산포로산행기 301

[겸재 그림 길 (104) 반구대] 그림·자연·유적이 모두 다채로운 명소 반구대

[겸재 그림 길 (104) 반구대] 그림·자연·유적이 모두 다채로운 명소 반구대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08년 옥소(玉所) 권섭(1671~1759)이 엮은 공회첩(孔懷帖)에 실린 겸재의 그림 두 점이 세상에 알려졌다. 옥소 권섭은 이미 졸고 ‘겸재 그림 길(73) 단양의 구담봉 옥순봉’에 소개한 바 있는 문인이며 학자에 그림도 즐기고 여행가로도 빠지지 않는, 겸재(1676~1759)와 같은 시대를 산 인물이었다. 그가 엮은 공회첩에는 아우 권영(1678~1745)의 편지와 겸재의 그림 2점(반구, 옹천), 그리고 자신의 발문이 수록돼 있다 한다.울주 대곡천 대곡박물관에서 펴낸 자료에 따르면 권섭의 아우 권영은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간을 역임한 인물인데,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형 옥소에게..

산포로산행기 2024.04.26

[매월당의 시 찾아 가는 길 (4) 금강산 길, 포천] 금강산 길목 ‘물 품은’ 포천의 물맛 술맛

[매월당의 시 찾아 가는 길 (4) 금강산 길, 포천] 금강산 길목 ‘물 품은’ 포천의 물맛 술맛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분포(盆浦)의 절(옥수동 미타사)을 떠난 매월당은 일단 한양으로 들어왔다. 먼 길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금강산 길이다. 조선인들에게 최고의 여행지는 단연 금강산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가 되면 선비라면 한 번은 다녀오고 싶어 했고 더욱이 화인(畵人)이나 시(詩) 좀 쓰는 이라면 금강산을 그리거나 읊은 작품 한두 개는 갖기를 원했다. 그뿐이겠는가? 번암 채제공이 쓴 만덕전(萬德傳)에는 금강산을 다녀온 여인 이야기가 있다. 1795년(정조 19년) 제주에 큰 기근이 있었다. 만덕이라는 기녀 출신 아낙이 있었는데 장사로 수천금을 모았다. 이때 그녀는 천금의 재물을 내어 관아에서도..

산포로산행기 2024.04.19

[겸재 그림 길 (106) 임천고암] 너른바위 투성이인 백마강 건너편을 그리다

[겸재 그림 길 (106) 임천고암] 너른바위 투성이인 백마강 건너편을 그리다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부여에서 금강을 따라 내려가면 강경을 지나고 익산을 거쳐 군산과 장항으로 흘러간다. 이 금강 구간 중 부여읍의 강 건너 북쪽 마을 규암면 천정대에서 강 따라 내려오면서 고란사, 낙화암, 구드레 나루, 수복정, 장하리(삼층탑), 봉무정 나루, 옛 임천(林川) 반조원(頒詔院) 나루까지 이어지는 물길을 백마강(白馬江)이라 부른다 한다. 참 가슴 시린 강이다. 오늘은 겸재의 그림 따라 옛 임천군으로 간다. 부여읍에서 백마강 건너 남쪽 지역 큰 고을이었던 임천군(林川郡)은 1914년 일제하에서 쪼개져 부여에 속하는 일개 면(面)이 되었다. 오늘은 옛 임천군에 속했던 임천면, 세도면(世道面), 장암면(..

산포로산행기 2024.04.13

[겸재 그림 길 (68) 도담삼봉] 300년 전 그림 넉 점이 남긴 삼봉 변천사

[겸재 그림 길 (68) 도담삼봉] 300년 전 그림 넉 점이 남긴 삼봉 변천사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을 따라 단양으로 접어든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구려 때 지명은 적산(赤山) 또는 적성(赤城)이었다가 고려로 오면서 단산(丹山), 단양(丹陽)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시인묵객(詩人墨客)들에게는 삼연 김창흡의 단구일기에서 보듯이 이곳을 종종 단구(丹丘)라 불렀다. 퇴계 선생도 단양군수로 계시던 1548년 청풍에서 단양으로 넘어오는 입구인 옥순봉(玉筍峰)에 단구동문(丹邱洞門)이란 글자를 새겼다. 왜 이런 별칭으로 단양을 부른 것일까? 시경과 함께 중국 문학의 원류가 되는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다. “우인을 이어서 단구에서 들었구나, 죽음 없는 옛 향리..

산포로산행기 2024.04.06

[겸재 그림 길 (81) 화적연] 한탄강의 원뜻을 알면 한탄스럽지 않을텐데…

[겸재 그림 길 (81) 화적연] 한탄강의 원뜻을 알면 한탄스럽지 않을텐데…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 따라 가는 길은 임진강 수계를 벗어나 한탄강(漢灘江)으로 넘어 간다. 한탄강은 이제는 북녘 땅이 된 강원도 북쪽 끝 평강(平康)에서 발원하여 김화(金化), 철원(鐵原), 옛 영평(永平: 포천 북부), 연천을 지나면서 전곡 은대리성 앞에서 차탄천(車灘川)을 품고 임진강 주상절리 아래에서 임진강에 합류한다. 옛 영평 지도에는 마아천(摩阿川, 麻阿川)으로 기록되었고, 차탄천과 합수 지점은 대탄(大灘)으로 기록되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대탄(大灘)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차탄천에 비해 큰 여울(한 여울: 大灘)을 의미하는 이름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름 한탄(漢灘)은 한(크다, ..

산포로산행기 2024.03.30

[겸재 그림 길 (77) 연강임술첩 ①] 적벽의 그날, 달 뜬 임진강에서 글 쓰고 그림 그리다

[겸재 그림 길 (77) 연강임술첩 ①] 적벽의 그날, 달 뜬 임진강에서 글 쓰고 그림 그리다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1742년(영조 18년) 10월 보름날, 경기도관찰사 홍경보(洪景輔)는 도내 동부 지역을 순시하면서 삭녕(朔寧) 우화정(羽化亭)으로 연천현감 신유한(申維翰)과 양천현령 정선(鄭敾)을 불렀다. 때는 마침 10월 보름이라서 송나라 소동파가 즐겼던 적벽의 뱃놀이가 떠오른 것이다. 소동파는 장강(長江) 황주(黃州)로 좌천당해 와 있던 동안 적벽부(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는데 마침 10월 보름날이 적벽 아래서 뱃놀이하며 후적벽부를 지은 날이었다. 이렇게 모인 세 사람은 삭녕(朔寧: 지금은 북한 땅이 된 연천 위 임진강 상류) 우화정(羽化亭)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 달이 환히..

산포로산행기 2024.03.23

[매월당 시 찾아 가는 길 (3)] 꽃피는 봄날의 한강을 읊은 김시습

[매월당 시 찾아 가는 길 (3)] 꽃피는 봄날의 한강을 읊은 김시습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매월당은 두뭇개 승사(僧舍) 행사 후 잠시 편안한 시간을 가진 듯하다. 그는 어촌을 둘러보고 한강을 바라보며 시심(詩心)을 느낀다. 태조가 천도한 한양은 본래 신라의 북한산주, 한산군(漢山郡)이라는 이름을 거쳐 고려 숙종 때 남경, 충렬왕 때 한양부(漢陽府)가 되었는데 매월당 시절에도 변함없이 한양이라 불렀다. 조선 후기의 지도 경조오부도에서 보듯이 한양도성으로 둘러싸인 경조(京兆, 민간에서는 흔히 문안이라 불렀음)와 도성 밖 10리까지를 포함한 한성부(漢城府)가 그 영역이었다. 그 남쪽 경계는 한강이었다. 지금은 서울이 강북(江北)과 강남(江南)으로 구분되지만 매월당 시절은 물론 대한민국 수립 후에..

산포로산행기 2024.03.15

[겸재 그림 길 (99) 인곡정사 풍계유택] 나이 70에 ‘깊고 그윽한 집과 삶’을 그리다

[겸재 그림 길 (99) 인곡정사 풍계유택] 나이 70에 ‘깊고 그윽한 집과 삶’을 그리다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퇴우이선생진적첩’ 덕에 오랜만에 인왕산 아래 마을로 돌아온 날이다. 이미 소개한 바 있듯이 이 화첩에는 계상정거, 무봉산중에 이어 풍계유택(楓溪遺宅)과 인곡정사(仁谷精舍)가 그려져 있다. 풍계유택과 인곡정사는 인왕곡(仁王谷) 품에 자리 잡은 자신의 외할아버지 박자진(朴自振)의 집과, 겸재 자신이 ‘이제는 돌아와’ 인왕산 품에 안겨 지내는 집을 그린 것이다. 양천 현령을 끝낸 다음해인 71세에 인왕곡에서 그린 이 화첩에 겸재가 남기고 싶었던 뜻은 무엇이었을까? 이제까지 겸재의 그림을 따라가며 살펴보았듯이 겸재는 경복고 교정쯤 되는 유란동에서 다 망해가는 양반집 아이로 태어났다. ..

산포로산행기 2024.03.09

[매월당 시 찾아 가는 길 (2)] 동호대교 앞 분포에 선 25살 청년 김시습

[매월당 시 찾아 가는 길 (2)] 동호대교 앞 분포에 선 25살 청년 김시습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임진나루를 건넌 매월당은 아마도 들러가라는 상인(上人: 노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나 보다. 이내 발길을 남쪽으로 잡아 한양으로 향한다. 길은 의주대로(義州大路)였을 것이다. 파주 지나 혜음령 넘고 벽제관, 구파발, 양철평 지나 한양으로 들어섰을 것이다. 이 시기 한양의 북쪽으로 들어오는 길은 서대문, 남대문을 거치는 길이 아니라, 고려 시절 남경별궁으로 오는 길, 즉 지금의 유진상가 앞에서 좌회전하여 홍제천을 오르고 이어서 지금의 창의문이 있는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광희문을 지났거나 남소문을 나서서 분포(盆浦)에 있는 절(僧舍)로 향했다. 낙성식이 있었던 것일까? 그날 지은 매월당의..

산포로산행기 2024.03.01

[매월당 시 찾아 가는 길 (1)] 개성에서 임진나루 건너 강원도로 첫걸음

[매월당 시 찾아 가는 길 (1)] 개성에서 임진나루 건너 강원도로 첫걸음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그는 풍운아였다. 조선초 1435년(세종 17년)에 성균관 옆 반궁리(泮宮里)에서 태어나 1493년(성종 24년) 59세의 나이로 만수산(萬壽山) 무량사(无量寺)에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그의 생(生)에 많은 날들은 길 위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말보다 글을 먼저 익히고 시재(詩才)가 뛰어나 세종 임금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불리던 그는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이른바 癸酉靖亂) 소식에 충격을 받아 과거를 때려치우고 승려의 행색으로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19세(1453년) 때였다. 59세..

산포로산행기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