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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99) 인곡정사 풍계유택] 나이 70에 ‘깊고 그윽한 집과 삶’을 그리다

산포로 2024. 3. 9. 09:27

[겸재 그림 길 (99) 인곡정사 풍계유택] 나이 70에 ‘깊고 그윽한 집과 삶’을 그리다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퇴우이선생진적첩’ 덕에 오랜만에 인왕산 아래 마을로 돌아온 날이다. 이미 소개한 바 있듯이 이 화첩에는 계상정거, 무봉산중에 이어 풍계유택(楓溪遺宅)과 인곡정사(仁谷精舍)가 그려져 있다. 풍계유택과 인곡정사는 인왕곡(仁王谷) 품에 자리 잡은 자신의 외할아버지 박자진(朴自振)의 집과, 겸재 자신이 ‘이제는 돌아와’ 인왕산 품에 안겨 지내는 집을 그린 것이다. 양천 현령을 끝낸 다음해인 71세에 인왕곡에서 그린 이 화첩에 겸재가 남기고 싶었던 뜻은 무엇이었을까?

이제까지 겸재의 그림을 따라가며 살펴보았듯이 겸재는 경복고 교정쯤 되는 유란동에서 다 망해가는 양반집 아이로 태어났다. 조상이 벼슬을 못한 지도 오래요, 경제적으로는 똥구멍이 째지게 가난하여 외가의 도움으로 버텨나갈 형편이었다. 다행히 선대로부터 인연이 있던 장동 김문(壯洞金門)의 도움을 받아 화재(畵才)를 키우고 벼슬길에도 나아가면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조선 제일의 화인(畵人)이 되었고 당대 잘 나가는 이들과 교분도 두터이 했다.

더욱 바람직한 일은 가난을 벗은 일이다. 그의 그림 한 폭이 당시 작은 가옥 반 채 값이었고 그림 요청이 줄을 이었다니 가히 화명(畵名)을 알 만하다. 국내뿐 아니라 연경(燕京)에서도 중국 일류 화인 그림 값의 몇 배나 비싼 값으로 팔렸다. 사천(槎川)의 서고에는 겸재의 그림을 팔아 사온 중국 신간이 천여 권이나 쌓였다 하니 국제적 화인이었던 셈이다.

인왕산 품으로 돌아온 인기절정 화가

이런 겸재가 하양 현감, 청하 현감, 양천 현령 외직으로 다니면서 나이를 먹고 은퇴길에 들어 70세(1745년, 영조 21년)에 인왕산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이제 무슨 여한이 있으랴. 제자를 키우고 그림을 그리고 벗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문제가 있다면 밀려드는 그림 요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 말고는.

오늘은 이런 겸재가 화첩에 그린 그의 집 인곡정사와 외할아버지 집 풍계유택을 찾아간다. 아쉽게도 집은 물론 그 위치도 정확하지 않다. 다만 겸재의 그림으로 어렴풋이 그 위치를 추측하면서 찾아가 보련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출발~~. 큰길 자하문로를 따라 오르면 세종대왕께서 태어난 지역을 알리는 안내판도 만나고 먹거리 길도 알리고 있어 가히 관광지로 뜬 서촌을 실감나게 한다. 통인시장으로 들어간다. 전통시장이 관광지화되어 왁자지껄했었는데 코로나로 가라앉은 모습이어서 아직은 좀 기다려야 할 듯하다. 이곳에 있는 서촌 관광 안내소에서 지도 한 장 챙기시기를.

 

겸재 그림길 답사 지도.

 

시장을 벗어나면 잠시 쉬어가는 정자가 있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기린교를 만나는 수성동(水聲洞) 계곡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향우. 길은 좁지만 이름은 필운대로다. 나지막한 언덕길 잠시 오르면 우측에 5층 아파트 몇 동이 있다. 달리 이름은 표기되어 있지 않고 전부터 군인 아파트로 불리고 있다. 김신조 사태 이후 이 지역 경호가 중요하여 지은 듯하다. 담에는 겸재 그림 몇 점이 붙어 있었는데 자수궁터(慈壽宮址)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이런 궁도 있었던가. 오늘의 답사 지도 번호 2에 해당하는 곳이다. 안내판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

 

겸재 그림길 옛 지도.

 

“조선 태조의 일곱째 아들 무안대군 방번(芳蕃)이 살던 집이다. 문종 때 세종 후궁들의 거처로 삼은 이후 궁궐에서 나온 후궁들이 살았으며 자수원이라고도 하였다”. 그랬었구나…. 문종실록에는 자수궁에 대한 힌트가 있다.

문종 즉위년 (1450년) 3월에 임금이 영을 내린다.

“임금께서 무안군(撫安君)의 예전 집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이름을 자수궁(慈壽宮)이라 하였으니, 장차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을 거처하도록 함이었다.(上命修撫安君舊第, 號慈壽宮, 將以處先王後宮也.)” 이 말이 무슨 말일까?

 

겸재 작 ‘인곡정사’. 노년기 겸재의 집을 그렸다.

 

조선에서는 임금이 죽으면 중전을 빼고는 그 임금을 모시던 모든 후궁들은 퇴궐을 해야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후궁들은 갈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친정으로 가거나 절로 가야 하는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은 그 문제를 왕자의 난에 피살당한 무안대군의 옛집을 수리하여 해결했던 것이다. 이곳은 광해군 때 또 다른 궁궐로 크게 중건하기도 했는데 인조반정 이후 다시 철거되고 한때는 자수원(慈壽院)으로 이름도 바뀌고 ‘대궐 안절’이라 해서 궁중 내전의 불사를 도모하는 최대 비구니 거처이기도 했다 한다. 그 후 사라져 일반 주택지가 된 듯하다. 겸재의 인곡정사는 자수궁터 일부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윽한(精) 집과 깊숙한(幽) 삶

자수궁터의 일부였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본다. 어디에서 본 듯한 향나무가 똬리를 틀고 곁에는 이 향나무의 후손으로 자라고 있는 향나무도 보인다. 겸재의 그림 독서여가(讀書餘暇)가 떠오른다. 여가의 한때 인곡정사 모옥(茅屋) 서재 툇마루에서 부채를 부치고 있는 겸재. 앞에는 작약과 난 분(盆)이 있고 뒤쪽으로는 향나무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인왕제색도.

 

또 다른 그림은 인곡유거(仁谷幽居)인데 인곡정사에 신선처럼 앉아 있는 겸재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화제(그림 제목)도 인왕산 골짜기 깊이 자리한 모습이라 유거(幽居)라 했다. 담도 어느 농촌 집 같이 소박하고 집의 뒷문이었을 솟을대문도 짚을 얹어 유거와 어울린다. 그런데 이 그림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인곡정사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힌트에 있다. 맨 뒤 오른쪽 봉우리는 기차바위(백련봉)이다. 이렇게 보이는 위치에 겸재의 집 인곡정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많은 건물로 시야가 막혀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본다. 아 어쩌면 저 산들의 각도가 겸재의 그림과 똑같을까? 어디에서 그렸는지 주장도 많은 인왕제색도의 풍경이 어쩌면 이렇게 한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겸재 작 ‘인곡유거’.

 

이제 본론으로 화첩 속 겸재의 인곡정사로 돌아온다. 이 그림은 후원과는 달리 본채를 그린 그림이다. 나이 70(1745년)에 만년을 지내기 위해 돌아온 집. 힘들었던 유란동 생활에서 벗어나 솟을대문 번듯한 집에서 만년을 지내려 했던 겸재의 마음이 잘 느껴지는 집이다. 아마도 뒤쪽 소나무 숲은 GS리더십센터가 자리 잡은 곳일 것이다. 대문을 나서서 내려가면 옛 자수궁교가 있던 천변길을 따라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을 것이다. 아래 큰길에는 지금도 이 다리를 기억하는 교회 자교교회(慈橋敎會)가 있어 그 날을 증언하고 있다.

 

우암 발문.

 

겸재는 퇴계, 우암 두 거두(巨頭)의 글을 대하자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계상에 정거(靜居)한 퇴계, 무봉산중에 은거한 우암, 이 글을 거둔 외할아버지 박자진의 옛집, 그리고 이제는 인곡에 깊이 앉은 겸재 자신. 문득 한 줄기로 엮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흔치 않게 개인의 집을 정사(精舍)라 하고 자신의 삶을 유거(幽居)라 한 것을 보면 겸재의 인왕곡 생활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사천의 제시.

 

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 사람은 사천(槎川)이었다. 화첩 인곡정사에 사천은 제시를 달았다.

松翠之邊竹籟中   소나무 푸른 주변 댓파람 소리 가운데
揮毫草草應兒童   거침없이 붓 휘둘러 아이를 응대하네
輞川不是他人畵   망천을 그린 것은 타인의 그림이 아니라
畵是主人摩詰翁   바로 그림의 주인은 마힐옹(왕유)로구나
                           丙寅秋友人槿老   병자년 가을 친우 근로(이병연)가

임헌회 발문.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불(詩佛) 왕유(王維)는 장안 종남산 아래 망천(輞川)에 집을 짓고 은거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시중화(詩中畵)요 화중시(畵中詩)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남종문인화의 종조로 여겨지는 왕유를 빌어 겸재를 읊었으니 그 겸재에 그 사천이었다.

이 화첩에는 퇴, 우 두 거두의 글 이외에 아들 정만수(鄭萬遂), 임헌회(任憲晦), 김용진(金容鎭), 이강호(李康灝)의 발문이 있다. (필요한 분은 최완수 선생의 책 ‘겸재의 한양진경’를 참조하십시오)

 

자락길에서 바라본 청풍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영원히 남길 바랬건만 지금은 시멘트 아래

마지막 그림은 풍계유택(楓溪幽宅)이다. 청풍계(淸風溪) 아래에 있던 유택을 그린 것이다. 그림길 안내지도에 그린 것처럼 군인아파트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올라가면 경복장로교회가 있다. 이 교회 뒤쪽으로는 없는 듯이 조그만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옛 마을로 오르는 길이 있다. 그 꼭대기가 바로 정조의 할머니 영빈 이씨의 선희궁이 있는 세심대 능선의 끝자락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갑자기 큰 저택 단지가 나타나고 맨 끝 집 주변 일대가 바로 장동 김문의 큰형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청풍계(淸風溪)가 시작되는 곳이다. 지금은 유진 인재개발원과 현대 정주영 회장이 살던 집이 있는 곳이다. 그 좋던 계곡은 모두 시멘트 아래 묻혀 알 길이 없고 겸재의 그림만이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한다. 그나마 길옆 빌라 축대 아래에 백세청풍(百世淸風) 각자가 남아 있어 이곳이 청풍계였음을 알리고 있다. 백세에 청풍으로 남기를 바랐건만 2, 3백년도 지나지 않아 시멘트 속에 갇히고 말았구나.

 

군인아파트의 향나무.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 작 ‘청풍계’.

 

다행히도 인왕산엔 요즈음 횡단도로 7부 능선쯤 되는 곳에 산책로가 개설되었다. 인왕산 자락길인데 숲도 우거지고 가볍게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길이라 이용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더욱이 좋은 것이 겸재의 그림이 되는 배경과 사뭇 가까이 길이 개설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는 길이 막혀 볼 수 없는 청풍계의 모습도 비록 멀지만 내려다 볼 수 있고 청풍계 위쪽 바위계곡도 철다리(가온다리)를 지나며 가까이 볼 수 있으니 겸재를 새롭게 만나는 길이 되는 셈이다.

 

겸재 작 ‘풍계유택’.

 

인왕산 자락길.

 

겸재의 외할아버지 집 풍계유택도는 아래에서 위를 바로보고 그린 그림이다. 우측이 청풍계, 좌측이 세심대 능선 뒤편이 된다. 청운초교와 청운현대아파트 사이 어디쯤인가 풍계유택은 있었다. 아쉽다. 그 자리조차 찾을 수 없구나.

답사지도 1은 풍계유택 추정 위치, 2는 인곡정사 추정 위치, 3은 김상용 청풍계, 4는 유란동 겸재 생가 터, 5는 세심대 능선, 6은 옥동척강 능선길이다. (다음 회에 계속)

 

<이한성 교수>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제722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2.04.29 10:29:23

 

[겸재 그림 길 (99) 인곡정사 풍계유택] 나이 70에 ‘깊고 그윽한 집과 삶’을 그리다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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