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기행 진성규 교수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가 있는 길.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의 발자취를 찾아서 도봉산(721.3m)을 오릅니다]
* 2018년 8월 답사
금년 여름은 재앙이라 할 만큼 폭염으로 모든 사람들이 힘겹게 지낸 것 같습니다.
이번 답사는 이교수님의 대만 옥산(玉山) 등반으로 부득이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실은 저도 21일 아프리카서 귀국이라 25일 답사 때는 답사하기 좋은 날씨가 기대되지만 너무 무덥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답사 참고 자료는 홍경모(洪敬謨)의 저서 《관악전서(冠巖全書)》 상공암부(相公巖賦)에 삼공암과 관련된 자료가 있고, 조현명의 저서 《귀록집(歸鹿集)》이 있습니다. 겸재의 그림 〈옥동척강(玉洞陟崗)>도 참고가 됩니다.
겸재의 그림 〈옥동척강(玉洞陟崗)
* 주제 :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의 발자취를 찾아서>
1. 답사 지도교수 : 진성규 교수님
2. 답사 장소 :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도봉역-도봉산 무수골~원통사~약사전 상공암~사리공~방학동사지~연월암삼폭 각자-와폭 각자-정의공주묘~귀록계산 각자~와운폭 각자~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간송가옥
3. 동반자 : <이야기가 있는 길>에 참여하신 분들
4. 만나는 곳 : 지하철 1호선 도봉역 1번 출구(도봉산역이 아님)
5. 시간 : 2018년 8월 25일(토) 오전 10시
6. 날씨 : 맑음(최고 영상 31도, 최저 23도)
7. 거리 : 9.1km
8. 소요시간 : 오전 10시 출발, 오후 4시 30분 종료(총 6시간 30분)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 1690~1752년)
- 생애 및 활동사항
1713년 (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 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 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했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 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송인영·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무수골에서 도봉산(721.3m)을 봅니다.
멀리 북한산(836m)도 봅입니다.
전교수님께서는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년이 이부근을 찾아 오셨기에 전하길로 전해 내려 오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더운 날 힘겹게 드디어 원통사에 도착합니다. 우이암(542m)도 멋집니다.
당시 평소에도 산을 무척 좋아하여 즐겨 올랐던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 1690~1752년)이 친우들과 이곳에 올라 남긴 각자로 추청되는 원통사 약사전 앞 <相公岩(상공암)>에 대해 진교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통사 입구 계곡에 위치한 楊州(양주)風雲居士(풍운거사) 사리공도 보입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카톨릭 혜화성당 공동묘지도 지납니다.
계곡 바위에 각자들도 봅니다. 예전 양반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진교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각자는 延月巗三瀑(연월암삼폭)입니다.
각자는 卧瀑(와폭)입니다.
각자는 谿水石(계수석)입니다.
귀록계산(歸鹿溪山)과 와운폭(臥雲瀑) 바위 글씨는 건립 경위와 시기, 서자(書者) 및 각자(刻者)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대의 인물인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1690~1752]이 방학동에 별서(別墅)를 마련하였다는 사실과 『귀록집(歸鹿集)』 권3에 실린 ‘와운 폭우 증가련(臥雲瀑又贈可憐)’ 등의 기록 등을 토대로 조현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교수님께서 작성하신 자료들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