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산행기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간다. 인왕제색도>]

산포로 2018. 9. 2. 17:52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간다(4) 인왕제색도 上>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금천교 시장~배화여고/필운대~사직단~황학정~단군성전~딜쿠샤~성혈바위~석굴암~인왕산(340m) 정상~성벽길~성벽 넘어 하늘다리 방향~마애불2~선바위/국사당~마애불3~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독립문역]18년 9월 2일


* 구간 :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금천교 시장~배화여고/필운대~사직단~황학정~단군성전~딜쿠샤~성혈바위~석굴암~인왕산(340m) 정상~성벽길~성벽 넘어 하늘다리 방향~마애불2~선바위/국사당~마애불3~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독립문역
* 일시 : 2018년 9월 2일(일)
* 모임장소 및 시각 :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오전 9시 30분
* 날 씨 : 맑음(최고 영상 30도 최저 영상 22도)
* 동반자 : 홀로산행
* 산행거리 : 8.8km
* 산행지 도착시각 :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오전 9시 30분
* 산행후 하산시각 :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독립문역 오후 3시
* 산행시간 : 약 5시간 30분(식사 및 사진촬영시간 포함)



[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간다 (4) 인왕제색도 上] 그림길 따라 필운대에 취하니 연암·다산 자취 그리워라


인왕제색도. 사진 출처 = 문화재청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겸재의 그림은 걸작 아닌 것이 드물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을 고르라 한다면 많은 이들이 금강전도(金剛全圖, 국보 217호)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216호)를 떠올릴 것이다. 오늘은 그중 인왕제색도에 숨겨져 있는 길을 걸어보려 한다. 인왕제색도에는 네 개의 봉우리가 그려져 있고 가운데 두 봉우리 사이 골짜기가 깊이 숨어 있다. 지난 3회에 걸쳐 소개한 창의문도에서는 이 인왕제색도에서의 오른 쪽 두 개 봉우리를 지나 홍지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걸었다. 이제부터는 중앙의 인왕산 주봉과 좌측 봉우리를 지나보려 한다. 이 길을 걷다보면 또 다른 행운을 만나는데, 겸제의 또 다른 그림 필운대(弼雲臺), 필운상화(弼雲賞花), 육강현(六岡峴, 六角峴)도를 만나게 된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선다. 서촌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90년 전에는 창의문에서 발원한 백운동천이 흘러내려 서울시경 방향으로 흘러가던 청계천의 젖줄이었다. 그 개울 위로는 금청교(禁淸橋)가 놓여 있었다. 전해지기로는 금교(禁橋), 금천교(禁川橋, 錦川橋), 다리 모양의 동그란 안경알처럼 생겼기에 앵경다리(안경다리)라 했다 한다. 5군영의 하나인 금위영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하는데 이 다리는 고려 충숙왕 때 세웠다 하니 나이도 참 많았다. 그런데 1928년 6월 자하동천을 복개하기에 이르렀으니 아름다운 금청교는 해체되고 남은 흔적은 캄캄한 도로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당시 서촌 지역은 이미 일본인들과 친일 세력들이 대규모로 땅을 점유했던 시기였으니 아마도 백운동천의 복개가 필요했을 것이다.




3개의 동그란 아취가 균형을 잡고 아취 사이에는 두 개의 무섭게 생긴 짐승의 얼굴을 새겨 넣어 감히 악한 기운은 흠칫, 뒷걸음칠 것 같다. 상상의 동물로 사흉(四凶)의 하나라는데 이름이 도철(饕餮)이고 식탐이 심해  무엇이든지 먹어치우는 괴물이라니 살금살금 피해 다녀야 했을 것 같다. 금청교를 해체하던 날 이 도철은 따로 보관했다 하는데 빨리 찾아서 이 나라에 해코지하는 이들을 향해 걸어 놓았으면 좋겠다. 자료 사진으로는 확인이 안 되는데 난간에는 연꽃도 새겨 넣었다 하니 고려가 남경(南京, 고려적 서울을 부르던 지명) 경영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청교 자료사진.


이제 옛 지도를 들고 그림 속 길 출발이다. 지하철 출구 앞쪽으로 과일 가게와 빵집이 보이고 그 사이 작은 골목길이 보인다. 금청교/금천교 시장 길이다. 요즈음은 체부동(體府洞) 시장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이름도 낯선 체부동이라는 지명은 서울 지명 사전을 찾으니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체찰사부(體察使府, 체부청/體府廳)라는 관청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체찰사는 왕의 뜻을 받들어 임지에 나가 장병들을 시찰 독려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옛 지도 위에 표시한 답사 코스.


그랬었구나. 시장은 지붕도 덮지 않은 채 옛 그대로인데 바닥을 내려다보면 맨홀 뚜껑이 자주 보인다. 필운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던 실개천의 흔적이리라. 3년 전만 해도 이 시장에 들어서면 가게 앞길에 앉으셔서 무쇠 솥뚜껑 위에 기름을 두르고 간장 양념으로 떡볶이를 하는 호호할머니가 계셨다. 고춧가루 양념으로 하는 것도 있었지. 그 감칠맛이라니. 언제부턴가 인왕산에 오르는 길이면 이곳에 들러 떡볶이를 사곤 했었다. 한 삼천 원어치만 사면 두엇이 간식으로 먹기에 충분했으니 언제나 할머니께 미안했었다. 들리기로는 그때가 90대 중반이라 하셨고 개성 분이라는데 한국전쟁 전에 서울에 들리러 왔다가 전쟁이 터져 고향으로 돌아가시지 못했다는 말도 들린다. 애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는 저 세상으로 돌아가셨다 하니 내 마음도 아프다. 이젠 이런 떡볶이가 생각나면 케리(Kerry) 국무장관이 들렸다는 윗시장 떡볶이 집에 들러야겠다.


겸재가 그린 필운대 그림. 간송미술관 소장


요즈음은 이 골목 시장이 서촌 바람을 타고 너무나 떠버렸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도 많이 생겼나 보다. 한 10년쯤 전일까, 어느 날 들린 국수집이 쓸 만했다. 그래서 이쪽에 오면 점심 한 그릇씩 했었는데 외국 관광객이 몰려오면서 더 이상 내게는 매력적이지 못한 집이 되었다. 그냥 한 그릇 먹으면 되는 일이지만 적절한 가격에 제대로 먹는 즐거움도 괜찮은 일이다. 다행히 저기 윗골목에 마음에 드는 만두집과 우동집이 생겨 인왕산 길에 한 그릇 먹는 즐거움을 다시 찾았다.




또 하나 이 골목에서 그리운 밥집이 하나 있다. 이 골목 끝쯤 되는 곳에 공사판 함바(はんば·飯場)식당 같은 백반집이 있었다. 상호는 있었던가? 정월 초하룻날 인왕산 해맞이 하고 우루루 몰려오면 무 넣고 푹 끓인 동태찌개가 우리를 맞았다. 이렇게 시작하던 푸근한 한 해가 이제는 어설퍼졌다. 나날이 변해가는 이 골목 시장에서 무슨 수로 가게세를 내실 수 있었겠는가? 밥어머니, 그 할머니는 잘 계시는지, 새해가 오면 주인과 손님 사이 같지 않던 그 밥집이 그리워진다.




금천교 시장 골목을 끝까지 지나 배화여고로 들어간다. 1898년에 아랫동네 내자동에서 캐롤라이나 학당으로 우리 땅 여성들의 교육을 시작한 후 1916년 경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붉은 벽돌의 교사(校舍)는 시간을 머금고 단아하게 앉아 있다. 생활관 건물은 특히 아름다운데 안내판에 쓰여 있기를 등록문화재로 1916년 선교사들의 주택으로 지어졌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교사 건물은 남쪽과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건물 뒤로 돌아가보자. 옹색한 공간이 나타나고 산등성이 바위에는 글자들이 보인다.







弼雲臺(필운대). 조선시대 장안의 승경지(勝景地) 필운대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으로 갇혀 있다. 누군가 조금만 신경을 써서 학교 건물을 20~30m만 앞으로 내어 지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동국여지비고’에 실려 있는 필운대의 내력을 보면, 인왕산 아래 있으며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젊었을 때 이곳 아래에 있는 원수 권율(權慄)의 집에 처가살이(贅寓: 췌우. 이항복은 권율 장군의 사위)를 했는데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부르는 인왕산의 이름을 따 호(號) 중 하나를 필운이라 했고, 석벽에 새긴 필운대란 글씨도 그의 글씨라는 것이다. 또한 필운대 곁에는 꽃을 많이 심었기 때문에 이곳이 봄철 손꼽히는 꽃구경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오해 소지가 있는 것이 처가살이다. 우리나라 결혼 제도는 조선 중기까지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장가드는 혼례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결혼을 하면 일정 기간(애기 낳아 얼마만큼 클 때까지) 처가에서 살다가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가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왕가에서는 중국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보여주듯이 친영(親迎) 즉, 신부 맞아오기를 행하고 사대부들도 따르기를 독려했으나 임진란 전까지는 장가들기가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율곡의 아버지도 신사임당 집에 살았고, 안동 무덤 속 러브레터의 주인공 ‘원이 엄마 아빠’도 그랬다. 오성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필운대 봄 꽃 구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유명했던 것 같다.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 필운대(弼雲臺)의 살구꽃이 유명하다 했고, 수헌거사(樹軒居士: 유득공의 아들?)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동국여지비고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많은 이들이 필운대 꽃구경을 시로 읊었다.


연암 박지원의 ‘필운대 살구꽃 구경(弼雲臺看杏花)’이란 詩에는


夕陽倏斂魂
上明下幽靜.
花下千萬人
衣鬚各自境.
저녁 해 지려 하니
하늘은 밝고 땅은 고요하네.
꽃 아래 많은 사람들
의관과 수염이 저마다 제 경지.


필운대에 꽃구경 나온 이들, 어스름해가 지니 모두가 풀어진 모습으로 꽃구경에 빠졌나 보다. 봄꽃에 취한 그이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에 질세라 다산 선생도 한 수 읊으신다.


竹扉淸晝每慵開
一任溪橋長綠苔
忽有客從城外至
看花要往弼雲臺
대사립은 맑은 낮에 매양 열기 게으르니
시냇물 다리엔 푸른 이끼 늘 끼었지
뜻밖에 성 밖에서 손님이 찾아오니
필운대로 꽃구경 나서야 되겠구나.


문밖 손님 찾아오니 필운대로 꽃구경 납시겠다 하는구나. 그만큼 필운대 꽃구경은 누구나 하고 싶어 했던 놀이 문화였던 것 같다.



그러나 즐거운 꽃놀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려함이나 즐거움의 반대편에는 쓸쓸함과 비통함도 있게 마련이다. 임진란으로 폐허가 된 한양 땅에 필운대인들 화사함만 있었겠는가. 임진란 때 이조좌랑으로 의주까지 선조를 호송했던 이호민(李好閔)은 폐허가 된 한양의 모습을 필운대를 통해 읊었다.


-亂後弼雲春望-
荒城無樹可開花
唯有東風落暮鴉
薺苨靑靑故宮路
春來耕叟得金釵
-임진란 후 필운대의 봄 경치-
황폐한 성에는 꽃 피울 나무도 없고
봄바람 저물녘에 갈가마귀 내려올 뿐
옛 궁궐 가는 길 모싯대만 청청한데
봄이 와 밭 갈던 늙은이 금비녀를 주웠다네.


금비녀의 주인은 어찌 되었을까?


경복궁 옛터에는 모싯대만 청청한데 봄이 왔다고 늙은 농부는 밭을 간다. 그런데 그 밭에 나뒹굴던 금비녀. 금비녀가 어찌 밭에 나뒹굴 물건이더냐. 이호민은 금비녀의 주인이 당했을 일을 차마 글에 담지 못했다.


필운대 바위벽에는 두 군데에 각자(刻字)가 더 있다. 하나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의 9세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시로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우리 조상 옛 집터에 후손이 찾으니  
我祖舊居後裔尋
푸른 솔과 돌 벽에 흰 구름 깊구나  
蒼松石壁白雲深
남기신 풍모 백년 넘게 다함 없고   
遺風不盡百年久
노인장의 의관은 에나 지금이나. 
父老衣冠古亦今

계유년 월성 이유원이 백사 선생의 필운대에 적다.
癸酉月城李裕元 題白沙先生弼雲臺


우측에 있는 또 하나의 각자(刻字)에는 가곡원류(歌曲源流)를 묶은 가객 박효관(朴孝寬) 등 모두 9명의 명단이 적힌 계유감동(癸酉監董)이라는 글이 있다.


계유년, 아마도 1873년 무언가를 감동(監董: 감독과 같은 뜻)했다는 것인데 무엇을 감독했는지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이유원의 글을 새기는 일을 감독한다든지, 이 동네의 위항가객(委巷歌客)으로서 필운대에다 운해산방(雲海山房)을 차려 놓고 제자를 육성했다 하니 그것과 관련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겸재의 그림 필운상화(弼雲賞花).


겸재의 그림 필운대는 지금은 학교 건물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 본 필운대의 모습이다. 현재 ‘弼雲臺’ 글씨가 쓰여 있는 바위 너머로 인왕산 능선을 그렸다. 또 하나 필운대와 관련된 겸재의 그림은 필운상화(弼雲賞花). 8명의 선비와 두 명의 동복(童僕)이 봄꽃을 보려고 필운대 뒤 언덕쯤 되는 곳에 모여 앉았다. 건너로는 목멱산(남산)이 보이고 남대문 너머 저 먼 곳에는 뽀족뾰족 관악산이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필운대 쪽에서는 이 그림의 앵글이 나올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그림은 맹학교(盲學校) 뒤 쪽 후천(后泉)이라 쓰여 있는 바위 위에서 바라본 시선이라는 주장이다.


육강현을 그린 겸재의 그림


또 하나 필운대와 관련 있는 그림이 육강현(六岡峴)도이다. 본래는 육각현(六角峴)인데 발음이 잘못 되어 이 그림에 육강현으로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육각현은 39쪽 옛 지도에서 보듯 필운대의 뒤쪽(북쪽) 너머에 있는 고개이다.


‘동국여지비고’에서도 필운대 곁에 있다고 했고 담장의 길이가 긴 집이 만리장성 집이라 한다고 했다. 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 지명사전에는 ‘종로구 필운동 9번지 필운대 옆에 있던 고개로서, 큰 집이 있어서 담의 둘레가 길고 여섯 모가 난 집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육각현이라고도 하였다. 육각재 위의 집은 담의 길이가 길다 해서 만리장성 집이라고 하였으며, 이 마을을 장성동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지명은 이해되었으니 그림을 보자. 그림에는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이 쓴 화제(畵題)가 보인다. ‘自農隱堂 望六岡峴’(농은당에서 바라본 육강현)이라 쓰여 있다. 아래쪽 기와집들이 농은당이고, 비스듬히 보이는 바위가 필운대, 그 뒤가 육각현이라 한다. 참고로 간송에 소장되어 있는 장시흥(張始興)의 필운대 그림이 있는데 필운대를 측면으로 그려서 육각현이 정면으로 보이게 한 그림이다. 기회 있을 때 감상하면 필운대와 육각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잠시 농은당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자. 누구의 집이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겸재의 스승 삼연 김창흡(金昌翕)의 형 농암 김창협(農岩 金昌協)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농은당은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농은(農隱), ‘농사에, 농촌에 숨는다’이니 자연에 묻혀 산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이제 배화여고를 나서 사직단 방향으로 나아간다. 사직단에 조금 못 미쳐 매동초등학교가 있다. 1895년 개교한 오랜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로 여전히 건재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직단 담장에 닿을 즈음 좌측으로 보이는 민가에 있는 가게 ‘사직동 그 가게’를 만난다. 문 앞 작은 칠판에 낙서처럼 쓰여 있는 티베트 속담이 마음을 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쿵 한 대 맞았다. 이 가게는 인도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 난민촌을 지원하고 있는 가게다. 티베트의 차(茶) 짜이와 간단한 음료, 식사를 팔고 있다. 수익금은 티베트 난민들을 위해 쓰인다고 한다. 그런 것 다 떠나서 분위기가 티베트스럽고, 짜이 맛이 훌륭하고, 간단한 식사도 좋다. 근처를 지나실 때 꼭 들려보시라, 좋아질 테니까.



이제 사직단(社稷壇)으로 들어간다. 두 개의 단(壇)이 있다. 토지신을 모시는 사단(社壇)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직단(稷檀)이다. 중국 고대 주(周)나라에는 나라의 시스템을 6개 부문으로 나누어 구축했는데, 그중 건설이나 도시계획 등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을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라 하고 편히 불러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라 한다. 내용은, 匠人管國, 方九里, 旁三門, 國中九經九緯, 經徐九軌, 左祖右社, 面朝後市이다. 여기에서 좌조우사(左祖右社, 편히 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대궐의 좌측(동쪽)에는 종묘(宗廟), 우측(서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걷기 코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 금천교 시장 ~ 배화여고/필운대 ~  사직단 ~ 황학정 ~ 단군성전 ~ 딜쿠샤 ~ 성혈바위 ~ 석굴암 ~ 인왕산 정상 ~ 성벽길 ~ 성벽 넘어 하늘다리 방향 ~ 마애불2 ~ 선바위/국사당 ~ 마애불3 ~ 독립문역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정리 = 최인욱 기자)


cnbnews 제578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3.12 09:38:19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4193


[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간다 (5) 인왕제색도 中] 뒤돌아보니 서울 어디선가 겸재가 날 바라보는 듯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사직단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근간이 되는 나라의 중요 시설이었건만 나라 잃은 조선의 사직단은 무기력하게 일제(日帝)에 의해 농단되었다. 일제로서야 조선의 사직단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1920년 이곳을 공원화했다 한다. 창경궁이 창경원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침탈된 나라의 역사는 부인되었다. 이제 늦었지만 복원을 추진하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사직단 뒤쪽 층계를 오르면 종로도서관이 보이고 마을버스가 다니는 구불구불 한적한 포장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좌측으로 향하면 인왕산으로 가는 길인데 잠시 뒤 한 200여m 나아가면 비스듬 언덕길에 황학정(黃鶴亭)이 길을 막는다. 국궁(國弓)을 쏘는 활터다. 혹시나 화살이 날아올까 지붕을 덮은 길로 잠시 오르면 드디어 단아한 한옥과 정자가 자리 잡고 있는 황학정 활터에 닿는다. 친절한 설명문이 붙어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5호이며 광무2년(1898년) 고종의 명에 의해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었는데 고종이 자주 와서 활을 쏘았고 일반에게도 개방했다 한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경희궁이 헐리고 황학정 자리에 전매국 관사가 들어서면서 1922년 황학정은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고종이 활 쏘던 황학정과 명사수 정조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 사직단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추진 중이라 다행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원래 이 자리는 인왕과 북악 주변에 자리 잡았던 5개의 활터(五射亭: △옥인동 登龍亭 △누상동 白虎亭 또는 風嘯亭 △사직동 大松亭 또는 太極亭 △삼청동 雲龍亭 △이곳 登科亭)의 하나인 등과정(登科亭)터였다 한다. 지금도 이 등과정의 표석이 황학정 뒤 인왕산 오르는 길 옆에 자리잡고 있다. 등과정(登科亭)이란 이름을 보면 그 시대 무과(武科)에 응시하려는 무인들의 과거에 급제하고픈 간절한 열망이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 황학정에 가 보니 건강과 스포츠로 활쏘기를 즐기는 이들이 사대(射臺)에 죽 서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세월의 간극(間隙)이 참으로 크구나.


과거시험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무인들의 간절한 열망이 느껴지는 등과정 표석. 사진 = 이한성 교수


그러면 황학정을 만드신 고종께서는 활을 잘 쏘셨을까? 명사수였는지는 전해지는 내용을 찾지 못하여 알 수 없으나 활쏘기를 무척 즐기셨던 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3월에 고종이 창덕궁 영화당 앞에 과녁을 마련하였음을 보도하고 있다. 또 지금도 고종이 쓰던 활 호미(虎尾)가 육사에 있는 육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면 조선의 임금 중 명사수는 누구였을까? 태조 이성계는 무인으로서 명사수였다는 이야기가 바람결에 전해지는데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고, 임금은 아니지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활솜씨는 어떠했을까? 난중일기를 검토한 분들에 의하면 적중률이 8할 정도 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임금은? 그 중 최고 명사수는 누구였으며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 있다. 정조의 일성록(日省錄)이다. 왕 16년(1792년) 10월에 초계문신 등 신하들과 함께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를 했는데 ‘내가 10순을 쏘아 46발을 과녁에 맞추었다(予射十巡獲四十六矢)’라는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 순(巡)은 다섯 발로 10순을 쏘는 것이 룰이었다 하니 정조는 50발을 쏘아 46발을 맞춘 것이다. 그것도 정조는 과녁 큰 것이 싫어 손바닥만한 작은 과녁(掌革, 小革)을 만들도록 해서 쏜 결과이니 특등 사수였던 것이다.


그러면 함께 한 신하들은 어떠했을까? 6명이 각각 50발을 쏘았는데 13발, 5발, 4발, 2발, 나머지 2인은 1발에 그쳤으니 아마 임금 앞에서 속된 말로 오금도 못 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찬탄의 글(箋文)을 올려 부끄러움을 얼버무렸는지도 모르겠다.


빼어나고 기이하옵니다 (以純以奇)
송축할 뿐입니다. 전하 화살의 신묘한 조화를(頌箭紅之神造).


정조의 활쏘기 기록은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정조대왕천릉지문(正祖大王遷陵誌文)의 기록은 더 드라마틱하다.


“활쏘기에 천분이 있으셔서 50발 중에 문득 49발을 명중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이 가득 차면 안된다 하셨다(其於射藝, 得於天分, 五十發輒四十九中, 曰: 物不可盈也).” 이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아마도 50번째 화살은 맞추지 않았던 것 같다. 정조, 여백을 남기는 참 멋있는 사나이였다.





그러면 조선의 임금들은 활쏘기가 취미였던 것일까? 공자도 활을 쐈듯이 취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주나라나 한나라에서는 남자 나이 15, 16세가 되면 대학(大學)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한 사람의 인격체(선비 士)가 되기 위한 교육이었다. 그 교육의 내용이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였다.


육덕은 지인성의충화(知仁聖義忠和)를, 육행은 효우목인임휼(孝友睦婣任恤)를, 육예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배우는 것인데 특히 육예는 실용 교육이었다. 에티켓(禮)을 배우고, 음악(樂)을 배우고, 활쏘기(射)를 배우고, 마차 운전(御)을 배우고, 글과 글씨(書)를 배우고, 수학과 천문지리(算)를 익혀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문인이나 무인이나 활을 쏘았다. 지금도 전국에 남아 있는 국궁장(國弓場)은 육예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사직단 지나 단군성전 만나는 길


이제 황학정을 돌아 내려오면 사직단 서북단 위에 단아한 건물이 보인다. 국조 단군을 모시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다. 해방 후에도 사직단이 방치된 것을 보다 못한 이희승, 이숭녕 이런 분들이 현정회(顯正會)를 만들고 국가로부터 국조 단군(檀君)의 표준영정을 승인 받아 봉안한 곳이다. 개천절(開天節)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으로 백성들을 일깨우신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날, 즉 어천절(御天節)을 기리고 있다. 지난 3월 15일에 어천절 제향(祭享)이 있었다. 유일한 단군 할아버지 표준상이 궁금하면 이곳에 들려보자. 사실 단군을 모시는 어느 종교가 있다보니 국조(國祖) 단군 할아버지를 타종교의 교조(敎祖)로 보는 일부 과격한 이들도 있어 안타까운 일도 발생하였다. 단군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어천절 제향(祭享)이 열린 단군성전. 사진 = 이한성 교수


단군성전을 나와 종로문화체육센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지자체에서 구민들을 위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운영하는 문화체육센터다. 도로를 면해서는 커피점도 있는데 보통 맛에 가격은 합리적이라서 이 길을 지날 때는 때로 커피 한 잔 하고 가는 곳이다. 잠시 후 편의점을 지나면 사거리길이 나오는데 이곳은 한양도성길이 지나는 길목이다. 좌측 눈 아래로는 연립주택이 보이고 그 뒤로는 오래 된 은행나무가 자리 잡은 모습이 보인다. 이 지역은 이 은행나무가 있어 은행동(銀杏洞)이었는데 새말(新村)이라 부르던 옥바라지 골목을 포함하여 행촌동(杏村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한다.




설명문에는 수령 420이라 했고, 적어 놓은 때가 1976년이니 이제는 460년이 넘은 나무가 된 셈이다. 나무 아래에는 표석도 있는데 이곳이 도원수 권율 장군의 집터라는 설명이다. 도원수 생몰연대가 1537~1599년이니 도원수 집안이 심은 나무일 것 같다.



3.1운동을 해외에 알린 알버트의 사랑 집


그러나 이 골목길에서 나에게 아련한 상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붉은 벽돌집 딜쿠샤(Dilkusha)다. 언젠가 이 동네에 대한매일신보를 운영하던 베델(Bethell) 선생의 집이 있다기에 찾아보러 왔다가 그 집은 이미 헐리고 다른 붉은 벽돌집이 있다기에 찾아가보았다. 그때 알게 된 딜쿠샤. 여러 사람들의 무단 거주로 슬럼가(街) 같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집이었다. 초석에 써 있는 Dilkusha 1923도 궁금증을 더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딜큐사는 그냥 건물이 아니라 그 공간에 살았던 젊은 외국인 부부의 이상향이자 행복의 꽃동산이었다.


영국 여배우 출신 메리 테일러와 그녀의 남편 알버트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딜쿠샤 역시 내년에 정비될 예정이라니 기대가 크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살면서 어떤 이들이 꿈같은 삶을 살았을 공간을 만나는 것은 또 다른 행복이다. 21살 미국인 청년 알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는 1896년 광산업자인 아버지 죠지 테일러를 따라 조선에 왔다. 아버지는 노다지(No touch)라는 말을 생기게 한 운산금광의 운영자였다. 1908년 아버지 죠지는 사망하여 조선 땅에 묻혔다. 그러나 아들 알버트는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사업을 이어갔으며 한편으로는 UPI 통신원으로 이 땅에서 활약하였다. 그 사이 그는 일본에 갔다가 만난 부유한 집안의 영국 여배우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일제 치하 경성(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1919년 2월 28일 첫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ickell Taylor)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 다음날이 바로 3.1독립만세날이었다. 간호사들이 무언가 종이뭉치를 일본 경찰 눈을 피해 숨기는 것을 본 알버트는 그것이 조선의 독립선언문임을 알게 되었다. 급히 아우 빌을 불러 선언문을 아우의 구두 밑창에 숨기고는 일본으로 보냈다. 이로써 조선의 독립운동과 독립선언문은 온세계로 타전되었다. 다음달 4월 15일 발생한 제암리 학살 사건도 알버트의 손에 의해 파헤쳐졌다.


알버트와 메리는 1923년 이곳 행촌동 은행나무 언덕 앞에 이 땅에서 영원히 꿈꾸며 살 이상향 딜쿠샤를 지었다. 그들의 신혼 여행지였나? 인도 러크나우(Lucknow)에 있는 궁전 이름을 땄다 한다. 그들은 비록 일제하에서 핍박은 받았지만 금강산을 비롯하여 이 땅을 사랑하며 행복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41년 일제는 이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다. 거부한 그들에게는 극심한 핍박이 가해졌고 이듬해 1942년에 강제 추방되었다. 이 땅에 돌아올 것을 믿었던 알버트는 불행히도 1948년 세상을 떠났고 알버트의 유언을 따라 메리는 그의 유해를 가져와 아버지 죠지 옆에 묻었다. 이들 테일러 부자는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서 이 땅을 사랑하며 잠들어 있다.


테일러 부부의 행복했던 시절.


이 땅에서 낳고 자란 아들 브루스(Bruce)는 우리 방송국 특집방송 촬영 차 1942년 떠났던 한국을 2007년 방문하였다. 한편 부인 메리의 딜쿠샤에서 살았던 그 시절 기록은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알베트와 메리가 도쿄에서 만났을 때 알버트가 준 선물이 호박(琥珀)목걸이 줄이었기 때문에. 난민촌처럼 관리 밖에 있던 딜쿠샤도 내년(2019년)에는 정비된다고 한다. 언제나 그곳에 가면 알버트와 메리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되돌아갔으면 좋겠다.




알터, 알뫼, 알바위 등으로 불리는 성혈


딜쿠샤를 돌아나와 성벽길로 나온다. 이제부터 인왕산을 향해 전진. 성벽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이 길은 4월에는 꽃동산을 이루고 눈이라도 내리는 날은 설경이 아름다운 길이다. 잠시 올라 전망대에 닿기 전 널찍한 바위들이 우측으로 보인다. 관심이 없으면 그렇고 그런 바위이지만 조금만 눈을 크게 뜨면 흥미진진한 바위이기도 하다. 그 바위들 위에는 성혈(性穴)이 여러 개 새겨져 있다. 성혈은 바위 위에 구슬치기 놀이 할 때처럼 구멍을 새겨 놓은 것이다. 지식사전을 찾으면 cup-mark라 하고 알터, 알뫼(알미), 알구멍, 알바위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땅에 묻혀 있던 고인돌에서도 나온다 하니 청동기시대부터는 시작된 행위다.


그렇다면 기원전 1, 2천 년 전부터 바위에 구멍을 새기는 성혈 파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목적은 다산(多産)과 기자(祈子)였다는 설명이다. 필자나 필자의 길동무들은 언제나 산행이나 답사를 떠나면 큰 바위를 살피는 것이 습관화된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의외로 많은 성혈을 만났고 많은 경우가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혈(性穴)보다 성혈(星穴)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성혈을 판 시기도 청동기 이후 근세까지 계속되어 왔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혹시 감은사지 석탑에 새겨진 많은 성혈을 보신 적이 있는지? 고려시대 탑에 새겨진 성혈을 보신 적이 있는지?  이 인왕산 길에서 만난 성혈도 별자리를 그려 넣은 것이다. 시대는 가늠하기 어려운데 오래 오래 전 이곳 인왕산 아랫마을에 살던 이들이 하늘님께 간절한 소원을 빈 흔적이 역역하다. 바위 위에는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북두칠성(칠성님), 북극성, 삼태성(三台星)을 그려 놓은 것은 아닐까?


북두칠성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이는 인왕산 성혈. 사진 = 이한성 교수


북극성(北極星)은 자미대제(紫薇大帝)인데 곧 하늘을 관장하시는 대왕이시다. 그런 분이니 하물며 인간사 부탁쯤이야 간절히 원하면 거절하시겠는가? 북두칠성(北斗七星)은 칠성님인데 우리의 명(命)을 관장하신다. 어떻게 얻은 귀한 자식인데…. 빌고 빌어 그 목숨 오래 오래 살도록 하려는 어미, 아비 마음이 오죽 했겠는가. 어느 명창이 뽑아내던 회심곡 한 가락 살펴본다.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뉘 덕으로 나왔는가
석가여래 공덕으로,
아부님 전 뼈를 빌고 어마님 전 살을 빌며
칠성님 전 명을 빌고 제석님 전 복을 빌어
이 내 일신 탄생하니

횡성의 회다지소리에는 이런 것도 있다.

칠성님 전 명을 타고,
삼태성에 복을 빌어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얻어…


사람이 태어날 때 복은 삼태성이나 제석(帝釋)님께 빌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왕산의 성혈은 별자리 신앙이 민간에 퍼진 이후에 생겨난 것일 것이다.


관리들이 쉬는 날 그린 인왕제색도
설명문 달면서 일제시대 왜곡 한자 쓰다니…


또 다른 성혈은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성벽길을 따라 인왕산으로 향한다.  인왕제색도 그림 속으로 깊이 들어가보려 한다. 잠시 후 무학동에서 오르는 길을 만나는데 포장길이다. 앞쪽으로는 성벽을 따라 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포장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한다. 이 길은 인왕산 자동차길인데 인도는 인왕산자락길이라는 이름의 산책길로 잘 가꾸어져 있다. 잠시 후 황금빛 호랑이 상을 만난다. 어째 좀 어설프다. 쓰여 있는 글귀도 ‘청와대와 경복궁을 지키는 호랑이’다. ‘서울시민을 지키는 호랑이’라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잠시 후 수성동에서 오르는 길을 만나고 길 건너로는 석굴암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석굴암 오르는 길은 계단길로 길게 뻗어 있다. 이 지역을 경비하는 경비소 앞에는 만수천약수로 갈라지는 길이 갈려나간다. 인왕제색도에서는 중앙부에 정상이 있는 주봉(338m)과 우측에 있는 봉우리(312m)가 있는데 만수천약수길은 312봉 능선 초입을 감돌아 가는 길이다. 층계를 걸어 석굴암으로 오른다. 인왕제색도의 정중앙 계곡길(정상이 있는 봉우리와  기차바위가 갈려 나가는 우측 312m 봉우리의 사잇길)이다.



겸재 그림 속 길을 걷다 뒤돌아보니 눈 덮인 서울 풍경이 보인다. 저곳 어디에선가 겸재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오르는 길 간간히 돌아보면 사대문 안 서울 시내가 꿈결 같이 내려다 보인다.


아, 잠시 사이에 저곳 티끌세상을 떠나왔구나. 그런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바위 틈 사이를 막아 조성한 석굴암은 아예 건물이 하나도 없다. 법당도 요사(寮舍)도 모두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앉았다. 겸재 시절에는 아예 석굴암이 없었거나 아니면 법당이나 요사가 바위틈이다 보니 인왕제색도에는 석굴암이 그려져 있지 않다. 다만 비 그친 가파른 계곡에 계곡수가 가득차서 흘러내린다. 이런 날에는 아예 이 길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인왕제색도 화제(畵題)에는 그림 그린 날자가 辛未閏月下浣(신미윤월하완)이라고 적혀 있다. 신미년(1715년 영조 27년)에는 윤달이 5월밖에 없으므로 겸재는 구지 윤오월이라 쓰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서 하완(下浣)이란 무슨 말인가? 완(浣)이란 빤다(wash)는 뜻인데 당나라에서는 관원들에게 열흘에 한 번씩 쉬는 날을 주었다. 관복이 많을 리 없는 관원들이 이 날은 관복도 빨고 쉬기도 하란 뜻이었기에 빨래하는 날이 완(浣)이었다. 이것이 열흘에 한 번이다 보니 상순, 중순, 하순처럼 상완, 중완, 하완이란 말도 사용하였다. 혹은 같은 뜻으로 상한(上澣), 중한(中澣), 하한(下澣)도 사용하였다.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그린 위치가 육상궁(칠궁) 위 북악산 기슭이라고도 하고, 옛 경기고등학교 운동장 자리인 정독도서관 마당이라고도 한다. 정독도서관 앞마당에는 문화부가 세운 조형물과 설명문도 세워져 있다. 내용은 이렇다.


“謙齋 鄭歚(1616~1759)은 아름다운 우리 山川을 獨創的인 筆法으로 그려 우리의 그림을 大成하였다. 그를 기려 이 자리에 碑를 세우니 비 온 뒤 갠 날 이곳에서 보는 仁旺의 모습은 仁旺霽色圖처럼 예나 이제나 새롭고 아름답다. 1992년 6월  문화부 세움”


기왕 세우는 것이라면 겸재가 화제에 쓴 ‘仁王霽色’이라고 썼으면 좋았을 것을. 굳이 일제 때 자주 등장했던 仁旺을 쓴 것은 부주의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한편 의문이 생긴다. 인왕제색도는 정말로 정독도서관 앞마당에서 보고 그린 각도가 맞는 것일까?
(정리 = 최인욱 기자)



걷기 코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 금천교 시장 ~ 배화여고/필운대 ~ 사직단 ~ 황학정 ~ 단군성전 ~ 딜쿠샤 ~ 성혈바위 ~ 석굴암 ~ 인왕산 정상 ~ 성벽길 ~ 성벽 넘어 하늘다리 방향 ~ 마애불2 ~ 선바위/국사당 ~ 마애불3 ~ 독립문역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cnbnews 제580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3.26 10:24:59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4274


[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간다 (6) 인왕제색도 下] 왕비 눈물 어린 치마바위를 일제가 능멸까지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이른 봄 석굴암 앞마당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다. 인왕제색도에 비갠 후 골짜기에 포말을 일으키며 시원스럽게 계곡수가 흘러내리는 위치 중간쯤 되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인왕산 정상이 있는 치마바위가 웅장하게 내려다보고, 동쪽으로는 기차바위 갈림길이 있는 312봉 사이가 된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인왕제색도를 그렸다는 정독도서관 앞마당은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더욱이 육상궁(칠궁) 뒤 북악산 기슭은 아예 목을 동쪽으로 돌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인왕산을 자주 올라본 사람에게는 의문이 생긴다. 인왕제색도처럼 인왕산의 정상이 자리한 치마바위(병풍바위)가 비스듬히 모두 보이고, 또 동쪽 기차바위가 뻗어나가는 312봉과 앞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이 거의 정면으로 보이면서 그 사이 석굴암 계곡이 훤히 드러나고 그 계곡 위 끝에 성벽이 보이는 위치라면 기존 연구 결과와 달리 훨씬 남쪽에서 그린 것이 아닐까. 더욱이 창의문에서 올라오는 성벽길이 거의 정면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그 성벽길 뒤로는 기차바위가 윗모습만 보이면서 예외 없이 검은 콩알만 한 해골모양 바위가 기차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곳.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오늘 정독도서관 앞마당과 경복고 교정에 다시 가서 인왕산을 바라보았다. 청와대 경내가 된 육상궁 뒤 북악산 기슭은 갈 수 없기에 거의 같은 시선(視線)인 곳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결론은 이곳에서 바라본 인왕산 모습은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많이 달랐다. 우선 이들 위치에서 보면 치마바위가 많이 가린다. 또한 물이 넘쳐흐르던 계곡(석굴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또 큰 차이점은 그림에서 성벽길 너머 부끄러운 듯 윗모습만 조금 드러내던 기차바위는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기존 연구자들이 너무 동쪽에 그 시선을 둔 것 같다.


인왕제색 그린 지점이 오락가락 하는 이유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런 이유는 아닐까?


겸재와 둘도 없이 막역하게 지낸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이 1751년 음력 윤5월 29일 세상을 떠났음을 자료를 통해 연구자들이 밝혀냈다(실록을 찾아보니, 영조실록에 사천의 졸기가 실려 있다. 漢城右尹李秉淵卒 秉淵, 字一源, 韓山人, 號槎川 性淸曠, 少從金昌翕遊 賦詩數萬首, 其詩道健奇崛, 往往有逼古者, 世之爲詩學者, 多取則焉 從蔭仕, 至亞卿而止). 또 하나 찾아낸 것이 승정원일기에 이 해 5월 19일에서 25일까지 비가 내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인왕제색도 화제(畵題)에 辛未閏月下浣(1751년 신미년 윤5월 하순)이라 썼으니 사천이 졸한(숨진) 29일보다 4일 쯤 앞선 25일 비가 그친 후 그린 그림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막역한 사천을 위해 ‘비 그친 인왕산처럼 시원스레 병석에서 일어나라’는 염원을 담은 그림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러다 보니 인왕제색도 우측 하단에 있는 집이 육상궁 뒷담 쪽(즉 대은암 남쪽)에 있었다는 사천의 집 취록헌(翠麓軒)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취록헌에 집착하다보니 자연스레 취록헌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을 인왕제색도를 그린 위치로 추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왕제색도는 정독도서관이나 육상궁 쪽에서 바라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조심스럽지만 이 집은 취록헌이 아닐 것이다.



동쪽 시선에서 본 겸재의 또 다른 그림 인왕산도와 수성구지(壽城舊地)를 보면 그 시점을 비교할 수 있다.


겸재가 그린 인왕산도. 동쪽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이다.


겸재 작 수성구지(壽城舊地). ‘인왕제색도’와 ‘인왕산도’의 중간 위치, 즉 동남쪽 시선에서 그렸다.


경복궁 경회루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모습. ‘인왕제색도’의 산 모습과 흡사한 풍경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인왕산에는 동남으로 흘러내리는 세 개의 골짜기가 있다. 제일 남쪽이 석굴암 계곡수가 흘러내리는 기린교 쪽 수성동(水聲洞, 일명 仁王洞), 그 북쪽이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청휘각이 있던 골짜기인 옥류동(玉流洞), 다음은 옥류동 북쪽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청풍계(淸風溪)이다. 다시 인왕제색도를 곰곰이 들여다본다. 산봉우리 아래쪽으로는 산등성이 사이로 세 개의 운무 낀 골짜기가 보인다. 좌측의 큰 운무 낀 골짜기는 석굴암 계곡 아래쪽이니 수성동(水聲洞)이 분명하다. 또 건물의 좌측 작은 운무는 수성동의 일부인지 옥류동(玉流洞)인지는 불분명하다. 건물 오른쪽 운무 낀 큰 골짜기는 가운데 운무가 수성동의 일부라면 옥류동일 것이며, 가운데 운무가 옥류동이라면 청풍계가 된다. 따라서 이 집은 지금 옥인동 주택재개발지구로 지정된 옥류동의 남쪽 능선이거나(수성동 경계), 북쪽 능선(청풍계 경계)에 있었던 집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자연 인왕제색도를 그린 시점(視點)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홍선 스님의 사리 모셨다는
사리공엔 공허만이 가득하고


이제 석굴암 경내를 살펴보자. 치마바위 남쪽 바위 면에 특이한 마애불이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연대는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상당히 토속적이다. 彌勒尊佛(미륵존불)이라 했으니 미래를 책임지실 메시아다. 그윽한 눈길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당신이 언젠가 열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꿈꾸고 계시다. 김신조 부대 침투 후 인왕산이 출입금지되었기에 믿음을 달리하는 과격한 이들에게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있다.


석굴암 안에서 그윽한 눈길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마애불. 사진 = 이한성 교수


그 옆으로는 인왕산 산신령(山神靈)이 동자와 호랑이를 데리고 계신다. 마애불 옆과 산신각에 각각 조각되어 있는데 부조(浮彫)로 조각한 모습은 상당히 토속적이다. 우리 민간신앙의 한 면을 보여 주는 소중한 산신상이다.


인왕산 산신각. 사진 = 이한성 교수


토속적이라 더 소중한 인왕산 산신령(山神靈). 동자와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또 하나 석굴암에서 관심가질 만한 유적이 있다. 어느 스님의 사리(舍利)를 모셨던 바위구멍이다.


어느 스님의 사리(舍利)를 모셨던 바위구멍이 보인다. 사진 = 이한성 교수


흔히 자료에는 마애부도(磨崖浮屠)나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이라 하는데 다비(茶毘: 화장)한 육신에서 나온 사리를 바위에 구멍을 뚫고 모신 일종의 납골함이다.


필자와 함께 다니는 우리 답사길 동무들은 굳이 없는 탑을 마애사리탑이라 부르기 거북하여 마애사리공(磨崖舍利孔)이라 부르고 있다. 마애사리공은 전국에 있으나 주로 서울 경인 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선사(승려의 높임말)들이 입적하면 응당 다비하여 나온 사리를 부도(浮屠: 사리 탑)를 만들어 봉안했었는데 절 살림이 어려워진 조선 중기 이후에는 부도를 만들 경제적 형편이 안 되는 선사들은 이렇게 사리공을 뚫어 봉안했던 것이다. 이곳에 모셔진 이는 洪善(홍선)이라 쓰여 있는데 기록이 없어 이분에 대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제는 사리공도 누군가 훼손하여 뻥 뚫린 구멍만 알아보는 방문자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누군가 사리를 넣었을 사리함(舍利函)이 탐나서 그리 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홍선스님






지아비 왕 향한 왕비의 눈물어린 치마바위에

일본 청년들 잔치했다고 글자 마구 새겼으니


이제 골짜기를 통하여 인왕산 정상 길을 향한다. 인왕제색도에는 물길이 시원스레 쏟아지던 길이다. 김신조 부대 침투 후 이 길은 물론 인왕산 길 대부분이 폐쇄되었는데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길이 열렸다. 이 골짜기 길은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지름길인데 길이 험하고 외져서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다. 게다가 인왕산 생태 보호나 멧돼지 출몰 위험으로 인해 요즈음은 통행을 자제하는 길이기도 하다. 되도록이면 다시 내려가 경비 근무자가 있는 초소에서 만수천 약수 방향으로 우회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골짜기길 좌측은 인왕산 치마바위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그 장대함에 잠시 외경스러움도 느낀다. 나의 산악반 친구들이 오래전 바위타기 훈련을 하던 바위이다. 요즈음도 운영하는지 잘은 모르겠는데 낡은 바위타기 안내판도 서 있다.





치마바위를 올려다보며 가슴 아프고 울분 터지는 일도 떠오른다.


가슴 아픈 일은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의 사연이다. 주지하다시피, 중종이 반정 세력의 등에 업혀 임금이 되자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 매부 사이라는 이유로 반정 세력의 제척(배제하여 물리침)을 받아 7일 만에 폐출당한 단경왕후. 야사에 전하기를 경복궁이 바라보이는 이곳 인왕산 병풍바위에 붉은치마를 걸어 지아비 중종이 볼 수 있게 했다는 게 바로 이 바위다. 그래서 나중에는 치마바위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끝내 지아비 중종을 만나지 못하고 폐서인(신분적 특권을 빼앗겨 서민이 된 사람)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후세에 영조가 복위시켜 벽제 온릉(溫陵)에 묻었다. 능이라고는 없는 외딴 곳에 아직도 초라한 능에 잠들어 계시는 단경왕후를 보면 지아비 중종이란 이가 참 미워진다. 그 놈의 임금 자리가 뭐라고 신하들에 밀려 조강지처를 7일 만에 버린단 말이냐.


또 하나 울분을 참을 수 없는 일은 이 치마바위에 일제(日帝)가 글씨를 새긴 일이다. 해방 후 그 글씨들을 파내기는 하였으나 아픈 상처의 흔적은 아직도 역력하다.


일제가 글자를 마구 새겨 넣은 흔적이 남아 있는 치마비위


이와 관련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일제 강점기 유리 원판 자료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당시의 광경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바위 오른쪽부터 첫째 열에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둘째 열에는 皇紀 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 十六日(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구월 십육일), 셋째 열에는 朝鮮總督 南次郞(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라는 큰 글씨의 순서로 쓰여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보다 약간 왼쪽으로 사이를 띄어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 길이’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기념 각자(글자를 새김)를 남기는 연유를 서술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1939년 9월 16일, 17일 양일간에 걸쳐 대일본청년단대회가 경성(현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것을 기념한 글씨를 학무국이 주도하여 인왕산의 얼굴인 치마바위에 새겼던 것이다.


논리의 정도전이 실질의 무학대사 이겼다지만


골짜기 길을 오르다 보면 인왕제색도에 그려진 넓은 바위를 연상케 하는 너럭바위가 있다. 겸재는 지름길로 오르는 이 골짜기 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치고 오르는 이 길 끝에 닿을 무렵 만나는 인왕산 성벽도 생생히 그려 놓았다. 숨이 가파를 즈음 성벽을 만나는 능선길에 닿는다. 여기에서 좌향좌. 이내 정상으로 오른다. 높이 339m의 인왕산이다. 서울을 안에서 호위하는 내사산(內四山: 북악, 낙산, 남산, 인왕) 중 서백호(西白虎)에 해당하는 산이다.


인왕산의 정상



이에 관련하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조선 건국 초기 수도 건설과 관련하여 자초 무학대사와 삼봉 정도전 간의 진산(鎭山) 논쟁이 벌어진다. 그 내용은 무학은 이곳 인왕을 진산으로 삼아 대궐을 동쪽을 향해 앉혀야 한다는 것이었고, 삼봉은 백악(북악)을 진산으로 삼아 궁궐을 남쪽을 향해 앉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옮기면 이런 것이다.




무학(無學)이 마침내 한양에 이르러 말하기를, “인왕산(仁王山)으로 뒷진산(鎭山)을 삼고, 백악(白岳, 북악산)ㆍ남산(南山)이 좌우(左右)의 용호(龍虎)가 되어야 합니다” 했는데 정도전이 반대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다 남면(南面)하여 앉아 다스렸으니, 동향을 하였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무학이 말하기를,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후 2백 년에 걸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 의명대사(義明大師)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양에 도읍을 택할 적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곧 5세(五世)를 지나지 못해서 왕위를 찬탈당하는 화가 일어날 것이며, 2백년 만에 전국이 혼란스러운 난리가 올 것이라’ 한 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무학이 볼 때 북악을 진산으로 궁궐을 남면해 앉히면 좌청룡(左靑龍)은 낙산(駱山)이 되어 산세가 너무 빈약하며, 우백호(右白虎)는 인왕이 되기에 균형이 안 맞고 청룡이 약하면 장자(長子), 남자가 힘을 못 받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반면 삼봉은 유교적 논리로 제왕은 남면(南面)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은 삼봉의 뜻을 따라 궁궐(경복궁)이 건설되었는데 조선 건국 200년 뒤인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났기에 호사가들은 무학의 말이 맞았다 하여 정감록 등 비기(秘記)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인왕제색도에 인왕상 정상이 없는 이유


그런데 인왕제색도에는 인왕산 정상이 그려져 있지 않다. 어떤 이는 일부러 구도를 정상을 그리지 않게 배치했다고도 하는데 일반적인 견해는 잘려 나갔다는 견해가 강하다. 정조의 정적이며 정치 파트너였던 노론 영수 만포(晩圃) 심환지(沈煥之)가 이 그림을 소유했는데 상단에 종이를 덧붙여 칠언절구를 적어 놓았었다 한다. 후에 임자가 바뀌면서 제시(題詩)를 썼던 그 종이도 없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그림의 상단이 잘려 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성벽길을 따라 무학동/사직동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무너졌던 성은 잘 보수되어 있고 하산하는 등산로도 안전하게 정비되어 있다. 주봉(主峰)을 거의 내려올 즈음 인왕제색도의 가장 좌측에 있는 봉우리가 내려다보인다. 이 즈음 하산길 바위에 또 하나의 성혈(星穴)이 발견된다. 아마 눈비비고 찾으면 인왕산 곳곳에서 성혈을 만나리라. 아래로 보이는 봉우리 옆으로는 국가시설물이 자리잡고 있어서 하산로는 멀찌감치 멀리 내려가는데 이윽고 작은 초소를 만나면서 성밖으로 연결되는 길로 나선다. 이 길은 앞산인 안산(鞍山, 毋岳)으로 이어지는 새 다리인 하늘다리로 연결되는 길이다. 하산 길 잠시 지나 기도처에 닿으면 정성 들이는 향단(香壇) 앞 암벽에 자그만 마애불을 만난다. 전혀 전문성이 없는 이가 정성 하나로 새긴 마애불 같다. 너무 서툴러서 사랑스럽다.


이 골짜기에서 기도하는 이들은 제석님(帝釋)이라고 부른다. 불법의 세계에서는 33천 세계의 도리천에 계신 분이지만 무속(巫俗)에도 등장하여 福을 주시니 활약이 크신 분이다.


두 번째로 만나는 마애불 제석님. 솜씨가 너무 서툴러서 더욱 사랑스러운 마애불이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다시 층계를 따라 내려온다. 울긋불긋 국사당에 닿는다. 저곳은 무엇 하는 곳일까? 왕조실록 1395년(태조 4년) 12월 기록에 그 힌트가 있다.


이조에 명하여 백악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命吏曹, 封白岳爲鎭國伯, 南山爲木覓大王, 禁卿大夫士庶不得祭)


즉, 백악산(북악산)에는 백악신사, 남산에는 목멱신사를 두어 나라의 제사를 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남산에는 일본신(日本神)을 모시는 조선신궁이 건설되었다. 이때 목멱대왕님은 오백년 넘게 지키시던 당신의 집 남산에서 쫓겨나 이곳 인왕산 골자기에 초라히 이사를 오신 것이다. 국사당(國師堂)이란 이름으로. 변변치 못한 후손들이 나라를 빼앗기니 신들도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남산에 조선신궁이 들어선 뒤 터 좋은 남산에서 이곳 인왕산으로 쫓겨나 세워진 국사당. 후손이 변변치 못하면 신들도 수난을 당한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세 마애불이 지키는 이곳이 바로 불국토


국사당 앞 언덕 위로는 높다랗게 선바위가 서 있다. 장삼을 입은 두 분 선사(禪師)님 모습인데 이곳에 기도를 드리면 잘 들어주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아들 낳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더 효험이 있다고 한다. 한편 청화도인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 팔도총론에는 태조가 한양도성을 어떤 라인에 쌓을 것인가? 하며 고민하는 상황이 실려 있다.




장삼을 입은 스님 모습의 인왕산 선바위.


외성을 쌓으려 하였으나 둘레의 원근을 정하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녹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기면서 눈을 따라 성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이다.(欲築外城未定周圍遠近 一夜天下大雪外積內消 太祖異之命從雪立城址卽今城形也)


그런데 이때 눈 녹는 곳이 선바위를 포함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일 이때 선바위가 선 안으로 들어갔다면 조선의 불교가 융성했을 것이라는 민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바위를 지나 길을 따라 내려가면 골목길 우회전한 길 끝 공터에 또 한분의 마애불이 정좌해 있다. 어찌 보면 일본풍의 불상 같기도 한데 오래된 마애불은 아니다.





그래도 인왕산 남쪽에 마애불 세분이 있다는 사실은 이곳이 불국토였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승려가 천민이 된 조선 사회에서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자연 도성에 가까운 인왕산이 불국토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아파트 길을 따라 전철역 독립문역으로 내려간다. 예전 의주대로 길에 들어서 있던 많은 주택은 사라지고 거의 대부분 아파트촌으로 변해가고 있다. 연행(중국행)을 떠나던 사신 일행이 전별의 정을 나누던 모화관도 영은문도 이제는 이름으로만 남았다. 또 겸재의 그림을 따라 더듬어 가야할 길이다. <인왕제색도 편 끝>
(정리 = 최인욱 기자)


걷기 코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 금천교 시장 ~ 배화여고/필운대 ~ 사직단 ~ 황학정 ~ 단군성전 ~ 딜쿠샤 ~ 성혈바위 ~ 석굴암 ~ 인왕산 정상 ~ 성벽길 ~ 성벽 넘어 하늘다리 방향 ~ 마애불2 ~ 선바위/국사당 ~ 마애불3 ~ 독립문역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이한성 동국대 교수


cnbnews 제581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4.02 09:56:40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4311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