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산행기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겸재 정선 그림 속 길>, 경복궁역~영추문~쌍홍문터~경복고~경기상고~창의문~홍지문~옥천암 백불]

산포로 2018. 8. 19. 09:33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겸재 정선 그림 속 길> 경복궁역~영추문~쌍홍문터~무궁화 동산(김상헌 집터)~경복고~경기상고~백운동천~자하동~창의문~한양도성~해골바위~기차바위~홍지문~옥천암/보도각 백불]18년 8월 18일


* 구간 :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 경복궁역~영추문~쌍홍문터~무궁화 동산(김상헌 집터)~경복고~경기상고~백운동천~자하동~창의문~한양도성~해골바위~기차바위~홍지문~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옥천암/보도각 백불
* 일시 : 2018년 8월 18일(토)
* 모임장소 및 시각 :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 경복궁역 오전 9시 30분
* 날 씨 : 맑음(최고 영상 34도 최저 영상 23도)
* 동반자 : 홀로산행
* 산행거리 : 8.9km
* 산행지 도착시각 :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 경복궁역 오전 9시 30분
* 산행후 하산시각 :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옥천암/보도각 백불 오후 3시

* 산행시간 : 약 5시간 30분(식사 및 사진촬영시간 포함)



[이한성 - 겸재 정선 그림 속 길 (1)] 내가 뛰놀던 유란동에 겸재 태어났으니


2010~2014년간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칼럼을 연재한 바 있는 옛길 답사가 이한성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가 새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겸재 정선의 그림을 따라 걷는다. 정선(1676∼1759년)의 그림을 보고 감흥을 느끼지 않는 한국인이 없을 정도로 그의 그림에는 시원함과 선 굵은 미학이 있다. 더구나 화가를 ‘환쟁이’라고 천대하던 시대에 그는 몰락 양반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끼니를 건너뛰는 적이 많았지만, 자신은 화가라는 뚜렷한 자각을 갖고 중국화와 차별되는 독특한 한국화풍을 이뤄낸 인물으로서도 의미도 크다. 붓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한국의 선(線)과 미(美)를 창조하며 일세를 풍미한 겸재 정선의 그림을 들고 이 교수를 따라 걷기에 나서본다.

<편집자 주>


▲ 현재의 경복고등학교 자리(그림 오른쪽 아래)부터 서울도성의 북문 격인 창의문(자하문이라고도 한다)까지 이어지는 길을 겸재가 그린 창의문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겸재를 따라가보는 길의 첫 번째는 이 길을 따라 시작된다.


시작하며


2004년이었던가, 간송(澗松)미술관에서 겸재 전시회가 열렸다. 미술학도들, 인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 교양에 목마른 이들이 많이 모였었는데 그중에는 그림에 문외한인 필자도 끼어 있었다. 그때 필자에게 더 궁금증을 일으킨 것은 죄송스럽게도 그림의 예술성보다 그 그림들의 배경이었다.


인왕산과 북악산을 그린 그림들은 처음 보는 그림임에도 낯설지 않았다.




10대 학창시절을 그 두 산을 놀이터 삼아 지낸 나나 우리 친구들에게는 놀던 마당이었으니 그저 그리울 뿐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 골짜기에 우리가 모르는 정자(亭子)며 멋진 집들이 300여 년 전에 그렇게 많았다니.


수균이가 살던 윗동네에 청휘각이 있었고, 영수와 석신처럼 쎈 친구들이 바위타기 훈련을 하던 그 바위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배경이라니. 수성동에 기린교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코앞에 살던 규용이가 생각났고, 백세청풍(百世淸風) 청풍계에는 형기네 하숙집이 생각났다. 방과 후에는 때때로 작당을 해서 교칙에 하지 말라는 일도 슬그머니 해보던 그곳이 알고 보니 청풍계였다.


▲ 겸재의 명작 ‘인왕제색도’의 무대가 되는 인왕산과 경복궁이 표시된 옛 지도. 필자가 어린 시절 뛰놀던 동네이기도 하다.


그렇게 궁금해서 겸재의 그림에 나타난 인왕산은 들어갈 수는 없지만 북악의 변두리를 다니고, 이제는 서촌(西村)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우대(웃대)를 다시 가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간송에 최완수 선생의 겸재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었기에 큰 고생 없이 다닐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겸재 그림 속 길’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서 시작한 인왕과 북악을 거쳐, 양천팔경(陽川八景)을 중심으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속 그림 길을 찾아다니게 되었고,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에 그려진 임진강을 다녔다.


불행히도 하양현감(河陽縣監) 시절 그린 그림들이 ‘영남첩’이라 하는데 ‘쌍도정도’ 이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어 아쉽다. 다행인 것은 청하현감(淸河縣監) 시절 그린 동해안의 명승지들을 비롯해, 손자 정황의 작품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의 의미있는 곳들도 다녀보려 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금강산이다. 겸재는 3번의 금강산 탐승(探勝)길에 올랐는데 그때마다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다. 아쉽지만 통일을 기약하자.


본 연재는 겸재의 생가터에서 시작하여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잠든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방학동, 쌍문동)를 그린 손자 정황(鄭榥)의 그림 양주송추도(楊洲松楸圖)에서 끝맺으려 한다. 이제 정선의 그림 속 길을 걷겠습니다. 걷는 이에게 행운이 있으시기를.



① 창의문 길 上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를 출발한다. 그 동안 걸어보지 않던 경복궁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경복궁 담을 끼고 북악산 방향으로 올라가려 한다. 옛지도에는 적선방(積善坊)에서 의통방(義通坊)으로 가는 길이다.


68년까지는 효자동 종점까지 전차가 다녔는데 그때는 이 길이 서울에서 은행나무 가로수가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최고의 아베크 길이었건만 68년 김신조 일행이 넘어오면서 민간인은 접근하기도 무시무시한 공포의 길이 되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이다. 동쪽 문이 건춘문(建春文)이니 짝을 맞춘 것이다. 동양에는 오행(五行)사상이 있는데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오행이라 하고, 계절로는 춘하(春夏), 바뀌는 계절(間季), 추동(秋冬)으로 오행을 삼고, 방위로는 동남중서북(東南中西北)으로 대응시키고 있다.


따라서 동(東)은 춘(春)이며 서(西)는 추(秋)가 되어 건춘문 영추문이 되었다.





오늘 첫 번째로 찾아가려는 목적지는 쌍홍문터다.


이곳 지명 효자동이 있게 한 유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번 위치는 자하문로 24길 519(효자동 172-1)인데 경복궁 담이 끝나는 곳 400여m 전 지점에서 담을 버리고 길을 건너면 서쪽으로 가는 2차선 정도의 차로가 열려 있다. 이곳에는 길을 안내하는 친절한 경찰관이 서 있으니 길을 물으실 것. (만약에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통인시장 방향으로 올라왔다면 자수교회 지나 세븐일레븐 골목으로 들어오면 된다)


길 안쪽에는 화이트하우스라는 건물이 있고, 건너편에 성주빌라라는 복합주택이 보인다. 이 빌라 코너에 ‘쌍홍문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에는 이렇게 써 있다.


“쌍홍문은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조원(趙瑗, 1544~1595)의 두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내린 한 쌍의 정려문(旌閭門)이다. 효자동이라는 동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아쉽게도 너무 간단해서 무슨 연유인지 알 수가 없다. 잠시 궁금증을 누르고 골목길로 들어간다. 옆으로 뻗은 작은 골목 막다른 집에 해공구가(海公舊家)라는 나무판을 붙인 해공 신익희 선생이 사시던 집을 만난다.


궁정동 그날과 김상헌의 충절이 한 자리에


코흘리기 시절, 조병옥 박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자 사람들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었지.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네”. 그 당시는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하는 구성진 노래가 유행을 타던 시기라서 이런 노래가 패러디 되었다.


먹고 살기는 힘들고 자유당 행태는 눈뜨고 보기 힘드니 백성들은 이런 노래를 만들어 마음을 달랬다. 이런 마음이 쌓이면 결국은 큰일이 생기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우길 주장한 청음 김상헌을 기리는 시비와, 그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이제 골목을 빠져 나오면 무궁화동산이다. 유신 시절, 안가들이 있어 암담했던 땅이다. 유신을 끝맺은 그 어두운 일도 이곳에서 있었다. 이곳이 본래 음침했던 땅이었던가?


아쉽게도 그런 곳이 아니었다. 공원 북서쪽 끝에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 선생의 시조를 새긴 시비(詩碑)가 있고 그 분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런데 이 집터에서 벌어진 유신의 종말을 고한 그 총성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역사적 평가는 어떨지 몰라도 이 터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청음 김상헌 선생은 정묘호란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명(明)에 원병을 청하러 갔었고, 병자호란에는 남한산성 항전에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주전파(主戰派)의 선봉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후 현장이 된 이른바 ‘궁정동 안가’는 사라지고 이제 공원이 됐다. 역사적 평가는 어쨌든, 역사의 현장은 보존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보니 주화파(主和派) 최명길과는 극심한 대척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은 김상헌이 죽어서 영원히 살고자 했다면, 최명길은 사직을 위해 살아서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주제를 벗어나 긴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은 다 청나라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럴지라도 만약 우리 시대에 이런 지도층이 이 땅의 미래를 맡겠다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No다.


청음은 청나라에 억류되어 고초를 겪으면서 집 생각으로 한 가닥 마음의 위로를 삼았다. 그 기록이 청음집에 근가십영(近家十詠: 집 주변를 생각하며 쓴 10편의 시)으로 권11에 전해진다. 목멱, 북악, 인왕, 청풍계, 백운동, 대은암, 회맹단, 세심대, 삼청동, 불암을 노래했는데 그 중 북악산을 읊은 칠언율시의 일부를 읽어 보자. 집이 많이 그리웠나 보다.


임금 가마 때때로 경회 못에 납시는데
龍輿時出慶會池
천암만학 앞 다투어 기이함을 다투누나
千巖萬壑爭效奇
나의 집은 바로 그 산 아래 있거니
吾家住在此山下
그리운 곳 그곳으로 어느 날에 돌아갈고
願言思之何日歸

(고전번역원 번역을 본으로 해서)



▲ 효자동이라는 지명을 만들어준 운강 조원을 기리는 운강대 각석 역시 경복고등학교 교정 안에 있다.


눈 앞에는 청와대 경내로 조선기와 건물들이 보인다. 아들은 임금이 되었건만 후궁이라는 신분 때문에 대접 받지 못하는 7분 후궁의 영혼을 모시는 칠궁(육상궁)이다. 들어갈 수 없으니 방문은 언젠가 청와대 방문 신청을 거쳐 가보기로 하고 골목을 접어들어 경복고등학교로 향한다. 이 학교 교정에는 겸재 정선의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畵聖 謙齋 鄭敾의 집터’(화성 겸재 정선의 집터)라고 쓰고 인곡정사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 겸재의 자화상 讀書餘暇(독서여가)가 새겨져 있다.




겸재에게는 장동 김씨와 인연이 있었으니


겸재는 유란동(幽蘭洞, 지금 청운동 89 경복고등학교 지역)에서 1676년(숙종 2년) 다 망해가는 한천(寒賤)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한다. 다행히 이웃에 살던 당대 최고 명문 가문 장동 김씨(壯洞 金氏) 김창집 등 이른 바 6昌 집안과는 6창의 고조부 김극효(金克孝)와 겸재의 고조부 정연(鄭演)이 같은 구로회(九老會) 회원이었기에 선대의 각별한 인연에 힘입어 그 문하에서 공부도 하고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한다. 6창은 청음 김상헌의 증손 6형제를 말하는데 청음 때부터 수집한 많은 서화(書畵)를 수장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당대 최고의 예술인들이기도 하였다. 특히 특별한 그림 스승이 없던 겸재에게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좋은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도움으로 그림에 눈뜨고, 벼슬길에 나선 겸재는 곧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겸재의 장동팔경첩에 그려진 그림들이나 인왕 백악을 그린 그림들은 이들 장동 김문과 관련 있는 곳이거나, 함께 공부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벗들과 연관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 학교 교정에는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각석들이 있다. 교정에서 교문 쪽으로 잠시 내려오다 보면 雲江臺(운강대)라고 쓴 단아한 해서체의 각석이 보인다. 그 옆에는 이 학교 31회 졸업생들이 1956년 세운 운강대의 내력을 설명한 孝子遺址(효자유지) 비석이 서 있다. 이 지역이 효자동이 된 내력을 알게 하는 중요한 각석인 셈이다.


운강(雲江)은 조선조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선조 때 이조 좌랑과 삼척부사를 지낸 조원(趙瑗)의 호(號)이다. 이곳이 그가 살던 집터였기에 누군가가 운강을 기리기 위해 새겨 놓은 글자가 운강대인 셈이다.





효자동 이름에 얽힌 사연


운강 조원에게서 비롯한 두 가지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위에 언급한 효자동의 내력에 관한 것이다.


선조 연간에 임진란이 일어났다. 운강의 아내는 전의 이씨인데 판서 이준민(李俊民)의 딸이다. 이준민은 남명 조식의 외조카이니 명문 집안의 규수를 아내로 맞은 것이다.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난리가 나자 큰아들 희정과 둘째 희철이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왜적을 만나 큰 아들은 즉사하고, 둘째도 큰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두 효자를 기려 두 개의 정려문을 내렸으니 이것이 바로 쌍홍문이다. 이런 내력으로 이곳이 쌍효자골 또는 효자골로 불리다가 효자동이 되었다 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조원과 그의 소실 옥봉(玉峯)에 관한 것이다.


옥봉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의 한 사람으로 옥천군수 이봉지(李逢之)의 얼녀(孼女: 천민에게서 난 딸)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에게 사랑 받았으며 글을 배우면서는 총명함이 뛰어났다. 그러나 신분상 양반집 정실이 될 수 없어 아버지 이 군수는 딸의 좋은 배필을 구하려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인품 있고 학식 있는 운강 조원을 알아보고 딸을 소실로 받아 주기를 청했으나 운강은 거절하였다. 아직 젊은 나이에 소실을 두는 일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에 옥봉의 아버지는 조원의 장인 이준민에게 청하여 옥봉을 조원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다. 결혼은 힘들었지만 이들의 결혼생활은 순탄했던 것 같다. 특히 조원이 외직 삼척부사로 나갔을 때는 옥봉도 따라갔는데 그 때 지은 시를 보면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도 한 순간의 실수로 사라져 버린다.



이웃에 사는 어떤 여인이 남편이 억울하게 소도둑으로 몰렸으니 도와달라는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느라 시 한편 써서 들려 보냈다. 여인은 이를 고을 원님께 가져 갔는데 이 글을 읽은 원님이 그 남편을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제목 : 爲人訟寃 위인송원:(남의 억울한 송사를 위하여)​


洗面盆爲鏡 (세면분위경)
낯을 씻으며 대야를 거울로 삼고
梳頭水作油 (소두수작유)
머리를 빗으며 물을 머릿기름으로 씁니다.
妾身非織女 (첩신비직녀)
제가 직녀가 아니니
郎豈是牽牛 (낭기시견우)
남편이 어찌 견우이겠습니까?


제가 직녀가 아닌데 어찌 제 남편이 견우(소 끌고 가는 도둑)이겠느냐? 재치있게 결백을 주장한 것이다.


이 일이 조원에게 알려졌다. 마침 벼슬길에 다시 돌아간 상황에 있던 조원은 나라의 송사에 소실이 끼어든 것이 알려지면 당파싸움에 빌미가 될 위험성이 농후했던 것을 알았기에 옥봉은 내침을 당해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녀는 다시는 운강을 만나지 못했고 임진란 중에 사망했다 한다.




빼어난 여류시인 옥봉을 기리는 전설


이런 그녀의 삶과 빼어난 시는 사람들 마음을 아프게 하여 전설이 되었다.


조선의 스토리텔러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옥봉의 전설이 각색되어 전해진다. 아마도 그 시절에 떠돌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승지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로대신으로부터 시집 한 권을 받는다. 놀랍게도 이옥봉 시집이었다. 옥봉은 부친 조원의 첩. 대신이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40여 년 전 바닷가에 괴이한 주검이 떠돌아, 사람을 시켜 건져 올리도록 했다. 주검은 종이로 수백 겹 말려 있었고, 안쪽 종이엔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가 빼어나 책으로 엮었다. 말미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임진란 중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빼어난 여류시인을 그리워하니 아마도 전설이 되었나 보다.



허균은 시화집(詩話集) 성수시화에서,


“나의 누님 난설헌(許蘭雪軒)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趙伯玉 : 趙瑗의 자)의 첩이다. 그녀의 시 또한 맑고 씩씩하여 지분(脂粉: 여자 느낌)의 태가 없다.
家姊蘭雪一時 有李玉峯者 卽趙伯玉之妾也 詩亦淸壯 無脂粉態”
고 했다.


조원의 현손 조정만(趙正萬)도 선대의 문집을 엮으면서 소실 할머니 옥봉의 시 32편을 모아 부록을 엮었다. 운강대 앞에서 그 시대를 살다간 한 여인이 짠하게 마음속에 파고든다.(다음 편에 계속)


[이한성 - 겸재 정선 그림 속 길 (2)] 아스팔트 아래로 흐를 자하동川을 마음으로 걷는다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아쉬움을 남기고 경복고등학교 정문을 나선다. 주택가 골목을 빠져 나와 우로(서쪽으로) 향하면 자하문로로 나서게 된다. 자하문터널을 통해서 세검정, 평창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길을 북쪽 자하문터널 방향으로 잡는다. 이 길은 이제는 대중교통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차량이 다니는 큰길이지만 복개된 도로 밑으로는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발원한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르던 하천이었다. 자하동, 백운동, 청풍계, 옥류동, 수성동…. 그 맑던 물이 어두운 공간으로 흘러들어가 청계천으로 간다. 도시가 되면서 얻은 편리함과 잃은 자연이 함께 있는 공간이다.




한 500m쯤 올라왔을까, 우측으로 경기상업고등학교가 나타나는데 반갑게도 학교 담에는 조그만 옛 그림이 붙어 있다. 가만 들여다보니 겸재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있는 그림 청송당(聽松堂)이다. 이곳이 청송당 유지(遺址)임을 알리는 표지판인 셈이다.


‘청송당 집터’라는 표지판이 반기고


청송당의 흔적을 찾으려면 학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유지는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청송당 초석이고, 또 하나는 청송당 유지임을 알리는 자연석에 새긴 각자(刻字)와 요즈막에 세운 표지석이다.


학교 건물은 남쪽을 향해 두 줄로 서 있다. 정문에서 직진하여 건물 서쪽 끝에서 뒷담 쪽으로 향하다 보면 앞건물과 뒷건물 사이 화단에 잘 정비된 초석들이 보인다. 청송당 유지임을 알리는 안내판도 있다. 일단 이 유지를 확인했으면 두 번째 건물을 지나 학교 뒷담까지 나아가자.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았을 것처럼 보이는 층계를 올라 뒷담을 끼고 가면 동북쪽 코너에 고목이 서 있고 그 아래 바위에 聽松堂遺址(청송당유지)라는 반가운 각자(刻字)가 기다리고 있다.



청송당이 있던 자리임을 표시하는 ‘청송당유지’ 글자가 새겨져 있다.


聽松堂(청송당). 조선 전기의 큰 학자 성수침(成守琛, 1493~1564년) 선생이 머물던 곳이다. 聽松, 소나무를 보지 않고 듣다니….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눈으로 보는 견송(見松)이나 관송(觀松)이라 하지 않고 성수침 선생은 귀로 듣는 미학을 택했다. 이 집에 칩거하여 글 읽고 사색하던 선생에게는 청청한 푸르름을 보고 눈을 호사하기보다는 송뢰(松籟;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聽松은 선생의 호(號) 중 하나이며, 당호(堂號) 청송당은 중종 21년에 눌재 박상(訥齋 朴祥) 선생이 붙여준 것이다.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었던 동네


이 집터를 처음 잡고 집을 지은 이는 아버지 성세순(成世純)이었다.


성수침 선생은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중종 14년(1519년) 일어난 기묘사회로 이상을 꿈꾸던 도학정치가 무너지고 피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청치의 현장을 접하고는 과거의 뜻을 접고 이곳에서  학문의 길에만 정진하였다. 이 지역에 소나무가 얼마나 우거졌는지는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알 수는 없으나 복숭아 나무가 많아 예부터 복사골 즉 도화동(桃花洞)으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었다. 이미 거쳐온 경복교 교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은암 도화동 이름난 이곳…”.

봄이면 복사꽃 흐드러지게 핀 청송당에 앉아 선생은 노래하였다.


이려도 太平聖代(태평성대)
저려도 太平聖代
堯之日月(요지일월)이요
舜之乾坤(순지건곤)이로다
우리도 太平聖代에 놀고 가려 하노라


아드님 성혼(成婚) 선생은 율곡 이이, 구봉 송익필 등과 더불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명망이 높았다. 부자(父子)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였기에 청송당은 후학들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선생 사후에는 많이 퇴락한 청송당을 윤선거, 윤순거 등의 후학들이 중건하였다. 겸재의 그림에 그려진 청송당은 이들이 중건한 모습일 것이다. 현재 청송당을 그린 겸재의 그림은 세 점이 전해진다. 국립박물관 소장 장동팔경첩 속 청송당, 간송에 소장된 장동팔경첩 속 청송당, 그런데 갑자기 몇 년 전에 또 하나의 청송당 그림이 나타났다. 고미술 전문화랑 공 아트스페이스에서 또 하나의 장동팔경첩을 내놓은 것이다. 간송본 청송당도에는 긴 지팡이를 든 신선 같은 선비가 동자를 앞세우고 청송당의 위 건물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겸재는 반은 도사가 된 청송 선생을 그렸으리라.


이제는 청송당 아랫건물은 학교 부지 속 일부가 되었고 계곡 위 건물터로 여겨지는 곳에는 뉘 집인지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시간에 따라 임자가 달리 있는 것이니 과히 애석해 할 일도 아니다.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청송 성수침으로 보이는 선비가 동자를 앞세우고 청송당을 향하는 모습을 그림 겸재 작 ‘청송당’(간송미술관 소재). 그림 속의 맑은 물은 이제 아스팔트에 뒤덮여 지하를 흐르고 있을 터이니, 도대체 우리의 쇠락은 어디까지 흐를 것인가.


이제 청송당 옛터를 나와 자하문터널 방향으로 나아간다. 터널에 이르기 전 오른 쪽에 후기성도교회가 보인다. 그 앞길로 올라 교회를 지나면 옛 건물터가 있는 산 아래 넓은 공터를 만난다.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선생이 살던 집터다.





동농 김가진. 선생은 1886년 병자호란 때 순절한 선원 김상용(金尙容: 청음 김상헌의 형님) 선생의 장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주일공사, 개혁을 주도하던 군국기무처회의원, 공조판서, 농상공부대신, 중추원1등의관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독립협회에도 가담하였다.


식민조선 최고위직이 임시정부에 가담하고,
그 며느리는 임시정부 안살림 책임졌으니…


1910년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庚戌國恥)에는 일본인들이 조선 고관들에게 내려준 남작의 작위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선생은 활동을 중지하고 은거하며 하사금을 받지 않았다 한다. 이후 비밀결사조직 대동단(大同團)의 총재로 활약하였고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 10월에는 둘째 아들 의한(1900~1964)의 손을 잡고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선생의 대동단은 1919년말 고종황제의 5자(五子) 의왕 이강(義王 李堈)공을 망명시키는 특별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압록강 건너 중국 땅 안동(安東, 지금의 단동)에서 발각되어 국내로 송환되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었다.


비록 의왕의 망명은 실패하였지만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고문으로 복국(復國: 나라 회복)운동에 몸 바치니 74세 노구의 조선 최고위직 관리의 임시정부 가담은 독립을 꿈꾸는 조선인들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일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생의 며느님 수당 정정화(修堂 鄭靖和) 선생도 20세 꽃다운 나이에 노구의 시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는 일념으로 1920년 1월 상해로 떠났다. 이렇게 시작하여 수당 정정화 선생의 국내 잠입 독립자금 조달 활동과 임시정부의 주부로서 모든 안살림을 맡아야 했던 고된 생활은 해방을 맞던 그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이들 가족은 어찌 되었을까?


동농 선생은 망명 3년만인 1922년 이역 땅 상해에서 명을 다하니 그곳에 묻혔다. 지금은 손문의 부인 송경령(宋慶齡) 묘역인데 아쉽게도 선생의 묘는 찾을 수가 없다. 1922년 7월 7, 8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선생의 부음 소식을 알리고 있는데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아들 김의한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수당 정정화 선생은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 요인들이나 중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그렇듯이, 해방 후 광복한 고국 땅에 돌아와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완용, 윤덕영 등 친일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나 그 후손들이 누린 세월과는 너무 먼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며느님 정정화 선생이 장강일기(長江日記)라는 제목으로 기록해 놓았다.



선생의 집터에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간송미술관 장동팔경첩에는 이곳을 그린 자하동(紫霞洞)도가 있다. 북악산이 흘러내린 곳 골짜기 제법 넓은 평지와 언덕에 지어진 집들의 배치가 아름답게 구도를 잡은 그림이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이 집이 선원 김상용 선생의 고손자 모주 김시보(茅洲 金時保; 1658~1734)의 집으로 설명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1711년 36세 되던 해 8월, 스승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이 6번째 금강산 탐승 길에 나섰을 때 그의 시(詩) 제자이며 조카뻘 되는 모주 김시보와 송애 정동후와  함께 금강산을 다녀오는 등 김시보와는 가까운 사이였으니 그의 집을 그림으로 남겼으리라.


겸재가 그린 ‘자하동’(간송미술관 소재). 이 아름답던 풍경을 현재는 아스팔트와 시멘트 집들이 뒤덮었으니, 우리 인간은 발전한 것인가, 뒷걸음질 친 것인가.


모주의 7세손인 동농 김가진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넓은 터에 1903년 백운장(白雲莊)이라는 새 집을 지었다. 왼쪽 언덕에는 몽룡정(夢龍亭)을 짓고 당대 명필의 솜씨로 손수 편액(片額)도 써 달았다(이 편액은 현재 남아 있다). 며느님 정정화는 1910년 11살의 나이로 동갑내기 의한과 혼례를 올리고 이곳에서 놀았다 한다. 이곳에는 인왕산 호랑이도 내려왔다던가…. 어린 새 신랑 각씨가 소꼽장 하며 놀았을 몽룡정이 아련하다.


겸재와 금강산 동행한 김시보의 7대손


동농 김가진 선생의 힘찬 글씨로 남아 있는 ‘백운동천’ 각자. 그의 기상을 느끼게 해준다.


이 터 북쪽 암벽에는 동농 선생이 쓴 힘찬 글씨가 남아 있다.


白雲洞天(백운동천). 光武七年 癸卯 中秋 東農(광무 칠년 중추 동농).


새 집을 짓던 해인 1903년 광무 7년 가을, 힘찬 해서로 쓴 백운동천. 번창하는 대한제국에서 뜻을 펴고자 했을 선생의 기상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라도 빼앗기고 집사의 농간으로 이 집도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 갔다. 1915년(大正4년)에는 일본 요리집 청향원(淸香園)이 되었다가 1929년(소화4년)에는 감히 백운장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생선요리(갑뽀, 割烹)집이 되었다니 아아 슬프다.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 몽룡정으로 올랐음직한 층계길 어구에는 왜색의 정원 석장식이 그대로 서 있다. 독립 후에도 나아진 것은 없어 카바레, 요정, 음식점 화남장으로 전전했으니 동농 선생 일가가 겪은 어려움만큼 이 터도 어려움을 겪었다.


겸재의 스승이었던 삼연 김창흡의 후손인 동농 김가진은, 조선총독부가 내려주는 하사금도 받지 않고 결연히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해 조선인들을 일깨웠다. 그가 지은 백운장은 그 뒤에 일본 요리집이 됐고 지금은 왜색 석등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치욕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옛터를 두고 다시 교회 앞길로 돌아내려 온다. 주택지 포장도로가 창의문 쪽을 향해 열려 있다. 포장길 바닥을 살피면 계속해서 쇠로 만든 맨홀 뚜껑이 덮여 있다. 그 아래로 하천이 흐른다는 말이다. 바로 창의문도에 그려져 있는 문 아래 심산계곡을 이루는 동천(洞川, 洞天)이다. 이른바 백운동천(白雲洞天)이요, 좁은 범위로 부르면 자하동천(紫霞洞天)이다.


겸재의 장동팔경첩에 이 골짜기를 그린 그림 두 점이 자하동(紫霞洞)과 백운동(白雲洞)으로 전해 온다. 간송의 최완수 선생은 자하동은 창의문 아래 북악산 기슭을 일컫던 동네라 했고, 백운동은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이라 했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서 놀던 필자에게는 크지 않은 골짜기 하나를 둘로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실한 연구자들이 호암 문일평 선생의 글을 찾아 공표를 해주니 백운동과 자하동의 고민은 한결에 풀렸다. 내용인즉, 한양천도 초에 이 골자기를 백운동이라 했는데 이 백운동의 깊숙한 곳을 개성에 있던 자하동에 비교하여 자하동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이름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개성(松京)의 북쪽 성문 아래 동네가 자하동이라 한다. 그러니 창의문(북서문)이 있는 성 아래 동네를 자하동이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옛 옥편을 찾으면 城이란 글자의 훈음(訓音)이 “잣/자 성, 잿/재 성”이다.


조선 중종 때 어린이들을 위한 책, 최세진의 훈몽자회에도 城은 ‘잣 성’으로 쓰여 있고, 필자가 가지고 있는 1981년 대옥편에도 城은 ‘성 성’과 ‘잿 성’이 병기되어 있다. 옛사람들은 城을 자/잣이나 재/잿으로 불렀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城門은 자문이며 성문밖은 자문밖이다.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창의문밖 구기동, 평창동을 자문밖이라 불렀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자문은 그 아랫동네는 자하문이 되어 한자화하면 紫霞門이 되고, 잣문으로 쓰다 보면 ‘잣 栢’의 백이 되어 성 근처 동네는 栢洞, 栢子洞도 되었다가 ‘자 尺’으로 잘못 알고 尺洞도 되고, 더 나아가 鵲洞(작동)도 되니 모두 城이 일으킨 요지경 속 이야기다.


성 밖 동네란 뜻의 ‘자문밖’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자하(紫霞)-백동(栢洞)-척동(尺洞)-작동(鵲洞)으로


온갖 괴이한 변화를 일으켰으니



이제 주택 사이 맨홀로 덮인 백운동천(자하동천) 길을 조금 더 오르면 길은 빌라들로 인해 갈라지는데 우측은 벽산빌라로 가는 길이며, 좌측은 신구파인힐로 오르는 길이다.


우선 우측 벽산빌라 길로 가보자. 창의문도에 계곡을 따라 곧바로 창의문으로 가는 층계길로 그려져 있는 길이다. 슬프게도 바닥 맨홀 뚜껑이 길을 찾는 나침반이 된다. 머릿속은 창의문도의 계곡수를 그리며, 오솔길에 찬찬히 그려져 있던 돌층계를 밟듯이 가자.


이윽고 맨홀 뚜껑이 끝날 즈음, 세상과 단절하려는 듯 절벽으로 선 빌라의 시멘트벽이 있고 거기에 가파르게 설치해 놓은 시멘 층계가 보인다. 가슴이 답답하다.


어서 벗어나자. 층계를 벗어나니 밖에도 역시 그림 속 계곡수는 없고 자동차만 쌩쌩 달리는 창의문 고갯길이다. 길 건너에는 김신조 무리가 넘어오던 그날 순직한 두 분의 동상이 서 있다. 그 앞쪽에는 청계천 발원지 샘이 150m 안쪽에 있다는 표지석이 서 있다. 앞쪽으로는 창의문(彰義門)이 보인다.


이제 벽산빌라와 신구파인힐이 갈리는 빌라 갈림길로 다시 돌아온다. 좌측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창의문도에서 보면 계곡 좌측 능선 어디메쯤 가로 질러 오르는 길일 것이다. 이윽고 만나는 괜찮은 건물이 있는데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위로는 새로 조성한 청운공원이 깔끔하게 자리잡고 있다. 가난하던 시절 서민들의 보금자리 청운아파트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국립박물관 소장 겸재의 백운동(白雲洞)도에는 300여 년 전 이곳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림 아래로는 나귀를 탄 길손이 동자 하나 앞세우고 있고, 동과 북으로는 바위에 청청한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이 소나무 중 하나였을까? 문학도서관에서 공원으로 오르는 길에는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지금도 길손의 앞길에 휘어져 있으니…. 아쉬운 것은 집 앞에 층층 늘어진 버드나무는 모두 어디론가 가고 없다는 점이다. 없어진 것이 어디 그것뿐이랴.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서울에서 놀만한 곳 중 하나로 백운동이 소개되어 있다. (漢城都中。佳境雖少。而其中可遊處三淸洞爲最。仁王洞次之。雙溪洞白雲洞靑鶴洞又其次). 그러나 이제는 빌라만 빽빽할 뿐 놀 곳이라고는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백운동을 인왕산 기슭 도성에 가까우면서 홍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강희맹(姜希孟)의 시를 빌어 소개하고 있다.


“백운동(白雲洞) 속엔 흰 구름 그늘,

백운동 밖엔 홍진(紅塵)이 깊구나
한 줄기 길 서려돌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문득 놀랐다네 도시에 감춘 산숲.”
(白雲洞裏白雲陰 白雲洞外紅塵深  一逕廻盤入雲中 忽驚城市藏山林)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 정선의 ‘백운동’ 그림. 


옛 자료들을 보면 이곳에는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의 형부 되는 이념의(李念義)가 살았다. 그는 정2품 지중추부사까지 지냈고 떵떵거리고 살았던 것 같은데 시(詩)를 몰랐던 모양이다.


(白雲洞在藏義門內。中樞李念義居之。詩人有題咏。然李目不知書)


남들은 시를 읊는데 그는 눈앞에 책을 두고도 알지 못했다고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콕찝어 소문을 낸 것을 보면 아마도 이념의는 그즈음 사람들 사이에 비호감이었던 것 같다. 임금의 동서로서 권력을 가진 이였을 테니 상황이 짐작된다.


겸재의 ‘창의문도’에도 층계길이 그려져 있고, 21세기 이곳 자하문으로 오르는 길에도 계단은 있으나,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이제 청운문학도서관을 오르면 새로 단장한 청운공원이 나타난다. 청운이란 이름은 인왕산 북쪽 계곡 청풍계(靑風溪)에서 靑, 이곳 백운동에서 雲, 이렇게 한 자씩 따서 붙인 동명이다. 다만 靑雲이 되지 못하고 현재 淸雲으로 쓰고 있는 것은 1914년 토지조사 사업 당시 동서기(洞書記)의 단순한 실수 때문이다.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 창의문으로 간다. (다음 회에 계속)


[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간다 (3) 창의문 下] ‘창의문도’에 숨겨진 해골모양바위의 비밀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오늘 걷는 길은 겸재의 창의문(彰義門)도 중 마지막 구간이다. 창의문도의 위쪽을 보면 인왕과 북악 사이 고갯길 안부(鞍部)에 단아한 창의문이 그려져 있다. 그 좌우로는 한양도성이 인왕과 북악의 주능선길(마루금)을 따라 펼쳐진다.


북악은 잠시 놓아두고 시선을 인왕산으로 돌리면 소나무 사이로 성벽은 이어진다. 요즈음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도는 18.6km 한양순성길 인왕산 구간이다.




오늘 우리가 가는 인왕산길은 성벽길을 한 구비 올라 북으로 빠지는 인왕산 북릉(北綾)길이다. 창의문도에는 붓질로 시원하게 그려 내린 바위산과 그 위에 공깃돌만하게 놓여 있는 검은 바위가 있는 길이다. 이 길은 탕춘대성의 인왕산 구간에 해당한다. 이 능선길의 끝은 홍제천인데 홍지문과 수문이 있다. 개울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고려시대의 돌부처가 개울 어구를 지키고 있는데 서울 서북쪽 랜드마크였던 석불이다.


자 이제 출발


자하문(紫霞門), 장의문(藏義, 莊義), 창의문(倡義門)이라고도 부르던 창의문(彰義門)이다. 한양 북쪽의 작은 문인데 왕래도 많았고 이야기도 많았던 문이다.


태조실록에는 이 문을 세운 일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 5년 (1396) 9월의 기록인데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는 기록이다.


한양과 개성을 잇는 주요 통행로 중 하나였던 창의문 길'

한양과 개성을 잇는 대표적 고갯길



그리고는 각문(各門)에는 월단(月團: 돌로 만든 홍예 부분)과 누합(樓閤: 누각)을 짓고 문의 이름도 지었다. 정북은 숙청문(肅淸門), 동북은 홍화문(弘化門)으로 이름짓고 속칭 동소문이라 했고, 정동은 흥인문(興仁門)으로 이름짓고 속칭 동대문이라 하고, 동남은 광희문(光熙門)이라 하고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했고, 정남은 숭례문(崇禮門),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는 돈의문(敦義門),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以石城築之, 間以土城作  各門月團樓閤。 正北曰肅淸門, 東北曰弘化門, 俗稱東小門.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東南曰光熙門, 俗稱水口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 小北曰昭德門, 俗稱西小門. 正西曰敦義門, 西北曰彰義門.)


창의문 자료사진.


그러니 창의문이라는 이름은 600년이 넘는 오랜 나이를 먹은 명칭이다.


차들이 다니는 길을 버리고 우측 샛길로 들어서면 창의문은 화강암 월단 위에 누합(樓閤)이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임진란 때 불타 없어진 누합을 영조 때 다시 세운 모습이 겸재의 창의문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창의문 옆 인왕산 기슭을 깎아 차도를 내는 바람에 창의문은 사람이 왕래하는 주기능을 도로에 넘겨준 셈이 되었다. 신라 때도 고려 때도 서울에서 개성 쪽을 거쳐 평양 의주로 나아가려면 가장 쉽게 넘어 갈 수 있는 길이 창의문 자리 고갯길이었을 것이다.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울 때도, 무열왕이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두 화랑의 넋을 위해서 장의사(莊義寺)를 세울 때도 사람들은 이 고갯길을 넘어 다녔을 것이다.









고려(高麗)야 더 말해 무엇하리. 개성에서 남경(서울)으로 오려면 임진강 건너 파주 땅에서 동으로 평지길을 걸어 불곡산 아래 양주, 녹양, 노원, 안암을 거쳐 오든지, 광탄, 혜음령, 벽지(벽제), 불광동, 홍제동(유진상가), 홍제천, 상명대 삼거리, 창의문 자리 고개를 거쳤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무악재길이 뚫리기 전에는 물론 무악재길이 뚫려 의주대로(義州大路)가 된 이후에도 많은 민초들이 다니던 길이었다.


부침바위 자료사진. 부암동이란 지명은 이 바위에서 유래했다.


창의문 둥근 월단 한가운데 화강암에는 유럽 어느 가문의 문장(紋章)처럼 세련된 봉황(鳳凰)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천정에도 채색 봉황이 비상하고 있다. 호사가(好事家)들은 이 지역이 풍수적으로 지네 형상이라서 닭을 새기고 그려 놓았다고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닭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봉황을 그린 혜화문(동소문)의 예를 보아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창의문을 가지고 풍수(風水)를 논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풍수 문제를 들고 나와 논쟁거리로 삼은 대표적 풍수사가 최양선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창의문을 이슈화했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태종 13년(1413) 6월  풍수 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글을 올렸다.


“지리(地理: 호순신이 지은 지리신법이라는 풍수법)로 고찰한다면 서울의 장의동문(藏義洞門: 창의문)과 관광방(觀光坊: 북촌, 삼청동 지역) 동쪽 고갯길(숙정문 지역)은 바로 경복궁(景福宮)의 좌우 팔입니다. 청컨대, 길을 열지 말고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르셨으니 명하여 새 문을 성(城)의 서쪽에 열어 왕래에 편하게 하였다. 정부에서 적당한 곳을 살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藩)의 집 앞에 옛길이 있으니 적당하다” 하였다. 이숙번이 말하기를 “인덕궁(仁德宮: 태종에게 양위한 정종의 거처) 앞에 작은 골이 있는데 길을 내고 문(門)을 세울 만하다”고 했다, 정부에서 그대로 따랐으니, 이숙번을 꺼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각사(各司)에 명하여 종을 시켜 장의동(藏義洞)에 소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風水學生崔揚善上書曰: “以地理考之 國都藏義洞門與觀光坊東嶺路 乃景福宮左右臂也。 乞勿開路 以完地脈。” 從之, 命政府開新門於城西, 以便往來。 政府相之, 或言: “安城君 李叔蕃家前有舊路爲宜。” 叔蕃言: “仁德宮前有小洞, 可開路置門。” 政府從之, 憚叔蕃也。 命以各司奴, 栽松于藏義洞)“


풍수설 따라 새 문 지어 새문안이 됐으니


내용인즉,  풍수사 최양선의 주장에 따라 창의문과 숙정문을 걸어 잠구었다는 것이다. 북문인 숙정문이야 잠그면 가까운 동소문(혜화문)으로 다닐 수 있지만 창의문을 닫으면 문밖 마을 사람은 물론, 북쪽에서 홍제천을 끼고 올라 한양으로 들어오는 많은 이들은 쉽게 왕래할 방법이 없었다. 요즈음 가치관으로 보면 난센스이지만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 시대에도 풍수가 지배하는 영역은 아주 넓었다. 특히 음택(陰宅: 무덤자리)에는 더욱 심해 왕릉 자리 지정에는 반드시 풍수사가 앞장섰으며 풍수가 나쁘다는 주장에 따라 천릉(遷陵)한 왕릉도 여럿 생겼다. 헌인릉 자리에 있던 세종대왕릉이 여주로 옮겨간 것도 모두 풍수사상 때문이었으니 그 시대를 알만하다.





기차바위 능선을 4, 50분 걸으면 나타나는, 무너져 내린 옛 석성(石城).


더 말해 무엇하리. 우리 시대에도 대통령에 출마하는 이들 조상 묘 자리가 아직도 심심치 않게 입에 오르내리고 어떤 이들은 부모님 묘를 이장했다지 않은가. 암튼 그렇게 해서 세운 문이 서전문(西箭門)이다. 아마도 사직터널과 경희궁 서쪽 담 사이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전문은 얼마 못가서 그 임무를 새로운 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1422년(세종 4년) 세종은 서전문을 헐고 오늘날 강북삼성병원 앞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우니 그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이 문을 새문(新門)이라 불렀기에 오늘날 신문로, 새문안 같은 지명이 생겨났다 한다.


창의문 위로 오르면 누합에는 편액이 여럿 걸려 있다. 그 중에는 인조반정 시절의 공신 이름들도 있다. 영조가 북쪽 교외에서 제를 지내고 돌아오다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반정의 그날을 기억하도록 써 붙이라 했기에 거기에 붙어 있게 된 것이다. 그 공신 명단 앞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반정의 그날 인조실록에는 이곳 창의문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여 놓았다.


“장단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김류·이귀·심기원·최명길·김자점·송영망(宋英望)·신경유(申景裕) 등이 거느린 군사가 또한 6백~7백여 명이었다. 밤 3경에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 전군(前軍)이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에 이르렀다.” 이 글을 읽으며 어째 신이 나지를 않는구나. 그날 문을 지키고 있던 선전관은 무슨 죄가 있어 청천벽력 같은 벼락을 맞아 목숨을 잃고 말았는지. 요즈음에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이층 문루에는 출입을 금하고 있어 아쉽다.


이제 창의문을 뒤로 하고 인왕산으로 오른다. 창의문에서 곧바로 성벽길로 이어갈 수는 없으니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 스카이웨이 길을 잠시 걸어 오른다. 예전 무너졌던 성벽을 모두 깔끔히 수선해 놓았다. 어느 날인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어야 할 귀한 유산이다. 좀 아쉬운 것은 새로 만들어 놓은 석재(石材)가 너무도 매끄러운 느낌을 주니 깊은 맛이 없다. 예전 정(釘)으로 쪼던 돌맛은 없고 그라인더로 갈아놓은 표면의 매끄러움은 시간의 깊이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다. 언제나 닳고 깎여 돌맛을 다시 살려주려나.







한 고비 치고 오르면 이제 전망 초소가 나오고 갈림길 안내판이 붙어 있다.


기차바위. 이 지점에서는 주위를 둘러보자. 인왕산 정상과 치마바위, 눈앞 수려한 자태의 북악산, 그 아래로 펼쳐진 사대문안 서울 시내의 아기자기한 모습들, 저 멀리 보이는 산들. 남산, 낙산, 관악산, 청계산, 남한산, 아차산….






300년 전에 이미 ‘드론 화법’을 구사한 겸재


주능선(마루금) 성벽길을 버리고 기차바위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공의 맛이 없는 인왕산 고유의 능선길이다. 잠시 후 창의문도(彰義門圖) 상단에 공깃돌처럼 까맣게 그려져 있던 바위덩이를 만난다. 창의문도를 곰곰 살피다가 우연히 이 공깃돌 같은 바위가 눈에 띈 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새롭다. 겸재는 인왕산을 눈으로 그린 게 아니라 발로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산 아래에서 볼 수 있는 바위는 아니다. 겸재 시절에는 아마도 민둥산에 가까웠을 터이니 성벽 너머로 눈비비고 찾으면 마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바위는 곁을 지나가도 반대 방향에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해골 모양 바위이다. 너무도 해골 같아서 해골바위라 부르고 싶지만 남쪽 능선에 오래전부터 해골바위로 부르는 바위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해골모양바위라고 불러 보았다.


겸재의 진경산수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깨닫게 해준 해골모양바위


겸재는 어떻게 알고 이 바위를 그렸을까? 아마도 이 북 능선을 수도 없이 다녔을 것이다.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말을 필자는 처음에는 우리 산천을 사진기 렌즈 같은 시선으로 그리는 실경산수(實景山水)인가 보다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겸재 그림을 조금 보아 나가다 보니 아하, 이 양반의 그림은 눈으로 본 것을 부분부분 마음속에 담았다가 재배치를 하는구나, 키울 것은 키우고 죽일 것은 죽이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창의문도’ 최상단의 해골모양바위(바둑알처럼 까맣게 그려진 부분)와 그 아래의 현재 ‘기차바위’로 불리는 백련봉 부분의 그림. 겸재가 수없이 이곳을 다니면서 지형을 마음에 담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창의문도만 보아도 눈높이의 시점이 한 곳이 아니다. 저기 아랫마을에서 올려다 본 그림은 물론 아니다. 소나무들을 보면 그림의 상단이나 하단이나 모두 정면처럼 보인다. 이런 시점(視點)이 있을 리 없다. 창의문을 보면 문루의 지붕쯤 되는 공중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 시절 무슨 수로 공중을 날며 그렸겠는가, 해골모양바위와 기차바위는 또 어떨까. 성벽 길 중간쯤 오르다 드론을 타고 올라가 기차바위의 7부나 8부 고도에서 본 시선이다.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부감법(俯瞰法)이라 한다는데 드론을 타고 좌우상하로 날면서 그린 그림 같으니 드론뷰(drone view)라 해도 될 것 같다.


해골모양바위를 지나면 바로 큰 바위길이 나타난다. 기차바위(백련봉)다. 창의문도에서는 이 바위의 옆면이 먹선(墨線)으로 그려져 있어 묵직한 중량감을 드러내고 있다. 훗날 이것이 발전하여 걸작 인왕제색도가 탄생했나 보다.


바위의 우측 절벽 아래는 안평대군이 꿈꾸던 무릉계곡 곧 무계동(武溪洞)이다.




숙종에게 장희빈만 있었나?
아니다, 나라 지키려는 탕춘대성 있었다


흰 바위 절벽 길에는 좌우로 안전줄을 매어놓아 칙칙폭폭 기차놀이라도 하고 싶다. 기차바위란 이름은 이런 동심에서 나왔나 보다. 기차바위를 지나면 능선길은 흙길로 이어진다. 3, 40년생 쯤 되는 구불구불 소나무가 길을 인도한다. 봄철에는 산철쭉이 여기저기 자생하는데 타오르는 듯한 산철쭉은 서울 근교에는 흔치 않다. 이렇게 30여분 능선길을 즐기다보면 어느새 국가 시설물 건물을 만나고 나무데크 길이 고도를 낮춘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데크가 없어 가파른 골짜기를 내려왔던 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기차바위능선을 4, 50분 걸었을까, 무너져 내린 옛 석성(石城)을 만난다. 서성(西城) 또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고 부르는 옛 성이다.








오간수문과 홍지문. 임진-병자 두 난리를 당한 숙종의 국방 결의가 빚어낸 성과물이다.


탕춘대성은 북한산 향로봉 남측에서 시작하여 홍제천을 수문으로 건너고 인왕산으로 이어져 한양도성과 연결하려던 성이었다.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장희빈의 남편이자 민비의 남편이기도 했던 숙종은, 우리들 인식에는 여자와의 스캔들이나 벌이는 그렇고 그런 인물로 비치지만 상당한 결단력에 정치력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임진, 병자 양난(兩亂)을 겪은 숙종은 유사시에 서울을 지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즉위년부터 37년이 될 때까지 논의만 하던 북한산성 건설을 완료한다. 그러다 보니 북한산성과 서울도성을 잇는 방어선이 필요했다.


오간수문과 홍지문을 찍은 옛 사진. 위쪽의 산세가 겸재의 그림 그대로다.


동쪽으로는 북한산 보현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인 형제봉과 북악터널 위 보토현을 자연방위선으로 삼고, 서쪽은 향로봉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서성(西城)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숙종 36년(1710) 10월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올린 차자(箚子)를 보자.


“옛날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는 도성(都城)이 완고(完固)하지 못하여, 변란(變亂)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무너질 것을 깊이 염려하시고, 일찍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축(修築)하여 험조(險阻)에 의거하여, 근본을 굳게 하고 나라를 보전하며 백성을 보호하는 계책을 삼았습니다. 지금 만약 북한(北漢)에 성을 쌓아 내성(內城)을 만들어 종묘와 사직단을 옮기고, 또 조지서(造紙署)의 동구(洞口)를 막아 강창(江倉)을 옮겨 설치하면, 공사(公私)의 축적(蓄積)을 모두 옮겨 들여올 수 있습니다.”(昔我孝宗大王, 深以都城不能完固, 有亂則必至先潰爲慮, 嘗欲修築北漢城, 以爲據險阻固根本, 保國保民之計。 今若築北漢, 作爲內城, 移安宗社, 又塞造紙署洞口, 移置江倉, 公私蓄積, 擧皆移入)


여인들의 정성이 갈아붙여진 ‘부암동’의 유래


조지서가 세검정 위쪽에 있었기에 그곳으로 가는 골자기 입구(洞口)에 성을 쌓고 한강가에 있는 곡식 창고를 옮겨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를 지키자는 계획이었다. 그 계획은 북한산성, 탕춘대성, 평창(平倉)으로 실현되었다. 평창동이란 지명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길이 가파르게 떨어질 즈음 안전한 나무데크를 만나고 눈 아래로는 홍제천(弘濟川)과 홍지문(弘智門), 그리고 오간수문(五間水門)이 보인다.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지은 문이다. 옛 지도에는 홍지문보다 한북문(漢北門)이란 표현이 많다.






수선전도에도 그렇고, 리움 소재 한양도성도에도 그렇다. 홍제천은 이제 자연을 많이 회복하고 있다. 조지서동(造紙署洞)이라 하던 이곳은 우리들 어려서는 이름이 자문밖이었는데 능금(林檎)나무가 숲을 이루었었다. 그때는 서울 사람들이 창의문 넘어 가족놀이 나오던 청정 동천(洞天)이었다. 종이 만들던 조지서(造紙署)가 있던 곳이라 그때까지 아직 남아 있던 종이 공장이 있었고 광목을 바래던(햇볕에 표백하던) 이들도 많았다.





고려시대 때부터 개경(개성)에서 남경(서울)으로 내려오는 길손을 맞았을 보도각 백불. 청나라에 잡혀간 김상헌이 그리워한 관세음보살이기도 하다.


한북문과 오간수문을 지나 홍제천을 따라 내려간다. 옛 서울의 명물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잠시 후 개울 건너 옥천암(玉泉庵) 개울가에 하얀 호분(胡粉)으로 단장한 마애관음상(磨崖觀音像)을 만난다. 보물 1820호로 지정되었다 한다. 젊은 부부가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무슨 바람을 여쭙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주십사’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겠지. 창의문 밖 부암동(付巖洞)이란 지명을 낳은 부침바위(附岩, 付岩)가 있듯이 바위에 작은 돌을 갈아 붙여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전해지는 바위가 있다. 특히 아들 낳는 데는 특효라 했다. 이곳 백불 바위도 뒤로 돌아가면 돌을 갈아 붙인 흔적이 여럿 있으니 아들 낳기 바라는 이들이 많이도 다녔나 보다.



엘리자베스가 일본 화법으로 그린 ‘보도각 백불’


앞에서도 고려의 길을 이야기했듯이, 개경에서 남경(서울) 오는 두 개의 메인 루트가 바로 혜음령 넘어 오다 홍제천 따라 오르는 서쪽 이 길과, 양주, 노원, 안암 지나오는 동쪽 길이 있었다. 안암동 보타사에는 이곳 관세음보살과 짝을 이루는 보물 1828호 또 하나 마애관음상이 있다. 개경에서 남경으로 오는 길목은 동서로 마애관세음이 길맞이를 했던 것이다. 리움 소장의 한양도성도에는 백불의 위치가 탕춘대성 안쪽에 그려져 있다. 옛 분이 살짝 한  실수에 미소가 지어진다.





특히 이곳 보도각 백불은 1800년대 말부터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는 가봐야 할 인상적인 곳이었던 모양이다. 100년이 넘는 옛 사진이 10여 장이나 전해지니 반가운 일이다. 그 중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의 판화가 일품이다. 인상파 미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 제작법으로 제작한 멋진 작품이다.


청나라 심양에서 고향을 그리며 쓴 청음 김상헌 선생의 근가십영(近家十詠)의 마지막 시가 佛岩(불암은 이곳 석불)이다. 선생이 애타게 그리워하던 불암. 그 시 한 조각 읽으며 창의문 길을 마무리하련다.


불암의 시내와 돌, 칭송이 제일이지
佛巖川石稱第一
시냇물은 유리 같고 돌은 매끄럽다네 
川似琉璃石潤滑
나의 집은 가까워서 자주 왕래 하였는데 
吾家住近往來熟
어느 날에 돌아갈고? 옛 자취 찾으러
何日歸歟尋舊跡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
* 걷기 코스: 경복궁역~영추문~쌍홍문터~무궁화 동산(김상헌 집터)~경복고~경기상고~백운동천~자하동~창의문~한양도성~해골바위~기차바위~홍지문~옥천암/보도각 백불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정리 = 최영태 기자)


cnbnews 제571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1.22 10:22:43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3909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