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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포로기행 武溪園(무계원) 명사 특강 <다산 정약용에게 배우는 세상을 사는 지혜>]

산포로 2016. 12. 9. 09:32

 

[산포로기행 武溪園(무계원) 명사 특강 <다산 정약용에게 배우는 세상을 사는 지혜>]


★ 武溪園(무계원) 명사 특강 <다산 정약용에게 배우는 세상을 사는 지혜>★


○ 답사구간 : 자하문고개-창의문-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현진건 집터-반계 윤웅렬 별장-자하미술관-서울성곽둘레길-윤동주문학관-청운문학도서관-무계원(특강)
○ 일 시 : 2016.12.8.(목). 19:30~21:00
○ 장 소 : 무계원 안채(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
○ 대 상 : 인문학에 관심있는 성인 누구나
○ 수강료 : 무료
○ 모집인원 : 선착순 60명(홈페이지 또는 전화접수 선착순 마감)
02- 6203-1162/ 02-379-7131~2/
<종로문회재단> 홈페이지 주소 : www.jfac.or.kr
<세부내용>
○ 주 제 : 다산 정약용에게 배우는 세상을 사는 지혜
○ 강 사 :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 강의내용 : 다산의 생애, 유배생활과 학문적 업적 및 목민심서를 통해 현대세상을 사는 지혜를 배우는 명사 특강 운영

 

오늘은 종로구 <종로문화재단>에서 개최하는 <다산 정약용에게 배우는 세상을 사는 지혜> 명사 특강이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武溪園)에서 열려 참석합니다.


특강의 내용도 무척이나 관심이 많지만, 특강이 열리는 武溪園(무계원)도 방문하고, 부근 현진건 집터와 반계 윤웅렬 별장,, 자하미술관, 서울성곽둘레길, 윤동주문학관, 청운문학도서관 답사도 이어집니다.


武溪園(무계원)은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安平大君 匪懈堂 李瑢(안평대군 비해당 이용,, 1418~1453)의 별장 터인 부암동 武溪精舍(무계정사)입니다. 武溪精舍(무계정사)는 한양의 북문 창의문밖 무계동(武溪洞)에 있고, 무이정사(武夷精舍)라고도 하며, 1만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선비들과 시를 짓고 교류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 세종대왕(즉위 1418~1450)의 즉위 다음 달 창덕궁에서 왕자로 태어났지만 왕의 길을 걸을 수 없었던 안평대군은 자신의 집인 비해당과 별장인 武溪園(무계원, 무예정사)에서 한 살 위인 형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모반"의 혐의를 뒤집어씌워 죽임을 당하는 계유정난까지 詩書畵(시서화)에 침잠하였습니다.


安平大君(안평대군, 1418~1453)이 서른 살이던 1447년 4월 20일 밤 집인 匪懈堂(안평대군의 호, 비해당)에서 꿈에 보았던 별유천지의 광경을 그 다음날 당대의 화가 安堅(안견, ?~?, 세종 연간(1418∼1450년)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 때까지도 화원으로 활약함)에게 시켜 그리게 한 것이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부암동주민센터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한 후 잠시 창의문으로 향합니다.

 

사실 이길로 고려시대 숙종(재위 : 1095~1105년)과 예종(재위 : 1105~1122년), 인종(재위 : 1123~1146년), 의종(재위 ; 1146~1170년)등은 南京(남경, 지금의 서울 경복궁 신무문 남쪽 앞)으로 잇달아 행차를 하였습니다. 즉 남경 궁터가 남쪽 멀지않은 곳에 있어 개성에서 출발하여 세검정을 거쳐 예전부터 왕래가 빈번하기도 하였습니다.

 

 

 

 

 

 

 

武溪園(무계원)에 도착합니다. 현재의 무계원은 조선 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자, 요정이었던 '梧珍庵(오진암)'을 종로구가 부암동으로 이전해 복원하면서 화제가 됐던 곳이기도 합니다. 무계원은 관광호텔 신축으로 헐릴 상황에 처한 서울시 등록 음식점 1호 오진암의 대문, 기와, 서까래 등 자재를 종로구가 안평대군의 숨결이 깃든 부암동 武溪精舍(무계정사) 터로 이축·복원해 개원했습니다. 마당에 오동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 오진암은 삼청각, 대원각 등과 함께 서울 3대 고급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입니다.

 

 

 

 

 

 

 

무계원에서 북한산 문수봉(723m)을 봅니다. 안평대군은 꿈속 무릉도원을 이곳에서 본것은 아닐까.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 세로 38.7×가로 106.5㎝)는 한 편의 장대한 교향시입니다. 작품의 기본축은 오른편 위쪽(무릉세계, 이상향)에서 왼편 아래쪽(현실세계)으로 가로지르는 호쾌한 대각선입니다. 그리고 보조축으로 오른편 아래에서 왼편 위쪽을 향해 점차 상승하는 대각선이 교차됩니다. 마치 교향곡에서 서로 다른 두 주제가 겹쳐져 화려하고 장엄하며 내밀한 음상을 짜 보이듯이 두 대각선은 서로 얽히고 설켜 복잡다단한 산수의 경관을 내비침으로써 무릉도원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나게 보여 줍니다.


한편 安平大君(안평대군, 1418~1453)은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의 武陵世界(무릉세계)를 어디서 보았길래 그런 꿈을 꾸었을까.

 

그러려면 安平大君(안평대군, 1418~1453)의 집터인 匪懈堂(비해당)과 별장터인 武溪園(무계원)에서 안평대군이 보던 풍경에 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武溪園(무계원) 뒤의 샛길을 올라 언덕 위에서 북한산(836.5m)을 봅니다.


안평대군의 집터인 匪懈堂(비해당) 역시 인왕산(340m)과 북한산(836.5m) 너머로 문수봉(723m(이 보이는 자리입니다.


匪懈堂(비해당) 보다는 북한산 자락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이 武溪園(무계원), 武溪精舍(무계정사) 자리입니다.


안평대군은 이렇게 전혀 다른 세계를 보고 살았습니다. 자기가 살던 두 곳의 집터 주변 풍광도 좋았지만, 그가 바라보던 곳에는 더 좋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理想鄕(이상향)이였습니다. 오죽하면 꿈까지 꾸고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를 남겼을까.


안평대군은 이런 불세출의 명작을 우리에게 남겼지만 정작 그자신은 안타깝게도 꿈과 현실의 부조화가 만들어내는 파열음속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습니다.


* ‘몽유도원도’의 발문.(자료 사진)

 

 

세종 29년(1447) 정묘년 4월 20일 밤. 내가 막 잠자리에 들어 정신이 개운하니 잠에 푹 빠져 들었는데 꿈도 또 꾸었다. 홀연히 인수(박팽년)와 함께 어느 산 아래 이르렀는데, 겹겹의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우뚝하니 높고 고요하였다.


복사꽃 수십 그루에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숲의 가장자리에 다다르니 갈림길이었다. 머뭇거리고 방황하며 오래 서성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산관야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났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나에게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곧 도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와 인수는 말에 채찍질 하며 찾아갔는데 깎아지른 절벽의 바윗길은 아찔하고 숲이 우거져 울창하였다. 계곡은 굽이굽이, 길이 구불구불, 백번이나 꺾이며 희미해지려 하는데 그 골짜기로 들어간즉 골짜기 안은 제법 널찍하여 2, 3 리는 됨직하였다.


사방의 산은 절벽에 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고 멀고 가까이의 복숭아 숲에는 햇빛이 비추며 노을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또 대 숲에는 띠로 엮은 초가집에 사립문은 반쯤 닫혔고 흙으로 쌓은 섬돌은 이미 무너져 내렸다. 닭과 개, 소와 말은 간데없고, 마을 앞 시내에는 오직 조각배 한 척이 물결 따라 흔들리는데 정경이 고요하여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하였다. 이에 머뭇거리며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인수에게 이르기를 “바위를 깎고 골짜기를 뚫어서 집을 짓는다”고 하더니 어찌 이를 두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실로 도원동이로다”라고 하였다.


곁에 몇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여기 정보(최항)와 범옹(신숙주) 등은 함께 운을 골라 시 짓던 이들이다. 함께 신발을 고쳐 매고 내려오며 뒤를 돌아보고 흐뭇해 하다가 홀연히 꿈에서 깨었다.

 

오호라! “도읍이나 큰 고을 번화한 곳은 이름난 벼슬아치가 노니는 곳이요, 깊은 골짜기의 깎아지른 절벽은 이내 그윽하여 은자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런 연고로 몸에 푸르고 붉은 비단에 얽매여 있는 자는 발자욱이 산이나 숲에 이르지 못한다 하고, 뜻을 자연에서 도야하려는 자는 꿈에서도 솟을 대문이나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니,  무릇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달리하는 길이며 이치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한 바를 밤에 꿈으로 꾼다”고 하였는데, 나는 궁궐에 매인 몸이라서 밤낮으로 일에 쫓기고 있는 터에 어찌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고, 또 어찌 도원에 이를 수 있었을가?


나에게는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도원을 유람에 여기 몇 사람만이 따랐던 것인가? 의식과 그들의 성정이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여 마음속에 자연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며, 함께 한 몇 사람은 교분이 매우 두터웠던 까닭에 여기에도 이르게 된 것이리라. 이에 가도(안견)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리게 한 것이다.


다만 옛부터 이른바 도원이 또한 이와 같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이 그림을 보는 이들이 옛 그림을 구하여 내 꿈과 비교하게 되면 반드시 말이 있으리라.


꿈을 꾼 지 삼일 만에 이미 그림으로 이루어져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쓰다.


歲 丁卯 四月 二十日夜 余方就枕 精神蘧栩 睡之熟也 夢亦至焉
忽與 仁叟 至一山下 層巒深壑 崷崒窈窅 有桃花 數十株 微徑抵林 表而分岐徊徨竚立 莫適所之 遇 一人 山官野服 長揖 而謂余 曰 : “從此徑 以北 入谷則桃源也” 余 與仁叟 策馬尋之 崖磴卓犖 林莽薈鬱
溪回路轉 蓋百折而欲迷 入其谷則 洞中曠豁 可二三里 四山壁立 雲霧掩靄 遠近桃林 照暎蒸霞
又有 竹林茅宇 柴扃半開 土砌已沈 無鷄犬牛馬 前川 唯有扁舟 隨浪游移 情境簫條 若仙府然 於是 踟躕瞻眺者 久之 謂 仁叟 曰 : 架巖鑿谷 開家室 豈 不是 歟! 實 桃源洞也
傍有 數人在後 乃 貞父 泛翁 等 同 撰韻者也 相與整履 陟降 顧盻 自適 忽 覺焉 嗚乎 ! 通都大邑 固 繁華 名宦之 所遊 窮谷斷崖 乃 幽潛隱者之所處 是故 紆身 靑紫者 迹 不到山林 陶情 泉石者 夢不 想巖廊
蓋 靜躁殊途 理之 必然也
古人 有言 曰 : “晝之所爲 夜之所夢”
余 托身禁掖 夙夜從事 何 其夢之 到於山林耶 又 何到 而至於桃源耶
余之相好者 多矣 何必 遊桃源而從是數子乎 意 其性 好幽僻 素有 泉石之懷而與 數子者 交道 尤厚 故致此也 於是 令可度 作圖 但 未知古之 所謂 桃源者 亦若是乎 後之觀者 求古圖 較我夢 必有言也
夢後三日 圖旣成 書于 匪懈堂之 梅竹軒.

 

 

 

 

 

 

 

 

 

 

 

무계원을 나와 인왕산(340m)으로 향하며 안평대군의 무릉세계와 우리의 역사 문화 유적지를 찾아 봅니다.  

 

 

 

 

 

 

반계 윤웅렬 별장입니다.

 

 

 

 

 

 

인왕산(340m)을 오르며 북한산 문수봉(723m)도 봅니다.

 

 

자하미술관입니다.

 

 

전시장이 정식으로 개원되면 다시 찾고 싶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이지만 오지, 깊은 자연속에 정성과 아름다움이 가득합니다.

 

 

 

 

 

 

 

 

 

 

 

인왕산(340m)을 오르며 북한산 문수봉(723m)도 봅니다. 앞에 보현봉(714m)입니다. 그밑에 절은 70년대도 제 추억으론 절이 아닌것 이상으로 불친절했는데 요사이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백악산(342m)도 봅니다.

 

 

 

 

서울성곽둘레길에 도착합니다.

 

 

창의문(자하문)으로 향합니다.

 

 

 

 

 

 

창의문 부근 윤동주 문학관에 잠시 둘러봅니다.

 

 

 

 

윤동주 문학관입니다. 아쉽지만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외부 사진으로 만족합니다.

 

 

 

 

 

 

청운문학도서관으로 향합니다.

 

 

 

 

* 청운문학도서관이란?

 

종로구 16번째 도서관이자 최초 [한옥 공공도서관]으로 독서와 사색,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주민을 위한 다양한 문학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문학인들에게는 각종 모임의 장소와 창작활동이 가능한 공간을 제공하여 종로구의 인문학 허브로 자라매김하고자 합니다.

 

첫째 - 시, 소설, 수필 위주의 다양한 문학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윤동주문학관과 연계한 문학 유산 콘텐츠를 만들어갈 예정입니다.

둘째 - 국내 문학 작품 및 작가 중심의 기획 전시와 인문학강연, 작품낭송회, 문학창작교실 등을 운영하여 문인, 학자, 시민의 다양한 소통 시간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셋째 - 국내 작가를 대상으로 조용한 자연과 한옥이 주는 편안함 속에서 작품구상과 집필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드디어 늦은 초겨울 밤에 밖에는 비가 오는 속에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무계원 명사 특강>이 시작됩니다.

무계원 강당을 가득 메운 수강생들의 열기와 강사이신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명사님의 풍부한 지식과 재미있는 특강이 추운 겨울 밤도 뜨겁게 녹입니다. 

★ 武溪園(무계원) 명사 특강 <다산 정약용에게 배우는 세상을 사는 지혜>★


○ 답사구간 : 자하문고개-창의문-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현진건 집터-반계 윤웅렬 별장-자하미술관-서울성곽둘레길-윤동주문학관-청운문학도서관-무계원(특강)
○ 일 시 : 2016.12.8.(목). 19:30~21:00
○ 장 소 : 무계원 안채(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
○ 대 상 : 인문학에 관심있는 성인 누구나
○ 수강료 : 무료
○ 모집인원 : 선착순 60명(홈페이지 또는 전화접수 선착순 마감)
02- 6203-1162/ 02-379-7131~2/
<종로문회재단> 홈페이지 주소 : www.jfac.or.kr
<세부내용>
○ 주 제 : 다산 정약용에게 배우는 세상을 사는 지혜
○ 강 사 :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 강의내용 : 다산의 생애, 유배생활과 학문적 업적 및 목민심서를 통해 현대세상을 사는 지혜를 배우는 명사 특강 운영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문신이고, 문인인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 1762~1836)은 실세한 남인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나 家學(가학)을 익혔으며, 李瀷(이익)을 사숙하였습니다. 규장각 초계문신을 거쳐 正祖[정조, 조선의 22대 왕, 1752년 10월 28일(음력 9월 22일)~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의 최측근으로 관직생활을 했습니다. 천주교 신봉 경력이 문제가 되어 노론벽파의 공격을 받고 금정찰방, 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죄천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辛酉邪獄(신유사옥) 때 천주교도로 몰려 長鬐(장기)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黃嗣永帛書事件(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康津(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후 18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학문에 몰두하는 한편 "茶山學團(다산학단)"으로 지칭되는 제자 그룹을 양성하였습니다. 해배된 후 사망할 때까지 북한강 일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고 저술을 정리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리며,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히기도 했습니다. 저서로는 與猶堂全書(여유당전서), 牧民心書(목민심서), 經世遺表(경세유표), 欽欽新書(흠흠신서) 등 다수가 있습니다.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강사님께서는 정약용이 멀리 떨어진 강진 유배 18년동안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자신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다산의 삶의 지혜를 7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십니다.

 

첫째, 부모에 孝道(효도)하고 형제간에 友愛(우애)가 있어라.

둘째, 讀書(독서)를 열심히 하여 공부에 매진하라.

셋째, 謹儉(근검) 節約(절약)하여라.

넷째, 勇氣(용기)를 잃지 말아라.

다섯째, 布施(보시)하라. 다만 절대로 대가를 바라지 말고 형편에 맞게 베풀어라.

여섯째, 부당한 일에 憤怒(분노)하라. 단 주의하고 사려깊게 분노하라.

일곱째, 謙讓(겸양)하고 謙讓(겸양)하여 自卑尊人(자비존인, 스스로는 낮추고 다른이는 존경하라)하라.

 

이에 自上者人下之 自下者人上之(자상자인하지 자하자인상지, 스스로를 높이는 이는 다른이들이 낮게 보며, 스스로를 낮추는 이는 다른이들이 높게 본다)도 무척이나 강조하십니다.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강사님, 2시간여 동안 내리는 눈도 녹여 비로 만든 열정 넘치는 강의에 감사드리며 수고많으셨습니다.

 

이에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 1762~1836)의 시 한 수 올립니다.

 

又次陸放翁農家夏詞(우차육방옹농가하사) 농가의 여름

 

輐輐山櫻黑(완완산앵흑) 동글동글 검은 산 앵두
鮮鮮野苺紅(선선야매홍) 곱디고운 붉은 들 딸기.
屋中餘鳥雀(옥중여조작) 집안엔 참새들만 남아 있고
林裏散孩童(임리산해동) 숲속엔 아이들이 흩어졌다.
委媵秧堆岸(위잉앙퇴안) 심다 남은 모포기 언덕에 쌓였고
收遺麥滿籠(수유맥만롱) 주워 담은 보리이삭 광주리 가득.
高田飛堀堁(고전비굴과) 높은 천수답엔 먼지 날리고
私語禱天公(사어도천공) 혼자말로 하느님께 빌어본다.

 

18년간의 유배에서 돌아와 만년을 경기도 양평 양수리 마재 마을 고향집에서 지내던 시절의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 1762~1836)의 시입니다. 검은 산 앵두와 붉은 들 딸기, 참새들과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곳, 모내기와 이삭줍기의 노동이 있는곳, 거기에 메마른 천수답의 농사를 걱정하는 시인이 등장합니다. 집에 있어야 할 아이들은 숲속에 흩어져 놀고, 숲에 있어야 할 참새들은 집에 남아있다고, 참새와 아이들 - 건강한 생명력을 도치된 상황으로 오버랩 시켜 놓았습니다. 정약용 시문학의 핵심은 일종의 역사적 증언이며, 정치적 행위로서의 문학입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삶의 아름다움에도 결코 둔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저히 일상과 현실을 영위하는 견실한 생활인의 의식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정약용의 시세계의 한 편에는 이처럼 현실의 일상을 아주 화사하고 활기차게 그러면서도 어른의 걱정을 잃지 않는 그런 시들이 있습니다.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강사님께서 오늘 수강생들 중에서 가장 열심히 경청하고 질문한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에게 자신의 저서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선물하십니다.

 

 

 

산포로산행기 - Sanporo Trekking

누군가는 산천은 가노라면 절로 마음에 맞을 뿐만 아니라 내게 슬품과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잊게 해주어, 내게는 산천이 진실로 좋은 벗이자, 훌륭한 의원이라고 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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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