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산행기

■ 11월 이야기길, 금강유역 답사목록 (1박2일),

산포로 2022. 11. 16. 09:06

■ 11월 이야기길금강유역 답사목록 (1박2일),

이한성 교수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길

 

▪ 가는 날 : 2022년 11월 12일(토)~13일(일) 1박2일

▪ 가는 곳 : 12일(토) : 전북 익산 왕궁리 옛터, 익산 미륵사지, 군산 초원사진관(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군산 동국사(일본 사찰)

                           충남 서천 한산모시관, 서천 신성리 갈대밭, 부여 가림성과 사랑나무

               13일(일) : 충남 부여 대조사, 부여 삼의당, 공주 공산성, 공주 무령왕릉, 부여 무량사

▪ 출발 시각 : 2022년 11월 12일(토) 오전 8시

 

 

▪ 숙박 및 식사, 입장료

1) 버스 : 28인승 리무진버스

2) 숙박 : 충남 부여 청소년 수련원 : 8인실 6개 + 4인실(기사분)1개 (1박 8만원) : 총 30명 수용

3) 침구류(이불, 요, 베개)는 1인 1세트로 준비되어 있음

4) 식사 : ※ 첫째 날 : 차내 식 운영 팀 제공

              ※ 첫째 날 : 저녁 숙소에서 뒤풀이를 즐기실 분은 개인적으로 가져 오세요

              ※ 둘째 날 : 조식은 각자 준비해 주세요(E마트 이용)

              ※ 둘째 날 : 귀경 길 석식은 개인선택입니다 (휴게소 30분 드림)

              ※ 간식거리는 개인 각자 준비

              ※ 뜨거운 물, 종이컵, 커피믹스는 버스회사측에서 제공함/차내비치

5) 입장료: ⓵ 공 산 성 : 1,200원(65세 이상 무료/단체 20인 이상 1,100원)

                 ⓶ 무령왕릉 : 1,500원(65세 이상 무료/단체 20인 이상 1,400원)

                 ⓷ 무 량 사 : 3,000원 (70세 이상 무료)

 

이번 답사는 전북, 충북 금강유역을 따라 놀러가는 수학여행이므로 공부는 최대한으로 줄입니다.

일본식 사찰 동국사와 완전 복원된 익산 미륵사지, 왕궁리 석탑, 부여 무량사가 포함이 됐으며, 매력적이고 부담이 없는 문화재도 선택이 되었습니다.

 

- 답사 후기 -

 

<동국대 교수 이한성 올림>

 

모두 무탈하시지요?

3년만에 길 떠나며 설렘도 있고 잠자리 먹거리 교통편 걱정도 되고 했습니다.

준비하신 분들,
길동무들 도움되라고 건식거리 마실거리 정성스레 준비해 주신 분들,
쉽지 않은 연세에, 아직 건강도 살펴야 하는 상태에도 불편함 참아주신 길동무님들,
불편함  부족함 알면서도 좋다고만 해 주시는 길동무님들,
오랜만에 오시고, 낯선 모임에 오셔서 잘 즐겨 주신  새 얼굴님들, 
또 모두모두  ᆢ
애쓰셨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번에  
함께 못하신 분들께도 아쉬움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날씨께도 단풍께도 감사합니다.

콘디션 조절 잘 하시고  다음 인연에 뵙겠습니다 (딸기)

 

주요 일정

11/12(토) 08 : 00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출발

                10 : 30 전북 익산 왕궁리 옛터 도착

                11 : 30 전북 익산 미륵사지 도착

                13 : 00 전북 군산 초원사진관(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13 : 30 전북 군산 동국사(일본 사찰) 도착

               14 : 30 충남 서천 한산모시관 도착

               16 : 00 충남 서천 신성리 갈대밭

               17 : 30 충남 부여 가림성과 사랑나무

               18 : 00 충남 부여 청소년 수련원 숙박

11/13(일) 08 : 00 충남 부여 청소년 수련원 출발

               08: 30 충남 부여 대조사

              10 : 00 충남 부여 삼의당

              13 : 00 충남 공주 공산성

              14 : 00 충남 공주 무령왕릉

              15 : 00 충남 부여 무량사

              16 : 00 충남 공주 출발

              20 : 00 서울 도착

 

* 전북 익산 왕궁리 옛터 도착

 

 

 

왕궁리 유적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말기 익산 경영과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 사비(부여)와 함께 복도로 이해하고 있다. 백제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되었다.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왕궁리 유적의 왕궁은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구조가 확인되어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성된 백제왕궁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왕궁의 외곽에는 폭 3m의 담장을 동서 245m, 남북 490m인 장방형으로 두르고 있다. 왕궁의 남측 절반은 국가의 중요 의례나 의식을 행하던 건물, 왕이 정사를 돌보던 건물, 왕과 왕의 가족의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4개의 동서석축을 쌓아 구분•배치하였다. 북측 절반은 왕의 휴식을 위한 공간인 정원과 후원, 왕궁의 서북측에는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왕궁의 남측에 의례나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배치하는 것은 고대 중국이나 일본 왕궁에서도 확인되고 있어서 당시 고대 동아시아 국가에 문화교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왕궁으로 일정 기간 사용한 후 사찰로 바뀌어 통일신라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사역 동남측 일부에서는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출처 : 백제 왕궁박물관]

 

<참고> 산포로산행기 - 미륵사지~왕궁리유적~석조여래입상~제석사지~쌍릉

 

* 전북 익산 미륵사지 도착

 

 

국내 최고(最古), 최대(最大) 석탑으로 꼽히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 20년에 걸친 해체·보수 공사를 마치고 당당하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재청(청장 김종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일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지난 20년간의 작업 끝에 최근 수리를 마친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과 조사연구 성과를 공개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지난해 12월 원래 남아있었던 6층까지 수리를 완료하였으며, 오는 7월 중순까지 현장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익산 미륵사는 7세기 백제 후기에 중흥기를 이끈 무왕(재위 600∼641) 대에 창건되어 조선 시대까지 유지됐던 사찰로서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적인 규모와 가람배치의 특징 등이 밝혀졌다. 미륵사지 석탑은 원래 미륵사에 있었던 3개의 탑 중 서쪽 영역에 위치한 석탑으로서 현존하는 석탑 중 최대 규모이며, 백제 목조건축의 기법이 반영된 독특한 양식의 석탑이다.

 

 

 

조선 시대 이후 석탑은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5년 시멘트를 마구잡이로 부어 보수해 흉물스럽게 변했다. 우리 국민이 자주 찾는 문화재지만, 시멘트로 발라진 모습 탓에 원형 복원 문제가 오랫동안 숙제로 제기돼 왔다.

 

 

문화재위원회는 1999년 해체·보수를 결정했다. 이어 2000년 정밀조사와 가설 덧집 설치를 거쳐 2001년 10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전라북도와 협약을 체결하고 석탑의 본격적인 해체조사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학술·기술 조사연구, 구조보강, 보존처리 등을 시행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해체에만 10년이 걸렸다. 수천여 개의 돌 조각을 하나씩 걷어내고, 크기와 생김새를 기록했다. 또 시멘트는 치석 제거용 기계로 떼어 냈다. 보수 작업은 축조 당시 재료를 최대한 활용했으며 옛 돌과 새 재료는 티타늄 봉으로 접합하고, 돌 사이 빈틈은 무기질 재료로 메꿨다. 원래 유실돼 시멘트로 덮은 부분은 돌을 쌓아 올렸다.

 

 

2009년 1월 석탑 해체조사 과정 중 1층 내부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돼 학계, 불교계 등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석탑의 건립 시기(639년), 미륵사 창건의 배경과 발원자 등이 밝혀졌으며, 이후 수습한 유물들이 학술조사와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최근 보물로 지정예고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는 단일 문화재로는 최장기간 체계적인 수리를 진행한 사례이고, 특히 국제적 기준에 따라 학술조사와 해체·수리 과정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점에서 석조문화재 수리의 선도적 사례”라며 “원래의 부재(部材·건축 재료)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문화재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과학적 연구를 통해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그 과정을 국민에게 계속 공개해왔다. 오는 7월 말부터 시행될 가설시설물 철거와 주변 정비를 위해 잠시 현장의 개방을 중지할 예정이나, 정비를 마치는 12월부터는 미륵사지 석탑의 완전한 모습을 국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또 그동안의 수리 과정과 결과를 담은 보고서 발간, 기술교육, 학술행사 등을 통해 성과를 지속적으로 공유하게 된다.

 

문화일보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게재 일자 : 2018년 06월 20일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62001032527097001

 

<참고> 산포로산행기 미륵사지~왕궁리유적~석조여래입상~제석사지~쌍릉

 

▲&nbsp; ① 익산 미륵사지석탑 출토 은&middot;동제 원형합(왼쪽부터)과 금제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 사진 아래는 각종 구슬들. ② 1층 심주석 사리공 각변 중앙에 선명한 삼국시대 먹줄. ③&lsquo;중부덕솔(中部德率)&hellip;&rsquo; 명문이 새겨진 금제소형판. ④ 2002년 해체조사에 들어가기 직전 미륵사지석탑의 모습. ⑤ 보자기에 싸여져 함께 부식된 소형 도자(칼). 양 끝에 금제로 투겁을 씌워 마감했으며 특히 1점(아래)은 손잡이인 환두(環頭)에 식물무늬를 투조해 화려하게 장식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19일 오후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해체조사 현장에서 공개된 백제 무왕(武王·재위 600∼641년)대 사리장엄(舍利莊嚴)은 충남 공주 무령왕릉 발굴과 부여 능산리절터 백제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 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풀아야 할 숙제도 많이 남겼다.(문화일보 1월19일자 1·9면 참조)

 

사리장엄 또는 사리장엄구는 사리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다중 구조의 용기 및 탑내에 들어가는 각종 공양구 일체를 말한다. 이번에 미륵사지석탑 1층 심주(心柱·중심 기둥) 윗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확인된 사리장엄은 앞·뒷면에 193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금제사리봉안기와 금제사리호 등 총 505점에 달한다.

 

 

이중 좌평(佐平·백제 16관등 중 제1품) 사탁(택)적덕(沙(宅) 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喜捨)해 가람(伽藍·미륵사)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639년)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금제사리봉안기는 무왕의 부인이 된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의 중심인물임을 말하는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의 내용을 부인하는 것이어서 역사학계에서 큰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금제사리봉안기 원문>

(앞면)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뒷면)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B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원문 해석>

가만히 생각하건데,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번역 김상현 동국대 교수)

 

당장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러브 스토리가 후대에 가공된 설화이거나 ▲무왕이 여러 명의 왕후를 뒀을 가능성 ▲40여년 간의 오랜 재위기간으로 볼 때 선화공주가 죽은 뒤 사택적덕의 딸이 왕후가 됐을 것이라는 등 갖가지 추정이 제기되고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전설과 같이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의 중심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금제사리봉안기가 철저하게 왕후가 주체가 된 발원문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금제사리봉안기를 판독한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21일 원문 해석 중 앞면 7행의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我百濟王后)’는 ‘나 백제왕후는’으로, 뒷면 6∼7행의 ‘또 원하옵나니, 왕후의 심신은(又願王后卽身心)’은 ‘또 원하옵나니, 왕후 내(나) 자신은(又願王后卽身)은 마음이(心)’로 끊어 읽어 주어를 왕후로 보는 것이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금제사리봉안기는 사택씨인 왕후가 발원한 것이 명확하게 된다. 김 교수는 또 “앞면 7∼8행 문장은 누가 봐도 ‘나 백제왕후는 사택적덕의 딸로’라고 보는 것이 순리적인 해석”이라며 “백제 관련 국내 기록 중 왕비 이야기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거의 유일한 기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미륵사 창건 설화 중 선화공주 관련 얘기만 빼면 ‘삼국유사’ 내용이 거의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삼국유사’의 자료적 가치를 강조했다.

 

 

최연식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중국 연호를 일체 안쓰는 백제 금석문의 특징을 이번 금제사리봉안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며 “무왕을 ‘대왕폐하(大王陛下)’로 호칭한 점 등과 함께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서도 독자성을 지키려 한 백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금제사리봉안기와 함께 출토된 금을 두드려 펴서 만든 금제소형판 18점 중 일부에서도 시주자 명문이 발견돼 주목을 받았다. 현재 3점에서 명문이 확인되는 데 이중 한 점에는 ‘중부(中部) 덕솔(德率·백제 16관등 중 제4품) 지율(支栗)이 금덩어리 1개를 보시한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는 내용이, 또 다른 한 점에는 앞·뒷면에 ‘하부(下部)의 비치부(非致夫)와 부모 처자가 함께 보시한다(下? 非致夫及父母妻子 同布施)’라는 내용이 각각 새겨져 있다. 나머지 한 점은 현재 판독불능이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마치 목간을 보듯 얇은 금편에 행정구역명과 시주자, 발원내용 등을 새겨놓았다”고 밝혔다.

 

심주석 1단 윗면에 만든 한변이 25㎝, 깊이 27㎝인 정사각형 사리공의 각 변 중앙에 639년 조성 당시 동·서·남·북 방위를 표시한 먹줄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도 최초의 사례에 속한다.

 

배 실장은 “심주석과 윗 부재 사이에 회를 발라 밀봉했기 때문에 삼국시대 먹줄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며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유물을 먹줄에 맞춰 사리공에 안치한 사실히 확인됐다”고 말했다.

 

사리장엄은 사리공에 3개의 층위로 배치돼 있었다. 우선 한변이 23㎝인 정사각형의 녹색 유리판을 맨 밑에 깐 뒤 그 위에 은·동제원형사리합 6개를 놓고 합들 사이를 460점에 달하는 각종 구슬로 채웠으며 그 위에 은제관식, 얇은 비단으로 추정되는 직물(보자기)에 싼 도자(칼), 금제소형판 등을 넣었다. 그리고 맨 위층 중앙과 남쪽에 각각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를 안치했다.

 

비늘문이 음각 장식된 금제족집게와 당초문과 꽃봉우리 장식이 있는 남·녀용으로 추정되는 은제관식 2점, 연꽃잎·인동당초문·연주문 등이 새겨져 있는 금제사리호 등은 백제 세공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특히 금제사리호는 동체를 상·하로 각각 나눠 제작하고 내부에 소형 사리병을 안치한 뒤 조립해 완성할 수 있도록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 참고(1) : [미륵사지 석탑 복원 기념][앙코르 다큐] 미륵사 제1부 [1400 년의 비밀] - YouTube

* 참고(2) : [미륵사지 석탑 복원 기념][앙코르 다큐] 미륵사 제 2부 [익산은 백제의 수도였는가?] - YouTube

 

문화일보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게재 일자 : 2009년 01월 21일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12101073230074002

 

문화일보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게재 일자 : 2018년 06월 20일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62001032527097001

 

* 초원사진관(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 동국사(일본 사찰) 도착

 

[라이프타임즈 박순배 여행전문기자수탈의 역사와 함께 항거의 역사도 함께 간직한 군산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과 건물들이 근대문화재로 지정되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곳이다.오늘은 많은 근대 문화재 가온데 일제 강점기에 지어져 일본의 사찰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국사를 소개한다.

 

군산 동국사는 일본식 사찰로 전라북도 군산시 동국사길 16 장계산 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국가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곳이다.일제 강점기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해 많은 일본인들이 살았으며 그 수가 무려 군산인구의 절반이 되었다고 한다.지금도 군산 곳곳에는 일제 강점기에 새워진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오늘 소개하는 동국사도 그중 한 곳이다.동국사는 일반 사찰과는 다르게 산속이 아닌 군산 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사찰이다.

 

 

일반 사찰은 일주문을 통과해야 부처님 도량으로 들어가지만 동국사 일주문은 그저 평범한 돌 기둥이다.평범한 동국사 문에는 한자로 차문불문이라는 된 글이 붙어 있는데 풀이하면 이문은 문이 아니다” 라고 하며 뜻은 이문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차문불문 한자 아래로는 지워진 글자가 있는데 이 음각된 글자는 조동종 금강사로 여기서 조동종은 일본 종단명칭이고 금강사는 창건당시 일본 사찰명이다.동국사의 두 개의 돌기둥 중 왼쪽 기둥에는 일본의 연호가 음각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지워져 없어졌고 날짜만 남아 있다.

 

동국사 일주문을 통과하면 1909년 6월 일본 조동종 승려 우찌다가 금강선사란 이름으로 개찰하고 1913년 현 위치로 옮겨와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한 동국사의 대웅전이 나온다.동국사는 1945년 해방을 맞아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 불교전북교당에서 인수하고 동국사로 개명했으며 1970년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국사 대웅전은 일본의 에도시대 건축양식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다.대웅전 건축에 사용된 목재는 일본산 스기목을 사용했으며 지붕에 얹은 기와도 일본에서 직접 구워왔다고 한다.동국사의 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1718호로 지정된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이 모셔져 있다.효종 1년에 진흙으로 만들어진 삼존불상은 해방 후 금산사 있던 걸 동국사로 모셔 왔다고 한다.

 

군산 동국사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해 1000여 명의 군산 시민이 낸 성금으로 2015년 8월 건립 된 소녀상이 서 있어 의미를 더한다.평화의 소녀상 앞 작은 연못은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검은색 타일 77장을 사용했으며 검은 타일은 대한해협 거울을 상징한다.군산 동국사에는 일본 조동종 스님들이 제국주의 첨병 역할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음각된 '참사문비'가 세워져 있다.참사문비는 2012년 9월 이치노헤스님 주도로 건립됐으며 비용도 일본 불교계에서 부담한 것이라고 한다.

 

 

소녀상과 참사문비 옆으로는 일본 전통양식을 가지고 있는 동국사의 종각이 서 있는데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종각이라고 한다.종각에는 1919년 일본 교토에서 주조했다는 동종이 높다랗게 매달려 있으며동종 몸통에 음각된 축원문은 일왕을 칭송하는 내용이어서 아픈 식민지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종각 옆 작은 불상들은 33가지 모습을 조각한 관세음보살상 33기와 12지 본존불 8기도 눈길을 끈다.대한 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동국사의 종무소가 있고 종무소 뒤로는 대나무숲이 있다.대나무 숲은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한 방공호로 두곳이 있었는데 한곳은 무너지고 한곳은 창고로 사용 중이라고 한다.동국사는 많은 분들이 일본의 잔재여서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절적산가옥 몇 채 없앤다고 식민지 지배의 아픔이 사라지지 않을듯 하다.이제는 아픈 역사를 끌어안고 그 아픔을 되새겨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이 없도록 어린 학생들에게 교육 자료로써 활용하는 게 어떨까 생각해 본다.

 

 

출처 : ()라이프타임즈(http://www.elifetimes.co.kr)

 

* 충남 서천 한산 모시관 도착

 

우리나라의 모시는 삼국시대에는 제작기술의 발달로 細布(세포)가 대량으로 생산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30升(승)에 이르는 紵杉段(저삼단)을 당나라에 보낼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고품질의 모시를 제작하는 등 최대 15승의 모시를 제작한 중국에 비하여 제직기술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시는 대표적인 특산직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섬세하고 고운 모시뿐만 아니라 제직기술이 다양화되어 花紋紵布(화문저포) 紗紵布(사저포) 등의 기록과 絲紵交織(사저교직)으로 제직된 유물이 확인되는 등 특별한 품종의 모시가 제작되었습니다. 모시는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교역물품으로 활용되었고 왕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상하 구분없이 가장 일반적인 의복의 재표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모시는 관복, 제례복, 갑옷, 일상복 등 귀천에 관계없이 다양한 복식에 사용되었습니다. 모시는 문헌기록에서 섬세도, 색 등에 따라 다양하게 확인되며, 이전과 달리 亢羅(항라)로 제직된 모시가 새롭게 등장하였습니다. 六矣廛(육의전)에는 모시를 전문으로 팔던 苧布廛(저포전)을 중심으로 유통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산과 임천이 모시를 공납하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대한제국 근대에는 의복제도가 간소화됨에 따라 모시를 사용한 복식의 범위가 축소된 반면, 신분제도가 해체되면서 계층에 따라 규제되던 복식의 제도도 변화되어 상류층뿐만아니라 다양한 계층에서 세모시를 의복의 재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시장과 교통의 발달로 모시의 거래가 활성화 되었으며, 세모시의 대표적인 생산지로 한산의 명성이 확대되었습니다.

 

현대는 의복제도가 간소화됨에 따라 모시를 사용한 복식의 범위가 축소된 반면, 신분제도가 해체되면서 계층에 따라 규제되던 복식의 제도도 변화되어 상류층뿐 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에서 세모시를 의복의 재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시장과 교통의 발달로 모시의 거래가 활성화 되었으며, 세모시의 대표적인 생산지로 한산의 명성이 확대되었습니다.

<한산모시 전시관>에서(seocheon.go.kr)

 

* 충남 서천 신성리 갈대밭

 

서해가 가까운 금강 하구에 자리한 충남 서천의 신성리(新城里), 금강 변에 나루가 만들어지면서 생겨나 신성개 또는 신성포(新城浦)라 했다. 오랜 퇴적물이 쌓여 땅은 넓었지만 범람이 잦아 사람이 일굴 땅은 못되었던 곳에 갈대가 자라면서 군락을 이루게 되었다.

 

 

 

강 건너는 익산의 웅포로 옛 사람들은 신성리 나루와 웅포 나루(곰개 나루)를 나룻배로 넘나들며 한 동네처럼 지냈다. 신성리 사람들은 웅포 5일장을 이용했고, 웅포 장의 유명한 객주는 신성리의 땅 부자였다.

 

 

신성리 갈대밭은 너비 200m, 길이 1.5km, 면적 33만 평방미터(10만 평)의 규모로 늦가을인 11월 경 갈대꽃이 필 때가 가장 아름답지만 언제 찾아도 아름다운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곳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지로 '신성리 갈대밭 연가' 노래비도 있다.

 

* 충남 부여 가림성과 사랑나무

 

 

충남 부여 加林城(가림성)은 백제 후기 사비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石城(석성)이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西記(서기) 501년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加林城(가림성)이 있는 성흥산은 금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중심지로 백제가 멸망 후에는 百濟(백제) 부흥 거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또한 가림성 南門地(남문지)에 위치한 느티나무의 가지가 하트처럼 보여. 일명 사랑나무로 불리는 사진작가들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며. 최근에 드라마 서동요, 대왕세종, 신의 예능과 영화의 촬영장소로 알려져 많은 戀人(연인)들의 "人生(인생) 샷" 명소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 참고 : https://youtu.be/2VkwJuvbw2M

 

* 부여 대조사

 

충남 부여 大鳥寺(대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부여읍지(扶餘邑誌)』에 의하면 이 절은 인도에 가서 범본(梵本)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와서 백제 불교의 방향을 달리한 겸익(謙益)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사적기를 참작하여 기록한 현판에 의하면 이 절은 527년 담혜(曇慧)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건주에 대한 설은 다소 다르지만 이들이 모두 6세기 초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이 절은 고려 원종 때 陳田長老(진전장로)가 중창하였고, 그 뒤 1989년에는 명부전, 1993년에는 종각, 1994년에는 미륵전을 각각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과 용화보전·명부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 뒤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한 노승이 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하여 있었으므로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조사 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이 있다. 이전에는 옥개석(屋蓋石)만 있었으나, 1975년 옥신(屋身)이 발견되어 복원하였다.

 

*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부여군 대조사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보살의 머리 위부분과 원통형 보관(寶冠 : 보배로운 모자)이 이어지는 부분이 보수되었으며, 왼쪽 어깨 일부가 부서진 상태이다. 보살상은 약 10m의 크기이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에 관한 명문이나 문헌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조성 배경은 알 수 없다. 비록 석조보살상이 미륵보살이라고 명명되고 있지만, 그 근거는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형식적인 면에서 유사하다. 다만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체적인 비례가 좋고, 하나의 돌을 다듬어 조각하였다는 점과 부드러운 모델링을 구사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통견(通肩 :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의 법의(法衣 : 보살상의 옷)를 입고 있으며,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양 손으로 금속제의 연꽃 가지를 잡고 있다. 약 5등신(等身)의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폭이 넓어져 안정감을 준다. 머리 위에는 원통형의 보관과 그 위에 가로로 긴 장방형의 보개(寶蓋 : 보배로운 덮개)를 2중으로 올려놓았다. 아래쪽의 보개 밑면에는 빗물이 얼굴로 타고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가장자리 부분을 돌아가면서 얕게 파내었다. 네 모서리에는 장식을 매달기 위해 뚫은 구멍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동령(銅鈴 : 청동 방울)이 매달려 있다. 원통형 보관에는 특별한 문양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 보관과 보개는 보살상과 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원래부터 이러한 형태를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보살상은 하관(下官)이 넓은 삼각형의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부은듯한 눈두덩, 살짝 굽은 콧등, 음각으로 새겨진 콧날, 긴 인중, 살짝 내민 입술, 얇고 섬세하게 조각된 귀를 가지고 있다. 상호(相好 : 얼굴)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이다. 또한 정갈하게 빗은 머리카락은 정면과 측면, 뒷면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양쪽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양어깨 위를 덮고 있다. 목에는 한 줄의 음각으로만 표현된 삼도(三道 : 세 개의 선)가 있다.

 

한편, 보살상의 몸은 고려시대 전기에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한 석조 불상과 같이 대충 돌을 다듬은 다음,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각 진 어깨, 모호하게 처리된 양 손, 법의의 주름 표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보살상의 몸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그저 표현을 위한 표현에 그치고 있다. 특히 오른쪽 팔 뒤로 넘어 온 법의 자락은 마치 칼로 도려낸 듯 딱딱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나마 목 뒤를 감고 있는 옷깃의 입체적인 처리와 가슴걸이 영락 장식의 섬세한 표현이 약간의 사실감을 부여해 준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방형(方形)의 보개와 원통형 보관, 5등신에 가까운 신체 비례, 부리부리한 눈, 넓은 하관 등을 통하여 볼 때,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모델로 하여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길쭉한 삼각형에 가까운 조형, 면류관(冕旒冠 : 왕이 쓰던 네모난 모자)과 유사한 방형 보개, 원통형 보관 등 고려시대 전기에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석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고려시대 전기에 유행했던 지방적인 특징을 지닌 대표적인 예이다. 보살상에 보이는 형식과 양식은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던 것으로서 고려시대 전기의 불상 연구에 있어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부여 삼의당

 

충남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 삼의당은 겸재 정선의 산수화 '임천고암(林川鼓岩)'의 배경이다. 삼의당과 나루터는 금강 댐으로 사라졌으나, 충남도는 이곳을 4대강 살리기 사업에 포함시켜 복원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간송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임천고암(林川鼓岩)’을 최완수 선생의 설명을 따라 살펴보려 한다. 아마도 겸재 70대 이후의 작품일 것이라는데 그렇다면 양천현령을 끝내고 편안히 인곡에서 독서하며 지내던 시기에 그린 그림일 것이다. 그림에는 백마강 변 우뚝한 바위 절벽 위에 건물이 하나 있다. 책 읽고 시 짓고 벗들과 한담(閑談)하든지 후학을 지도할 만하니 독서당이라 불렀다. 그 앞으로는 정자관(程子冠)에 도포 입고 동자 하나 거느리고 지팡이 짚은 선비가 고개를 조금 들어 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다. 은일(隱逸)하게 은거한 은자(隱者)의 모습이다. 겸재가 이 먼 곳까지 찾아가서 그림을 남긴 것을 보면 많이 가까웠던 사이였을 것 같다. 그 주인공은 겸재의 삼종질(三從姪)인 삼회재(三悔齋) 정오규(鄭五奎, 1678~1744)일 것이라 한다. 삼종질은 팔촌 형제의 아들이니 구촌 조카가 되는 셈이다. 요즈음에야 먼 촌수(寸數)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팔촌은 가까운 사이였다.

1676년 생인 겸재로 보면 조카이지만 같은 연배였으니 뜻만 맞으면 가까웠을 것이다. 삼회재는 사천 이병연과도 가까운 사이였고 겸재의 백부인 반곡 정시설(盤谷 鄭時卨)이 편찬한 광주정씨세보의 초본을 바탕으로 족보를 완성해 낸 인물이라서 일문(一門)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다.

 

계속 이어보기 : 이한성 교수의 [겸재 그림 길 (106) 임천고암] 너른바위 투성이인 백마강 건너편을 그리다 (cnbnews.com)

 

 

 

 

 

<참고> : 이한성 교수의 [겸재 그림 길 (106) 임천고암] 너른바위 투성이인 백마강 건너편을 그리다 (cnbnews.com)

 

* 공주 공산성

 

백제의 고도 공주의 상징공산성

 

 

공산성(사적  12)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475~538) 지킨 왕성이다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고려시대 공주산성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인조가 이괄의 (1624)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으로도 불렀다조선 선조·인조  지금과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고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공산성에서 시대별 역사를 살펴볼  있다.

 

 

 

성벽은 밖에서 오르지 못하게 쌓고(치성雉城), 남북에  개의 문루와 적에게 보이지 않는 출입문 暗門(암문) 만들었다공산성 옆의 공주 옥녀 봉성(충청남도 기념물 99) 흙으로 쌓은 (퇴뫼식)으로 공산성의 보조 왕성의 역할을 하였다.

 

 

 

 

* 충남 공주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에 위치하며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된 송산리 고분군에 포함되어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 고분군에는 당시 중국 양(梁)나라 지배계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벽돌무덤[塼築墳]으로서 무령왕릉과 함께 제6호 벽돌무덤이 있다. 무령왕릉은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제6호 벽돌무덤 북쪽의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송산리 고분군이 조사되면서 무령왕릉이 제6호 벽돌무덤의 현무릉(玄武陵)으로 인식되어 처음에는 왕릉으로 주목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릉으로 발견된 것도 매우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1971년 7월 5일, 제6호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하여 후면에 배수를 위한 굴착 공을 파면서 왕릉의 입구가 드러나 조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무령왕릉은 도굴과 같은 인위적 피해는 물론 붕괴 등의 피해가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조사된 것이다. 현재 송산리 고분군 내 무령왕릉은 제7호분으로 분류되어 있으나, 피장자가 명확히 확인된 무덤이므로 무령왕릉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구조를 보면 평면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며, 터널형 천정을 하고 전면의 중앙에 무덤에 들어가는 연도(羨道)가 부설되어 있는 철(凸)자형의 전축(塼築) 단실묘(單室墓)이다. 입지한 지형은 남향한 경사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원형인 분구(墳丘)의 지름은 약 20m 이며, 무덤의 상면에 호석(護石)으로 추정되는 잡석으로 쌓은 석축도 확인되었다. 현실의 바닥에서 분구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는 7.7m였으나, 토압이 현실에 적게 미치도록 분구의 중심을 현실의 중심보다 5.8m 위쪽에 조성하였다. 봉토는 현실 주위의 풍화암반을 편평하게 깎아낸 후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원형으로 만들었다.

 

 

묘실 규모는 남북 길이 420㎝, 동서 너비 272㎝, 높이 293㎝이다. 무덤의 현실은 남쪽의 벽면에서 109㎝ 범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닥보다 21㎝ 정도 한단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 관대를 조성하였다. 따라서 후면의 관대는 동서 너비 293㎝, 남북 간 너비 315㎝의 규모이다. 관대와 바닥의 경계는 벽돌쌓기의 차이, 즉 관대와 바닥 전면의 벽돌쌓기는 삿자리문 형태로 장방형의 벽돌을 깔면서 경계에 해당하는 관대 외곽은 벽돌을 길이로 늘어 쌓아 구분하였다. 이 바닥의 벽돌 아래는 묘실에서 연도를 지나 묘도로 빠져나가는 배수시설이 있다.

 

묘실의 남벽 중앙에 시설된 연도는 길이 290㎝, 너비 104㎝, 높이 145㎝의 규모이고, 그 앞으로 묘도가 길게 연결되어 있다. 묘실의 축소판으로 터널형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사용한 벽돌이나 축조방법도 묘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천정 이하의 벽면에는 반으로 자른 연꽃이 있는 벽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바닥도 묘실처럼 벽돌을 삿자리문으로 깔았으나 묘실 바닥보다 높게 만들어 묘실 내의 관대와 같은 높이를 유지한다.

 

연도 외부는 묘도로 이어지지만 바깥에 벽돌을 쌓아 304㎝의 높이로 연도 전면의 벽체를 갖추고 있다. 사용된 벽돌은 문양이 있는 것과 문양이 없는 것, 그리고 무령왕릉에 사용된 연꽃무늬가 있는 것 외에도 제6호 벽돌무덤에서 사용된 동전무늬가 있는 전범문(錢范文)의 벽돌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배수구는 현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가운데 바닥 밑에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87㎝의 길이에 이르게끔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벽체는 벽돌을 이중으로 쌓아 만들었다. 벽면은 좌우 벽을 상부에서 곡률을 주어 정상부에서 만나고, 전·후벽은 수직으로 하여 터널형 천정을 축조하였다. 전축은 뉘어쌓기와 세워쌓기를 반복하여 사평일수(四平一垂) 방식으로 축조되어 중국의 삼평일수(三平一垂)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벽돌쌓기 방법은 네 벽면이 동일하지만 상단부의 좁은 면적이나 둥근 형상이 표현되는 부분은 방법을 달리하였다. 공적법(空積法)을 사용하였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간간이 석회나 진흙이 끼어 있으며, 천장에서 벽돌의 이음새는 석회를 발라 견고하게 하였다. 사용된 벽돌은 연꽃무늬가 장식되었으며, 위치에 따라 사격자의 망상문(網狀紋)과 연화문을 다르게 배열하였다.

 

입구 부분을 제외한 3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작은 화염문을 채색한 보주형 벽감과 벽돌 9개를 길게 배열한 살창(유자창)을 시설하였다. 이외에 묘실 벽에는 대형의 철정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고, 묘실 바닥을 1단 높여 관대를 시설하면서 그 아래에 배수로를 설치하였다. 특히 무령왕릉 축조에 사용된 벽돌은 연화문이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입구의 막음벽돌 중에는 무문전과 제6호 벽돌무덤의 벽돌과 동일한 전범문 벽돌이 꽤 많이 있다.

 

 

출토유물은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데, 연도 입구에서 동발(銅鉢)과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 지석(誌石) 2매와 오수전 한 꾸러미, 석수(石獸) 등이 발견되었다. 현실의 남쪽에도 동발과 청자육이호가 쓰러져 있었으며, 관대 위에는 동쪽에 있는 왕의 목관과 서쪽에 있는 왕비의 목관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유물이 겹쳐져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중요 장신구로는 왕이 소지한 것으로 보이는 무령왕 금제관식 1쌍(국보, 1974년 지정), 금귀걸이 1쌍(국보, 1974년 지정), 금제 뒤꽂이 1점(국보, 1974년 지정), 은제과대 외 요패 1벌, 금동식리 1쌍, 용봉문환두대도와 금은제도자 각 1점, 발받침 1점(국보, 1974년 지정) 등과 왕비가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무령왕비 금제관식 1쌍(국보, 1974년 지정), 금귀걸이 2쌍(국보, 1974년 지정), 금목걸이 2개(국보, 1974년 지정), 은팔찌 1쌍(국보, 1974년 지정), 금팔찌 1쌍, 금은장도자(金銀裝刀子) 2개, 금동식리 1쌍, 베개 1점(국보, 1974년 지정)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지석 2매(국보, 1974년 지정)과 청동제품으로 신수문경(神獸文鏡)·의자손명수대문경(宜子孫銘 獸帶文鏡)·수대문경(獸帶文鏡: 이상 국보 161호) 등의 각종 거울과 청동제 접시형 용기, 청동완, 청동개, 수저, 젓가락, 다리미 등이 있고, 기타 도자제품으로서 등잔이 있다. 이 가운데 1974년 7월 9일에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목 17건에 이른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고대의 무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훌륭한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소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벽돌무덤이라는 중국 남조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金松)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하여 당시 중국·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릉이 백제 묘제의 전개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벽돌무덤으로서 중국 묘제라는 특수성을 지녔지만, 백제의 묘제 변화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변수로 자리한다는 점이다. 백제의 묘제 측면에서 살펴볼 경우 한강유역 궁륭식 천정의 굴식 돌방무덤이 웅진천도와 더불어 송산리 제1∼4호분과 같은 형태로 도입되었다가, 이후 무령왕릉과 제6호 벽돌무덤의 출현에 영향을 받아 터널형의 천정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살펴진다. 이와 같이 외래의 벽돌무덤이 기존의 백제 묘제 속에 무리 없이 수용되고 전통적 묘제 자체에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령왕릉의 영향이 단순한 묘제의 변화뿐만 아니라 백제의 사회·문화에 걸쳐 전반적인 변화상을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무령왕릉과 출토유물을 통하여 웅진기 백제문화는 중국 남조문화의 직접적 영향 관계에 있으며,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 <참고> :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naver.com)

 

* 충남 부여 無量寺(무량사)

 

충남 부여 無量寺(무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麻谷寺(마곡사)의 말사로서 여러 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 말기의 고승 無染(무염)이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하였으며, 金時習(김시습)이 이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고, 조선 중기의 고승 震默(진묵)이 아미타불을 점안하고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서 마시면서 도도한 詩心(시심)을 펼쳤던 사찰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무량사 極樂殿(극락전)을 비롯하여 山神閣(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에는 동양최대의 불좌상이라 하는 아미타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산신각에는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33호로 지정된 무량사 석등과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무량사 오층석탑, 절 문 앞에 있는 거대한 幢竿支柱(당간지주), 김시습의 부도 등이 있다. 또한, 김시습이 1493년(성종 24) 이곳에서 죽자 승려들이 그의 影閣(영각)을 절 곁에 짓고 초상을 봉안하였다.

 

 

그 뒤 읍의 선비들이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여 學宮(학궁) 곁에 사당을 짓고 淸逸祠(청일사)라 이름하고 그 초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이 절에서는 조선시대 상당수의 경판이 간행되었다.

 

 

1498년(연산군 4) 『法界聖風水陸勝會修齋儀軌(법계성풍수륙승회수재의궤)』를, 1522년(중종 17) 『夢山和尙六道普說(몽산화상육도보설)』을, 1470년에서 1494년 사이 『地藏菩薩本源經(지장보살본원경)』을 간행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 참고 : [다시보는 BTN] 한국의 명찰 - 부여 만수산 무량사 (1995년 제작) - YouTube

 

 

金時習(김시습)은 조선전기 『매월당집』·『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문인이다. 1435년(세종 17)에 태어나 1493년(성종 24)에 사망했다. 5세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다. 21세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하다 보던 책을 불사른 뒤 승려가 되었다. 생육신으로서 단종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키며 유랑인의 삶을 살다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불교적 사색을 병행했으며, 선가의 교리까지 포괄하려고 시도하는 등 다채로운 면모를 보였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 생육신의 한 사람.

 

그의 선대는 태종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金周元)이다.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시대 시중을 지낸 연(淵)·태현(台鉉)으로 전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매월당집』의 세계도(世系圖)에 의하면 김인존(金仁存)이 맞다.

 

증조부 김윤주(金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김겸간(金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진 선사 장씨(仙槎張氏)이다.

 

 

김시습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莊陵誌)』·『해동명신록』·『연려실기술』 등이 있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정속(正俗)』, 『유학자설(幼學字說)』, 『소학(小學)』을 배운 후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오세(五歲,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5세인 1439년(세종 21)에는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인 1447년(세종 29)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시경』·『서경』을 배웠고,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서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449년(세종 31)에는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15세의 나이로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별세하였고, 당시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 수행에 입문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인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철원에 은거하였으며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규탄하고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김시습은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만나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적었다.

 

 

26세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인 1463년(세조 9)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교정(校正)하는 일을 맡아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세조 11)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 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세조 11)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1465) 때부터 37세(1471)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시편들을 지어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육경(六經)과 자사(子史)의 글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1493년(성종 24)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圖)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東峯自畫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김시습을 비롯한 이맹전(李孟專)·조여(趙旅)·원호(元昊)·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의 절개를 칭송하여 생육신(生六臣)이라 부른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시습(金時習))]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