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의 옛절터 가는 길, 북한산 국녕사~노적사~태고사~봉성암~대동문~우이동]19년 10월 12일
* 구간 :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백화사입구~국녕사~노적사~태고사~봉성암~대동문~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 일시 : 2019년 10월 12일(토)
* 모임장소 및 시각 :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백화사입구 버스정류장 오전 9시
* 날 씨 : 맑음(최고 영상 23도 최저 영상 13도)
* 동반자 : 홀로산행
* 산행거리 : 19.3km
* 산행지 도착시각 :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백화사입구 버스정류장 오전 9시
* 산행후 하산시각 :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우이전철역 오후 5시
* 산행시간 : 약 8시간(식사 및 사진촬영시간 포함)
날씨도 선선하여 오랜만에 북한산을 오릅니다.
오늘 산행은 이한성 교수의 옛 절터 가는 길을 시작으로 노적사와 고려 말 圓證國師(원증국사) 太古 普愚(태고 보우, 1301~1382)의 태고사로 향합니다.
이는 북한산의 아름다운 풍광과 숨겨진 유적, 보물 등과 함께 하는 우리만의 멋진 역사 순례길이기도 합니다.
다사한번 오늘의 감동을 되새겨 앞으로도 더욱 아름답고 소중한 북한산 산행을 이어갈 것을 스스로 다짐해 봅니다.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22] 북한산 국녕사~노적사~서암사터 길
민초들 애환 간직한 북한산 둘레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부럽잖다
북한산 속, 또 한 번 잊혀진 절터를 찾아가는 날이다.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를 나와 북한산성 방향으로 가는 버스(34번, 156번, 704번)로 환승한다. 은평뉴타운을 지나 백화사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북한산성 대서문길보다 언제나 한산하여 봄가을 시즌에도 북한산성 오르기에 호젓함을 느끼게 하는 코스다.
백화사 안내판을 따라 골목길로 잠시 들어서면 둘레길 표지판과 만나면서 여기소 경로당 앞 여기소(汝其沼) 옛터를 알리는 안내석이 서 있다. 설명문에 북한산성을 쌓을 적에 어느 지방관리가 올라 왔는데 그를 사랑하는 기생이 만나러 왔다가 끝내 못 만나고 이 소(沼)에서 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이라고 시적(詩的) 풀이를 해 놓았다.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해석이 너무 좋아 미소 짓는다. 경로당 뒤편 물 흐르는 계곡쪽으로 가 보았더니 여기 소는 시멘트로 메워진 채 매 마른 물길이 되어 있었다. 그 사랑도 이렇게 매 말라 가는구나.
백화사 방향길로 잠시 나아가면 동네 슈퍼와 음식점이 있다. 그 옆으로는 회백색 바위 하나가 앉아 있다. 계곡을 메우고 길을 만들었기에 길옆에 반은 묻혀 볼품없이 되었다. 자연하천이 살아 있을 적에는 번듯한 바위였을 것이다. 둘레길에 세워놓은 길안내 지도에 ‘소금바위’라고 적혀 있다.
소금바위?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진관사 입구에 가면 세종의 9째 아들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묘역이 있다. 그 신도비에 옮기기 전(前)의 묘역이 ‘양주 중골(中興洞) 솜바위(면암:緜岩)를 정북으로 등지고 앉았다(자좌:子坐)’고 했다. 진관사 입구엔 세종 9째 아들 묘역 또 잠시 후 지나갈 내시묘역을 답사한 기록(박상진 님)에 의하면 내시묘역에 묻힌 분들 후손이 소장한 가승(家乘)에 선조들 묘역이 ‘중골(中興洞) 솜바위(緜岩) 동쪽’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곳 중골에 랜드마크가 될 만한 상징물로 솜바위(緜岩)가 있었다는 말이다. 솜바위는 어느덧 유래를 모르는 후손들에 의해서 슬그머니 소금바위로 탈바꿈한 것은 아닐까. 여기에 소금장수 전설 하나 덧붙여지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소금바위를 지나 작은 돌다리를 건너 백화사로 들어간다. 근래에 개산(開山)한 비구니스님들의 작은 절이다. 안쪽 흰 바위에 삼존불을 모셨다. 근년에 모신 마애불 중에는 꽤 균형잡힌 모습을 하고 있다.
백화사를 나오면 둘레길에 이곳이 내시묘역(內侍墓域)길임을 알리고 표지판이 붙어 있다. 2003년 11월에 은평향토사학회에서는 이 곳 백화사 뒤 옛 내시가문 사패지에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 45기의 조선 내시묘역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음을 알렸다. 외관이야 일반 사대부집 선영과 다를 바 없었으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야곱의 묘소가 있기에 세계의 순례길이 되었듯이, 북한산 둘레길이 역사와 옛사람들의 삶, 이야기가 있는 길이 되는데 한 축을 맡을 만한 유산이었다.
그런 내시묘역이...
금년(2012년) 4월 5일 한 일간지에 45기묘가 완전히 갈아엎어져 평탄지가 된 사진과 함께 자손들이 4억 8000만원에 이 땅을 팔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금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2012년 이 시점에 우리 세대가 한 일이라니. 이제는 이 길 이름을 바꾸자. ‘내시묘역 없는 길’.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길 우측 철조망 너머는 사라진 내시묘역이며, 좌측은 송금물침비(松禁勿侵碑)의 주인공 이해룡(李海龍) 선생이 묻혀 있는 경주이씨 선영(先塋)이다.
살짝 오르는 고개마루에서 우측 의상봉/가사당암문 길로 접어들어야 하나
고개 아래 30여m 지점에 세워져 있는 경천군 송금물침비(慶川君 松禁勿侵碑)를 둘러본다. 선생은 임진왜란 즈음하여 역관으로 일본과의 화평교섭에 공을 세워 이 지역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받았다. 그래서 잡인들이 이 사패지 안에 들어오지 말고 소나무도 베지 말라는 금표비를 세운 것이다. ‘경천군 사패지이니 정해진 경계 내에는 침범 및 소나무 벌목 금지(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 만력 42년(광해군 7년 1614년).
조선시대에는 소나무 무단벌목을 엄히 다스린 실록기록이 있다. 한두 그루 베면 곤장 100대(斫 一二株者杖一百), 서너 그루 베면 곤장 100대+군대징집(三四株者杖一百 充軍), 열 그루 이상이면 곤장 100대+전가족 변방이주(十株以上者杖百 全家徙邊). 우리 땅 소나무는 이렇게 해서 보존된 것들이다.
최근 동일한 또 하나의 금표비가 발견되었다. 이 비와 짝을 이룬 비인데 약 1km전방 북한산초등학교 담 옆에서였다. 내용은 동일한데 송금(松禁)이 금송(禁松)으로 순서만 바뀌어 있다. 무심하게도 이 비석은 그 간 잊혀져 뒷면에는 ‘정씨 박씨 합장지묘’라 기록했으니 어느 민초가 가져다 묘표(墓表)로 삼았던 것이다.
자손 없는 내시의 삶 고스란히 담긴 흔적 갔던 길을 잠시 되돌아와 의상봉/가사당암문 방향으로 간다. 막바로 의상봉과 가사당암문길이 갈라진다. 오늘은 우측 가사당암문길이다. 주변에는 조선시대 잊혀진 묘의 석물(石物)들이 눈에 띈다. 자손 없는 어느 내시의 삶의 흔적이었을까? 내시묘역 철조망이 끝날 즈음 왼쪽 등성이에 무너진 오랜 석축(石築)이 보인다. 잠시 오르면 넓은 평탄지에 낙엽 속에서 깨어진 기와편들이 고개를 든다.
잊혀진 절터, 어느 누구도 올라와 보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기록해 주지도 않는 절터, 이런 곳에 오면 마음속에 싸~한 바람이 지나간다. 오르는 길 계곡은 맑다. 500여m 오르면 등산로 옆에 작은 민묘(民墓) 두 기가 있다. 주변 낙엽 속을 한참을 들치노라면 몇 개의 기와 쪽이 손에 잡힌다. 아마도 아래 큰절에 속했던 암자터일 것이다. 큰 절도 잊혔는데 암자야 더해 무엇 하리. 게다가 암자터를 파내고 묻은 묘도 잊혀져 이제는 반은 평평해졌다. 이 길을 다니는 산사람들에게는 절터도 암자터도 모두 마음 밖이다.
이제부터는 길이 가팔라진다. 백화사에서 가사당암문까지는 2km 남짓한 거리이다. 오르는 길 옆 계곡은 수량은 많지 않아도 깨끗하고 바위가 수려하기에 매니아들이 다니는 길이다. 한 시간 남짓 올라 가사당암문에 도착한다. 의상봉과 용출봉(龍出峰) 사이에 수줍게 숨어 있는 문이다. 네모진 문 안으로는 백운대가 위풍 있게 자리 잡는다. 암문 프레임 속에 산의 실물을 담은 듯하다. 문밖 성벽에 기대어 커피 한 잔 마신다. 이 곳이 햇볕 따습고 바람도 없는 명당이다.
성벽에는 300년 전 성(城)을 싼 사람들이 기록한 각자(刻字)가 세월에 무디어져 간다. 八牌(팔패). 이 곳은 팔패에 속하는 이들이 쌓았구나. 북한산성 축성을 정리한 북한지(北漢誌)에도 축성을 위한 조직편성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이런 각자(刻字)로 짐작할 수 있다. 패(牌)란 우리가 요즈음에 쓰는 단어 속에도 살아 있듯이 ‘패거리’, ‘깡패’처럼 그 무리를 일컫는 말인데 아마도 산성을 쌓을 때 1패, 2패, 3패...로 나누어 책임구역을 맡기는 실명제(實名制)였을 것이다. 잘못 쌓거나 무너지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불려와 다시 쌓아야 했으니 인위적으로 훼손하지 않은 지역은 300년이 지나도 온전한 곳이 많다.
북한산성 축성사를 정리한 북한지
암문에서 200여m 가파르게 내려가면 국녕사(國寧寺)가 있다. 산성 축성 시에 지어졌는데 86간에 승려 청휘, 철선이 창건하였다 한다.(八十六間 淸徽 徹禪 所刱). 가사당 암문을 지키기 위한 거점 사찰이었다. 영조 때 학자 여암 신경준 선생의 가람고(伽藍攷)에 소개되어 있으나 한국사찰전서(1979년)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타난다. 지금의 국녕사는 옛 국녕사터에 중창한 것이다. 자리만 그 곳일 뿐 옛 국녕사의 법등(法燈)은 전해지지 못하였다. 중창한 뒤 1991년 불탔다 하며 1998년 능인선원에서 본격적인 중창을 거쳐 대가람이 되었다. 24m의 국녕대불과 만불은 가히 장관이다.
대불 뒤 능선 바위에는 인위적으로 무엇인가 새긴 것 같은 흔적이 완연하다. 흔히 마애불이라고 하는데 여러 번 확인하여도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또 하나 옛 국녕사의 흔적이 있다. 절 앞 좌측 언덕길에 종형(鐘形)의 한월당대선사(漢月堂大禪師) 부도(浮屠)가 있다. 국녕사에서 도를 닦다 열반하신 것은 분명한데 기록이 없으니 어느 분인지 알지 못한다.
국녕사를 뒤로 하고 산성 안으로 내려간다. 북한산성 계곡에 닿을 즈음 범용사가 자리잡고 있다. 내려가는 길이 너무 협소하다. 북한산성대로인 계곡길에 닿는다.
여기에서 우향우, 산성 안 중성문(中城門)으로 들어간다. 문은 대문과 좌측 암문이 있다.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을 쌓은 이듬해(1712년) 숙종은 몸소 산성에 행행(行幸)하였는데 이 때 대서문 쪽이 낮으므로 든든한 방어를 위해 안쪽에 중성(重城)을 쌓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2년 뒤(1714년) 성이 완성되었으니 그 때 만든 문이 중성문(中城門)과 암문(暗門)이었다. 그런데 죽은 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산성 안에서 명(命)이라도 끊어지면 그 육신은 대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암문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암문은 슬픈 이름 시구문(屍口門, 屍柩門)이 되었다. 나의 한 길친구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결코 이 문으로 다니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이 문으로 들어가며 장난을 친다.
'~귀신 환생이요~’
문안으로 들어가 잠시 오르니 계곡에 걸린 다리 운하교(雲河橋)가 있고 다리 건너 안 쪽에는 노적사(露積寺)가 있다. 옛 분들은 여기를 노적동(露積洞)이라 불렀다. 잠시 가파른 길 올라 노적사에 닿는다. 노적봉이 경건한 모습으로 서 있다. 300년 전 산성을 쌓은 후 이 자리에는 진국사(鎭國寺)란 절이 자리잡았었다. 85간으로 북한지를 지은 성능스님이 창건했던(八十五間 僧聖能所刱) 절이었다. 폐사된 자리에 60년대에 노적사가 세워졌다. 노적사란 이름은 원래 원효봉 아래 상운사(祥雲寺)의 옛 이름이다. 혹시 옛 자료를 읽는 분들은 혼동하지 않으시기를.
노적사에는 불탑과 석불을 세웠는데 불탑에는 네팔로부터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모셔와서 봉안했다 한다. 그래서 노적사는 적멸보궁이 되었다.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다. 노적사 법당에도 불상을 모시지 않고 벽을 뚫어 유리창 밖으로 불탑에 경배하도록 해 놓았다. 부처의 진신사리는 본래 석가가 돌아가시자 그 사리(舍利)를 8 탑에 봉안하였다. 후에 아쇼카왕이 8만4000 탑을 만들어 그 곳에 분산 안치했는데 모든 탑에야 어찌 안치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부처의 진신사리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내력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시절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100개의 사리를 가져다가 황룡사, 태화사, 통도사에 봉안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慈藏法師所將佛頭骨佛牙佛舍利百粒) 부처의 진신사리에 대한 불교도들의 믿음이 깊어지면서 근래에는 여러 사찰이 동남아에서 진신사리를 옮겨 봉안하는 일이 많아졌다.
노적사를 나와 북쪽 능선길을 넘어간다. 노적봉을 오르다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잦아지자 이 길은 출입제한구역이 되었다. 출입금지구역은 아니건만 이 곳을 지키는 직원은 위압적인 자세로 길을 막는다.
훈련도감 창고 적석사 오른편엔 경외로운 노적봉
능선 위에는 펜스로 둘러친 사묘(私墓)가 잘 가꾸어져 있다. 그 능선 너머로는 옛 건물터가 층을 이루어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가 경작했던 밭고랑에는 석축도 보이고 무수히 많은 기와 파편들이 밟힌다. 아마도 적석사(積石寺)의 옛터일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적석사는 기록되어 있는데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적석사는 훈련도감의 창고가 되었다(今爲訓局倉舍-北漢誌에서). 오른쪽으로는 노적봉의 경외(敬畏)로운 모습이 길손을 내려다본다.
10여분 정도 걸었을까 사오백평은 실히 넘을 넓은 터 한 켠에 주춧돌이 배열되고 석축도 가지런한 평탄지가 나온다. 훈련도감이 있던 곳이다. 북한지에 따르면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축성 시에 대서문 옆 수문에서부터 원효봉 염초봉 백운대 만경대를 거쳐 용암봉까지 2292보의 성을 쌓고 이 쪽 구역을 방어하였다(自水門北邊 至龍岩二千二百九十二步). 아래로는 돌을 반듯하게 손질하여 만든 연못도 보인다. 비상시에 사용할 수원(水源)이었다. 북한지에 기록된 연못을 보면 모두 26곳인데 11개소가 훈련도감 관할구역에 있었다. 이 곳 연못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훈련도감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의미를 알기 어려운 각자(刻字)가 새겨진 바위들일 것이다. 방위를 그려 놓은 바위야 보면 이해가 되는데 ‘戊’를 새긴 바위와 ‘戊法臺와 알 수 없는 문양’을 함께 새긴 바위는 해득하기 어렵다. 본래 戊라는 글자는 창 과(戈)에 도끼날이 붙은 무기를 뜻하는 글자였다. 그러니 ‘도끼날 붙은 창’이란 뜻으로 창 모(矛)의 옛 글자 형태이기도 했다. 훈련도감다운 글자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戊가 천간(天干)에 다섯 번째 글자로 빌려 쓰기 시작한 것은 그 뒤에 일이다.
또 알 수 없는 문양은 무엇일까? 아마도 날 달린 창 두 개를 캐릭터화 하여 만든 훈련도감의 심볼 마크는 아니었을까? 이제 오던 길을 이어서 간다. 잠시 후 노적봉에서 뻗어 내리는 능선의 안부를 만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노적봉이며, 왼쪽으로 가면 북장대터로 이어진다. 북한지에는 ‘장대는 3개인데 북장대는 중성문 서북에 있다(在中城門西北)’고 하였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북한도에는 노적봉에서 내려와 혈(穴)을 맺은 봉우리 위에 북장대 그림이 완연하다. 이 안부 갈림길 좌측 끝 제일 높은 봉우리에 북장대가 있다는 말이다.
잠시 후 민묘가 하나 있는 470m 봉우리에 닿는다. 북장대 흔적은 남은 것이 없다. 초석으로 쓰였을 돌 몇 개가 전부인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봉우리 이름은 정확하지 않은데 북한지에 기린봉(麒麟峰)을 설명한 내용을 보면 노적봉 아래에 있다(在露積峰下)고 했으며 달리 이 봉우리를 지칭할 만한 다른 이름은 언급한 것이 없다. 아마도 이 봉우리가 기린봉 맞을 것이다.
이제 안부로 회귀하여 대동사 방향으로 넘어 간다. 백운대 아래 백운동암문(위문) 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만난다. 앞쪽으로는 대동사가 있고 좌로 길을 잡으면 상운사 갈림길이다. 이 길로 내려오면 개연폭포를 지나는데 이내 보리사가 있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50년대 말 이승만 대통령 방문시에 영빈관으로 사용한 등운각 건물이다. 연전(年前) 번성하던 북한동 마을이 있던 이곳은 어느덧 공원화되었다. 새로 지은 북한동역사관만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을씨년스레 앉아 있다. 어디서 온 흰둥이도 관심없는지 길게 하품을 한다.
하산길은 계곡길로 잡는다. 잠시 내려 오면 계곡 건너 원효봉 아래에 있는 덕암사 갈림길을 만난다. 북한산 산꾼도 좀처럼 들리지 않는 절이다. 심력(心力)이 깊은 비구니 스님이 주지로 계신다. 산문에 들어서면 연대를 알 수 없는 작은 석불이 길손을 맞는다. 아직 모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 임시로 봉안하였다 한다. 절 마당에는 큰 석불 입상이 아랫세상을 내려다보신다. 법당은 바위굴 안에 있는데 차디찬 감로수(甘露水)가 있다. 불단 위에는 관세음과 대세지 두 보살을 협시보살로 여래께서 앉아 계신다.
산꾼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덕암사
본래 철원 심원사에 계시던 보살인데 6.25 전생 때 본존불은 인왕산 환희사로 가고, 협시보살은 이 곳 덕암사로 왔다고 한다. 6.25는 부처님도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경기도 문화재 2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라도 이산가족을 함께 사시도록 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 염원을 담고 덕암사를 나선다.
계곡옆길 내려오기를 잠시 철층계를 내려 오면 바위 사이에 칠유암(七遊巖)이라고 쓴 바위가 계곡 안에 있다. 순조 때의 문신 석재 윤행임(尹行恁)의 북한기(北漢記)에는 "삼백보 정도 따라 오르니 칠유암이 나타난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의 평장사 민지가 6명의 지인을 데리고 놀던 곳이라서 이로써 바위 이름을 정했다 (沿上三百步 出七遊巖 世傳高麗平章事閔漬從六人乎遊 巖之名以此)." 라고 칠유암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민지(閔漬)는 고려 충렬왕, 충선왕 때의 문신으로 이 곳에 그의 유서(遺棲:옛터)가 있었다(高麗文仁公閔漬遺漬在水口門內- 북한지). 칠유암 아래에는 서암사터가 있다. 산성을 쌓은 후 승려 광헌이 133간으로 창건한 절이다.(一百三十三間僧廣軒所刱). 처음에는 민지사(閔漬寺)였었는데 민공의 이름을 기휘(忌諱: 옛분이나 높은 분의 이름자를 피함)하여 서암사로 고쳤다. 요즈음 중창하려고 터 닦기가 한창이다. 서암사라는 사명(寺名)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계곡길을 계속 내려오면 홍수에 쓸려간 수문(水門)터를 만난다. 앞 쪽 바위에는 희미한 각자(刻字)가 보인다. 아마도 성을 쌓고 문을 지을 때 사람들이 적어 놓은 기록인 것 같다. 이제 무너진 수구문을 지나 속세로 돌아온다. 목이 출출하다. 일행과 들린 막걸리집 벽에 낙서가 눈에 띤다.
西厓 曉窓睡餘 小槽酒滴聲. 白沙 洞房良宵 佳人解裙聲 누군가가 취흥(醉興)에 젖었나 보다. 홍만종(1643~1725)이 지은 명엽지해(蓂葉志諧)라는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선조의 명신인 송강 정철, 일송 심희수, 서애 유성용, 월사 이정귀, 백사 이항복 이렇게 5인이 모였는데 가장 멋진 소리(聲)가 무엇인지 겨루기로 했다. 자아~ 이 소리는 어떻겠소?
백사 맑은 밤 밝은 달에 누 위로 지나는 구름소리(淸宵朗月 樓頭遏雲聲)
송강 산 가득 붉은 단풍에 먼 산 바람소리(滿山紅樹 風前遠岫聲)
일송 새벽창 잠결 작은 술통에 술 거르는 소리(曉窓睡餘 小槽酒滴聲)
서애 산간 초당에 도련님 시 읊는 소리 (山間草堂 才子詠詩聲)
월사 화촉동방 그윽한 밤 그녀 치마끈 푸는 소리(洞房良宵 佳人解裙聲)
이 저녁 문득 백사(白沙) 선생과 한 잔 하고 싶구나.
- 이한성 동국대 교수
*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 ~ 34, 156, 704번 버스환승 백화사 하차
* 걷기 코스 여기소 ~ 백화사 ~ 경천군 금송비 ~ 옛절터 ~ 옛암자터 ~ 가사당 암문 ~ 국녕사 ~ 중성문 ~ 노적사 ~ 적석사터 ~ 훈련도감터 ~ 북장대터 ~ 보리사 ~ 덕암사 ~ 칠유암 ~ 서암사터 ~ 수문터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cnbnews 제303-304호 박현준⁄ 2012.12.10 11:03:05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9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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