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 찾아 가는 길 (2)] 동호대교 앞 분포에 선 25살 청년 김시습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임진나루를 건넌 매월당은 아마도 들러가라는 상인(上人: 노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나 보다. 이내 발길을 남쪽으로 잡아 한양으로 향한다. 길은 의주대로(義州大路)였을 것이다. 파주 지나 혜음령 넘고 벽제관, 구파발, 양철평 지나 한양으로 들어섰을 것이다.
이 시기 한양의 북쪽으로 들어오는 길은 서대문, 남대문을 거치는 길이 아니라, 고려 시절 남경별궁으로 오는 길, 즉 지금의 유진상가 앞에서 좌회전하여 홍제천을 오르고 이어서 지금의 창의문이 있는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광희문을 지났거나 남소문을 나서서 분포(盆浦)에 있는 절(僧舍)로 향했다. 낙성식이 있었던 것일까? 그날 지은 매월당의 시(詩) 한 편을 읽어 보자.
분포(盆浦)의 절집, 한양
절은 찬 강가에 있어
붉은 문 물가에 비치네
한 가닥 어부의 피리 소리 멀어지고
천리(千里)에 저무는 강(江)의 봄날
부처님 전 스님은 연로하신데
사액(賜額)받은 불전(佛殿)은 새롭구나
세상에서는 비록 (새들) 예쁘다 전하지만
들새의 성품은 길들이기 어렵지
盆浦僧舍 漢京
寺在寒波上。朱門映水濱。一聲漁笛遠。千里暮江春。香火僧年老。招提佛宇新。江湖雖信美。野鳥性難馴。
참고: 초제(招提)는 나라에서 사액(賜額)한 절
이때 매월당이 갔던 분포의 절은 어디였을까? 길 찾기 퀴즈 탐험에 나서 본다. 어느 출판사가 발행한 ‘김시습 평전’에는 지금의 반포라 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매월당 자신이 한경(漢京)이라 했으니 강 건너 과천 지역이었던 반포일 리는 없다. 달리 분포가 기록된 옛 지도나 지리서는 찾기 어려운데 다행히 분포(盆浦)를 넣어 쓴 시편(詩篇)들이 개인 문집에 남아 있다.
숙종 때 문인 이서상(李端相: 1628~ 1669년)의 정관재집(靜觀齋集)에 실린 시를 본다.
저물녘에 동호에 배를 대다. 홍우와 배를 띄우기로 기약하였다〔暮泊東湖 期與洪友泛舟〕
아스라이 나는 광릉의 물새요
渺渺廣陵鳥
흐릿하게 보이는 분포의 누대로다
依依盆浦樓
석양빛 속에도 강변은 아득하고
夕陽猶遠渚
가랑비 속에는 외로운 배 하나
疏雨自孤舟
물이 따뜻하니 물고기는 신났고
水暖魚知樂
모래톱이 기니 해오라기 시름겹다
沙長鷺喚愁
오늘 밤 동호의 달빛 속에서
今宵湖上月
벗님과 노닐기로 기약을 했지
期與故人遊 (기존 번역 본)
이 시에서 보면 분포는 동호(東湖: 동호대교 앞 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 1613년)의 진시무팔조계(陳時務八條啓)에는 한강에 자리한 진(陳)을 열거했는데 “고양(高陽) 행주(幸州)로부터 양화도(楊花渡), 용산(龍山), 동작(銅雀), 한강(漢江), 분포(盆浦), 삼전도(三田渡), 광진(廣津), 평구(平丘), 두미(斗尾), 용진(龍津), 여주(驪州), 남강(南江), 원주(原州) 흥원창(興元倉)을 거쳐 강물 상류에 이르기까지…”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즉 한강진(지금의 한남대교)과 삼전도 건너(뚝섬) 사이에 분포가 있었다는 말이다.
내친김에 하나 더 찾아본다.
율곡선생전서에 있는 시(詩) 한 편이다.
권용경이 찾아왔다. 이때 그는 (황해도) 안악의 훈도였는데 20년을 분포에서 함께 논 사람이다.
시인(권용경)을 못 본 지가 20년이네
나는(석담: 율곡의 다른 호) 오늘 내일 흔연하다네
헤어진 뒤 세상사가 뒤섞여 헝클어졌는데
동호(東湖)에서 달 배 띄우고 꿈꾸어 보네
權用經來訪。時爲安岳訓導 二十年同遊盆浦者也。
不見詩人二十年。石潭今日兩欣然。別來世事渾無賴。夢著東湖載月船。
분포는 지금의 동호대교가 있는 동호(東湖), 즉 두뭇개(옥수동, 금호동) 포구를 이르는 지명일 것이다. 동호에 물동이처럼 오목하게 들어간 곳을 분포라 부른 것이다. 지금은 이곳에 3호선 옥수역이 들어섰다. 아직도 그 안 동네에 미타사(彌陀寺: 두뭇개 승방)가 천년을 넘겨 서 있다.
사적기를 보면 신라 진성여왕 때인 888년에 세워지고 1115년 종남산 남쪽 이곳으로 옮겼다 한다. 매월당이 방문했을 때도 수백 년 자리한 절이었을 것이다. 여러 차례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언제부터인가 서울에 있는 4대 니사(尼舍: 비구니 사찰)의 대표적 절로 자리 잡았다.
조선 시대 한양에는 4개의 비구니 승방이 있었다. 창신동의 청룡사(새절승방), 보문동의 보문사(탑골승방), 옥수동 미타사(두뭇개승방), 석관천의 돌곶이승방이 그곳들이다. 니사로 기록된 이곳 두뭇개승방은 지금도 ‘종남산 미타사’로 비구니 승려들의 수행 도량으로 남아 있다. 경조오부도에는 이 주변에 두모포(豆毛浦)와 니사(尼舍), 저자도가 그려져 있고 강 건너로는 압구정이 기록되어 있다.
두모포 또는 두뭇개란 한강과 중랑천 두 물이 만나는 곳이라서 붙은 지명인데
‘두물+ㅅ+개’가 ㄹ이 탈락하여 ‘두뭇개’가 되었다. 그런데 한자로 지도를 그리거나 기록을 하려다 보니 뜻으로 하면 양수포 또는 이수포(兩水浦, 二水浦)가 될 것인데 소리로 쓰다 보니 두모포(豆毛浦)가 되어 두 물(二水)이 콩털(豆毛)이 되는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저자도(楮子島)는 두 물이 만나는 지점에 유속이 느려지다 보니 모래와 자갈이 침전하여 생긴 동호(東湖)의 오랜 섬이었다. 이덕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 출정은 이곳에서 이루어졌는데 세종은 여기에 납시어 출정하는 수군을 사열하였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지닌 저자도는 60~70년대 개발의 바람으로 파여나가서 앞구정동 저지대를 메우는 골재로 사라졌다. 그 위에는 지금의 압구정 아파트들이 들어섰으니 시대의 변천은 때로는 야속하기도 하다.
물론 그곳에 있던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 터도 묻혔다. 압구정의 흔적은 겸재가 그린 두 점의 압구정도로 남았으니 그 또한 애석하다. 매월당과 한명회는 동시대 사람이지만 매월당이 미타사에 왔을 때는 압구정은 아직 세워지지 않을 때였다. 후에 매월당은 압구정에 들러 한명회가 쓴 시에 몇 글자를 고쳤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만년에 압구정에 가서 유유히 생을 즐기려고 써붙인 한명회의 시가 이것이었는데,
젊어서는 사직을 돕고 靑春扶社稷
머리 희끗해서는 강호에 묻히련다. 白首臥江湖
이를 본 매월당은 한 필(筆)에 그 가식을 고쳐버렸단다.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靑春亡社稷
머리 희끗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
白首汚江湖
한명회도 매월당도 강물 따라 갔다. 니사 윗동네에 있던 젊은 선비들 공부방 독서당 터도 아파트가 되어 사라졌다.
후세 1781년(정조 5년)에는 다산 정약용이 과거에 급제 소식을 받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잔 후 배를 띄워 고향마을 소내로 돌아갔다는 시(詩)를 남겼다. 선생의 벼슬길은 이곳 분포에서 배를 타고 출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매월당도 길들이기 힘들다던 분포 강가 물새들…. 쇠오리, 왜가리,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민물가마우지, 쇠백로, 논병아리, 넓적부리, 심지어는 괭이갈매기까지 이곳에 와 물 위에서 논다. 이제는 길들이려는 이 아무도 없다.
1459년 절 앞까지 찰랑이던 한강 물을 바라보며 25살의 봄날 저녁을 물새에 실어 보냈던 매월당. 3호선 전철은 분주히 동호대교를 건너 분포의 절 곁 언덕 위 터널로 사라진다. 사람은 가고 분포의 절집 목탁 소리는 도시 소음에 묻힌다. “나무 티끌세상”.
제765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4.02.14 16:02:57
[매월당 시 찾아 가는 길 (2)] 동호대교 앞 분포에 선 25살 청년 김시습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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