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77) 연강임술첩 ①] 적벽의 그날, 달 뜬 임진강에서 글 쓰고 그림 그리다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1742년(영조 18년) 10월 보름날, 경기도관찰사 홍경보(洪景輔)는 도내 동부 지역을 순시하면서 삭녕(朔寧) 우화정(羽化亭)으로 연천현감 신유한(申維翰)과 양천현령 정선(鄭敾)을 불렀다. 때는 마침 10월 보름이라서 송나라 소동파가 즐겼던 적벽의 뱃놀이가 떠오른 것이다. 소동파는 장강(長江) 황주(黃州)로 좌천당해 와 있던 동안 적벽부(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는데 마침 10월 보름날이 적벽 아래서 뱃놀이하며 후적벽부를 지은 날이었다.
이렇게 모인 세 사람은 삭녕(朔寧: 지금은 북한 땅이 된 연천 위 임진강 상류) 우화정(羽化亭)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 달이 환히 뜬 웅연(熊淵: 연천 중면 삼곶리)에 도착하였다. 이날의 뱃놀이에 홍경보는 서문을 쓰고, 글 잘 쓰는 신유한은 부(賦)를 짓고, 겸재는 그림과 함께 제발(題跋)을 달아 만든 서화첩이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다. 셋이 각각 한 첩씩 나눠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은 출발 모습을 그린 우화등선(羽化登船)과 도착 모습을 그린 웅연계람(熊淵繫纜)이다.
우선 이날의 뱃길을 ㄱ사 위성지도로 살펴보자. 지도 1에서 1은 삭녕 우화정이다. 지금은 삭녕이란 지명도, 우화정도 없다. 2는 황강(黃江)댐이다. 언젠가 북에서 가두어 두었던 물을 예고 없이 방류하여 임진강변에서 행락을 즐기던 사람들 여럿이 목숨을 잃고 농경지가 침수되는 아픔을 겪게 한 북 측의 댐이다. 아직도 이 댐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고 있으니 그 옛날 뱃놀이를 즐겼던 이들이 들으면 어떨까 모르겠다.
3은 휴전선이다. 그 가까이 안보관광을 위해 태풍전망대가 설치되었지만 요즈음에는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아마도 코로나19와 아프리카돼지열병 때문인 것 같다. 이 글을 쓰기 전 다시 한번 가 보았는데 역시나 들어갈 수 없었다. 4는 연강임술첩 도착지 웅연(熊淵, 또는 熊灘)이다. 아쉽게도 지난해 수해를 입어 혹시나 지뢰가 떠내려 왔을까 안전을 염려하여 가까이 갈 수가 없다. 멀리서 보아도 물살이 빠르다. 웅탄(熊灘)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 같다.
5는 중면사무소가 있는 삼곶리(三串里)이다. 옛날과 달리 전방의 이미지는 없고 산색(山色) 푸르고 공기 맑은 전원마을이다. 남북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규모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이 지역 옛 지도들도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69쪽). 삼곶리가 그려져 있고 이제 읽게 될 횡강(橫江), 문석(文石)의 위치도 그려져 있어 연강임술첩 글을 읽는 데 도움을 준다.
전문가는 원문을 읽을 게 바람직
이제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에 실린 세 사람의 글을 읽고자 한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일이지만 글 쓰는 일을 하는 이들이나, 강의 해설을 하는 이들에게는 되도록 원문을 한 번 보시기를 권한다. 떠다니는 글은 오류와 오역이 많아 잘못된 정보에 접할 우려가 있어서다.
관찰사 홍경보의 글
余於巡審之路 抵右峽之漣朔間 實壬戌十月之望也 與陽川鄭使君元伯 漣川申使君周伯 約會于羽化亭 乘舟順流而下 歷橫江文石 薄暮泊熊淵得月而罷 蓋倣蘇子黃岡之遊也 是行也沿洄四十里 左右皆峭壁又有賓客酒肴之美 其視黃岡之遊 殆無不同而余與蘇子所遇 有不同者. 蘇子之遠謫江湖之間 再遊赤壁之下望美人兮一方 謀諸婦以斗酒 聞洞簫而不樂 倚長嘯而興悲 所與遊者亦不過邨社間二客耳 其徘徊感慨之意 孤羈落拓之狀 觀於二賦可知 余則不然 遭遇明時 謬膺藩寄而 不出於畿甸之外 又於旗纛車馬之側 得此江山之勝 而鄭申二使君之文章墨妙 俱在屬縣 得與之同遊 此皆蘇子之所未能 而余乃有之 玆非其幸也歟 遂擧酒自賀 仍屬兩使君曰: 幸爲我賦其事而圖畵之 觀察使洪景輔識
내가 순행하며 살피는 길에 (경기도) 우측 골짝 연천과 삭녕 간에 다다른 것은 실로 임술년(1742년 영조 18년) 10월 보름이었다. 양천의 사군(使君: 수령) 정원백(현령 정선), 연천의 사군 신주백(현감 신유한)과 삭녕 우화정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 배를 타고 내려가며 (횡산리 앞) 횡강(橫江) 문석(文石)을 거쳐 어스름 녘에 웅연(熊淵)에 정박했는데 달이 뜨면서 파하였다. 이는 대저 소자(蘇子: 소동파 선생)의 황강(黃岡) 뱃놀이를 본뜬 것이었다. 이번 길은 물길 따라 40리인데 좌우 모두 우뚝한 절벽이고 빈객과 주효의 멋도 있었으니 그 황강의 뱃놀이와 거의 같지 않은 게 없었으나 나와 소동파는 처한 상황이 달랐다. 소동파는 강호지간 멀리 적거(謫居)에서 재차 적벽 아래서 뱃놀이하며 미인을 바라봐도 일방이었고(이 부분은 전적벽부의 한 구절로 ‘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 아득하고 아득한 내 마음이여. 미인을 바라봐도 하늘 저쪽이구나’라는 부분을 떠올려 쓴 것임), 아내에게 상의하여(諸婦의 諸는 之於를 줄인 표현으로 뜻은 ‘~에게’이고 음은 ‘저’이다) (가난한 아내가 준비해둔) 술 한 말로 손님과 뱃놀이를 했으니 퉁소 소리 들어도 즐겁지 못했고 긴 휘파람에 의지해도 슬픈 감흥이 일었으며 함께 뱃놀이하는 사람도 촌사람 두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배회하는 감개의 마음과 외로운 객지살이의 불우한 상황은 이부(二賦: 전적벽부, 후적벽부)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그렇지 않다. 좋은 시절을 만나 (나 같은 사람을) 잘못 지방관을 맡기시고 수도권 밖으로 내치지 않으셨다. 또 관찰사의 깃발과 거마의 곁에 이 같은 강산의 명승을 얻고 문장과 묘묵의 정, 신 두 수령이 우리 속현에 있으니 그들과 함께 뱃놀이를 한다. 이 모든 것을 소동파는 할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있으니 이는 행운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술을 들어 자축하고 두 수령에게 부촉하여 말하였다. “바라건대 나를 위해 이 일을 부(賦)를 짓고 그림으로 그려 주시게.” 관찰사 홍경보 쓰다.
이렇게 하여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은 탄생하였다. 요즈음 가치관으로 보면 경기도지사가 양천구청장과 연천군수를 오라 해서 임진강 뱃놀이를 하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림 그리고 글을 써서 세상에 알린 일이니 격세지감이 든다. 이날 뱃놀이 길은 ㄱ사 항공 지도와 옛 지도로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66쪽).
왕이 있던 시대의 오른쪽·왼쪽 개념은?
잠시 여기에서 살펴볼 방위개념이 있다. 홍경보는 연천과 삭녕을 우협지연삭간(右峽之漣朔間)이라고 썼다. ‘오른쪽 골짜기 연천 삭녕’이라고 쓴 것이다. 연천, 삭녕이 왜 경기도 오른쪽일까? 옛사람의 방위개념은 항상 임금이 계신 궁궐이 중심이 된다. 임금이 계신 한양에서 바라보면 연천, 삭녕은 경기도 우측이니 경기우도(京畿右道)에 속하게 된다. 반대로 경상도를 보면 안동, 봉화, 영양은 경상좌도(慶尙左道), 함양, 거창은 경상우도(慶尙右道)가 된다.
이제 부촉을 받은 연천 현감 신유한이 어떻게 부(賦)를 지었는지 살펴보자.
연천현감 신유한의 글
伊季壬戌十月之望 畿輔觀察洪相公 肅命旬宣 攬轡原隰 駟車彭彭 早發寧峽 陽漣兩尉 薄焉追躡翩其鬷邁 度亭坂之嶢兀 木落山淸 江鳴石出 相公曰: 嘻今夕何夕 緬坡翁之豪遊 我誦其辭 寤寐風流 二客旣同 歲月惟侔 睠玆江壁 曷異黃州 峕不可以再得 盖迨今而亟謀 於是飭津吏整蘭舟 威儀孔燕 帳御咸修 翼小船以先後齎玉罇與華髻 高渡廣而容筏 茅茨隱於薈蔚 漁火雜於樵聒 仰栖鶻之危巢 俯潛蛟之幽窟 剔神文於巖髓 羲姒邈其靡 質明沙鋪練 斷霞成綺 騎吹遶岸 候火如市 亮殊觀之已 飫復焉往而求美 船連蜷而不進 命廚疱而陳饋 傾霞酌而半酣間毫墨以言志 古琴冷冷而寫興 洞簫嫋嫋以揚聲 淸彈水僊之操 怨和明月之章繽江妃之闇欷 怳河伯之顚狂 夜厭厭而橫參 霜露浥而侵裳 相公驩焉擧酒屬客曰: 今日之遊 坡翁與相公之所共得 卽吾漢北江山 奚遜於吳江赤壁 遂鼓舷而少歌曰: 赤壁之僊兮緲雲天 赤壁之賦兮落塵土 不如熊江今夜月 婆娑脚踏船尾兮滄浪歌 歌竟 相公引壺更酌 陶然而喜 蓋二客之不能飮 飮半勺亦醉 僉曰:興蘭樂不可窮 夜歸縣齋琴淸月籠 漣川縣監 申維翰 稿
이 해 임술년(1742년 영조 18년) 10월 보름에 경기관찰사 홍상공이 엄숙한 명을 두루 펴고자 말고삐를 잡고 관내를 순심하였는데 수레 끄는 말들이 팽팽하였다(위용이 씩씩하였다). 아침 일찍 삭녕 협곡을 출발하니 양천, 연천 두 수령이 서둘러 와서 날듯이 가볍게 함께 나아갔다. 높다란 언덕 위 정자를 지날 때면 나뭇잎은 떨어져 산은 맑고 강물은 울 듯 소리 내고 돌들이 드러났다.
상공 말씀이: “아, 오늘 저녁이 어떤 저녁인가? 먼 옛적 파옹(坡翁, 소동파)이 호방하게 뱃놀이 한 날이다. 나는 그 글을 읊으면 자나 깨나 풍류가 이는데 두 손님도 이미 (소동파 그때와) 같고 날짜도 생각컨대 같네. 이 강벽을 둘러보면 어찌 황주(黃州: 소동파가 좌천되어 간 양자강가 고을)와 다르겠소? 때는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대저 이제 서둘러 도모해 봅시다.” 이에 나루지기를 불러 유람선(蘭舟)을 정비케 하니 거동이 매우 정연하였다. 휘장과 용품들이 모두 갖추어지고 보조하는 작은 배들이 앞뒤로 술동이와 화계(華髻: 기생과 악사?)를 갖추었다. 높은 나루는 넓어 뗏목을 수용하였고 초가집들은 초목에 가려져 있다. 어화(漁火)는 초군(樵군)들과 섞여 떠들썩하다. 고개 들어 아슬아슬한 매의 집을 바라보고 고개 숙여 교룡의 깊은 굴을 보면서 바위에서 신의 글자를 읽어내고 희사(羲姒: ?)는 물가(靡: ?)에 아득하다. 여명에 모래는 베 바래듯 펼쳐져 있고 한 조각 놀은 비단 같았다. 악공 소리는 강가를 둘렀고 손님맞이 횃불은 저잣거리 같았다. 정말 멋진 광경을 보았으니 다시 어디에 가서 아름다운 구경을 구하겠는가? 배가 움짓하며 나아가지 않는데 주포(廚庖: 주방)에 명하여 음식을 차렸다. 술잔을 기울여 취흥에 접어들어 가니 필묵으로 시가를 지었다. 고금(古琴)은 낭랑하게 흥을 그려내고 퉁소는 간들간들 소리를 드날리네. 맑게는 수선의 조(水仙操)를 타고 원망의 느낌은 명월장으로 화답하여 어지러우니 강비(江妃: 뱃놀이에 온 기생?)는 남모르게 탄식하고 황홀한 하백(河伯: 여기서는 강물)은 미친 듯 요동치네. 밤은 길고 길어 삼성(參星: 28수에 속하는 별자리, 3개의 별이 있음)이 비껴 있고 이슬과 서리는 촉촉이 옷을 적시네. 상공은 기쁘게 잔을 들어 객에게 권하면서 “오늘의 뱃놀이는 소동파 옹과 상공이 같이 얻은 것이라오. 우리 한북(漢北)의 강산이 어찌 오강의 적벽만 못하겠습니까?” 드디어 뱃전을 치며 짧막히 노래를 하니,
적벽 신선이여 운천에 아득하고
적벽의 시부(詩賦)여 진토로 떨어졌으니
오늘 밤 달 웅강(熊江)만 못하리라.
가뿐히 고물에서 발굴러 춤추네
창랑가(滄浪歌)여.
노래가 끝나자, 상공은 술병을 끌어다가 다시 따르고는 거나하게 취하여 기뻐하였다. 대저 우리 두 객은 술을 마시지 못하니 반 잔만 마셔도 역시나 취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흥겨운 음악은 끝날 수 없다고 했다. 밤에 현재(縣齋)로 돌아오니 거문고 소리는 맑고 달은 둥글고 높다. 연천현감 신유한 쓰다.
흐드러진 뱃놀이가 한판 벌어졌다. 새삼 알게 된 사실이 겸재와 신유한은 술을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겸재가 그림 뒤에 붙인 제발(題跋)을 만나는 시간이다.
겸재의 글
是歲十月之望 同漣川倅申周伯 陪觀察洪公 遊於羽化亭 蓋用雪堂故事也. 周伯以觀察公命 作賦記 余又畵以繼之 各藏一本于家 是爲漣江壬戌帖云
陽川縣令 鄭敾 書
이 해 10월 보름에 연천 수령 신주백과 관찰사 홍공을 모시고 우화정에서 놀았는데 대저 설당(雪堂: 소동파가 황주 적거생활 중 지은 집)의 고사를 말한 것이다. 주백은 관찰사의 명(命)으로 부기(賦記)를 지었고 나는 또 그림으로 그것을 이어, 각각 집에 1본씩 수장했으니 이것을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라 한다. 양천현령 정선(鄭敾) 쓰다.
이상으로 본 것이 연강임술첩의 세 주인공이 쓴 글이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 차에는 연강(漣江) 길 나들이를 나서려 한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제700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5.28 11:26:21
[겸재 그림 길 (77) 연강임술첩 ①] 적벽의 그날, 달 뜬 임진강에서 글 쓰고 그림 그리다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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