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81) 화적연] 한탄강의 원뜻을 알면 한탄스럽지 않을텐데…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 따라 가는 길은 임진강 수계를 벗어나 한탄강(漢灘江)으로 넘어 간다. 한탄강은 이제는 북녘 땅이 된 강원도 북쪽 끝 평강(平康)에서 발원하여 김화(金化), 철원(鐵原), 옛 영평(永平: 포천 북부), 연천을 지나면서 전곡 은대리성 앞에서 차탄천(車灘川)을 품고 임진강 주상절리 아래에서 임진강에 합류한다. 옛 영평 지도에는 마아천(摩阿川, 麻阿川)으로 기록되었고, 차탄천과 합수 지점은 대탄(大灘)으로 기록되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도 대탄(大灘)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차탄천에 비해 큰 여울(한 여울: 大灘)을 의미하는 이름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름 한탄(漢灘)은 한(크다, 大)의 음을 빌린 것(音借)으로 보인다.
겸재는 이곳 한탄강 주변을 그린 4점의 그림을 남겨 놓았다. 화적연(禾積淵), 삼부연(三釜淵), 정자연(亭子淵), 화강백전(花江栢田)이다. 겸재는 일생 세 번의 금강산 기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은 36세 되던 해 1711년 같은 동네의 백석(白石) 신태동(辛泰東: 1659~1729년) 일행과 함께였으며 이때 그려서 백석에게 전한 그림이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으로 전해지는 13점의 그림이다. 국립박물관 소장의 이 그림 13점은 <피금정披衿亭>, <단발령망금강산>, <장안사長安寺>, <보덕굴普德窟>,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불정대佛頂臺>, <백천교百川橋>, <해산정海山亭>, <사선정四仙亭>, <문암관일출門岩觀日出>, <옹천甕川>, <총석정>, <시중대>이다. 내금강과 외금강을 그린 그림들로 아쉽게도 한탄강 관련 그림들은 없다.
겸재는 다음해 1712년 사천 이병연의 초청으로 다시 금강산 여행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어떤 연구자들은 그 전년 신묘년 여행 때도 사천 일행과 함께 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겸재의 1712년 금강산 여행은 별도의 여행은 아닌 셈이다).
이때 겸재는 30여 점의 그림을 그려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라는 이름으로 사천 이병연에게 전한다. 이 그림들에는 삼연 김창흡과 사천 이병연의 제화시들이 달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때 그려진 해악전신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36년 뒤, 겸재는 다시 21점의 <해악전신>을 그린다. 72세인 이때 겸재가 금강산을 다시 방문했는지는 다른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전문가들은 1712년 화첩을 다시 그린 것으로 여기고 있다. 1712년에는 30점이었다가 1747년에는 21점으로 줄었지만 이병연은 이 화첩에 자신이 1712년의 화첩에 썼던 제화시를 다시 써넣었고, 이미 고인이 된 김창흡(金昌翕, 1653~1722년)의 시는 홍봉조(1680~1760년)가 대필해 넣었다. 화첩은 그림마다 김창흡과 이병연의 시가 수록되고 장첩 경위를 알 수 있는 발문까지 갖추어져 완성도 면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 21점의 그림들은 <화적연禾積淵>, <삼부연三釜淵>, <화강백전花江栢田>, <정자연亭子淵>, <피금정>, <단발령망금강산>, <장안사비홍교長安寺飛虹橋>, <정양사正陽寺>, <만폭동萬瀑洞>, <금강내산金剛內山>, <불정대>, <문암門巖>, <해산정>, <사선정(삼일호)>, <문암관일출>, <총석정>, <시중대>, <용공동구龍貢洞口>, <당포관어唐浦觀漁>, <사인암舍人岩>, <칠성암(七星岩)>이다. 보물 1949호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나라 지식인들의 산수기행 따라한 조선 선비들
우리가 이제 만날 그림들은 바로 겸재의 두 번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속 그림들이다. 이 화첩은 하마터면 매국노 송병준(宋秉畯, 1858~1925년)의 손자 송재구(宋在龜)의 집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한 것을 구해낸 것이었다.
한편 이런 그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흐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가 희망을 주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자 명나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산수기행(山水紀行)이 흐름을 타기 시작하였다. 왕세정(王世貞) 같은 이는 명산기(名山記: 名山勝槪記)를 발간하여 붐을 일으켰으며, 서하객(徐霞客)으로 알려진 서광조(徐宏祖)의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 서하객 여행기)는 산수 기행과 문예 전반에 변화를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조선에서도 해동명산기와 와유록이 편찬되는 열풍이 나타났다. 문인들은 주변 명산을 다니면서 유산기(遊山記)를 남겼고 금강산 유람(遊覽, 探勝, 歷勝)도 유행을 탔다. 유금강산기, 유금강록, 관동록, 금강산기행록, 금강산록, 유금강산록 등 기록도 많이 남겼다.
참고로 조선 후기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살피면 조선 양반들의 행유(行遊) 문화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춘명일사(春明逸史)에 명승 유람을 기록한 것인데,
나는 기내(畿內: 서울 경기 지방)의 경우에는 도봉산(道峯山), 수락산(水落山), 남한산(南漢山), 북한산(北漢山), 영평 팔경(永平八景) 및 송악산(松岳山), 박연폭포(朴淵瀑布), 마니산(摩尼山), 정족산(鼎足山), 미지산(彌智山), 용문산(龍門山), 운악산(雲岳山), 현등산(懸燈山), 서운산(瑞雲山), 청룡산(靑龍山) 등을 들러 구경하였다. 관서의 경우에는 연광정(練光亭), 담담정(澹澹亭), 통군정(統軍亭), 강선루(降仙樓), 황학루(黃鶴樓), 백상루(百祥樓) 등의 누정(樓亭)을 둘러보았고, 호서의 경우에는 사군(四郡), 속리산(俗離山), 성주산(聖住山), 청라산(靑蘿山), 계룡산(鷄龍山), 유성(儒城), 부소산(扶蘇山), 백마산(白馬山) 등지를 둘러보았다. 영남의 경우에는 태백산(太白山), 소백산(小白山), 조령(鳥嶺), 용추(龍湫), 통도사(通度寺), 영남루(嶺南樓)를 둘러보았다. 호남의 경우에는 변산(邊山), 격포(格浦), 법성포(法聖浦), 칠양(七洋), 만마동(萬馬洞)과 송광사(松廣寺), 금산사(金山寺)를 둘러보았다. 해서에 있어서는 구월산(九月山), 수양산(首陽山), 정방산(正方山), 결포(結浦) 등지를 둘러보았고, 관북에 있어서는 석왕사(釋王寺), 백운사(白雲寺) 등의 여러 절과 석문(石門), 구경(龜景) 등의 대(臺)를 둘러보았고, 관동에 있어서는 내금강(內金剛), 외금강(外金剛), 영동 팔경(嶺東八景) 및 설악산(雪嶽山), 소양강(昭陽江) 등지를 둘러보았다. 이는 40년 동안에 유람하여 감상한 것이다.
이 정도면 요즈음의 우리 시대에도 만만치 않은 수준 아니겠는가? 더욱이 영의정까지 지낸 양반이.
그런데 춘천박물관에 가면 전시물로 이런 양반들의 나들이 할 때 갖추는 준비물 명세를 기록해 놓은 것이 있다(사진 1). 혹시 그 첫 번째 항목이 무엇인지 추측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답은 남녀(藍輿: 가마). 양반들은 산을 오를 때도 남여를 탔던 것이다. 평지 먼 길을 갈 때는 말을 타고, 산에 오를 때는 남여를 탔음을 겸재의 신묘년 풍악도첩 ‘백천교’는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그 남여는 누가 메었을까? 사진 2에서 보듯 금강산 산사의 승려들이었다.
그림 좌측 아래 남여 옆에 고깔 쓴 승려들 모습이 보이고 우측 아래에는 말과 함께 패랭이 쓴 노복들이 보인다. 조선 시대 승려들은 천민이었기에 끽소리 한마디 할 수 없이 양반님들을 위해 남여를 메었다.
한편 겸재 일행처럼 한양에서 출발하는 금강산 탐승객들은 어느 길을 경유해서 금강산에 갔을까? 춘천박물관 전시물은 그 답을 지도 위에 표시해 놓았다(사진 3). 이 길은 관북대로(關北大路)라 하여 한양 흥인지문을 출발하여 함경북도 경흥까지 가는 이른바 경흥대로(慶興大路)였다. 길은 흥인문을 나선 뒤 수유리 ~ 다락원(도봉산역) 앞 ~ 의정부 ~ 축석령 ~ 송우리 ~ 안기역(포천 신읍) ~ 단창거리(신북면 신평리) ~ 만세교 ~ 운천(영평) ~ 철원 갈말(풍전역) ~ 갈현(가로개 마을) ~ 김화 생창(생창역) ~ 김화 읍내리(김화)를 지나 회양 ~ 철령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의정부에서 김화까지는 43번 국도와 거의 일치한다.
겸재 일행은 이 길로 금강산 유람에 나서면서 아마도 영평팔경(永平八景)을 유람하였을 것이다. 영평(永平). 지금의 포천 북부 지역인데 한때는 대도호부이기도 했으나 1914년 포천과 합쳐지면서 영영 사라진 행정구역이 되었다.
포천에서 철원으로 가다보면 영중면(永中面), 영북면(永北面)을 지나게 된다. 영평을 아는 사람은 이 지명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가 영평의 중심부, 북부였겠구나 하고.
옛사람들이 그냥 놔두지 않은 영평팔경
산이 수려하고 한탄강과 그 지류들이 산과 마을을 끼고 돌아 지금도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옛사람들은 이런 곳을 가만두지 못해 이름을 붙였다. 화적연, 와룡암, 선유담, 금수정, 백로주, 창옥병, 청학동, 낙귀정지. 이름하여 영평팔경(永平八景)이다. 금강산 유람을 가는 이, 이 지역에 은거한 이들이 그림과 글을 남겼다.
오늘은 겸재의 첫 그림 화적연을 찾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금강산을 유람 가는 이라면 빠짐없이 들렀던 곳이다. 지금은 43번 국도를 타고 철원으로 가다 보면 좌측으로 화적연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길을 알린다. 내비게이션의 지번은 ‘영북면 북원로 248번지길 31-2’이다. 사일리와 자일리 경계 한탄강에 노적가리 같은 바위가 강물에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은 고요하고 모래사장과 호수 같은 물 그리고 큰 달팽이 같기도 하고 거북이가 고개를 든 것 같기도 한 바위가 어우러져 저절로 절경임을 알리고 있다.
주변에는 주상절리도 보이고 화산석인 현무암을 비롯하여 여러 바위와 돌들이 강변을 메우고 있다. 한탄강은 13만 ~ 50만 년 전 북쪽 평강의 화산 폭발로 인해 형성된 국내 유일의 현무암 협곡을 이루고 있다 한다. 지질학적으로 특이한 지형도 많아 지질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안내판에는 어느 농부가 오랜 가뭄에 시달리다가 화적연에 와서 한탄을 하니 용이 하늘로 오르면서 그날 밤부터 비가 내렸다는 전설이 쓰여 있다. 이런 전설 탓인지 화적연은 나라의 기우제를 지내는 신성한 곳 중 하나였다. 왕조실록에는 선조, 인조, 숙종, 영조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기록들이 전해진다.
선조와 숙종 때 기록을 잠시 보자.
선조 32년 기해(1599) 5월 3일, 예조가 특별 기우제를 박연(朴淵)·도미진(渡迷津)·화적연(花積淵)·관악(冠岳)·마리(摩利) 등 산에서 지낼 것을 청하니, (당시 6차나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께서 이에 따랐다.
禮曹請行別祈雨祭于朴淵、渡迷津、花積淵、冠岳、摩利等山, (時已六次祈雨而不雨故也。) 上從之。
숙종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오래도록 가물므로, 여러 신하들을 나누어 보내서 송경(松京)의 박연(朴淵), 영평(永平)의 화적연(禾積淵), 양근(楊根)의 도미진(渡迷津), 과천(果川)의 관악산(冠岳山)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時久旱, 分遣諸臣, 禱雨於松京 朴淵、永平 禾積淵、楊根 渡迷津、果川 冠岳山。
기우제에서는 무어라 빌었을까?
병자호란 후 눈물을 머금고 청태종비를 쓴 백헌 이경석의 백헌집에는 1628년(인조 6년) 화적연 기우제의 제문이 실려 있다. 이때 가뭄이 심하여 농작물 이파리가 하얗게 말라 죽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신령스런 못 물 엉겨 모이니 뭇 물줄기 흘러 감도네. 구름 따라 비 내려 주시고 태만 없이 응험있게 하소서. 지금 이 큰 가뭄에 백성 목숨 위태롭네. 덕 없음은 제게 있지 맨손의 백성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하찮은 버팀도 없이 날로 두려움이 더합니다. 시원한 빗줄기와 단 못이여, 이 굶주림에 은혜 베풀어 주소서.
靈湫凝湛。衆流攸匯。與雲降雨。有應無怠。今玆大旱。民命其殆。失德在予。赤子何罪。微誠未格。憂懼日倍。庶霈甘澤。惠此飢餒。-右禾積淵 長.
비는 왔을까?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농부의 전설로 볼 때나 백헌의 인품으로 볼 때 아마도 흡족히 내렸으리라.
이렇듯 화적연은 농경사회를 대변하는 이름 화적(禾積: 벼 낫가리)을 달고 있지만 그 외관에 따라 사람마다 달리 보기도 했다.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 1589~1670년)는 동유록(東游錄)에서 용호산 12영(龍護山十二詠: 명성산 줄기)을 읊으면서 화적연을 석룡퇴(石龍堆)라 했다.
은은한 석룡퇴 隱隱石龍堆
웅장하게 서린 씩씩한 수문이지 雄蟠壯水門
거센 물결에도 우뚝한 단단한 기둥 狂瀾標底柱
자물쇠처럼 그 기세 길이 존엄하네 關鍵勢長尊
박세당의 서계집에는 둘째 아들 박태보가 화적연을 귀룡연(龜龍淵)으로 부르고 있다.
화적연
이곳은 풍전역(豐田驛)에서 10여 리 되는 곳으로 비를 비는 곳이다. 암석이 극도로 기괴하여 윗부분은 마치 용머리처럼 앙연히 두 개의 뿔을 이고 있고 아랫부분은 거북 같다. 그 밑에 맑은 연못이 짙푸르게 고였다. 서쪽 벼랑은 모두 바위 봉우리인데, 삐죽삐죽 둘러선 것이 열두 봉은 됨 직하다. 박태보가 “이 바위 이름이 너무 속되니 귀룡연(龜龍淵)이라 불러야 합니다”라고 한 인연이 있는 곳이라 떠나기에 임해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자동 안개에 옷소매 젖어 衣袖沾殘紫洞煙
표표히 귀로에 귀룡연에 들어섰네 飄飄歸路入龍淵
더욱 어여뻐라 그림 같은 열두 봉우리가 更憐六六峯如畫
풍악산 일만이천 봉에 방불한 것이 欲逼楓岑萬二千
‘入’은 指이다.
(기존 번역 전재)
禾積淵
此地去豐田驛十餘里。乃禱雨處。巖石極奇怪。上頭。昂然戴兩角若龍首。下頭。如龜。其下澄淵凝綠。西崖皆石峯。參差環擁。數可十二。泰輔謂此巖名太俗。可喚作龜龍淵。臨去甚覺難捨。
衣袖沾殘紫洞煙。飄飄歸路入龍淵。更憐六六峯如畫。欲逼楓岑萬二千
入作指.
한편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는 유석향(乳石鄕)이라 하였다. 바위 색깔이 희어서 그랬는가, 가만 보면 둥글게 올라온 바위 끝 두 봉오리는 여인네 젖무덤 같기도 하다. 이렇듯 명승(名勝)이다 보니 이름도 많고 많다.
미수 허목은 화적연기(禾積淵記)를 남겼다.
화적연기(禾積淵記)
체천(砌川: 한탄강 최상류)의 물은 청화산(靑華山)에서 발원하여 화강(花江: 김화를 흐르는 한탄강 상류)의 물과 합류하여 육창(陸昌: 강원 철원/鐵原의 옛 이름)을 지나 칠담팔만암(七潭八萬巖)이 되고, 영평 북쪽에 이르러 화적연이 된다. 동쪽 기슭은 긴 벼랑과 소나무 숲이며, 그 아래는 석장으로 모두 흰 바위들이다. 북쪽은 석봉으로 수중에 백 척 높이로 서 있다. 위에는 지극히 고요한 감료(甘潦)가 있는데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 준다. 옆에는 용혈석(龍穴石)이 있는데 아래에 끝이 안 보이는 구멍이 있다. 시냇물은 굽이굽이 흘러 남쪽 기슭에 이르면 푸른 절벽이 화적연에 잠겨 있다. 바위 주위에는 소나무며 철쭉이 많다. 바람은 조용하고 날씨가 화창하니 물결이 잔잔하다. 석장은 사단(祀壇)이 되어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면 희생과 폐백으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 중사조(中祀條)에 실려 있다. 상류 고석정(孤石亭)까지는 15리이다. 용주공은 나와 삼부폭포를 구경하고 다음 날 화적연의 석장에서 노닐었다. 화적연의 물은 서쪽으로 흘러 청송곡(靑松谷)에 이르러 북쪽으로 백운계와 합류한다. 그 아래는 대탄(大灘)이며 다시 그 아래는 시냇가에 송림(松林) 절벽이 있는데, 송우(松隅)이다.
(기존 번역 전재)
禾積淵記
砌川之水。發源於靑華山。與花江之水合。過陵昌爲七潭八萬巖。至永平北。爲禾積淵。東岸長壁松林。其下石場。皆白石。北爲石峯。立水中百尺。上有甘潦至靜。令人益氣。傍有龍穴石。下窞竇無底。川流灣洄。當南岸蒼壁浸淵。石上多松多躑躅。風靜日長。水波渺漫。石場爲祀壇。水旱用牲幣。載中祀。上流孤石亭一十五里。龍洲公與我觀三釜瀑布。明日遊淵上石場。
禾積之水。西流至靑松。北合白雲溪。其下大灘。又其下川上松林絶壁。爲松隅
수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화적연 바위 위에서 제사를 지냈음도 알 수 있다. 이렇듯 명승이다 보니 예부터 그림도 많이 그려졌고 글도 많이 쓰였다. 화적연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겸재, 정수영, 윤제홍, 이윤영의 작품이다.
겸재와 윤제홍은 상류 방향에서 그려서 우뚝한 모습으로 그렸고, 정수영과 이윤영은 뒤쪽 방향에서 그려 다른 모습의 화적연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주변 주상절리와 산의 모습을 위치이동 시키고 크게 그렸다. 특히 겸재의 화적연은 더 많은 변형을 시켜 지금 보는 실물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림으로 보는 화적연은 그 자체로 전신(傳神)의 세계를 그린 것이니 멋진 그림이다.
요즈음 우리가 풍경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원경으로 인물의 모습을 슬쩍 넣듯이 겸재는 예의 탐승하는 양반 두 사람과 동자 한 명을 그림 속에 배치하였다. 이 그림을 와유(臥遊)할 인물을 그림 속에 넣어 놓은 것이리라.
글도 많이 남았다. 두어 편만 읽고 가자.
면암집에는 최익현 선생이 읊은 화적연이 전한다.
신룡이 돌이 되어 깊은 못에 들어가니
神龍幻石走深淵
화적산이 높아 별천지를 이루었네
禾積輪囷別有天
창벽 아래로 조용히 걸어서
緩步經由蒼壁下
여울 앞에서 읊고 앉았네
朗吟坐久碧灘前
헛된 명망은 민생에 도움이 없고
虛名無補民生食
장한 유적은 나그네 옷깃이 연했네
壯蹟猶勞客袂連
적기에 비를 내려 주는 잠공은
賴爾潛功時作雨
만물을 즐겁게 자라게 하네
能令萬物各欣然
(기존 번역 전재)
박순(朴淳)은 화적연을 이렇게 읊었다
우뚝한 바위 용처럼 교교하게 구름으로 접어들고
穹石入雲龍矯矯
세찬 여울 골짜기에서 흘러 눈은 층층 쌓이네
危灘出峽雪層層
우레 같은 물소리 河伯의 굴로 쏟아지니
百雷躍下馮夷窟
깊은 淵 매우 맑아 만 길까지 澄明하네
蓄黛渟膏萬丈澄
옛사람들 눈에는 화적(禾積) 같은 바위가 못(淵)에서 오르는 용(龍)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제 화적연 주변을 걷는다.
요즈음 지자체에서는 명승을 단순히 명승으로 두지 않고 관광자원으로 적극 개발하고 있다. 명승 93호 화적연을 비롯하여 비둘기낭에는 캠프장이 들어섰다. 예전 숨은 비경 비둘기낭은 이미 없다. 넓은 공원에 한탄강 하늘다리까지 생겼다. 어떻게 하든 지역을 살려 보려는 지자체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화적연 뒤 언덕길에는 이미 트레킹 코스가 개설되었다. 트레킹 코스를 통해 산 넘어 사정리에 가 보았다. 화적연 수변생태공원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 기간이 6월말까지이니 아마 지금은 생태공원 조성이 끝났을 것이다. 조급하지 말고 환경친화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랄 뿐이다. 옛것과 현재의 조화. 필자가 다녀 보고 느낀 정답은, 언제나 원형은 놓아 두고 살짝 가꾸고 활용하는 것이다. 화적연이 후인들에게도 고즈넉하게 전해지기를 바라본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제704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8.03 10:07:58
[겸재 그림 길 (81) 화적연] 한탄강의 원뜻을 알면 한탄스럽지 않을텐데…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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