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68) 도담삼봉] 300년 전 그림 넉 점이 남긴 삼봉 변천사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을 따라 단양으로 접어든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구려 때 지명은 적산(赤山) 또는 적성(赤城)이었다가 고려로 오면서 단산(丹山), 단양(丹陽)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시인묵객(詩人墨客)들에게는 삼연 김창흡의 단구일기에서 보듯이 이곳을 종종 단구(丹丘)라 불렀다. 퇴계 선생도 단양군수로 계시던 1548년 청풍에서 단양으로 넘어오는 입구인 옥순봉(玉筍峰)에 단구동문(丹邱洞門)이란 글자를 새겼다.
왜 이런 별칭으로 단양을 부른 것일까? 시경과 함께 중국 문학의 원류가 되는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다. “우인을 이어서 단구에서 들었구나, 죽음 없는 옛 향리에 자리 잡았네(仍羽人於丹丘兮, 留不死之舊鄕).” 이렇듯 단구라는 땅 이름은 죽음을 모르는 신선(神仙)들의 땅인 셈이다. 산수가 수려한 단양 땅을 옛사람들은 신선이 살 만한 고장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들의 시문이나 그림은 근본적으로 도인(道人)이나 신선(神仙)의 삶을 그리워하는 모티브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서 출발한 것이 팔경(八景) 문화이다.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단양팔경(丹陽八景), 관동팔경, ㅁㅁ팔경, 00팔경 이런 것들이 중국 장강(長江)의 지류인 소수(瀟水), 상강(湘江)의 경치인 소상팔경에서 비롯된 것인데, 실체도 불분명한 소상팔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산천의 이름이나 시문(詩文) 그림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양팔경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이제 단양팔경을 찾아가 보자.
도담삼봉(島潭三峰), 석문(石門), 하선암(下仙岩), 중선암(中仙岩), 상선암(上仙岩), 사인암(舍人岩), 구담봉(龜潭峰), 옥순봉(玉筍峰).
소수(瀟水)나 상강(湘江)에 비해 훨씬 청량하고 아름다운 곳들이다. 충북의 관광 조사 자료에 따르면 도내에서 가장 지명도 높은 관광지가 도담삼봉이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어렸을 때에도 단양은 몰라도 도담삼봉은 알았으니까. 멋진 풍경을 담은 달력 사진에는 도담삼봉이 빠지는 일이 없었으니 자연 그리 되었을 것이다.
단양 여행은 1박 2일 내외가 소요되므로 차를 가지고 오면 편리한데, 안 되면 단양버스터미날에서 렌터카를 이용하거나 시내버스(043-422-2866)을 이용할 수 있다. 주말에는 시티 투어 버스(043-423-1693)를 이용할 수도 있으니 가벼운 백패킹이 가능하다.
도담삼봉에 도착하면 낯익은 삼봉이 남한강 안에 운치있게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그린 옛 그림은 몇 개가 남아 있다. 겸재의 삼도담(三島潭), 단원의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속에 있는 도담삼봉, 이방운(李昉運)의 사군강산삼선수석첩(四郡江山參僊水石帖) 속 도담(島潭), 또 한 사람 기행과 자존감이 강했던 칠칠(七七) 최북(崔北)의 단구승유도(丹丘勝遊圖)에 그 시절 도담삼봉이 남아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버드나무와 모래톱
우선 겸재의 삼도담을 살펴보자. 앞쪽으로는 지금은 없는 버드나무 가지가 축축 늘어져 있고 그 사이 배의 돛대로 보이는 목재 하나가 삐죽 올라와 있다. 요즈음 유람선 황포돛배가 연상된다. 삼도봉의 세 봉우리는 지금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다만 가운데 봉(요즈음 이름으로 남편봉, 장군봉) 아래로는 모래톱이 자리 잡았고 그곳에 작은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다. 충주댐이 생기면서 봉우리의 1/3은 가라앉았다 한다. 그러기에 우리 시대에는 모래톱도, 그곳의 버드나무도 볼 수가 없다.
좌측봉(첩봉)과 남편봉 사이에는 일엽편주 한 척이 떠 있다. 사공은 노(櫓) 없이 삿대로 배를 밀고 있다. 수심이 낮았다는 뜻이다. 강 건너로는 산이 우뚝한데, 옛 지도에 기명(記名)한 두혈산(頭穴山)이거나 용두산(龍頭山)일 것이다. 그 뒤로는 소백산의 연봉들이 보인다. 단구 일기에 보면 겸재의 후견인 삼연 김창흡은 1688년 3월 13일 옥순봉 단구동문을 지나서 다음날에는 이곳 도담삼봉과 석문(石門)에 도착한 후 위쪽 은주암까지 올라갔다(午後至島潭 放舟度石門入隱舟岩).
15일에는 계상 이징하(季祥 李徵夏)와 함께 도담삼봉 사이에 배를 띄우고 피리 부는 사람을 봉우리 사이에 앉게 하여 연주를 시키면서(季祥招與泛舟於三峰之間. 使笛人坐峰間奏數曲) 신선 같은 뱃놀이를 하였다. 도담삼봉은 이런 곳이었다. 민간에는 이런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가운데 남편봉은 오른쪽 처봉(妻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왼쪽 첩봉(妾峰)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에 처봉은 아예 돌아 앉았다나…. 그러고 보면 남편봉은 좌측 첩봉을 바라보고 있고 첩봉은 은근히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다. 아우 창흡과 함께 뱃놀이를 했던 형 농암 김창협(金昌協)의 도담에 대한 시 한 수 읽고 가자.
강 빛은 어둑어둑 저녁놀 이는데 江光黯黯晩霞生
뱃머리에 삼봉이 눈에 훤히 들어오네 鷁首三峯照眼明
깎은 듯한 구름뿌리 솟아오를 땅 없고 戍削雲根無地湧
삐죽한 기러기 줄 하늘에 만들어지네 參差鴈序自天成
소나무 끝 늙은 매 배에서 솟아오르는데 松梢老鶻衝船起
깊은 물 밑 잠긴 용 피리 응해 우는구나 泓下潛龍應笛鳴
짐짓 나무꾼에게 신선 길을 묻고 싶네 欲借樵柯問仙路
석문 깊이 들어서자 바둑 소리 들리누나 石門深入聽碁聲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 선생도 놓치지 않았다.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山明楓葉水明沙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三島斜陽帶晩霞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爲泊仙楂橫翠壁
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지더라 待看星月湧金波
(기존 번역 전재)
다산 선생도 단양절구오수(丹陽絶句五首)를 지었는데 도담(島潭) 관련 시는 다음과 같다.
봉래도가 날아와 푸른 못에 떨어진 곳 蓬島飛來落翠池
낚싯배 바위 문을 조심스레 뚫고 가네 石門穿出釣船遲
어느 누가 솔씨 하나 가져다가 심어서 誰將一顆雲松子
물 위의 나뭇가지 쏴쏴 소리 보탰는고 添得颼飅到水枝
(기존 번역 전재)
그때도 남녀동반으로 도담삼봉 유람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단원의 병진년(1796년) 화첩 속 도담삼봉 그림이다. 이 그림에도 가운데 봉(남편봉) 아래로는 모래톱이 있다. 나무는 없는데 이때는 겸재 시절에 있던 나무는 이미 죽었나 보다. 겸재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일엽편주가 남편봉과 첩봉 사이에 있다. 어부 혼자 삿대를 밀고 있다.
다음은 이방운(李昉運)의 도담(島潭)이다. 이방운은 몰락한 양반가 후손으로 그림 그리는 일로 업(業)을 삼았다 한다. 도담을 포함하고 있는 사군강산삼선수석첩 속 그림이 모두 밝고 동적이다. 구도로 보면 석문(石門)의 뒤쪽 산에서 석문과 도담을 아울러 내려다보며 그린 그림이다. 석문은 사진으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산봉우리 아래쪽에 숨듯이 자리하는데 이방운의 그림에서는 산꼭대기에 다시 위로 세워 그려 놓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사실적인 그림은 아니다. 삼봉은 고만고만하게 그려 차별화가 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삼봉 옆에 떠 있는 배의 모습인데 차양을 씌운 아래로 양반으로 보이는 세 남자와 배의 고물 쪽에 기녀로 보이는 여인네 둘이 서 있다. 사공은 열심히 상앗대로 배를 밀고 올린다. 이 시절 삼봉에서 놀던 놀잇배의 전형일 것이다. 그림 속 나무들은 대부분 소나무로 보인다.
마지막 그림은 최북의 도담이다. 남편봉 앞으로는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모래톱이 보이고 풀인지 관목이 자라고 있다. 지금처럼 물에 잠긴 모습은 아니다. 배에는 두 명의 선객과 역시나 삿대로 배를 미는 사공이 서 있다. 그림 옆에는 화제(畵題)가 붙어 있다.
己巳春季書于寒碧 기사년(1749) 늦은 봄에 한벽루에서 쓰다.
樓月城崔埴有用來 월성 최씨 식이 마침맞게 와서
與之同遊畵之 그와 함께 놀며 그리다.
道甫 도보(이광사의 字)
또 옆에 붙은 원교 이광사 글을 보면 5명의 친구가 모임을 가졌고 이때 최북이 와서 같이 놀며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네 그림 모두에 현재 서 있는 정자 삼도정은 없다. 1766년(영조 42년) 단양군수 조정세(趙靖世)가 능영정(凌瀛亭)이라는 이름으로 제일 큰 가운데 섬에 세웠다는데 수해로 인해 없어지곤 했다. 이 그림들은 그 시기에 그려진 것인가 보다.
삼봉 정도전은 정말로 여비의 후손이었을까
한편 이곳에 삼봉이 있다 보니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에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광장에는 삼봉의 동상도 세워 놓았다. 과연 정도전은 삼봉이 있는 이곳과 지역적 관계가 있는 것일까? 삼봉에 관한 역사의 기록이 없어 그 진위는 알기 어려운데, 한영우 선생이 삼봉집에 정리한 내용을 참고로 보자.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이 젊었을 때 삼봉을 지나다가 어떤 상(相) 보는 사람을 만났다. 상 보는 사람은 그에게 10년 후에 혼인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정운경은 그 말대로 10년 뒤에 삼봉에 다시 돌아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서 아이를 얻게 되었다. 그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이므로 호(號)를 삼봉(三峰)이라고 지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딸로서, 우연은 우현보(禹玄寶)의 족인(族人)인 김전(金戩)이라는 중이 여비(女婢)와 통하여 낳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운경의 장모는 여비의 딸인 셈이요, 여비의 딸이 바로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출생 배경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단양 지방의 거족(巨族)이던 우현보의 집안에서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고, 이 때문에 정도전은 뒤에 대간(臺諫)의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여 출세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다. 정도전이 고려의 구가 세신(舊家世臣)들과 정치적 갈등을 가졌을 때, 구신들로부터 가계(家系)가 바르지 못하고 불분명하며 미천하다는 험구를 여러 차례 듣고, 또 특히 우현보 일족과는 가장 심각한 구원(仇怨) 관계를 갖게 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도전의 부계(父系)를 보더라도 그의 가문이 현족(顯族)이 되지 못함은 사실이다. 봉화 정씨(奉化鄭氏) 세보에 의하더라도 정도전의 가계는 고조(高祖) 정공미(鄭公美)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안동군 봉화현의 향리(鄕吏) 호장(戶長)이었다. 그 다음 증조 정영찬(鄭英粲)은 비서랑 동정(秘書郞同正)을 지냈고, 조부 정균(鄭均)은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벼슬은 모두가 실직이 아닌 산직(散職)에 불과하다. 실직에 오른 것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이다. 정운경은 충숙왕 때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에 형부 상서(刑部尙書)에까지 오르고, 수령 재임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서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양리전(良吏傳)에 등재되었다.
정운경은 이렇듯 봉화 정씨로서는 처음으로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지만 처신이 청렴결백하여 가산(家産)은 보잘것없었다. 정도전과 그의 두 남동생 및 누이동생은 정운경으로부터 약간의 노비를 상속받았다고 하므로 아무리 가난했다 하더라도 중소지주적(中小地主的) 경제 기반은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도전의 집안은 신분적으로는 향리에서 출발하여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전형적인 신흥 사대부라 할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중간계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도담삼봉 바로 곁의 또 다른 팔경 석문
이제 단양팔경 중 도담삼봉 바로 곁에 있는 또 다른 팔경 석문(石門)을 찾아간다. 이곳을 그린 겸재의 그림은 아직 나타난 것은 없다. 석문은 도담삼봉 옆 산에 있던 동굴의 천정이 붕괴되어서 생긴 망가진 동굴인데 입구는 남아 뻥 뚫린 문의 형태가 되었다. 단양 옛 지도와 이방운의 그림으로 보아 오래전에 이미 동굴이 무너진 것을 알 수 있다. 추사도 이곳에 와서 시 한 수 남겼는데 이 시를 읽으면서 다음 여정으로 향한다.
百尺石霓開曲灣 : 백 척의 돌 무지개가 둥그스럼 열렸네
神工千缺杳難攀 : 아득한 신의 공력 따라잡기 어렵구나
不敎車馬通來跡 : 말과 수레가 오간 자국 남기지 않게 하니
只有煙霞自往還 : 안개와 노을만 절로 가고오누나
(기존 번역 전재)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제690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12.31 11:14:03
[겸재 그림 길 (68) 도담삼봉] 300년 전 그림 넉 점이 남긴 삼봉 변천사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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