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산행기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경기도 양주시 덕정역-회암사지-천보산-칠봉산-경기도 양주시 봉양사거리]

산포로 2017. 5. 20. 11:17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 지하철 1호선 덕정역-78번 마을버스-회암교-김삿갓고향-회암사지 박물관-회암사 터-회암사-고구려 제5보루-천보산(423m)-장림고개-칠봉산<금병산, 수리봉-돌봉(정상, 512m)-투구봉-석봉-깃대봉-매봉-발리봉>-대도사 갈림길-천보/칠봉산 종주길-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봉양4거리 버스정류장]17년 5월 19일


* 구간 :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 지하철 1호선 덕정역-78번 마을버스-회암교-김삿갓고향-회암사지 박물관-회암사 터-회암사-고구려 제5보루-천보산(423m)-장림고개-칠봉산<금병산, 수리봉-돌봉(512m)-투구봉-석봉-깃대봉-매봉-발리봉>-대도사 갈림길-천보/칠봉산 종주길-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봉양4거리 버스정류장
* 일시 : 2017년 5월 19일(금)
* 모임장소 및 출발시각 :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 지하철 1호선 덕정역 오전 10시 출발
* 날 씨 : 맑음(최고 영상 26도 최저 영상 15도)
* 동반자 : 홀로 산행
* 산행거리 : 약 9.6km
* 산행지 도착시각 :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 지하철 1호선 덕정역 오전 10시 출발
* 산행후 하산시각 :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봉양4거리 오후 4시 도착
* 산행시간 : 약 6시간(식사 및 사진촬영시간 포함)



날씨도 봄이 지나 완연한 초여름으로 낮에는 덥기까지 합니다.


그동안 몇번 천보산 회암사지를 찾은 적이 있으나 오늘은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 길>에 소개된 자세한 내용을 보며 천보산(423m)과 칠봉산(512m)을 함께 오릅니다.


또한 이 천보산 능선 길은 왕방지맥이기도 하기에 더불어 잠시 찾아 봅니다.


* 왕방/한북소요지맥(逍遙枝脈)이란?


축석령-287봉-378봉-어야고개-석문령-회암령-칠봉산갈림길까지가 양주군과 포천군의 경계능선입니다. 연이어 해룡산-오지재고개-왕방산-국사봉-새목고개-649봉-413봉-소요산-535봉-173봉갈림길까지가 동두천시와 포천군의 경계능선이며, 173봉-말턱고개까지의 산줄기를 말합니다. 이 산줄기의 동쪽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산내천이나 포천천으로 흘러들고 서쪽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강화천으로 흘러들어 다 같이 한탄강에서 합류하여 임진강으로 흘러듭니다. 산줄기는 비교적 확실하며 그 끝이 초성리앞 강화천의 강변으로 녹아들어 한탄강과 합류합니다. 약 30여km의 산줄기를 한북소요지맥(漢北逍遙枝脈)으로 분류합니다.


* <산경표를 따라서>에서 지도 계속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② 上]김삿갓 눈물부터 양녕대군의 헛헛웃음까지
양주 회암사터, “크면 성기다”더니 이렇게 짜임새 있는 연유는...


종로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울 시계를 넘으면 의정부로 접어든다. 가능역이나 의정부북부역 또는 양주역에서 내려 30-1버스로 환승한다. 버스는 3번 국도를 타고 양주시청 곁을 지나 샘내고개를 넘고 우회전하여 56번 지방도로 접어드는데, 양주 회천신도시 지구를 지나간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상당히 광활한 택지를 조성해 놓았다.



버스를 탄 지 약 30분 지나 김삿갓교(회암교)에서 내린다. 다리에 쓰여 있는 이름은 김삿갓교인데 버스 안내방송은 회암교라 하고 있다. 종로로부터 약 1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다리를 건너지 말고 곧바로 도로를 500m 정도 직진한다. 회암2교라 쓴 돌다리가 나오면서 회암사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일대 마을들이 회암리(檜巖里)다. 아마도 회암사 아랫마을이라서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곳이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의 고향이라고 한다. 문헌상 기록을 찾지 못해 100% 확신할 수는 없어도 연구자들은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김삿갓교로 붙였을 것이다. 김삿갓 본인이 쓴 시(詩)에도 그렇게 추정할 근거가 있다.


김삿갓 본인이 스산한 일생을 뒤돌아 본 시가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 난고는 김삿갓의 호)’인데 이 시의 네 번째 연(聯)에는,


初年自謂得福地(초년자위득복지) 어려서 좋은 곳에 살았다 할 만하지
漢北知吾生長鄕(한북지오생장향) 한수 북은 잊지 못할 내 낳고 자란 고향


라는 문구가 있다.


양주 사람으로 추정되는 김삿갓이 명시를 지어 장원을 했는데, 그 시를 보고 김삿갓 어머니는 눈물만 흘려. 시가 혹독하게 비판한 인물은 바로 김삿갓의 할아버지였으니…


이 시를 볼 때 김삿갓은 한강 북쪽 땅인 경기도 어디메쯤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또 하나의 시가 있으니….


시건방을 떠는 시골 훈장 집에서 겨우 밥 한 그릇 얻어 자시고 조롱하듯 쓴 시(詩)가 있다. 마지막 구(句)를 훈장이 하는 말로 끝맺는다.


今年過客盡楊州(금년과객진양주: 금년의 길손들은 모두 양주 사람이구먼)


그러니 김삿갓도 양주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땅도 널찍하고 물도 풍부한 이 고장을 두고 왜 김삿갓은 일생을 떠돌며 살아간 것일까? 팔자가 역마직성(役馬直星)이라 방랑벽이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김병연이 23세 되던 해 영월 동헌(東軒)에서 백일장이 열렸는데 여기에서 그는 장원을 했다. 그 때 지은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曰爾世臣金益淳(왈이세신김익순: 그대 대대로 잘 산 김익순에게 이르노라).


그러면서 그는 홍경래의 난에 항복한 명분가 출신의 김익순을 꾸짖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死地寧爲二心子(사지영위이심자: 사지에서 어찌 반역의 마음을 먹는단 말이냐?)’로 몰아붙이고 ‘이 일을 이 나라 역사에 길이 전하겠다(此事流傳東國史)’고 하면서 춘추필법(春秋筆法: 노나라 역사를 기록한 공자의 칼날 같은 필법)을 들이대 서릿발 같은 심판을 내린다.


이렇게 장원을 한 김병연, 어머니께 빨리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갔는데…. 자초지종을 다 들은 어머니는 묵묵부답 눈물만 흘리셨으니….


김익순은 김병연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선천부사였던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에 항복했는데 난이 평정된 후 처형되고 집안은 몰락하였다. 그 날 이후 김병연은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술 한 잔에 시(詩) 한 수로’ 일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이름도 버리고 김삿갓으로.



광대하면서도 잘 자리를 잡은 건물터와 초석들…이성계의 정신적 멘토였던 무학대사가 머문 회암사지의 모든 것은 어찌 이리도 빈틈 하나없이 잘 어울리나.


회암2교를 건너 속세의 경계를 넘어간다. 좌로는 그 동안 발굴한 회암사지(檜巖寺址) 출토품을 전시하기 위한 박물관이 세워지고 있다. 내년(2012년) 5월 개관할 예정이라 한다. 회암사터에 이르는 길은 1km 남짓, 좌우로 숲이 가지런한 아담한 길이다. 우측에 패널 가건물이 있는데 절터를 발굴한 기와들이 광주리마다 가득 담겨 있다. 출토품을 가려서 연구와 전시에 쓸 모양이다.






잠시 후 가로수길이 끝나면 절터가 나타나는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광대함. 격자(格子)모양으로 정렬한 그 많은 건물터와 초석들, 당간지주(幢竿支柱), 부도(浮屠: 사리탑)와 뒤로 보이는 천보산의 앉음새까지…. 크면 허술한 법인데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음이 없다.






노자는 이런 말씀을 하였다. ‘天網恢恢 疎而不漏(천망회회 소이불루)’, 즉 하늘이란 그물은 넓고 넓어서 엉성해 보이지만 물 샐 틈이 없다네’란 의미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회암사터는 이 말에 덧붙여 엉성해 보이지도 않으니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6년간 발굴을 하고 일반인들이 관람하게 오픈했는데 탐방객 기준으로 좌측 언덕에 전망대를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문화재 해설사가 계셔 많은 궁금증을 풀 수 있다. 필자도 양주시청 문화관광과(031-820-2121)에 전화를 걸어 해설사가 계신 시간을 확인하고 방문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려 충숙왕 15년(1328) 때 인도 승려 지공화상(指空和尙)이 원나라를 거쳐 이곳에 왔는데 이곳 지형이 인도 나란다 사원의 아란타사(阿蘭陀寺)와 유사하여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회암사는 그 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창하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사를 마쳐 대찰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중창한 절의 규모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기록한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修造記)’에 있는데 262간(間) 규모에 승려도 3000명에 이르렀다 하니 그 때의 흔적이 지금 절터에 잘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절터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조선시대에 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태조 이성계와 자초(自超) 무학대사다. 요새 말로 하면 무학대사는 태조의 멘토(mentor)인 셈이다. 삼봉 정도전이 이성계의 정치 파트너로서 조선 건국을 기획했다면 자초 무학은 정신적 스승, 멘토로서 이성계의 의지처가 되었던 것이다. 회암사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야사도 많지만,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중 하나를 보자면,


“직접 자초 무학대사가 있는 회암사에 거둥하기도 하고, 내관을 보내어 자초 무학에게 문안드리게 하고, 곡식을 수시로 내리고, 화재가 나거나 역질이 돌면 재빨리 다른 절로 옮기게 하지를 않나, 용문사로 가겠다 하니 끝내 못 가게 잡아 놓지를 않나, 경기도민을 동원하여 무학대사의 부도를 미리 만들게 하지 않나….”


샘나서 보아 주기 힘들 정도로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으니 미처 기록 안 된 태조 이성계의 무학대사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끔직한 것이었으랴.


아들 방원에게 화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눌러앉아 서울로 돌아가지 않으니 태종 이방원이 조알하려 오고…절터의 건물배치가 궁궐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방원에 의한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내준 뒤 태조는 함흥과 함께 이곳 회암사에 거처를 정하였다. 함흥차사(咸興差使: 진노하여 함흥으로 귀향한 태조에게 태종 방원이 보낸 사신이 가는 족족 돌아오지 못했다는 야사에서 나온 사자성어)란 말도 이 때 생긴 것이며 의정부(議政府)란 지명도 이 때 생긴 말이다.



태종실록에는 회암사에 대한 기록이 더 많다. 왕위를 물리고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 이성계의 기록이 태종실록(2년 1402년 6월)에 실려 있는데,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회암사(檜巖寺)로 행차하였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重修)하고, 또 궁실(宮室)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하니(太上王自逍遙山幸檜巖寺. 太上欲重修檜巖寺, 且營宮室而留居)’.


발굴된 회암사터의 북쪽 지역은 사찰건축 배치가 아닌 궁궐건물 배치를 따르고 있다. 이 기록이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배치가 바로 이때의 일이겠구나, 이런 상념에 젖으니 600년의 시간이 어제인 듯하다.





같은 해(1402년) 8월 실록 기록은 ‘임금이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태상왕을 조알(朝謁)하였다.(上朝太上王于檜巖寺)’라고 썼다. 태조가 회암사에 거처하니 태종이 조알하러 온 것이다. 임금이 이리했으니 의정부(議政府: 지금의 국무회의 격인 국가최고의결기구의 명칭)도 자주 양주 땅에 와서 열렸으리라. 그 곳이 지금의 의정부 땅이다.


한편 회암사에는 양녕대군의 동생이며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중수하고 수도하였다(세종실록 17년). 양녕대군의 객기랄까, 허허로움이랄까 하는 점도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동생 효령이 수도하는 회암사에서 사냥한 새와 짐승을 구워 먹는 일이 발생했다. 아우 효령이 말리자 양녕이 한 마디 한다. “부처가 만일 영험이 있다면 그대의 5, 6월 귀에 낀 테는 왜 벗기지 못하는가. 나는 살아서는 국왕(國王)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佛如有靈, 君之五六月耳掩, 何不爲脫之乎? 我則生爲國王之兄, 享有富貴, 死亦爲佛者之兄, 誕登菩提, 不亦樂乎?)"


이제는 옛 흔적만 남은 회암사터를 내려다보면서 ‘범생이 아우’와 ‘망나니(아니면 통큰) 형’의 모습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진다. 그들도 모두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갔구나.



세종의 형 양녕대군이 허허롭게 웃던 들판에선 명승 보우를 시샘한 유생들의 소행이었던 듯, 목 잘린 불상과 불탄 흔적만 나오니 이념의 횡포란 참으로…


해설사께서 회암사는 명종과 선조 간(間)에 불타서 사라졌다고 했다. 불탄 흔적이 지금도 초석 여기저기에 검게 남아 있다.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설명에 의하면 국내에서 경주 황룡사 다음으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왜 불에 탔을까? 해설사는 말을 아낀다. 명종실록과 발굴 결과를 보면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5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중종의 첫째 아들 인종은 후사 없이 즉위 7개월 만에 승하했다. 이에 중종의 둘째 아들 경원대군이 13대 임금(명종)으로 즉위하니 때는 1545년 나이 12세였다. 할 수 없이 중종의 계비인 어머니 문정왕후가 이 후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이 일이 결과적으로 회암사의 빛과 그림자가 되었다.


문정왕후는 당대의 명승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를 모시고 불교에 심취한다. 회암사를 중창하고 승려의 도첩제(度牒制: 승려 신분을 인증하는 제도)를 부활하고, 승과(僧科: 승려 과거시험)를 부활하여 지금의 코엑스 봉은사 앞마당에서 실시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같은 시대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통로였다.


그 당시 문정왕후 발원으로 그려진 16세기 조선불화가 400여 점 되는데 조선시대 불교미술의 걸작이라 할 만 하다. 아쉽게도 대부분 일실되어 손에 꼽을 정도만 남아 있다.



이러하니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의 유생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사방에서 소(疏)가 올라오고 여간 소란스러운 게 아니었는데 문정왕후는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급서(急逝)한 것이다.


때를 만난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요승(妖僧) 보우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앞장 선 이가 누구였을까? 율곡 이이(李珥)였다. 율곡은 그 자신이 19세 때 금강산으로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 유학자였다. 그러함에도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보우를 탄핵한 것이다. 역사를 보면 사람은 다면체(多面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우가 발탁한 휴정과 유정, 그리고 그가 남긴 저서들을 통해 보우의 본 얼굴을 보려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는 모두 승자들의 기록이다. 이렇게 하여 보우는 1565년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고 거기에서 제주목사 변협에게 주살(誅殺)되었음을 명종실록에서 사관은 전한다.


보우가 남긴 서적도 모두 불살라 없어졌지만 다행히 그중 하나가 일본학자에게 발견돼. 너무 많은 숨결 만날 수 있는 회암사 터엔 정적만 감돌고…


그가 남긴 저서도 모두 사라졌다. 다행히 그가 죽은 지 8년 후 사명당의 발문이 담겨 있는 허응당집(虛應堂集)이 일본 학자 다까하시도루(高橋亨)에 의해 발견(1959년)된 것은 정말 행운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명종실록 21년(1566년) 4월 20일 기록에 보면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欲焚蕩檜巖)’는 기록이 있다. 그 뒤 회암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다음 기록은 선조28년(1595년)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회암사 옛터에 종루가 있는데 그 아래 큰 종이 묻혀 있으니 그것으로 화포를 제조하자는 것이다. 회암사는 불타 없어졌지만 한 가지 위안을 삼는 이들이 있었다. 회암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이런 마음의 위안도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6년에 걸친 발굴 결과 회암사의 불상은 모두 목이 부러지고 산산이 깨진 채로 출토됐다. 제기(祭器)로 쓰던 백자도 모두 철저히 깨진 파편뿐이었다.



아, 회암사. 모진 사람의 손길에도 그 터는 따듯한 햇살 아래 고요했다. (다음 회에 계속)


교통편
1호선 전철(가능역, 의정부북부역, 양주역) ~ 30-1번 버스 환승 ~ 회암교(김삿갓교) 하차
또는 1호산 전철 덕정역 하차 ~ 78번 마을버스 ~ 회암2교 하차
수유로, 도봉로, 의정부 간선도로에서 902 좌석버스를 타고 천보3거리에서 내려 걸어가도 되지만 걷는 거리가 길다.


답사코스
김삿갓교 ~ 회암2교 ~ 회암사지 ~ 회암사 ~ 천보산 ~ 해룡산 갈림길 ~ 장림고개 ~ (짧은 코스를 택하려면 여기서 ~ 회암동 하산 ~ 30-1버스 종점) ~ 송전탑 ~ 칠봉산 ~ 대도사 갈림길 ~ 봉양4거리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cnbnews 제252호 박현준⁄ 2011.12.12 14:24:31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7788


* 이야기가 있는 길,1 - 옛 이야기를 찾아 걷는다
http://cafe.daum.net/storyroad1/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② 下]이성계가 걷고 궁예가 울던 산

‘왕의 상징’ 간직한 대사찰 회암사의 상처들


가지런히 발굴해 놓은 회암사터는 격자형으로 층을 이뤄 엄연한 질서를 느끼게 한다. 한 부분이라도 그 터를 밟아 보고 싶었으나 유적 보호를 위해 허락되지 않는다. 아쉬움을 달래면서 발굴 때 출토된 특이한 발굴품의 사진만 살펴본다. 내년(2012년) 봄이면 실물을 볼 수 있으리라.


청기와도 있고, 맷돌도 있고, 아마도 손오공일 것 같은데… 잡상도 있고, 용과 봉황새를 그려 넣은 기와 수막새와 암막새도 있다. 연호(年號)도 기록돼 있는데 천순(天順) 경진(庚辰)이다. 우리 연호가 없는 아쉬움은 있으나 명나라 영종(英宗) 때이니 세조 6년(1460년)에 새로 불사를 한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도 분명한 것이 여느 절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건물 지붕의 잡상(雜像)과 감히 제왕이 아니고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용(龍)과 봉(鳳) 문양을 볼 때 행궁(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의 역할을 했음은 기록에서나 출토품에서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던 조선 제1의 회암사가 어느 순간 사라져 간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을 쉽게 떨칠 수가 없다.



이제 회암사로 향한다. 회암사터에서 천보산(天寶山)을 향해 오르다 보면 ‘회암사’라 부르는 절 하나가 있다. ‘옛 회암사 본가’가 없어졌기에 회암사(檜巖寺)란 이름으로 그 정신을 잇고 있는 것이다. 순조 28년경(1828년) 세워진 절이다. 들리기로는 옛 회암사에는 9개의 부속 암자가 있었다 한다. 현재의 회암사는 아마도 그 암자 자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회암사는 이곳이 그 옛날 ‘절골’이었음을 알리는 안내석을 지나 휘어진 길로 접어들면 비스듬 언덕 위쪽에 있다. 6.25에 대부분 소실된 터를 넓히고 모두 새로 건물을 세웠다. 그러니 고풍스러운 회암사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고 오르시라.





다행히 조사전(祖師殿) 안에는 1755년 창평 용흥사에서 발원한 아담한 목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경기 유형문화재 206호인데 이렇게 제작 연대와 출처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유물들은 시대를 판정하는 기준이 되기에 중요한 자리를 점하는 조상의 선물인 것이다.


또한 조사당 벽에는 고려의 지공(指空) ~ 나옹(懶翁) ~ 조선의 무학(無學)으로 이어지는 선종(禪宗) 세 화상(三和尙)의 진영(眞影: 초상화)이 있다. 이 세 분이 고려 말 이후 이 땅 불교의 법맥(法脈)이다.


천보산 한 줄기가 내려와 좌우로 갈라지며 작은 두 능선을 만드는데 그 사이 아늑한 땅이 지금의 회암사 자리다. 암사를 품고 있는 좌우의 능선에는 지공, 나옹, 무학 세 화상의 부도와 비석이 있다. 일반인들 기준으로 본다면 세 화상의 무덤이 여기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도와 비석들이 온전하지가 않다. 비석들은 아래를 받치는 귀부(龜趺)만 있고 비신(碑身)이 없거나 새로 만들어 세웠다. 우측 능선에는 선각대사(나옹)의 비가 있는데 비신은 없고 귀부마저 온전치 못하다. 그나마 새로 새겨 세워 죄송함을 달래고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聊無愛而無憎兮(료무애이무증혜)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이렇게 살다간 그 분에게 흔적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러함에도 인륜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좌측 능선에는 지공, 무학의 부도와 비석이 있고 나옹의 부도가 있다.








순조실록(純祖實錄) 21년(1821년) 7월 조를 보자. “광주(廣州)의 유학(幼學) 이응준(李膺峻)이 양주 회암사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 사리를 훔친 후 그곳에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묻었다. 지공·나옹·무학 세 선사의 부도와 사적비(事蹟碑)가 회암사 북쪽 산비탈에 있었는데, 무학의 비석은 곧 태종의 분부를 받아 글을 지어 세운 것이다. 경기 관찰사가 이 사실을 장계로 아뢰자… (廣州幼學李膺峻, 碎破楊州、檜巖寺浮圖及石碑, 偸竊舍利, 仍葬其親於其地. 蓋指空、懶翁、無學三禪師浮圖及事蹟碑, 在於寺之北厓, 而無學碑, 卽太宗朝奉敎撰立者也. 因畿伯狀…)”


이응준은 섬으로 귀양가고 부도는 제 자리로 돌아 왔으나 깨어진 비문은 모두 복원되지 못하고 귀부만 상처 입은 채 세월에 늙어 간다. 이 일로 지금의 회암사가 부도가 있는 능선 아래에 자리 잡게 됐다. 이제는 부도와 비가 모두 보물과 유형문화재로 인정받게 됐으니 행여 느끼는 것이 있다면 석물(石物)인들 감회가 깊지 않겠는가.



고려조 목은 이색(李穡) 선생은 회암사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회수창창석세완(檜樹蒼蒼石勢頑: 회암사 숲 우거지고 바위 기운 단단한데)
엽간풍우반천한(葉間風雨半天寒: 잎 사이 비바람에 하늘은 차구나)
노승출정망성색(老僧出定忘聲色: 노승은 선정 끝에 세상사를 잊었는데)
두상광음주사환(頭上光陰走似丸: 눈 앞 세월은 구르는 구슬 같네)


세월은 정말로 구르는 구슬 같아서 회암사의 아픔도 모두 잊혀졌다. 세월이 모든 것을 감싸 그냥 바람 속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무심(無心)으로 돌아 온 회암사터를 뒤로 하고 천보산으로 오른다.


나지막한 산(423m)에 바위가 우뚝하여 밧줄도 매어져 있다. 산세가 만만치 않다. 목은(牧隱)선생도 이 산을 오르셨기에 바위 기운이 만만치 않다(石勢頑) 하셨겠지. 잠시 밧줄을 잡고 오르니 암반이 나타난다. 뒤돌아보니 시야가 확 트인다. 회암사터, 회암사, 회암동이 눈 아래 있다.



동북쪽으로는 포천의 들판이 가까이 보인다. 이곳 43번 도로를 따라가면 철원 지나 김화, 평강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로 김화 지나서 회양 거쳐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도로 들면서 함흥 거쳐 두만강변 서수라까지 가는 길이 관북대로(關北大路) 곧 경흥대로(慶興大路)였다.


태조 이성계도 아들(방원)에게 또 다른 아들(방석)이 죽임을 당하는 차마 보지 못할 꼴을 보고 함흥으로 간 그 길이 바로 저 길일 것이며, 두만강 쪽 여진의 사신도 많은 경우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 땅은 말갈(靺鞨)의 땅이었으며, 백제의 땅이 됐다가 고구려의 땅이 되고 다시 신라의 땅이 됐다. 땅에 주인이 따로 있겠냐마는 내 마음에는 이 지역에 오면 언제나 이곳은 궁예(弓裔)의 땅이라는 생각이 먼저 고개를 든다.


신라 효공왕 5년(901년)에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세운 사람. 그 시대에 감히 외람되게 무태(武泰)와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는 연호로 건원(建元)했던 진보주의자 궁예. 호족 연합세력 같은 미지근한 국가체제를 버리고 과감히 왕권을 강화하려던 사람. 역사는 이긴 자들의 스토리라서 고려인들은 그를 너무 폄훼한 것은 아닌지.


부하인 왕건(王建),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검필 등에게 졸지에 배신당해 철원을 버리고 이곳 포천 보가산성으로 패주해 왔던 사람. 보가산성에서도 부하들에게 패해 성동리성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던 사람. 그 뒤에는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 전설로 패주골이라는 지명을 남기고 산에 들어 울었다며 명성산(鳴聲山)이라는 슬픈 산 이름으로 남아 있는 사람. 언젠가는 철원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태봉국의 왕궁터와도 만나고 싶고 궁예의 참모습과도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천보산 능선을 간다.






아들이 아들의 칼에 죽는 못볼 꼴을 본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가던 길이 바로 이 길일 것이며, 진보주의자 궁예가 부하들에게 패하면서 산속에서 울었던 곳(명성산)이 바로 이곳 아닐까.






‘천보산 제5보루’를 만난다. 길 옆 작은 봉에 무너져 내리는 석축이 있다. 안내판에 고구려 토기가 발굴된 보루(堡壘: 방어 또는 후망하던 진지)라고 한다. 이 곳 천보산 주변만 해도 여러 개의 보루가 있다.


보루의 역사는 적어도 1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가 있다. 한강과 그 이남을 통치하던 백제는 371년 근초고왕 때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이때 이후 임진강(臨津江) 이남은 확실한 백제의 땅이 됐다. 백제는 임진강 이남에 방어용 성과 보루를 구축한다. 그러기를 100여년 백제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걸출한 임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나타나면서 판도는 바뀐다. 급기야 475년(장수왕) 고구려는 백제를 공략해 개로왕을 생포하고 처형한다. 100년 만에 고국원왕의 원한을 푼 것이다. 힘에 밀린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구려는 계립령 ~ 죽령, 순흥 지역까지 영향권에 넣는다. 그리고는 새로 확보한 임진강과 한강 사이 지역 방어망을 구축한다.


이때 구축한 보루들이 임진강과 한강 사이 지역에 산재한다. 이곳 천보산, 도락산, 불곡산, 감악산, 고장산, 노고산, 소래산, 테미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 아차산 등 지금까지 40여 곳이 발견됐으며, 앞으로 더 많이 발견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보존이 잘 이뤄지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역사적 중요성을 잘 알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략해 한강가를 회복한다(551년). 그러기도 잠시 신라 진흥왕은 한강변 여러 성을 공략해 탈취하고(553년) 여러 곳에 방어 기지를 구축한다. 이 때 세운 비가 북한산 순수비(北漢山巡狩碑)이다. 지금도 보루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의 흔적들이 함께 발견되는 것은 세 나라의 뺏고 빼앗긴 피나는 역사의 흔적이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한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은 가장 다이내믹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러면 이 지역에서의 다이내믹한 역사는 마무리된 것이었을까? 아니다. 120여년(675년) 뒤 이곳 양주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으니 이른바 나당전쟁(羅唐戰爭)이었다.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두 나라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 땅은 물론 신라도 그들의 지배하에 두려 했다.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당나라의 일개 지방 행정단위로 고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한다.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과 힘을 모아 당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675년 이 곳 양주벌 매소성(買宵城: 불곡산 아래 대모산성 또는 양주 구읍)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꺾음으로써 대전(大戰)은 막을 내리고 이듬해 금강에서 수군을 물리치는 것으로 전쟁은 마무리됐다.


천보산 길에서 남서쪽 들판 그 어딘가가 그 날의 전쟁터였을 것이다. “잘 하셨습니다. 형님들!” 이 땅의 남자로서 전 시대를 살다간 이 땅의 남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구려에 밀린 백제가 이곳 천보산 등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당나라 힘을 빌려 이 땅을 차지한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당나라의 야욕에 맞서 천보산 남서쪽 들판에서 대승을 거두니...




* 왕방지맥 해룡산 갈림길입니다. 오늘은 칠봉산으로 향합니다.


천보산 능선길은 아늑하고 편하다. 남쪽 가파른 바위에 비해 능선과 뒤쪽(북쪽)은 편안한 흙길이다. 20여분 지났을까, 해룡산 갈림길에 닿는다. 여기서 길은 북으로 해룡산 ~ 왕방산 ~ 국사봉에 이르고, 한 쪽 길은 소요산 지나 신천으로 떨어지는 소요지맥이 되고 또 한 줄기는 개미산 지나 영평천으로 떨어지는 왕방지맥이 된다.


한북정맥 축석령에서 양주, 포천, 동두천, 연천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왕방·소요지맥이다. 명소로 알려진 신북온천과 열두개울은 국사봉에서 갈라지는 두 산줄기 품에 있는 명소인 것이다.


이제 장림고개를 향해 오던 길을 계속 나아간다. 이 길이 동두천 일주 43km MTB(산악자전거) 코스에 포함된 구간이다. 산악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니 얼마나 편한 길이겠는가. 어렵지 않게 장림고개에 닿는다. 산에 오른 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린 셈이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회암리 마을 30-1 버스 종점에 닿는다.


고개 앞 가파른 길을 통해 칠봉산(七峰山)을 오른다. 아기자기한 7개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칠봉산이다. 산세는 앞쪽은 병풍처럼 깎아진 바위, 뒤 쪽은 편안한 흙산이라 일명 금병산(錦屛山)이다. 전설로 세조가 올라 사냥했다고 해서 어등산(御登山)이라고도 하는데 대동여지도에는 어등산(於登山)으로 기록돼 있다.









편안한 7개 봉우리가 이어진다. 솔리봉(수리봉), 돌봉(칠봉산 정상), 투구봉, 석봉, 깃대봉, 매봉(응봉), 발리봉이다. 칠봉산 정상에서 40여 분 능선길을 가면 대도사 갈림길을 만난다. 대도사 방향으로 가면 송내동으로 내려가 1호선 지행역을 이용해야 한다.
































이곳 대도사 하산 길에는, 대도사에서 20여 분 아래 농장 길에 의미 있는 기념비와 만난다. ‘유행성출열혈 병원체 발견 기념비’다. 유행성출열혈의 병원체를 세계 최초로 규명한 대한민국의 이호왕 박사 연구팀이 등줄쥐를 잡은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그 바이러스 이름이 ‘한탄 바이러스’인데 그 쥐는 한탄강에서 잡은 게 아니라 한탄강 수계 최상류인 칠봉산 자락에서 잡았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알게 됐다.


오늘은 천보 ~ 칠봉 종주를 위해 직진한다. 직진 길은 갈림길에서 좌측 길을 택하면 무리가 없다. 이윽고 30여 분 뒤 개가 심하게 짖어대는 밭둑길에 닿는다. 산길 4시간이 걸린 셈이다. 바로 큰 길과 만나는데 길을 건너면 봉양4거리 버스정류장이다. 의정부 방향으로 나오는 버스 노선이 많다. 오늘은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에서 막걸리 한 잔 해야겠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교통편 
1호선 전철(가능역, 의정부북부역, 양주역) ~ 30-1번 버스 환승 ~ 회암교(김삿갓교) 하차
또는 1호산 전철 덕정역 하차 ~ 78번 마을버스 ~ 회암2교 하차
수유로, 도봉로, 의정부 간선도로에서 902 좌석버스를 타고 천보3거리에서 내려 걸어가도 되지만 걷는 거리가 길다.


답사코스
김삿갓교 ~ 회암2교 ~ 회암사지 ~ 회암사 ~ 천보산 ~ 해룡산 갈림길 ~ 장림고개 ~ (짧은 코스를 택하려면 여기서 ~ 회암동 하산 ~ 30-1버스 종점) ~ 송전탑 ~ 칠봉산 ~ 대도사 갈림길 ~ 봉양4거리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cnbnews 제254-255호 박현준⁄ 2012.01.02 13:52:44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7864


* 이야기가 있는 길,1 - 옛 이야기를 찾아 걷는다
http://cafe.daum.net/storyroad1/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