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⑩-1.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혜화역 1번출구-대학로-동덕여대 예술공연센터-일석 이희승기념관-낙산(125m)-서울성곽-삼군부 총무당-낙산(125m)-동쪽 차도-마을버스 정류장-비우당(원각사)-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동묘역 1번 출구]17년 1월 30일
* 구간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혜화역 1번출구-대학로-동덕여대 예술공연센터-일석 이희승기념관-낙산(125m)-서울성곽-삼군부 총무당-낙산(125m)-동쪽 차도-마을버스 정류장-비우당(원각사)-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동묘역 1번 출구
* 일시 : 2017년 1월 30일(월)
* 모임장소 및 출발시각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혜화역 1번 출구 오전 11시 출발
* 날 씨 : 맑음(최고 영하 3도 최저 영하 7도)
* 동반자 : 홀로 산행
* 산행거리 : 약 7.6km
* 산행지 도착시각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혜화역 1번출구 오전 11시 출발
* 산행후 하산시각 :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동묘역 1번출구 오후 3시 도착
* 산행시간 : 약 4시간(식사 및 사진촬영시간 포함
2017년 정유년 희망찬 새해도 밝았습니다.
날씨는 겨울답게 춥지만, 하늘은 맑아 근교 산행엔 최적입니다.
이에 년초 시행한 서울 근교 역사 답사 산행을 오늘도 오릅니다.
전날에도 익숙한 서울 명소들이기에 마음도 편하고 시간도 넉넉합니다.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⑩-1] 낙타봉에 오르다
구비마다 선조 숨결 어린 낙산~비우당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서울 한복판에 이처럼 많은 선인들 삶의 흔적이 응결되어 있는 곳이 또 있을까? 혜화역 1번 출구를 나와 낙산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대학로답게 젊은이들이 활기차고 예술의 향기가 넘치고, 먹을거리가 가득하다.
동덕여대 예술공연센터를 지나 조금 더 골목길로 들어서면 일석 이희승(一石 李熙昇) 선생 기념관이 있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 교지에 실을 원고를 청탁하러 이 댁에 부지런히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자그마한 체구에 단아하셨던 일석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 그 집은 없어지고 화려하고 현대적인 기념관 건물이 들어서 있으니 ‘이건 아닌데…’라는 물정 모르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누구를 기념한다는 것은 그 분의 손길, 발길부터 남겨 놓아야 하는 것 아니던가?
골목 안으로 더 들어가면 다세대 주택들이 자리를 잡고 골목길은 마치 미로 찾기 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당황할 일은 아니다. 필자는 이곳에 여러 번 왔는데 한 번도 같은 길로 해서 낙산(駱山, 125m)에 도달해 보지 못했다. 매번 다른 골목을 지나 오르게 된 것이다. 이 곳 길은 묘해서 미로길이 있는 곳이라면, 위로 오르면 결국은 낙산으로 연결되는 나무층계를 만나게 된다. 나무층계를 다 오르면 앞쪽으로 서울도성 성벽이 나타나고 그늘 드리운 쉼터가 있다. 이곳에서 숨 한 번 몰아쉬자.
이 쉼터 뒤로는 철조망 쳐진 담장이 있다. 혜화동 신학교 담장이다. 혜화동 지역은 100년 전만 해도 백동(柏洞: 잣골)이라 해서 태종 때 공신 조은이 심은 잣나무가 무성하던 곳이었다.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100년 전 혜화문(동소문) 사진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1909년 독일 베네딕토 선교회의 수사신부 2명이 내한한다. 이들은 백동(혜화동)에 약 10ha(약 3만평)의 땅을 사들여 선교회 활동을 하는 한편 교육기관인 숭신학교와 숭공학교를 세운다. 숭신학교는 사범학교로 일제(日帝)에 의해 폐지되고, 숭공학교는 목공(木工), 철공(鐵工) 등 기술 교육으로 식민지 조선 젊은이들의 기술 교육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
그러나 베네딕토 선교회에게 진실로 고마운 일이 2005년 일어났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희귀 작품 21점이 실린 화첩(畵帖)이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한국으로 반환된 것이다. 1925년에 성오리엔탈 수도원장인 베버신부가 방한했는데 그는 금강산 방문길에 이 겸재의 화첩을 구입하여 독일로 가져갔다.
이곳만큼 서울 선인들의 삶이 응축된 곳이 또 있으랴? 독일인이 앗아갔던 겸재의 그림을 되돌려주니 길 막혔어도 좋아라.
해외 유명 경매 업체에서 적어도 수십억 원을 호가하던 이 화첩이 무상으로 왜관 베네딕토 선교회로 반환됐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필자는 서울 도성 길을 걸으면서 혜화동 신학교가 막고 있는 이 구간을 돌아가면서 화를 낸 적도 많다. 그러나 베네딕토 선교회가 우리에게 준 고마운 마음을 생각하면서 서운함을 풀었다. 한편 이곳은 김수환 추기경이 만년을 지낸 곳이며, 5.16 때 장면 총리가 피신했던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 성벽 길을 따라 낙산(駱山, 125m))으로 오른다. 낙산은 낙타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타락산(駝駱山) 또는 낙타산(駱駝山)이라고 부르며,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한국의 산줄기들은 백두산(2,750m)에서 시작해 지리산(1,915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간 것인데, 강원도 식개령에서 갈라져 한강의 북쪽을 내닫는 산줄기가 한북정맥(漢北正脈)이다. 한북정맥이 흘러 와서 도봉산(721.3m)을 지나고, 우이령에서 올려쳐 상장봉(543m)으로 치닫는데, 한 줄기가 서남으로 흐른 것이 북한산(836m)이 된다.
다시 이 북한산(836m)이 낳은 산이 북악산(北岳山, 342m)이다.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主山)이며, 북한산(836m)은 서울의 조산(祖山)이다. 이 두 산을 중심으로 주변 산들이 서울을 에워싸고 있다. 북한산-아차산-관악산-덕양산(행주산성)을 외사산(外四山, 바깥쪽 산 4개)이라 하여 서울을 외각에서 호위하는 산이다.
한편 북악산을 중심으로 동으로 낙산(125m), 서로 인왕산(340m), 남으로 목멱산(木覓山, 271m, 남산)이 서울을 에워싼 내사산(內四山, 안쪽 산 4개)인데, 조선이 건국돼 한양으로 천도할 때 이런 서울의 풍수가 여러 모로 검토됐다.
실록에도 풍수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하지만, 택리지(擇里志)나 비기(秘記)의 결정판 정감록(鄭鑑錄)에는 미신 같은 이야기가 종종 실려 있다. 문제는 인왕산에 비해 오늘 오를 낙산이 너무 낮고 산줄기도 짧아서 생겼다. 인왕의 높이 338m에 비해 낙산의 120m가 너무 낮아 균형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풍수 하는 이들이 볼 때, 우백호인 인왕은 여성, 지차(之次: 둘째 아들 이하)를 의미하고, 좌청룡인 낙산은 남성, 장자를 의미하는데, 좌청룡이 형편없으니 보나마나 왕자, 장자가 힘을 못 쓸 것이 너무 뻔하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때의 상황은 무학대사(無學大師)와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의 대결 구도로 극화된다. 즉 무학대사는 궁궐의 자리를 인왕산 밑에 잡아 궁궐이 동(東)쪽을 보게 하자고 주장한다. 그래야 북악이 좌청룡이 되고, 목멱이 우백호가 되어 좌청룡이 든든해지니 왕자, 장자가 힘을 얻어 조선의 왕권이 강화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삼봉 정도전은 임금의 자리는 남면(南面: 임금은 남쪽을 보고 앉는 것이 제 자리라는 유학의 기본 개념)하는 것인데 어찌 동쪽을 보고 앉으신단 말이냐고 강력 반대했다는 것이다. 결국 삼봉의 승리로 끝나고, 경복궁은 북악산 밑에 지어지고 임금은 남면(南面)하게 되었다.
이때 무학대사가 통탄하며 “200년 지나면 종묘사직이 흔들리는 크나큰 재앙을 만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점사(占辭)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조선 건국 1392년에서 2백년이 지난 시점에 일어난 임진왜란(1592년) 뒤 누군가 가져다 붙인 이야기는 아닐까?
서울의 ‘왼쪽 어깨’가 낮아 걱정한 선인들은 동대문 이름을 일부러 4자(흥인지문)로 만들고 꽃피는 가짜산(방산)까지 만들어 보해 줬으니…
그런데 정말로 조선왕조는 적자(嫡子)이면서 장자(長子)가 왕통을 이은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으니 재미삼아 이야기를 갖다 붙일 만도 했다.
낙산의 지세가 약한 것과 관련해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지세가 약할 때 그것을 보완하는 것을 비보(裨補: 돕는다는 뜻)라 한다. 풍수가 과학적이냐 아니냐는 차치하고 우리 조상들은 약한 지세를 보강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서울의 사대문(四大門) 이름은 숙정문, 숭례문, 돈의문, 흥인지문인데 무엇 때문에 동대문만 흥인문(興仁門)으로 하지 않고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했을까? 동청룡인 낙산의 지세가 약하니 지(之) 자(字)를 넣어 늘려 주는 비보를 한 것이다.
또 하나 사례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흥인지문 아래 개천(開川: 청계천의 옛 이름) 가에 두 개의 가산(假山:임시로 만든 가짜 산)이 기록되어 있다.
낙산의 산줄기를 이렇게라도 해서 늘려 주고 싶었던 그 시대 사람들의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이 가산에 온갖 방초(芳草)가 흐드러지게 피니 사람들은 방산이라 불렀다. 오늘날도 방산시장이 이곳에 있으니 비보의 흔적이 지금도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계곡물 좋고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서 풍류를 즐겼다. 인왕산의 백운동(白雲洞)-인왕동, 북악산의 삼청동, 남산의 청학동(靑鶴洞)과 함께 낙산의 쌍계동(雙溪洞)이 유명했다. 이제는 인가(人家)도 늘고 숲도 없어지니 쌍계동 계곡도, 구 서울대 문리대 앞 ‘미라보 다리’도 빛을 잃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귀국해 머물던 곳, 대한민국 최초의 정부 조각(政府 組閣)이 이루어진 곳인 이화장(梨花莊) 부근을 내려다 본 후 도성의 암문(暗門)을 통해 한성대 방향으로 내려간다.
그곳 조그만 공원에는 의외의 웅장한 전통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시대에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三軍部)의 본전 건물인 총무당이다. 본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는데 패망한 조선의 군부 건물이다 보니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1930년 일제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서울시 유형문화제 제37호). 총무당이라고 쓴 편액에는 조선말 명필 신관호(申觀浩)의 인(印)이 선명하다.
기둥마다 주련(柱聯: 건물 기둥에 써 붙인 글)도 걸렸는데, 그 청정한 주련 글도 지키지 못한 국운을 생각하니 마음이 스산하다.
의동상부동서향청(儀同相府東西向廳) 법도는 의정부같이 동서로 청이 향하고
문무길보위헌만방(文武吉甫爲憲萬邦) 문무는 아름답고 커 만방에 법이 되네
이제 다시 암문으로 올라 와 낙산 정상 방향으로 간다. 공원을 잘 정비해 놓아 매우 깨끗하다. 사실 이곳은 살기 어려웠던 60~70년대에 게딱지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시민아파트가 자리하던 곳이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깨끗이 공원으로 정비되었다. 낙산 정상까지 마을버스도 다닌다.
정상 동쪽 능선이 모두 아파트촌으로 변했고 이곳까지 연결되는 마을버스들이 있다. 버스 노선이 성벽을 헐고 연결된 점이 아쉽다.
성벽 돌에는 좌룡정(左龍亭)이라고 쓴 각자가 선명하다. 낙산이 좌청룡이기에 이곳에 정자를 짓고 좌룡정이라 이름붙인 것이리라. ‘서울금석문대관’(서울金石文大觀: 서울특별시 발간)에는 용(龍)을 임금으로 보고 좌(左)를 좌(佐: 돕다)로 해석하여 입금을 보좌하는 정자라고 해설하였는데 아무래도 너무 비약한 해석 같다.
서울을 안에서 감싸는 4개산(내사산) 중 하나인 낙산에는 양반의 발자취는 물론 60~70년대 빈민의 치열한 삶도 얽혀 있어
이제 성벽을 버리고(성벽을 따라 가면 ‘서울도성 답사길’이 되면서 동대문으로 내려가게 된다), 본래 낙산의 동쪽 능선이었던 동쪽 차도를 따라 간다. 왼쪽으로는 한성대가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아파트들이 보인다.
쌍용아파트가 나오면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근처 안내판을 주의 깊게 살펴 보자. 쇠파이프로 양쪽 기둥을 세우고 철판에 ‘단종대왕천도도량 원각사’라고 쓴 안내판이 보일 것이다. 이 안내판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약 20m 내려가면 가꾸어 놓은 숲 속에 복원한 초가집 한 채가 나타난다. 비우당(庇雨堂)이다.
비우당에서 비(庇)라는 글자는 덮다/가린다는 뜻이다. 그러니 비우당(庇雨堂)이란 말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누가 어떻게 비를 가렸을까? 청계천을 걷다 보면 동대문에 해당하는 위치의 청계천에 오간수교가 나오고, 이어서 맑은내다리, 다산교, 영도교, 황학교, 비우당교가 나온다.
산보객 중 많은 사람들이 다른 다리 이름은 그 의미를 짐작하건만 비우당교만은 오리무중으로 빠져 들고 만다. 그럼에도 다리 이름에 대해서는 한 마디 설명도 없으니 아쉽다.
비우당은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광해군 때의 유학자 지봉 이수광(芝峰 李晬光, 1563~1628)선생이 지은 창신동 지봉(芝峰) 아래에 있는 초가집이다. 선생의 부친 이희검(李希儉)은 세종조 때 청백리(淸白吏)인 삼청(三淸: 황희, 맹사성, 유관 세 사람. 당대에 청백리였기에 삼청이라 불리었다) 중 한 사람인 유관(柳寬)의 외증손(外曾孫)이었다.
李晬光(이수광, 1563~1628)은 임진란 이후, 낙산 동쪽 봉우리인 이곳 지봉(芝峰) 아래에서 집필 활동에 매진하면서 호(號)도 지봉이라 자호(自號: 스스로 호를 지어 부름)하고 외가 할아버지 유관(柳寬) 선생의 삶을 기려 그 분이 사시던 옛터에 비나 간신히 가릴 수 있는 초가를 짓고 당호(堂號: 집 이름)를 비우당이라 하였다.
하정 유관(夏亭 柳寬) 선생의 일화는 필원잡기(筆苑雜記), 청파극담(靑波劇談), 용재총화(慵齋叢話) 등에 전해지는데, 본래 선생 이름은 柳觀(유관)이었건만 후에 柳寬(유관)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기휘(忌諱)라 하여 조상이나 임금과 관련이 있는 글자를 후손의 이름 글자로 쓰지 않으며, 벼슬 이름의 글자가 조상 이름 자(字)와 겹쳐도 그 벼슬에서는 일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유관의 아들 계문(季聞)이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벼슬을 제수 받았을 때 발생했다. 계문은 부친 유관의 이름자인 ‘관’(柳‘觀’과 ‘觀’察使)이 기휘해야 할 글자이므로 경기관찰사 부임을 포기하려 하였다. 이에 부친 유관은 觀을 寬으로 바꾸어 이름은 柳寬이 되고 계문은 관찰사 직(職)을 잘 수행했다 한다.
그런데 요즈음 작명 책(作名)에는 이런 기휘 원칙을 지나 아예 이름에 쓰지 말라는 글자 목록까지 만들어 소개하니, 기휘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 아닌가?
과거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그 시절에는 비록 예전에 지은 내 이름이라도 새로 등극한 황제가 이름 자(字)를 쓰면 내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따라서 공연히 너무 좋은 글자로 이름을 지었다가 뒤늦게 이름을 바꾸거나, 심지어 미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가 혼찌검이라도 나면 안 되지 않겠는가? 이런 위험을 사전에 피하려면 미리 알아서 기휘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다음 호에 계속)
교통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
걷기 코스
혜화역 1번 출구~일석기념관~낙산~삼군부 총무당~비우당~미타사(탑골승방)/보문사~동망봉~청룡사/정업원 구기~우산각골~안양암~창신역 또는 동묘역
* 이야기가 있는 길,1 - 옛 이야기를 찾아 걷는다
http://cafe.daum.net/storyroad1/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