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산행기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가 있는 길. 양평 숨은 절 사나사를 갑니다]

산포로 2016. 8. 28. 14:13

[산포로기행 이한성 교수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가 있는 길. 양평 숨은 절 사나사를 갑니다]

 

8월말에는 찬바람이 좀 불려나?


너무 더운 날이 계속되니 몸과 마음이 힘듭니다.
8월에는 양평 사나사 계곡을 걸어 깊숙히 숨은 절 사나사로 갑니다.
교통이 불편하여 차로 가는 코스인데, 이번 답사에는 걸어서 가겠습니다.
보고 가야할 곳이 있습지요.


1. 가는 날 : 2016년 8/27(토)
2. 가는 곳 : 경기도 양평 사나사
3. 모이는 곳/시간 : 10:00 중앙선 아신역 1번 출구 (용문행), 거리가 멀어 10:00 에 모입니다.
4. 준비물 : 개인 물, 중식
5. 복장 : 등산 복장, 등산화나 편한 신발(모자와 썬크림, 썬그라스, 우천시 우비), 혹시 물에 들어갈지 모르니 반바지나 스리퍼 있으면 좋을 듯.
6. 식사 : 참가가능자 답사 후 함께 합니다. 비용 1/n
7. 기타 :

1) '옛절터 가는 길' 10 읽고 오시면 참고가 됩니다
2) 모두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스스로 책임지는 답사입니다.
3) 진행속도는 후미를 기준으로 합니다.
4) 코스: 경기도 양평군 중앙선 아신역-옥천읍-대원사 당간지주-개울길(하사천)-함왕혈- 사나사-경기도 양평군 중앙선 아신역(답사 거리 : 11.3km)
* 아신역에서 사내(斜川)을 따라 걷습니다.
* 돌아올 때는 아신역으로 다시 걷든지 양평 콜택시 이용합니다.
* 아쉽지만 함왕산성 등산은 생략합니다.
5) 별도 회비는 없습니다.
6) 우리 이야기길의 목표는 健康과 즐거움이고, 공부는 덤이니 편한 마음으로 오십시요.
7) 용산이나 옥수, 회기, 상봉 등에서 만나서 오셔도 좋습니다.

 

지금껏 30일 넘게 이어진 열대야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그리도 덥던 한여름 폭염이 전날 내린 비로 초가을 날씨로 돌변하였습니다.


열대야는 물론 사라지고, 낮에도 그늘에 서면 약간 선선함을 느낍니다.


대자연의 깜짝쇼입니다.


때문에 오늘 산행엔 무척이나 시원한 답사길이 이어집니다.


사실 양평 백운봉(941m)과 용문산(1,157m)은 수차례 찾아 오른 산이기에 무척 익숙하지만, 대부분 양평으로 산을 올랐기에 이곳 옥천 사나사 방면은 처음 온 곳입니다.


물론 양평의 마테호른인 백운봉(941m)과 용문산(1,157m)의 모습은 이곳에서 더욱 멋져 진가를 발휘합니다.


더욱이나 사나사를 오르는 중에 숨어있던 아름다운 절과 계곡은 저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

* 양평 사나사 답사 길에 수고많으신 분들과 함께 합니다.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새가 “으하하하, 홀딱벗고” 우는 길

 

초의선사가 찾은 양평 사나사 옛절터 길을 찾아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의 편지글을 모은 책에 벽해타운(碧海朶雲: 바다 건너 온 편지)과 주상운타(注箱雲朶: 상자에서 꺼낸 편지)가 있다. 이 편지글 끝에 발문(跋文)이 있는데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쓴 글이다.

 

거기에는 1830년 겨울 초의선사의 두 번째 서울 나들이 기록이 있다. 스승 완호스님이 입적한 후 정조의 사위 홍현주에게 비명(碑銘)을 부탁(乞禪師塔碑銘於海居都尉)하러 온 것이다.

 

이때를 기회삼아 이듬해(1831년, 辛卯) 초여름에 김익정, 민화산과 함께 한강에서 배로 거슬러 올라 용문산을 기행하였다. 그 경로가 사내(斜川) 길 옛절터 ~ 사나사(舍那寺) ~ 수월암(水月庵) ~ 가섭봉(용문산) ~ 윤필암 ~ 상원암 ~ 용문사(龍門寺)였다. 지나는 길마다 선사는 시(詩)를 한 편씩 남겼는데 주옥같은 9편의 시가 있다.

 

<그중에서 험난한 가섭봉(용문산의 옛 이름)을 오르며 장단구를 쓰며, 산의 모습과 시어의 구성에서도 실감나게 지은 登迦葉峯(등가섭봉, 가섭봉을 오르다)입니다.

 

登迦葉峯(등가섭봉)                 가섭봉을 오르다

 
登山莫登逶迤山(등산막등위이산)  산을 오르되 밋밋한 산 오르지 마소
逶迤之山凡草樹(위이지산범초수)  밋밋한 산은 모두 풀 나무뿐
君不見(군불견)                       그대 보지 못하나
迦葉崎嶒白雲上(가섭기증백운상)  가섭산이 흰구름 위로 뚫고 솟아
直入銀漢吐風雨(직입은한토풍우)  곧바로 은하수로 들어 비바람 토해냄을
縣松倒祚許人攀(현송도조허인반)  매달린 솔 거꾸로 선 참나무 사람 손잡게 하고
崩崖落石縈細路(붕애낙석영세로)  무너진 벼랑 떨어지는 돌 가늘은 길 돌게 한다
强欲一步進(강욕일보진)            억지로 한 발짝 나가려면
已覺退三步(이각퇴삼보)            이미 세 발짝 물러남 알겠다
危磴幾屈膝(위등기굴슬)            위태로운 바위 몇 차례 무릎 꿇고
側棧屢驚度(측잔루경도)            기울어진 사다리 건널 때마다 놀란다
絶驗難寄飛煣足(절험난기비유족)  험한 절벽 원숭이도 붙어 날기 어렵고
嵩峻倒壓戾天羽(숭준도압려천우)  높은 준령은 하늘을 나는 새도 거꾸로 누른다
終能絶頂非人力(종능절정비인력)  절정은 끝내 정복하기엔 인력이 아니고
知有山靈冥祐護(지유산령명우호)  산신령이 은밀히 도울 줄로 알겠다
不知幾萬丈之穹隆(부지기만장지궁륭) 몇 만 길의 높은 하늘이나
峭壁下臨無地(초벽하림무지)       아무리 내려가도 지면이 없는 절벽 알 수 없어
目眩足酸不敢俯(목현족준불감부)  눈 어지럽고 다리 시어 내려다보지 못한다
列岳攢峯爭盤紆(열악찬봉쟁반우)  못뫼 뾰족한 봉우리 다투어 둘렸으니
騰驤起伏勢難收(등량기복세난수)  굽었다 일어났다 하는 말인 양 형세 거두어 들이지 못한다
環坐陳險難(환좌진험난)            둘러 앉아 험난했던 일 말하며    
慰言如相訴(위언여상소)            서로 하소연하듯 위로한다
掬嘗巖寶泉(국상암보천)            바위 구멍 샘물 움켜 맛보니
神爽如發悟(신상여발오)            상쾌한 정신 깨달음 일 듯하고
摘蔬囊單食(적소낭단식)            채소 따서 주먹밥 싸먹으니
靈香通胃腑(영향통위부)            신령스런 향기 위장까지 통한다
談論恐非人間意(담론공비인간의)  이야기로는 세상 뜻 되지 못할 듯
賦咏疑是天上趣(부영의시천상취)  시 읊음이 천상의 멋인가 의아하다
地上神仙眞玆是(지상신선진자시)  땅 위의 신선이 바로 이것이니
何必吸風復飮露(하필흡풍복음로)  꼭 바람 마시고 이슬 마셔야 하나.
 
<艸衣 禪師(초의 선사, 1786~1866)는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興城(흥성) 張氏(장씨)이며, 이름은 意恂(의순), 자는 中孚子(중부자)입니다. 24세 때 전남 강진에 와서 유배 생활을 하던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 1762~1836)과 처음 교류하였습니다. 정약용은 초의에게서 차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초의는 <周易(주역)><詩學(시학)>을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30(1815) 되던 해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와서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 1786~1856), 정약용의 아들인 丁學淵(정학연) 등과 교류를 했습니다. 이들 문사와의 교류는 평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초의 선사의 저서로는 일생동안 참선이였기에 사대부와 교류하며 지은 시를 모은 <一枝庵詩稿(일지암시고)>와 일생동안 지은 (), (), (), (), 祭文(제문), 祝文(축문), 影讚(영찬)을 실은 <一枝庵文集(일지암문집)>, ()의 요지를 밝힌 <禪門拈頌(선문염송)>중에서 골자만을 가려 註釋(주석)을 달아 놓은 <艸衣禪課(초의선과)>, 한국의 茶經(다경)으로 불리는 東茶頌(동다송), 차의 지침서인 茶神傳(다신전) 등이 있습니다.
 
한편 艸衣 禪師(초의 선사, 1786~1866)의 시 중에서 58세 때(1843) 늙은 몸을 이끌고 고향을 들렀으나, 고향집은 다 허물어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의 무덤을 돌아보고 눈물로 지은 시를 소개합니다.
 
遠別鄕關四十秋(원별향관사십추고향을 떠난지 40년인데
歸來不覺雪盈頭(귀래불각설잉두돌아와 보니 센 머리도 모르겠구나
新基草沒家安在(신기초몰가안재새 터전은 잡초에 묻히고
古墓苔荒履跡愁(고묘태황이적수옛 묘는 이끼만 끼어 걸음마다 시름이구나
心死恨從何處起(심사한종하처기마음을 잃었는데, 한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血乾淚亦不能流(혈건루역불능류피눈물도 말라서 흘려지지않네
孤笻更欲隨雲去(고공갱욕수운거외로운 중은 다시 구름따라 떠나노니
已矣人生愧首邱(이의인생괴수구아서라, 고향 찾는단 말 부끄럽네.>
 
오늘의 답사 길은 선사(禪師)가 거쳐 간 옛 절터를 찾아가 보려 한다. 길이 멀기에 일찌감치 용문행 전철에 올라 아신역에서 하차한다. 역은 6번 경강국도 이면도로에 자리 잡고 있다. 역을 나서 좌측 마을길을 지난다.
 

 

 

아신에 도착합니다.

 

 

 
 

 

 

중앙고속도로 밑으로 백운봉(941m)이 보입니다.

 

 

 
 

 

 

 

 

 

마을이 끝날 즈음 주유소가 나타나고 철도길 아래를 지나는 차도로 들어서면 잠시 후 개울을 건너는 옥천교가 있다. 길은 큰 길과 마을로 들어가는 길로 나뉜다. 큰 길은 주로 한화콘도 가는 이들이 이용하는 길이다.

 

 

마을길로 들어서자. 옥천면 소재지가 있는 작은 시골동네다. 이 동네는 40여 년 전부터 옥천냉면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지금도 냉면과 완자가 유명하다.

 

 

 

 

옥천이 양평읍으로 조선 중기에 관아가 이전되기 전엔 꽤 번창하였답니다. 하기에 옛 고읍이란 명칭이 옥천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면사무소를 지나 파출소 뒤로 가면 옥천고읍(古邑)의 작은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근처 탑산리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고려 시대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향토유적 33호), 허씨며느리비(碑)(향토사적 9호)로 전해지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비석, 가슴에 손을 모은 돌불상, 옥천(玉泉)이라는 지명을 낳게 한 옥천수(玉泉水)가 아직도 철철 흘러넘치고 있다.

 

 

 

 

 

 

그런데 3층 석탑은 누군가 슬그머니 한 층을 더 올려놓아 4층탑이 되어 있다. 상륜부를 만든다고 한 것 같은데 올려놓은 한 층을 없애고 원래의 형태로 돌려놓았으면 좋겠다.

 

효부 허씨 며느리비로 전해지는 비(碑)도 여말선초의 묘표(墓表)로 보인다. 누군가의 잊힌 묘 앞에 서 있었을 흔적이었을 것 같다.

 

사나사에서 내려온 물길이 사내이니

 

이 지역은 본래 양근(楊根: 양평의 옛 지명)의 읍치였는데 1747년 관아가 옮겨간 후 고읍(古邑)으로 불리다가 옥 같은 샘이 있어 옥천(玉泉)이 되었다 한다. 그 이전에는 미원장(迷原莊)에 속했었다. 이제 초의선사가 지나간 옛절터를 찾아간다. ‘한국사찰총서’ 기록을 참고하면, “대원사(大願寺): 터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대원리. 사찰 당간 석주가 지금도 있다(址在京畿道楊平郡玉泉面大元里. 刹竿石柱尙存)”라고 했다.

 

또한 초의선사 일행은 노탄(蘆灘)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 사내(斜川) 개울가에 있던 옛절터를 지나 사나사로 들어간다. 다행히 지금도 사나사에서 내려온 계곡이 개울을 이룬 물줄기를 사내(斜川)라 부른다. 위를 상사천, 아래를 하사천이라 한다.

 

 

옥천 고읍 읍내에는 시대를 잊은 듯한 다방 간판, 눈깔사탕을 팔고 있을 듯한 오래된 구멍가게도 문을 열고 있다. 한 순간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하다. 이런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 2차선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노래방이 하나 있다. 이 노래방 뒤 골목길에 너무나도 초라하게 당간지주 하나가 서 있다(향토유적 8호). 이것이 신라말 또는 고려적 절 대원사(大願寺 혹은 大月寺)를 알렸을 깃발(당: 幢)을 매달던 당간 돌기둥이다.

 

쓰러져 가는 안내판에, 당간지주 하나는 일제 때 경찰서장이 가져다가 황국신민선서(皇國臣民宣誓)를 새겨 갈산에 세웠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그 하나도 찾아다가 짝을 맞추었으면 좋겠다.

 

 

 

 

 

 

 

백운봉(941m)이 가까이 보입니다. 죄측엔 용문산(1,147m)도 보입니다.

 

 

 

 

 

 

초의선사가 지나간 1831년에도 절은 없었다. 선사는 시(詩)를 한 편 읊는다.

 

경하염염서광청(輕霞冉冉曙光晴)  엷은 놀 흐릿하더니 새벽빛 맑아 오고
욱일연연상적성(旭日涓涓上赤城)  아침해 물흐르듯 하늘로 떠오른다
추창용문산하로(惆悵龍門山下路)  안타깝네, 용문산 아랫길에는
보방유여야인경(寶坊遺與野人耕)  옛절터에 농부가 밭을 가누나.

 

이제는 밭가는 농부도 없고 그 절터에 자리한 노래방에서 누군가 소리 질러 노래를 하겠구나. 당간지주 앞 패널 건물 낙숫물 떨어지는 곳에는 부서진 기와편들이 모진 세월을 견디고 있다. 선인들의 발자취가 너무 버려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절터를 지나 개울 뚝방길로 들어선다. 주민들 산책길을 조성해 놓아 길은 깨끗하고 편리하다. 곧 두 물줄기가 모이는데 왼쪽 물길은 신복천으로 한화콘도로 가는 물줄기이다. 우측 개울 길을 잡아야 한다. 백현마을을 지나면 물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좌측 물길은 쏠비알 계곡으로 가는 길이며 우측 물길은 하사천(下斜川)이며 사나사 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개울길 중간에 성지교회라는 교회도 지나고 상류 부분에 이르면 산책길이 끊어지면서 풀밭이 나오는데 이 풀밭을 지나 우측으로 빠져 나오면 사나사로 향하는 2차선 포장도로와 만난다. 여기서 사나사까지 약 1km 길이다.

 

정권의 갈림길에서 선택 잘한 함왕

 

사나사 가는 길에는 함왕혈(咸王穴)이 있다. 제주도에 가면 고(高)씨, 부(夫)씨, 양(梁)씨 시조가 태어났다는 삼성혈(三姓穴)이 있듯이 양근(楊根: 양평) 함씨의 시조인 함왕이 태어난 구멍(穴)이라는 전설이 있다. 함왕의 흔적은 사나사 뒤 함왕봉, 장군봉에 걸쳐 있는 함왕성터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함왕(咸王)은 누구였을까? 정확한 역사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짐작컨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이바지하여 공신의 반열에 오른 광평시랑(廣評侍郞) 함규(咸規: 양근 함씨 중시조)일 것으로 여겨진다.

 

후기신라 말 세상은 극도로 어지러워지고 각지에서 토호(土豪) 세력이 불같이 일어났다. 이런 군웅할거의 시기가 정리되면서 왕건, 견훤, 신라가 정립한 후삼국시대가 펼쳐지는데 함규는 양근 지역에 세력 기반을 둔 호족이었다.

 

 

 

▲ 함왕혈

 

사나사 가는 중에 봉재산(340m)을 오르는 길도 보입니다.

 

 

사나사로 들어간다. 180년 전 초의선사 일행도 오늘의 필자처럼 함왕혈을 지나 사나사계곡을 끼고 절에 이르렀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사나사를 ‘미지산(彌智山: 용문산의 이명)에 있다’고 간단히 기술했다.

 

전해지기로는 923년 창건하고 공민왕 16년(1367년) 태고보우선사가 중건했다 한다.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는데 1907년 이곳에 의병들이 집결하니 일제가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들은 6.25 이후 중건하여 석탑, 사리석종, 비석 등과는 달리 고풍스러움은 없다. 그러나 절터와 계곡은 시간 저 너머의 적요함과 그윽함 그대로이다.

 

 

이 절은 조금만 눈부비고 살피면 가치 있는 옛사람들의 흔적들이 있다. 우선 사나사(舍那寺), 이름부터 특이하다. 종무소 보살께 여쭈어 보았더니 노사나불(盧舍那佛)에서 온 이름이라 한다. 절에서는 흔히 삼신불(三身佛)이라 하여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淸淨法身), 노사나불(盧舍那佛: 圓滿報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千百億化身)을 모신다.

 

지금의 사나사는 주법당을 대적광전으로 하여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그렇다면 사나사의 절 이름도 이제 毘盧舍那佛(비로사(자)나불)에서 그 뜻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절 입구 종각 아래 숲에 옛 비석이 보인다. 6.25때 누군가 총을 쏘아대어 표면이 흉악하게 얽었다. 살펴보니 이름도 특이하게 당상계불량비(堂上稧佛糧碑)이다. 건륭(乾隆) 40년 을미팔월(영조 51년, 1775년)에 세운 비석으로 이 지역에서 당상관(정3품) 이상 품계를 받은 사람들이 출연해 사나사 부처님께 영세토록 불공을 드릴 수 있도록 불량답(佛糧畓: 부처님 양식이 될 논)을 시주한 내용이다. 유학이 지배하는 가치관 속에서 당상관들이 출연했다고 이런 일을 하다니…. 이념과 생활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데올로그 정도전은 왜?

 

절 마당에는 고려적 3층석탑(문화재 자료 21호)이 고졸하게 서 있고, 그 옆으로 세월에 흠뻑 젖은 종형(鐘形)의 부도(浮屠: 경기유형문화재 72호)가 있다. 고려말 선승 원증국사 태고보우(太古普愚)의 4개 사리탑 중 하나다.

 

 

 

 

 

 

 

 

 

태고 보우스님은 이곳에서 산 하나 넘으면 닿는 소설산 소설암(지금의 가평군 설악면 설곡리)에서 열반해 다비했는데 그 때 사리 100과가 나왔다 한다.

 

 

 

 

옛절터 가는 길⑥ 태고사 편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 사리를 당신 생전에 인연 닿은 4개의 사찰에 나누어 봉안했다. 사나사(옥천), 태고사(북한산), 소설사(미원, 지금의 가평 설악면), 양산사(가은: 희양산 봉암사)이다.

 

부도 옆으로는 정도전이 지은 ‘미지산 사나사 원증국사탑비’(경기 유형문화재 73호)가 서 있다. 6.25 때 총질을 해대어 구멍이 뚫리는 등 심하게 훼손됐으나 그 비문은 채록된 것이 있어 내용을 아는 데 문제가 없다.

 

특이한 것은 조선을 유교국가로 설계하고 후에 불씨잡변(佛氏雜辯)을 지어 불교를 통렬하게 비판한 삼봉 정도전이 대사의 탑비명(塔碑銘)을 지었다는 점이다. 북한산 태고사의 비명(碑銘)은 목은 이색이 지었고, 조선 중기에 파괴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얼마 전 파편 일부가 발견된 소설사의 비명은 양촌 권근이 지었으니 대사의 위치가 어떠했는가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이 있다. 세상 어느 절에도 없는 한 사람의 전각이 있다. 함왕을 모신 함씨각(咸氏閣)이다. 전각의 문을 열자 함왕을 그린 탱화가 걸려 있다. 일본 같았으면 벌써 신(神)으로서 신사(神社)에 모셨을 것이다.

 

이제 태고보우대사를 모신 조사전(祖師殿) 우측으로 함왕성길에 나선다. 함왕성은 용문산 정상(가섭봉)에서 양평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용문산 ~ 장군봉 ~ 함왕봉 ~ 백운산 ~ 두리봉)에서 함왕봉(947m) 아래 해발 890m 봉우리 주변에 있다. 출발 기점에는 함왕성지 1.77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고도가 만만치 않으니 천천히 오르도록 하자.

 

청정수 가득 흐르는 계곡을 건너 한 시간여 산길을 오르면 함왕성지(도 기념물 123호)에 닿는다. 무너진 성벽돌이 지천으로 흘러내린다. 갈림길이 없으니 길 잃을 걱정은 없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함왕성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함공성(咸公城): 군 동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만9508척이다. 고려 때 고을사람들이 이곳에서 몽고 군사를 피했다“라는 내용이다.

 

한국의 마터호른이라더니 역시 경치가

 

성은 가파른 경사면을 이용하여 돌로 쌓았는데 상당히 넓은 면적을 포함하도록 폐곡선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에다가 함왕봉 쪽으로는 가파른 능선 한쪽만 쌓은 포곡식산성(包谷式)도 포함하고 있다.

 

평탄하고 넓은 부지에는 어제인 듯 기와편이 지천으로 부서져 있다. 단단한 질그릇 조각과 청자편도 보인다. 성벽을 따라가면 일정 거리를 두고 성루(城壘) 터를 만나는데 이곳에도 기와편들이 흩어져 있다.

 

이 외딴 곳, 먼 시간 너머에서 무슨 목적으로 이 산성을 쌓은 것일까.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처럼 비상사태 때 피신하여 방어할 수 있도록 쌓은 산성은 아닐까. 이만한 성벽과 건물들을 지었음을 볼 때 몽고 침략에 대비해 단시일에 쌓은 성은 아닌 것 같다.

 

전날 백운봉 산행 중 백운봉 정상에서

 

 

예전 백운봉 산행 중 홤왕산성터에서

 

 

홤왕산성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함왕 시절 만일에 대비해 보장(保障)의 성격으로 쌓은 성은 아닐는지…. 이 지역 애호가들과 전문가들의 발굴과 연구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이만한 자원을 방치하는 것은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요즈음 옛길 찾아 지방도시를 가다 보면 먹을거리와 대중문화 중심으로 축제가 이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이 땅 선배들이 남긴 흔적에도 눈길 한 번 주었으면 좋겠다.

 

함왕성(城)을 산속 시간 속에 묻어 두고 남쪽 백운봉을 향한다. 산의 형상이 군더더기 없이 솟아올랐기에 호사가(好事家)들은 백운봉을 한국의 ‘마터호른’이라고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그만큼 멋있다는 말일 것이다.

 

가는 길 험하기는 해도 시야에 들어오는 한강의 풍경, 주변 마을들의 풍경은 마음마저도 시원하게 한다. ‘으하하하, 으하하하’ 검은등뻐꾸기가 짝을 부른다. 나의 어떤 친구는 그 새의 짖음을 ‘홀딱벗고 홀딱벗고’라고 한다. 같은 소리라도 이렇게 다르게 듣리다니…

 

이 새는 남의 집에 알을 낳는 탁란조(托卵鳥)다. 알이 부화하면 본래 있던 알을 떨어뜨려버리고 남의 어미가 가져다주는 먹이를 먹고 자라는 새다. 인간의 도덕성으로 보면 참으로 망할 놈의 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연은 이런 일도 저지른다.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일까.

 

체력소모 많은 길이므로 안배 잘해야

 

늦은 진달래는 떨어지고, 철쭉은 봉오리를 틔운다. 백운산 오르기 전 고갯길에 닿는다. 이정표가 백운산 650m, 우측 사나사 2310m임을 알려 준다. 백운봉 길은 60도 이상 가파르게 치고 오르는 길이다. 20여 분을 올라 940m 백운봉 정상에 닿는다. 정상석이 서 있고 곁으로는 백두산에서 가져온 자그마한 통일석(統一石)도 올려놓았다.

 

이제 하산이다. 등산로 입구인 용문산 휴양림까지는 약 3km 하산길이다. 하산길은 두리봉을 들를 수도 있고 계곡길로 그대로 내려올 수도 있다. 이정표가 확실하니 이정표에 따르면 어려움이 없다. 다만 체력이 문제이다.

 

능선길 지나 두위봉 갈림길에서 우측 등산로 입구(휴양림) 길로 들어선다. 석간수 백년약수가 있다. 계곡길이다. 계곡 아래 동네가 세수골이다. ‘와(臥)산림욕장’을 알리는 표지판을 지나면 좌측으로 작은 다리가 보이고 이윽고 운동시설을 갖춘 체력단련장이 있다.

 

이곳에는 많은 기와 파편이 보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절터다. 그런데 힌트가 있다. 용문산을 설명한 등산 안내판에는 초의선사가 1831년 백운산 밑 세수골에 있는 수월암(水月庵)에서 자고 가섭봉, 운필암, 사원사, 용문사에 들렸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주상운타(注箱雲朶) 발문에 의하면 이날 선사는 상숙수월암(上宿水月庵)이란 시(詩)를 남긴다.

 

백운산 아래 세수골 그리고 절터, 고증은 안 되었으나 수월암 자리일 가능성이 있다. 절터는 흔적이 없고 체육시설만 자리하니 마음이 무겁다. 절터에서 내려오면 사거리약수터 안내판이 있다. 약수는 이미 메워져 말라 있다.

 

잠시 후 조그만 폭포(사자바위폭포)를 지난다. 아래로는 휴양림 시설들이 보인다. 그곳을 지나 마을(백안리)로 내려온다. 버스시간이 멀어 택시를 타기로 한다(전화: 031-773-2121). 걸으면 40~50분이 걸릴 것이다. 양평역까지 6000원 지불했다.

 

노파심에서

 

걷는 거리가 적어도 12~13km(6시간)로 체력소모가 많은 길이다.

1. 북한산 종주 정도 체력이 가능하면 본 답사길 모두를 걷고,
2. 그렇지 못하면 백운봉 앞 고갯길에서 사나사로 회귀함이 좋다.
3. 그것도 무리가 되면 산에 오르지 말고 사나사까지만 답사하시기를.

 

교통편
1. 용문행 전철 아신역 하차 ~ 도보
2. 용문행 전철 양평역 하차 ~ 군청4거리 왼쪽 정류장에서 옥천행 버스(약 1시간 간격)

 

걷기 코스
아신역 ~ 옥천읍 ~ 대원사 당간지주 ~ 개울길(하사천) ~ 함왕혈 ~ 사나사 ~ (등산 시작) 함왕산성 ~ 백운봉 앞 고개 ~ 백운봉 ~ 등산로 입구 ~ 백년약수 ~ 절터 ~ 용문산휴양림 ~ 백안리마을

 

장날
양평 5일장은 3일, 8일이니 맞춰 가면 좋다.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 혹은 홈페이지(http://cafe.daum.net/storyroad1)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교수님의 <이야기가 있는 길>에서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8425

 

* 이야기가 있는 길,1 - 옛 이야기를 찾아 걷는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87071020&orderClick=LAG&Kc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