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싯길 (5) 금강산길, 영평] 없어진 영평 지나 무릉도원 향해 가다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포천에 날이 밝자 매월당은 금강산 길에 다시 오른다. 운수납자(雲水衲子: 수행승)의 유람 길이니 달리 바쁠 것도 없다. 길은 태조 이성계도 무수히 다녔을 북관대로(北關大路)다. 말이 대로이지 우마차 하나 제대로 가기 힘든 오솔길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만세교를 지나면 이윽고 영평(永平) 땅이다. 지금으로 보면 43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가는 길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통행인도 늘어 이 다리 옆에는 다리(脚)를 쉬어 갈 수 있는 가겟집도 하나 생겼다(만세점). 매월당 시절에도 있었으려나…, 그렇다면 나그네 목 한 번 축이고 길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영평(永平)은 지금은 없어진 땅이다. 포천의 북쪽, 철원 김화의 남쪽 땅인데 고구려에서는 양골현(梁骨縣), 고려 거란 전쟁의 주인공 고려 현종 때에는 동주(東州)에 속했다가 영흥(永興)으로 독립하였고 조선 태조 때에 영평(永平)이 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포천을 포함하기도 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조정으로 포천에 포함되어 땅은 그 자리에 있으되 이름은 영영 사라진 땅이 되었다. 영평이란 이름의 흔적은 이제 영중면, 영북면이 유일하다.
금강산을 유람한 옛 분들 글에는 포천보다는 영평의 기억이 훨씬 많이 남아 있다. 영평현에 속했던 지역들은 지금 포천시의 북쪽인 영중, 영북, 창수, 관인, 일동, 이동 등으로 산 좋고 물 맑은 명승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고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산은 천 개요 북쪽은 높고 물 한줄기 남으로 흐르네.”
(千山北峙 一水南流)
궁예의 울음소리(鳴聲)로 남은 명성산이 김화와 경계를 이루고, 후세에 한북정맥이라 이름 붙인 광덕산, 백운산, 도마봉, 국망봉, 견치봉, 강씨봉, 청계산이 1천 미터(m) 고지를 넘나들며 남으로 달려 포천, 양주로 이어져 내려온다.
김화를 흘러내린 화강(花江, 남대천)은 철원에서 지류를 품고 한탄강(漢灘江)이 되어 영평으로 흘러내리고, 여기서 영평 땅 작은 평야들을 적시고 내려온 영평천을 받아 명승을 이루면서 연천 임진강으로 흘러간다.
곳곳이 작은 평야여서 백성들은 그리 배고프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매월당보다 연배인 문신 성임(成任)은 영평 땅을 읊어,
“작은 고을 백성은 다툼이 없고, 땅은 비옥하여 해마다 곡식 여무네”라 하였다.
(縣小民無訟 田肥歲有秋)
또한 산 높고 물 맑으니 자연 곳곳이 명승(名勝)이었다. 금강산 가는 이 명승에 들려 문인은 시 한 수 읊고 화인(畵人)은 그림 한 점 남겼다. 이렇게 해서 영평의 명승은 영평팔경(永平八景)으로 유명세도 탔다. 후세에는 ‘영평팔경가’도 불리고 있다. 주로 한탄강과 영평천 주변의 명소들이다.
화적에서 벼를 털어 (禾積淵)
금수로 술을 빚어 (金水亭)
창옥병에 넣어 들고 (蒼玉屛)
와룡을 빗겨 타고 (臥龍巖)
낙귀정 돌아드니 (樂歸亭址)
백로는 횡강하고 (白鷺洲)
청학은 날아드니 (淸鶴洞)
선유담이 예 아니더냐 (仙遊潭)
매월당 시절에는 아마도 이들 명소를 아직 팔경이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팔경이란 말은 후세에 나타나는 표현이니 말이다. 포천에서 영평으로 넘어가는 포천천에 만세교(萬世橋)를 건너 매월당은 영평 땅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도 이 다리는 43번 국도 위에 시멘트 다리로 남아 있다. 영평 땅에 들어선 매월당을 맞은 것은 금모래와 기암, 맑은 물이 어우러진 백로주(白鷺洲)였다. 아마도 시 한 수 읊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아쉽게도 매월당의 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후세의 문인 서하(西河) 이민서의 글로 아쉬움을 달랜다.
맑은 냇물 만고에 흐르고
큰 돌 물 가운데 있네
세찬 물결 우렛소리로 놀라게 하고
뿌리 하나 햇볕을 품고 있네
푸른 솔은 모래톱에 깨끗하고
푸른 벽 돌문은 펼쳐졌는데
옛날 함께 노닐었던 이를 추억하다가
물가에서 눈물 옷을 적시네
淸川流萬古 巨石水中央 激浪驚雷響 孤根抱日光 靑松沙岸淨 翠壁石門張憶昔同遊客 臨流淚滿裳
서하 선생은 이 길을 함께 갔던 옛벗이 생각났나 보다. 깨끗하고 풍광 좋은 곳이다 보니 백로주 곳곳에는 옛사람들의 글귀가 남아 있다.
필자도 젊은 날 동료들과 가족들과 이곳에 와 신선처럼 놀다 간 일들이 생각난다. 함께 왔던 이들 중에서 외국으로 간 이, 고인이 된 이도 있으니 풍광 좋은 곳에 오면 옛사람들이 생각나는 것이 사람 마음인 듯하다.
관아의 객사였을까, 주막이었을까
매월당은 다시 북으로 발길을 옮긴다. 반갑게도 양문역(梁文驛)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조금 지나면 지금은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삼팔선 휴게소가 자리 잡았다. 560년 전 매월당은 후세에 나라가 두 동강으로 나뉘어 이곳에 삼팔선 휴게소가 서리라고 차마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곳에도 매월당이 남긴 시는 만날 수가 없다. 공무로 나선 길이 아닌 매월당은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
조선의 많은 이들이 금강산 길에, 때로는 공무 길에 관북으로 가면서 이곳에서 여정을 풀었다. 조선 광해군 때 함경도 경성으로 좌천되어 가면서 양문역에서 하루를 유(留)한 이가 있었다. 광해군이 풍수에 빠져 거처하는 창덕궁을 두고 경운궁으로 이거하려 하자 몸으로 길을 막다 미운털이 박힌 것이다. 그는 동계(桐溪) 정온(鄭蘊)이었다. 이곳이 제일 큰 역이었건만 마음이 불편한 그는 황량한 시골 객사에는 앉을 깔개도 없다고 투덜댄다(荒凉村舍坐無氈). 호호. 동계 선생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매월당은 영평 읍내로 들어갔다. 지금의 43번 국도는 거의 직선형 신작로여서 영평의 읍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양문리 지나 좌회전하여 연천 방향 37번 국도로 조금 이동해야 옛 영평현 관아 터로 갈 수 있다. 매월당 시절에 길은 영평천 넘어 관아로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영평현의 관아는 영평초등학교 자리라 하는데 관아는 물론 1백 년을 넘긴 초등학교도 이제는 폐교가 되었다. 폐교되어 을씨년스럽게 잠긴 철문 앞에는 참으로 생소한 선정비 몇 기만 남아 이곳이 천 년을 넘게 지켜온 고장의 읍치였음을 알리고 있다.
철문을 밀고 교정으로 들어간다. 단군 할아버지도, 이순신 장군도, 어깨동무하는 다정한 친구도, 책 읽는 소녀도 모두 그 자리를 지키고 있건만 이곳에서 뛰놀던 아이들만 모두 떠나갔다. 석불 한 분 홀로 서서 교문을 바라보며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리는 교정에는 저녁 햇살이 무심하다.
매월당은 560여 년 전 그날 어디에서 나그네의 하루를 유(留)하셨는가? 관아의 객사(客舍)였는지 관아 앞 저자(시장의 옛말)의 주막이었는지 써 놓지 않으셨다. 그날 매월당의 시 한 수 읽는다.
저녁 무렵 영평에 들다
작은 고을 사방엔 산으로 둘러싸여
낮은 정자 마른 나무 구름 사이에 기댔구나
저녁 연기 그림처럼 천 겹 봉우리에 퍼지고
개울물에 적삼 적시는데 달은 반 가락지
세속 세상에서 이 몸 심히 늙을 것 잘 알고 있지만
초야에는 어디인들 安閑하지 않겠는가
내일 아침 다시 桃源길 들어서면
승경이 유래한 땅 팍팍하지 않겠지
暮投永平縣
小邑週遭圍四山. 短亭枯樹倚雲間. 暮煙展畫峯千疊. 野水浸衫月半環. 人世極知身老大. 林泉何處不安閑. 明朝更入桃源路. 勝景由來地不慳.
半環: 때는 초승이거나 그믐에 가까워 달 모양이 반 가락지처럼 보인 듯하다.
安閑: 편안하고 한가로움
매월당이 영평에 머문 날 달은 초승달(그믐달)이어서 영평천에 그 달이 비쳤을 것이다. 매월당은 스스로 힘을 돋운다. 그래 산골 나그네, 내일 아침 금강산 승경을 찾아서 무릉도원(桃源) 길로 가자~.
참고: 영평을 찾으실 때는 적어도 영평팔경 중 화적연(禾積淵)과 금수정(金水亭)은 들러 보십시오. 화적연은 졸고 ‘겸재 그림길’에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CNB 문화경제 사이트에서 검색하시면 됩니다. 금수정은 영평 관아 터에서 멀지 않은 영평천 언덕 경승지에 있습니다.
제771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4.05.16 09: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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