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88) 경포대] 경포대의 편액들을 혹평한 강릉 천재 허균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한국의 중년 이상 세대에게 강릉(江陵)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던 이미지가 경포대와 신사임당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요즈음 세대라면 아마도 커피와 힐링이 그보다 앞설 것 같다. 강릉을 가게 되면 길동무들에게 항상 묻는 질문이 있다. 경포대를 가 보았느냐고. 그러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며 누구를 무시하는 거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막상 경포대에 가면 반쯤은 “아니, 바다로 안 가고 어디로 가느냐?”고 한다. 많은 이들이 경포대 해수욕장을 경포대라 생각한다. 젊은 날 여름이면 가고 싶어 했던 곳이니까. 그리고 경포대 간다 하면 그 바닷가로 갔으니까. 필자도 제일 먼저 접한 경포대(鏡浦臺)는 그 해수욕장이었다. 어른이 되고 한참 후에 겨우 경포대라는 이름의 누각(樓閣)을 알게 되었다.
동계올림픽 이후 KTX가 뚫리면서 강릉은 두 시간 거리로 가까워졌다. 필자도 1년에 한두 차례는 그 기차를 타고 강릉과 동해안을 가니 대관령을 넘는 기회도 점점 줄어간다. 강릉 땅은 어떤 땅이었을까? 겸재를 만나기 전에 강릉의 시간여행을 잠시 해 보려 한다. 낯선 땅을 찾아갈 때는 이 땅의 옛 삶을 기록한 지리서가 좋은데 그중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만 한 자료도 없을 것이다.
강릉대도호부
본래 예국(濊國)인데, 철국(鐵國) 또는 예국(蕊國)이라고도 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이 지역을 임둔(臨屯)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다. 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하였다. 신라 선덕왕(善德王)은 작은 서울을 설치하여, 사신(仕臣)을 두었다. 무열왕(武烈王) 5년에 이 지역이 말갈(靺鞨)과 연접하였다 하여 작은 서울이라는 명칭을 고쳐 주(州)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두어서 진무하고 지키도록 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명주(溟洲)라 고쳤다. 고려 태조 19년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고, 성종 2년에 하서부(河西府)라 불렀다. 5년에는 명주도독부라 고쳤으며, 11년에 목(牧)으로 고쳤다. 14년에 단련사(團練使)라 하였다가, 그 후에 또 방어사(防禦使)라 개칭하였다. 원종(元宗) 원년에는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고, 충렬왕 34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부로 만들었다. 공양왕 원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本濊國。一云鐵國,一云蘂國。漢武帝元封二年,遣將討右渠定四郡時,爲臨屯。高句麗稱河西良。一云何瑟羅州。新羅善德王爲小京,置仕臣。武烈王五年,以地連靺鞨,改京爲州,置都督以鎭之。景德王十六年改溟州。高麗太祖十九年,號東原京。成宗二年稱河西府,五年改溟州都督府,十一年改爲牧。十四年爲團練使,後又改防禦使。元宗元年,以功臣金洪就之鄕,陞爲慶興都護府。忠烈王三十四年,改今名爲府。恭讓王元年,陞爲大都護府。本朝因之,世祖朝置鎭).
강릉은 동해 바다 쪽 제일 큰 지역으로, 이 지역을 대표하는 대도호부(大都護府)였다.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예(濊), 맥(貊)으로 불린 독립국가였는데 중국의 사서에는 부지런하고 선량하며 학문을 좋아한다고 하였으니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우수한 국가였던 것 같다. 그 후 고구려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그 일부가 되어 하슬라주(何瑟羅州)가 되었다가 신라 때 다시 명주(溟州)가 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명주군은 1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땅 이름인 셈이다.
아픈 역사도 있다. 성산면 보광리에 가면 명주군왕(溟洲郡王)이라는 이의 능(陵)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그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왕(김경신)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상재(김주원)의 무리들이 모두 와서 따르고 새로 오른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이다. 이름은 경신이요, 성은 김씨이니….
신라 37대 선덕왕이 승하하자 태종 무열왕의 직계인 상재(上宰) 김주원(金周元)이 등극 1순위였는데 후순위 상대등 김경신이 김주원이 홍수로 나타나지 못하자 왕위를 차지해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표현은 그리 안 했지만 김경신이 쿠데타로 왕위를 차지하고 김주원 군은 항복했던 것이다. 이에 김주원은 어머니 고향 명주에 와서 자리잡고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명주군왕은 원성왕 측에서 이 지역을 식읍으로 내려준 칭호라고 한다. 정사(正史)에는 기록이 없는데 모두 그를 왕으로 불렀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면 이런 아픔은 잊혔고 풍광 좋고 인심 좋은 관동의 양반 고장으로 여겨져 지방관으로는 해 볼만 한 자리였던 것 같다.
이런 풍토에서 우리 문화에 걸출한 두 여류가 태어났다.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였다. 어느 날 대관령 옛길을 넘으면서 마음이 아련했다. 긴 설명은 사족이니 시 한 수 읽고 가련다.
慈親鶴髮在臨瀛 머리 흰 어머니 임영(강릉)에 계시는데
身向長安獨去情 이 몸만 서울로 떠나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 고개 돌려 북촌집 時時로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흰 구름 나는 아래 저녁 산 빛 푸르네
늙으신 어머니 두고 남편 따라 가는 서울 길, 대관령 고개에서 고개 돌려 친정집을 바라본다. 언제 뵈오려나…. 사임당의 눈에는 이슬이 고였을 것이다.
秋淨長湖碧玉流 가을 맑고 긴 호수에 푸른 옥 같은 물 흘러
荷花深處繫蘭舟 연꽃 깊숙한 곳 작은 배 매어 두었지요
逢郞隔水投蓮子 그대 만나려고 물 건너로 연밥을 던졌다가
遙被人知半日羞 저기 남에게 들킬까 한나절 부끄러웠죠
처녀 적 이렇듯 예쁜 꿈을 꾸던 난설헌은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했다. 급기야는 한 해 사이에 어린 아들, 딸을 잃고 통곡한다.
去年喪愛女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哀哀廣陵土 슬프고 슬프다, 광릉 땅에
雙墳相對起 한 쌍의 무덤이 마주 생겼네
…………(후략)
이렇게 가슴 아파하던 그녀도 27세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오죽헌과 난설헌 생가터에는 오늘도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을 것이다.
바다 쪽에서 보고, 바다 향해 보고
겸재를 만나러 가는 우리는 경포호수(鏡浦湖水)로 간다. 경포대는 호수 북측 언덕 숲속에 서 있다. 옛 사진이나 그림에는 호숫가에 우뚝 서 있는 누대(樓臺)가 보이는데 이제는 나무가 우거져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르는 벽에는 옛 화인들의 관동팔경도와 경포대도(鏡浦臺圖)를 정리하여 전시해 놓았다. 경포대도에는 겸재, 단원, 이방운, 작가 미상 그림이 소개되어 있다. 겸재는 근래에 세운 ㅂ호텔이 서 있는 바닷가 방향에서 안쪽을 보며 경포대를 그렸다. 경호(鏡湖)라는 이름처럼 호수 면에는 물결 하나 없다. 사람에게 유익한 호수라 하여 군자호(君子湖)라는 이름도 있다 한다. 호수 가운데 바위가 있는데 각종 철새들이 찾아와 노는 곳이라 하여 새바위라고 부른다 하며, 숙종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조암(鳥岩)’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 한다.
물론 작은 글씨가 겸재의 그림에 표현되지는 않았다. 요즈음에는 새바위 위에 정자를 지어 운치를 살렸다. 좌측에 이층으로 우뚝 경포대가 서 있고 그 오른쪽으로는 언덕에 기대듯이 서 있는 정자가 보인다. 아마도 경호정(鏡湖亭)인 듯하다.
겸재의 그림이 그려질 당시는 원래 호수 주위 길이만큼인 12km의 호수 둘레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줄고 줄어서 4km 조금 넘는다고 한다. 호숫가에는 경포대(鏡浦臺)를 비롯하여 해운정(海雲亭), 경호정(鏡湖亭),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석란정(石蘭亭), 창랑정(滄浪亭), 취영정(聚瀛亭), 상영정(觴詠亭) 등의 정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대부분 자리를 옮겨 앉았다. 단원 김홍도(金弘道), 기야 이방운(李昉運), 복헌 김응환(金應煥)의 경포대도는 겸재와는 달리 경포대 뒤 산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구도를 잡았다. 화면(畵面)이 확 트인 시원한 느낌을 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경포대의 뒷통수를 그렸다는 점일 것이다. 호숫가 주위에 있던 정자의 모습도 보이고 호수 앞 바다의 섬 죽도(竹島)도 보인다. 강릉 옛 지도에도 경호(鏡湖) 앞으로 죽도가 보인다.
그 옛 지도에는 경포를 설명하는 몇 구절의 설명문이 씌여 있다.
周二十里水淨如鏡 不深不淺纔沈人肩 臺畔有鍊藥石臼 滄海萬里直望日出月出最爲奇勝亦曰鏡湖 有亭 太祖世祖常巡幸駐駕于此
둘레는 이십리요 물이 거울처럼 맑다.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아 겨우 사람 어깨 정도 잠긴다. 경포대 호반에는 약을 찧는 돌절구가 있다. 창해는 만리인데 바로 일출 월출을 바라볼 수 있으니 빼어난 승경이 된다. 그래서 이르기를 경호(鏡湖)라 했다. 태조, 세조께서 순행 길에 여기에서 어거를 멈추셨다.
정자가 어찌 해와 달과 무관하겠는가? 다른 화인들 그림에는 불분명하지만 이방운의 그림은 보름달이 환히 떠오르는 모습을 담고 있다. 동해 위로 떠오르는 만월을 보며 경포대 뒤 언덕에서 화구(畵具)를 꺼냈다. 그런데 경포대를 담기 위해 그랬을 뿐 아마도 경포대 누각에 올라 뜨는 달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요즈음도 경포대 누각은 신발을 벗으면 누구라도 오를 수 있다. 필자도 2층 누대에 올라 경호를 바라보았다. 아쉬운 것은 새로 지은 호텔 건물이 바다로 통하는 길목 스카이라인을 차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옛 그림 속 경호의 스카이라인은 없다. 그림으로만 남았다. 경포대 누각 안에는 여러 편액들이 걸려 있다.
세월이 오래된 누정(樓亭)이다 보니 고려 때부터 전해지는 글들이 있다. 경포대 편액은 두 장이 걸려 있는데 해서체로 정면에 쓴 것은 헌종 때 대사헌 이익회(李翊會)의 글씨라 하고, 예서체의 경포대는 조선 후기 명필 유한지(兪漢芝)의 글씨라 한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글씨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이다.
한때 명나라 주지번(朱之蕃)의 글씨로 알려졌었는데, 주지번은 명나라 관리로 조선에 여러 번 사신으로 다녀간 사람이었다. 속된 말로 명나라 사신들 중 많은 사람이 개판이었는데 주지번은 인품이 훌륭해서 법도를 넘지 않았으며 시문과 글씨에 능해 조선에서 인기가 높았다. 조선 사회에서는 훌륭한 글씨 중 출처를 모르면 주지번이 썼다는 설이 많이 퍼져 나가기도 했다. 명(明)이 망한 후 중국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조선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던 사람이다.
‘제일강산’ 저 글씨도 이런 연유로 한때 주지번의 글씨로 여겨졌을 것이다. 지금은 북송의 서예가이자 산수화가인 미불(米芾)의 글씨로 알려지고 있다. 미불의 글씨 탁본 第一山(제일산)에 조선 후기 서예가 윤순(尹淳)이 강(江)을 써 붙여 만든 편액이라 한다.
이 편액의 쌍둥이 편액이 평양 연광정(鍊光亭)에 걸려 있다 한다. 겸재는 ‘연광정도’도 그렸는데 영구 임대로 돌아온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 화첩 속에 반갑게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써 놓은 해동제일승 제일필(海東第一勝 第一筆: 해동 제일의 승경, 제일의 필력)이라는 감상평 또한 일품이다.
수많은 글과 시를 빚어낸 경포대의 절경
이어지는 경포대의 편액들은 숙종의 어제시(御製詩), 강릉부사 조하망(曺夏望)의 중수상량문과 시, 이율곡의 경포대부, 관찰사 심언광(沈彦光), 심성조(沈星祖), 심영경(沈英慶), 청백리 박수량, 근년의 강릉시장 한동석(韓東錫) 등 여러 사람들의 시가 걸려 있다. 또한 몇 편의 중수기(重修記), 중건기(重建記)도 기둥을 장식하고 있다.
숙종의 어제시는 무어라 썼을까?
汀蘭岸芝繞西東: 물가의 난초지초 동서로 감싸고
十里煙霞映水中: 십리 이내 속 모습 물속도 비쳐
朝噎夕陰千萬像: 동트고 해 지는 사이 수많은 모습이
臨風把酒興無窮; 바람 맞아 잔 드니 흥은 끝없네
숙종이 어떻게 경포대 시를 썼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누군가의 그림을 보고, 경포대에 올라 잔 들고 싶어 한 수 읊으신 것 같은데 누구의 그림이었을까? 겸재나 단원은 후세 사람이니 그들의 그림은 볼 수가 없었을 터인데….
부사 조하망(曺夏望)의 중수상량문(重修上樑文)도 명문이라고 소문이 났고 율곡이 10세 때 썼다는 믿기지 않게 노숙한 문장의 경포대부(鏡浦臺賦)도 장문이라서 소개는 생략한다. 아쉬우니 조하망의 상냥문은 못 읽더라도 걸려 있는 그의 시라도 한 수 읽고 간다.
十二朱闌碧玉簫: 열두 붉은 난간에 푸른 옥 퉁소 소리
秋晴琪樹暗香飄: 맑은 가을에 아름다운 나무 은은한 향기 날리고
千年海闊秦童遠: 천년 틔인 바다 악기 타는 아이는 먼데
一曲湖明越女嬌: 한 굽이 맑은 호수 서시처럼 곱구나
芳草佳期當落日: 방초 피는 좋은 시절 해지는 때에
美人歸夢隔層霄: 미인의 고향 생각은 하늘만큼 멀어
漁翁猶唱瀛洲曲: 어부는 여전히 강릉 노래 부르면서
船過江門舊板橋 배는 옛 널다리 강문교를 지나가네
부사 조하망은 경포대를 고쳐 짓고 누(樓)에 올라 경호를 바라본다. 새로 쓴 나무 향기가 은은하다. 노래하며 경호를 지나가는 어부를 보며 상념에 잠겨 본다.
조하망이 고쳐 짓기까지 경포대는 오랜 세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왔다. 민족문화대백과에 실려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고려 후기 강원도 존무사 박숙정이 건립한 누정인데 보물 제2046호로 지정되었다 한다.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 존무사(存撫使) 박숙정(朴淑貞)은 신라 사선(四仙)이 놀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印月寺) 터에 정자를 지었으며, 그 뒤 조선 중종 3년(1508년)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다고 전해진다. 1626년(인조 4) 강릉부사 이명준(李命俊)에 의하여 크게 중수되고, 인조 때 우의정 장유(張維)가 지은 중수기(重修記)에는 태조와 세조도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면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졌는데 다시 지었다. 현재의 경포대 건물은 1745년(영조 21) 부사 조하망(曺夏望)이 세운 것이다. 일설에는 1873년(고종 10) 강릉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건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렇게 역사가 오래다 보니 경포대에 대한 고려 사람들의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안축의 기(記)와 시를 비롯하여 김극기, 이곡, 백문보 등이다. 조선으로 접어들면 끝도 없다. 이곳으로 지방관을 나오면 친지들이 전별시 한 수씩 지어 보내니 경포대에 관련된 시문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강릉 출신 천재 허균의 문화 비평집 학산초담(鶴山樵談)에도 경포대에 대한 언급이 있다.
강릉부에서 구경할 만한 곳으로는 경포대(鏡浦臺)가 으뜸이요, 한송정(寒松亭)이 다음간다. 이곳을 구경하는 사신(使臣)이 그리 많은데도, 사람 입에 전파된 가구(佳句), 경어(警語)가 하나도 없으니, 이 어찌 묘사할 절경(絶景)이 너무나 궁해서 그렇겠는가. 두로(杜老: 杜甫)나 맹양양(孟襄陽: 孟浩然)이 이 경치를 본다면
吳楚東南坼(오와 초는 동남으로 트였고)
乾坤日夜浮(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들뜬 듯하구나) 라든지,
또는
氣蒸雲夢澤(운몽택엔 기운이 찌는 듯)
波撼岳陽城(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 등의 구절이 반드시 현판에 걸렸을 터인데, 우리나라 인재는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또한 알겠구나
경포대에 걸린 시문(詩文)이 그렇고 그런 것에 대한 허균의 안타까움이다. 천재의 눈으로 보니 고향 땅 제일경(第一景)에 걸린 현판이 맘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경포대는 옛사람 눈으로 볼 때 8곳의 경승(景勝)이 있어 경포팔경(鏡浦八景)이라 했다.
녹두일출(綠荳日出): 호수 남쪽 해안의 녹두정(한송정 터)에서 보는 일출
죽도명월(竹島明月): 죽도에 뜬 밝은 달
강문어화(江門漁火): 강문교 앞 고깃배의 어등(漁燈)
초당취연(草堂炊煙): 난설헌 집의 동네 초당마을에서 저녁 밥 하는 연기
홍장야우(紅粧夜雨): 경포호 북안(北岸)에 있는 홍장암에 내리는 밤비
증봉낙조(甑峰落照): 호수 서북쪽 시루봉의 낙조
환선취적(喚仙吹笛): 시루봉 신선의 피리소리
한송모종(寒松暮鍾): 호수 남동쪽 한송사 저녁 종소리
이런 팔경을 두고도 절창이 없으니 허균은 마음 먹고 매의 눈으로 비판한다.
이제 이곳을 지나간 장동 김씨 삼연의 시로 글을 마무리 한다. 문곡 김수항도, 미호 김원행도 시문을 남겼지만 겸재의 그림 길이니 삼연의 시를 읽는 것이 좋겠다.
安仁以至鏡湖涯: 안인진항 지나서 경호가에 갔더니
草遠沙長岸有花: 넓은 풀밭 긴 모래펄 꽃이 피었네
全海豈容鯨攪濁: 온 바다가 어찌 고래가 저은 흐린 물만 담겠는가
片雲猶見鶴侵拏: 조각구름엔 외려 학이 드는 게 보이고
仙留丹竈收眞訣: 신선은 약 부뚜막에서 선약을 만드는데
僧倚寒松誦法華: 한송사에 스님은 법화경을 읽는구나
鍊氣參禪俱屬事: 기를 다듬고 참선함은 모두 신선의 일
此心惟欲伴虛槎: 이 마음 오직 빈 뗏목과 함께 하리
경포대를 지나며 삼연은 마음을 내려 놓는다. 경포에서 등선(登仙)하려나. 겸재는 경포대를 그리면서 이런 마음으로 경포를 지나간 삼연을 기억했을까. 담백한 묵화(墨畵) 색이 욕심을 버린 듯하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제711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11.12 09:48:00
[겸재 그림 길 (88) 경포대] 경포대의 편액들을 혹평한 강릉 천재 허균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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