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싯길 (13) 귀경 길에 들른 산] 금강산 들르고도 감악 등 4산 美 읊어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매월당은 회암사를 나선다. 지금 덕정역이 자리 잡고 있는 회천으로 나왔을 것이다. 거기에 이르면 연천에서 양주로 이어지는 길이 남으로 향하는데, 현재는 3번 국도이며, 조선 시대에는 삼방로(三防路)였다.
◇하늘 찌르는 감악산
그 길에서 서편을 돌아보면 적성(赤城)에 우뚝한 감악산(紺岳山, 675m)이 보인다. 산길로 이어진 마차산(588m)도 보인다. 서쪽으로는 파평 윤(尹)씨의 본향 파평산도 파주 쪽에 자리잡고 있다. 감악산은 신(神)의 산이다.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산신으로 살고 무가(巫家)의 신(神)들도 살고 있다는 산이다.
산줄기에는 임꺽정도 산다고 하고 남으로 산줄기를 뻗어 임꺽정봉 ~ 노고산 ~ 한강봉 ~ 첼봉을 거쳐 사패산, 도봉산에 닿는다. 전방 지역이라 잘 가지 않았던 산이지만 이른바 감악지맥이다. 매월당은 이 산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잊혀져 파주의 한 고을 적성면이 되었지만, 삼국시대부터 난은별, 칠중성으로 중시되던 국방의 요새이며, 그 주산(主山)이 감악산이다. 매월당은 삼방로를 내려오면서 그곳에 다녀온 것 같다.
감악산 개인 구름
감악산 높이 솟아 하늘을 찔렀는데
아득한 산골짜기 뜬 구름은 이내 같네
천 그루 우뚝한 나무 산신당(山神堂)에 드리우고
한 줄기 나는 폭포 용연에 곧추섰네
듣노니 먼 종소리 푸른 절벽에 맴돌고
늙은 학은 보이지 않고 둥지만 산머리에
가랑비는 하늘에 그림같이 모였다가 흩어지니
무심히 비는 양대(陽臺)* 앞에 내리는군
紺岳晴雲
紺岳之山高揷天. 縹緲洞壑浮雲煙. 千章喬木蔭神廟. 一道飛瀑垂龍淵. 但聽疏鐘搖翠壁. 不見老鶴巢層巓. 空濛似畫聚復散. 等閑作雨陽臺前.
*양대(陽臺) - 초(楚)나라 양왕(襄王)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한 부인이 찾아와 ‘저는 무산(巫山)의 여신인데 저와 하룻밤 지내시지요’ 이렇게 청했다. 그래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는데 떠나면서 하는 멘트가 ‘저는 무산 양대(巫山 陽臺: 양지 바른 언덕)에 삽니다.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운우지정(雲雨之情)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후 시인, 묵객이 비 내리는 날이면 무산신녀(巫山神女)를 호출해 시 한 수 짓곤 했다. 매월당도 신녀(神女)가 그리우셨나?
매월당의 시처럼 산 정상에는 당나라 설인귀를 주신으로 모시고 무가의 여러 신을 모시는 산신당이 있었다. 지금도 무가에선 ‘감박산(감악산) 천총대왕 마누라’를 모시고 있다. 그 정상에는 진흥왕의 또 다른 순수비로 보이는 비석이 서 있다. 아쉽게도 글자는 모두 마멸되어 몰자비(沒字碑)라 부른다.
매월당이 만난 폭포는 운계(雲溪) 골짜기로 떨어지는 운계폭포인데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물길이 그치지 않는다. 매월당은 이 골짜기에서 절의 종 소리를 듣는다. 운계사의 종 소리였다. 그 옛터에 근래에 범륜사를 지었다. 그냥 옛 이름 운계사라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 터에는 운계사 고졸한 탑이 옛 일을 기억하고 있다.
매월당이 지나간 후 또 한 분 생육신 추강 남효온이 들러 시 한 수 남겼고, 후세에 미수 허목(眉叟 許穆)은 이곳에 들렀던 이야기 유운계기(遊雲溪記)를 남겼다.
◇뾰족 봉우리 도봉산
늦가을 매월당의 남행은 계속된다. 양주 북쪽 땅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는다. 이 언덕은 예나 지금이나 달리 이름이 없다. 지금도 3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양주 시청과 덕계리 사이 비스듬한 오르막 길이 보인다. 모양새는 보잘것없지만 한북정맥(漢北正脈)을 이루는 고갯길이다. 포천의 산줄기를 지나서 축석령에 닿으면 나지막한 산길은 북으로 뻗어 덕계리의 아파트 지구를 지나는데 3번 국도와 이 아파트 경계를 이루는 둔덕이 망가진 한북정맥 길이다. 이 둔덕 끝에 이르면 바로 3번 국도(옛 三防路) 고갯길이다.
작은 언덕이지만 비가 내리면 이 고개 북쪽 빗방울은 동두천의 신천(峷川)을 지나 한탄강, 임진강으로 흘러가고, 이 고개 남쪽 빗방울은 중랑천(中浪川)을 지나 한강으로 간다. 이 빗방울 형제는 각자의 길을 가다가 교하(交河)에서 비로소 만나 조강(祖江)이 된다. 이렇게 이 고개는 분수령(分水嶺)이 되는데 여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는 도락산 ~ 불곡산을 만들고 사패산 ~ 도봉산으로 이어진다.
매월당은 이 고개를 넘어 불곡산을 바라보며 의정부를 지나 덕해원(德海院)에 도착했다. 후에 누각을 지어 누원(樓院: 다락원)이 된 곳이다. 지금의 의정부시 호원동과 1호선, 7호선이 연결된 도봉산역 앞이다. 다락원은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동해 어물(魚物)의 집산지가 되고 영-정조 이후에는 특히 한양의 북어(北魚) 값을 좌지우지했다. 제사상에 올릴 북어의 공급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북어의 길이 바로 삼방로(三防路)였다.
삼방(三防)이란 원산에서 분수령을 넘기 전 좁은 골짜기에 북쪽 오랑캐에 대비해 세 곳의 방어 진지를 구축했으며 이곳이 바로 삼방이었다. 국가의 공식 길인 영흥대로(북관대로)는 산과 언덕을 넘는 길임에 비해 삼방로는 이른바 추가령구조곡(옛 이름 추가령지구대)을 지나는 평탄한 골짜기 길이었기에 민간의 길, 북어의 길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매월당은 산길로 들어가 절집 앞에 선다. 영국사(寧國寺)였을 것이다. 이곳은 본래 고려의 큰 절 도봉원(道峰院)이었다. 고려 광종 22년(971년)에는 전국에 3개의 부동사찰(不動寺刹)을 지정했는데 바로 이곳 도봉원, 문경 희양원(지금의 봉암사), 여주 고달원(지금의 고달사)이었다. 부동사찰이란 외부에서 ‘낙하산’으로 주지가 임명돼 오지 못하도록 왕의 칙령이 내려진 절이었다. 수도였던 개경 이외에 그 시절을 대표한 사찰이었던 것이다.
원(院)이라 이름 붙인 까닭은 고려 시대 주요 지역 대찰(大刹)은 국립 여관으로서 원(院)을 겸하였기 때문이었다. 매월당이 이곳을 찾은 때는 아마 사명이 영국사(寧國寺)로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사명(寺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의 안녕을 비는 주요 사찰이었다. 이날도 절 행사가 번열하여 깃발(幡幢)이 가득 휘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가을 여우비가 쏟아진다. 비 갠 뒤 선인봉을 바라보니 물보라가 날려 간장이 다 시원하다. 맑은 단풍은 선명하여 눈이 시리다. 그에 맞춰 가을 기러기가 줄을 지어 저 높은 하늘로 날아간다. 아 가을이구나.
이러하던 도봉원은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빛을 잃고, 조선 중엽에는 그 자리에 도봉서원(道峰書院)이 들어서 공맹(孔孟)의 천국이 되었다. 몇 해 전 도봉서원을 다시 세우겠다고 옛터를 파다가 옛 영국사(도봉원)의 보물급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아 어쩔거나? 절을 다시 세울까? 서원을 세울까? 다 놓아두고 매월당 시비(詩碑)나 하나 세우면 좋겠다.
도봉산 뾰족한 봉우리
이빨 같은 봉우리는 영락없는 창칼일세
연로한 등나무와 잣나무 풍상(風霜)을 넘어왔네
저 멀리 깃발 가득 절집에 늘어섰는데
(갑자기) 천둥번개 푸른 하늘에 번쩍 하네
맑아진 가을 단풍 나그네 눈 현혹하고
바위에 흩뿌리는 물 내 간장 씻어낸다
바라보고 바라보니 눈 언저리 시린데
낙엽 지고 하늘 높고 기러기는 저 멀리
道峯尖岫
峯勢嵯牙如劍鋩. 瘦藤老柏凌風霜. 幡幢杳藹列梵刹. 雷電閃爍摩靑蒼. 湛湛霜楓惱客眼. 霏霏巖溜漱人腸. 望中不盡眉宇寒. 木落天高回雁行.
◇노을 아름다운 수락산
도봉산의 절을 들러 매월당은 다시 큰길로 나온다. 지금은 그 길이 도봉동에서 의정부로 넘어가는 대로(大路)이며 앞에는 도봉산역이 자리하고 있다. 매월당이 이 길을 걷던 1459년 가을에는 간신히 수레 한둘 지날 수 있는 북관대로가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는 벌판 너머로 도봉산과 오누이처럼 바라보는 산이 있다. 수락산(水落山)이다. 마들평야를 지나는 중랑천을 건너면 수락산이다.
양주 덕계리에서 발원한 중랑천은 의정부로 흘러와 이 들을 지나 흘러 흘러 살곶이 다리로 이어지고, 곧 저자도(楮子島) 앞에서 동호(東湖)로 흘러드니 한강의 일부가 된다. 의정부에서 서울로 흘러온 중랑천은 이곳 마들평야(蘆原)에 물을 공급하는데 이제는 그 동쪽에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이 자리 잡고, 서쪽으로는 도봉동, 방학동, 창동이 자리 잡은 큰 주거지가 되었다.
매월당이 이 개울에 간 날에는 저녁놀이 지는데 집오리 서너 마리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三个四个孤鶩歸). 우뚝한 봉우리를 바라보고 바라보고 하는데 낙조가 떨어지며 산 그림자가 산 중턱에 걸렸다. 수락의 골짜기는 낙조 속에 속살을 드러내 푸른 이끼 낀 골짜기 바위도 그 모습이 완연했다. 매월당의 시(詩)를 읽으니 그 모습이 어제인 듯하다.
비 온 가을날 저녁 무렵 수락산은 떨어지는 낙조(落照) 속에서 붉은 단풍이 아름답다. 수락산은 포천 끝 한북정맥에서 분기하여 용암산 깃대봉을 거쳐 수락 ~ 불암 ~ 구릉 ~ 망우 ~ 용마 ~ 아차산을 거쳐 한강에서 그 달림을 멈춘다. 이른바 수락지맥(水落支脈)이다. 이날 매월당은 수락에 오른 것 같지는 않다. 훗날 이곳 수락산에 집 짓고 이 산(山)에 기대어 십년을 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수락산은 매월당에게는 그만큼 뜻깊은 곳이다. 그날의 시 한 편을 560여 년 뒤 가을날에 읽는다.
水落山에 지는 놀
한 점 두 점 지는 저녁놀 너머로
서너 마리 외로운 오리 돌아오고
봉(峰)은 높아 눈 시리게 바라보는 산 중턱에 그림자
수락(水落)은 푸른 이끼 덮인 바위 드러내려 하네
가는 기러기 낮게 맴돌아 넘지를 못하는데
차운 날 갈까마기 깃들려다 놀라 다시 나는군
하늘 끝 바라보니 그 뜻 끝은 어디일까
이르는 곳 붉은 단풍 맑은 햇빛에 흔들리네
水落殘照
一點二點落霞外. 三个四个孤鶩歸. 峯高剩見半山影. 水落欲露靑苔磯. 去雁低回不能度. 寒鴉欲棲還驚飛. 天涯極目意何限. 斂紅倒景搖晴暉.
훗날 서계 박세당은 매월당이 바라본 산 아랫동네에 들어와 살면서 매월당을 기려 그의 영당(影堂)을 짓고 추모했다.
◇나라 걱정되는 삼각산
이제 매월당은 지금의 도봉동, 창동, 쌍문동 지역을 지나 수유현(水踰峴)을 바라보며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을 도모한다. 지금은 아파트와 건물들이 눈길을 막지만 1459년 가을엔 오른쪽으로 눈길 한 번 돌리면 삼각(三角)의 세 봉우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 모습이 보였을 게다. 아마 아침 무렵이었을 것이다,
백운, 인수, 만경(白雲, 人壽, 萬景) 세 봉우리가 삼형제처럼 아침 피어오르는 이내 속에 우뚝하다. 비록 세조의 왕위 찬탈에 세상을 버리고 떠다니는 매월당이었지만 왕을 버린다고 나라야 버리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왕권(王權)은 유한(有限)하되 나라는 영원하지 않겠는가? 매월당의 마음에는 분연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피어 오른다.
삼각산 상서로운 이내
세 봉우리 높이 솟아 우리나라 돕는구나
상서로운 이내는 정상을 덮고 깃발처럼 드리웠네
늘어선 절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단청(丹靑) 빛을 발하는데
새파란 색 짙게 칠해 높은 창문에 띄우네
산악은 신(神)을 내려 보신(甫申)*을 낳게 하니
저 푸른 하늘 산(山) 모양 내려 넓고도 두텁구나
우리 임금님 보우하여 천만세를 도모케 하사
울울창창 상서로운 기운 하늘을 찌르리라
三角祥煙
三峯高聳祐吾邦. 祥煙覆頂垂如幢. 列刹相望映金碧. 滴翠濃抹浮軒窓. 惟嶽降神生甫申. 彼蒼垂象臨鴻庬. 護我龍圖千萬世. 鬱蔥**佳氣衝天杠.
*보신(甫申): 원(元)나라 제일의 화가(畵家)인 진악(陳岳)의 자(字).
**울창(鬱蔥): 울울창창(鬱鬱蒼蒼)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말
1459년 가을은 세조 5년 기묘년(己卯年)인데, 세조 싫어 세상을 등진 매월당이 어찌 이런 시를 읊는단 말인가?
“우리 임금님 보우하여 천만세를 도모케 하사(護我龍圖千萬世).”
괴이하기도 하다. 단종이 죽음을 당한 지 2년밖에 안 된 시점(時點)에…. 눈도장 찍어 세속(世俗)으로 돌아오려는 몸부림인가? 이런 생각도 들지만 아닐 것이다. 어느 한 임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邦)와 이어지는 왕통(王統: 龍)을 생각하며 쓴 시 아니었을까?
일찍이 태조(太祖)는 백운대에 올라 기개를 펼쳤다 하지 않았던가.
백운봉에 올라
손 당겨 덩굴 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암자 하나 흰 구름 속에 높이 자리했네
만약 장차 눈에 보이는 세상 내 땅이 된다면
강남 땅 초나라, 월나라인들 어찌 받지 않으리요
登白雲峰
引手攀蘿上碧峰
一庵高臥白雲中
若將眼界爲吾土
楚越江南豈不容
매월당은 1459년도 저물어 가는 때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이로써 그는 금강산 여행길을 마무리하고 이듬해(1460년) 봄이 올 때까지 한양과 인근에서 지낸다. 그의 집이 남아 있었다면 반촌(泮村: 성균관 마을)에서 지냈을 것이다. 기록이 없어 그 겨울에 어찌 지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제 봄 오기를 기다려야겠다.
제787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5.01.13 13:27:32
[매월당 싯길 (13) 귀경 길에 들른 산] 금강산 들르고도 감악 등 4산 美 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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