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로산행기

[겸재 그림 길 (60) 미호 ②] ‘왕이 자고 간 하천(왕숙천)’이 된 사연

산포로 2024. 7. 5. 16:51

 

[겸재 그림 길 (60) 미호 ②] ‘왕이 자고 간 하천(왕숙천)’이 된 사연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요즈음에는 많은 이들이 길을 걷는다. 운동 삼아 걷는 이들도 있고 역사와 문화를 비롯하여 각자의 관심 분야를 테마로 하여 답사길에 나서는 이들도 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땅에 서려 있는 이야기를 테마로 길을 나선 지 오래 되었다. 어느덧 60회가 된 겸재의 그림 길도 겸재의 그림을 매개로 해서 이 땅을 걷고자 쓰는 글이다. 화가도 아니요 미술사가도 아닌 필자로서 공연히 그림에 대해 아는 척 한다면 도를 넘는 일이다. 기왕 배낭 하나 메고 나서는 길, 의미 있는 길이라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신경 쓰는 일도 여럿 있는데 특히 ‘대중교통으로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점과 그림 속 어느 루트로 길을 갈까 하는 점이다. 차를 가지고 가면 원점회귀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고 길의 종점에서는 시원한 막걸리나 맥주라도 한 잔 마시는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아서이다.

오늘 나서는 길은 남양주시 미호(渼湖)와 덕소다. 미호 지역은 겸재의 두 그림 미호 1, 미호 2의 대상 지역이고, 덕소는 미호라는 그림을 탄생할 수 있게 한 안동 김씨(장동 김씨)의 묘역이기에 들러 보려 한다. 답사길은 지도 1에 오늘의 갈 길을 표시하였다. 지도 속 숫자 4 왕숙천을 들러 숫자 1 삼주삼산각과 미호나루가 있던 지역으로 이동한 후 고개 넘어 2 지역으로 간다. 2 지역은 옛 석실서원이 있던 마을이다. 여기에서 큰길로 나가 버스를 이용하여 3 안동 김씨 묘역으로 가는 답사 루트를 택하려 한다. 물론 답사자의 편의에 따라 반대 방향으로 가도 문제는 없다.

 

지도 1. 이번 호 답사길을 지도 위에 표시했다.

 

미호 주변 답사지도.

 

자, 이제 출발이다. 경의중앙선 덕소역으로 가면 일반버스 166-1, 빨간 좌석버스 1660, 1670, 1700가 있다. 하차 역은 수석동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려면 5호선 광나루역에서 1660, 잠실역에서 1670, 1700번을 이용하여 역시 수석동에서 하차하실 것. 하차 후 마을 길을 따라 강변 쪽으로 이동한다. 길은 겸재의 그림 안에서는 상상도 못할 음식점과 까페촌으로 변해 있다.

강변 서쪽(서울쪽)으로는 잔디 체육공원이 펼쳐져 있다. 공원이 끝나는 지점 수석교 아래로는 왕숙천(王宿川)이 평화롭게 흐른다. 남양주를 대표하는 지천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왕산천(王山川), 다른 옛 지도에는 왕숙탄(王宿灘), 또는 오늘날처럼 왕숙천(王宿川)으로 기록되어 있고, ‘왕숙천은 독음강으로 흘러간다(王宿川流去禿音江)’라 하였다.

 

왕숙천.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이 개울을 王宿(왕이 잤다) 또는 왕산(왕의 산)으로 기록했을까? 석실서원이 배출한 전북 고창 선비 황윤석의 이재난고(頤齋亂稿)에도 ‘王宿灘’으로 기록하고 한글 토를 ‘왕잔여홀(왕이 잔 여울)’이라 했으니 어느 왕인가 이 개울가에서 자긴 잤나 보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잠을 잔 임금은 태조 이성계라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아들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니 태조 이성계는 함흥으로 떠났다. 얼마 후 방원의 간청으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재 남양주의 한 마을에서 여덟 밤(팔야: 八夜)을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곳을 팔야리라 했는데 현재의 진접읍 팔야리라 한다. 그뒤 이 마을 앞을 지나는 하천을 ‘왕이 자고 갔다’는 의미로 왕숙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왕산천(王山川)이란 이름은 이 개울이 지나는 옆 검암산에 동구릉이 조성되어 왕들이 영원히 잠자고 계시니 왕숙천, 왕산천이라 부른 것 아니겠냐는 이야기도 있다.

 

고산 윤선도 시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체육공원을 가로질러 카페촌 방향으로 돌아온다. 체육공원 북단 잔디밭에는 의외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다. 벼슬길 유배길의 지친 마음을 고산촌에 들어와 시작 활동으로 풀었다는데 고산촌이 바로 이곳 수석동이었다는 것이다. 시비에는 몽천요(夢天謠)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교과서에 없던 내용이라 다소 생소하다. 아마 이곳에서 쓰신 시인가 보다. 한 수만 읽고 가자.

생시던가 꿈이던가 백옥경(白玉京)에 올라가니
옥황은 반기시나 뭇 신선(神仙)이 꺼리누나
두어라 강호자연(江湖自然)이 내 분수에 알맞도다

 

미호 주변의 옛 지도

 

겸재 작 ‘미호’(삼주삼산각).

 

잔디공원 앞 카페촌을 바라본다. 겸재의 미호(삼주삼산각) 자리가 분명한데 기와쪽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이 지역이 명소인지 코로나 세상에도 주차장에는 차들이 꽉 차고 사람들도 참 많다. 동네를 골목골목 돌아보아도 찾은 것이라고는 카페 간판 아래 놓인 누군가의 묘비 받침돌 하나였다. 삼주삼산각을 지은 농암(김창협)이나 그곳을 그린 겸재가 이곳에 왔다면 마음 가득 허망함을 느꼈을 것이다.

 

겸재 그림 속 삼주삼산각이 있었을 법한 자리의 현재 모습.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곳에 번창했던 미음나루도 카페 건물들과 강변 시멘트 벽으로 흔적도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이곳이 미음나루였음을 알리는 안내판뿐이다. 이곳은 고려 때에도 큰 나루였다. 송도에서 중원권으로 가는 길목 중 하나였다. 고려 때는 노수포(蓾水浦) 또는 독포였다. 이 지역 이름이 독음면(禿音面)이었는데 강 쪽 마을은 외미음, 안쪽 마을은 내미음이었다. 그에 따라 나루 이름도 독음진(禿音津), 독포, 독진이라 불렀다. 두음진(豆音津), 미음진, 미호진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번화한 나루였다는 말이리라. 조선 말 문인 이채(李采)의 시 한 구절에는 ‘미호의 뗏목은 구름처럼 흩어져 진종일 불러도 그대는 안 보이네(渼湖津筏散如雲. 盡日招招不見君)’라는 구절도 있다. 정선, 영월을 지나온 뗏목들이 머물다 가는 나루였다. 강을 건너면 미사리와 닿는다.
 

삼주삼산각 지역의 묘비 받침돌.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삼산각 있던 자리 차지한 식당과 카페들

겸재의 그림 미호(삼주삼산각)를 보자. 중앙 높다란 산 아래 삼산각으로 보이는 기와집이 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렇게 우뚝한 산은 이곳에 없다. 작은 뒷산이 있고 삼산각이 있었을 자리는 음식점과 카페가 모두 차지했다. 잠실 수중보를 쌓아 수면도 그림보다 많이 올라갔다. 그림에서 1로 표시한 개울은 위치상 왕숙천일 것이다. 2는 삼산각과 그 앞에 있었을 미음진나루다. 이제는 그 자리에 미음나루 안내판이 서 있다.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나루 중 하나였다. 주요 지역 방어 개념으로 보면 아래와 같았다.

숭례문-서소문-창의문-돈의문은 훈련도감이, 흥인문-동소문-수구문은 어영청이 맡고, 용진(龍津)-두미진(豆尾津)-광진(廣津)-미호진(渼湖津)-송파진(松坡津)-삼전진(三田津)은 수어사가, 한강-동작진(銅雀津)-노량진(露梁津)은 어영청이, 공암진(孔巖津)-양화진(楊花津)은 금위영이 맡아 지키도록 하라.

上曰, 摠戎使金重器, 徵水原·南陽·長湍兵率領, 兼巡討使, 專主討撫之事, 仍以南泰績遞通津, 移差摠戎中軍, 禁衛中軍朴纘新, 兼巡討中軍, 授禁衛步軍五哨, 別驍衛五十騎, 訓鍊都監馬兵參哨標下軍, 別選驍果者, 從優定送, 一聽金重器之號令, 可也.(‘일성록’에서).

 

삼산각에서 석실서원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미음나루가 있던 강변은 이제는 이어서 콘크리트 옹벽이 쌓여 있다. 그 위로 자전거 길과 산책 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길은 삼남 지방으로 연결되는 자전거 길이다. 주말이면 많은 이들이 라이딩에 나선다. 겸재의 그림에는 어부의 배 세 척과 일반 나룻배 네 척이 그려져 있는데 좌측 한 척은 바람을 받고 상류로 올라오고 있다. 아쉽게도 뗏목(筏)은 보이지 않는다.

번호 3은 석실서원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고개가 가팔라 라이딩 초보자들에게는 몹시 힘든 코스이기도 하다. 강 건너 4는 미사리 지역인데 선리(船里)마을로 여겨지는 나루마을에 버드나무 아래 집 두어 채를 그려 넣었다. 30년쯤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이 강가마을은 지금은 없어졌다. 그림 좌우로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은 아마도 좌측은 불암산과 수락산, 우측은 천마산일 것이다.

 

수석리 토성 흔적.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고갯길을 따라 석실마을로 향한다. 크게 볼 수 있게 프린트한 미음 지역 답사 지도에서 1 구역을 벗어나 2 구역으로 가는 길이다. 2 구역은 겸재의 미호(渼湖) 두 번째 그림인 석실서원 지역이다. 이 지도 2 구역에서 번호 4는 조말생 묘역, 5는 조말생 신도비, 6은 수석리 토성, 7은 홍릉천이다.

풍납토성 지키던 한강과 임진강 유역의 백제 토성들

자전거길을 따라 고개마루까지 올라왔으면 내려가는 포장도로는 버리고 산 능선 길로 이어지는 흙길로 직진한다. 잠시 후 갈림길이 나오는데 수석리토성과 조말생 신도비를 구분 짓고 있다. 수풀을 헤집고 잠시 가면 고갯마루께에 토성의 흔적이 보이고 안내 입간판이 서 있다.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백제 토성 흔적이다. 이곳이 백제 땅이었던 백제 중기 이전에 말갈이나 고구려와의 방어선을 든든히 하기 위해 쌓은 토성으로 보인다. 임진강 유역에 많이 남아 있는 백제 토성과 같은 성격일 것이다. 더욱이 백제의 수도 풍납토성이 코앞이니 상당히 중요시했을 것이다.

 

조말생 묘역.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조말생 신도비. 훌륭한 비석이지만 길도 없는 맹지에 놓여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다시 돌아 나온다. 조말생(趙末生) 신도비 방향으로 잠시 능선 길을 나아가면 우측에 곡장을 두른 묘가 나타난다. 묘는 잘 가꾸어 놓았고 그곳에서 내려다 보는 한강은 일품이다. 거꾸로 묘역을 층계로 내려가면 층계 옆으로 ‘석실서원지(터)’임을 알리는 안내 돌 비석이 서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석수서원 유지(터) 안내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지난 호에 석실사(石室祠)와 석실서원(石室書院) 기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였다. 석실서원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피려면 김원행(金元行)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그는 장동 김씨 청음의 5세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의 손자이다. 조선 명문가인 안동 김씨 가문의 적통에다가 17세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니 앞날은 밝았다. 그러나 19~20세 때 잇따른 정치적 사건(신축환국, 임인옥사)으로 할아버지(김창집), 친아버지(김제겸), 친형(김성행) 등 삼대가 일거에 죽음을 당하면서 멸문의 화를 겪은 그는 과거나 출세는 잊고 유람과 독서로 젊은 날을 보냈다. 40이 넘어 미호 석실서원에 정착한 그는 학문과 교육에 온힘을 기울인다. 나라에서 내린 벼슬길도 마다하고 산림(山林: 요즘 기준으로 보면 재야)의 한 축이 되었다. 조부, 생부, 형 등이 후에 모두 신원되었지만 아들 김이안의 기록을 보면 “아버지는 과거를 가볍게 여기셨다(知科擧之輕)”면서 “다시는 한양에 한 걸음도 들이지 않았다(不復踐京城一步)”고 했으니 그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제자를 기르는 데에 신분이나 지역, 직업에 차별을 두지 않고 학생을 받아들였다 한다.

이렇게 하여 석실서원은 명문 서원이 되어 그의 문하에는 한양, 경기 지방의 우수한 노론계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서울은 진보요, 충청도는 보수였으니

이 시대에는 이른바 호락논쟁이라 하여 노론 내 인사들 간에 논쟁이 있었다. 호(湖)와 낙(洛)은 충청도와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학계의 주류였던 노론 내 학자들이 주로 충청도와 서울을 기반으로 학파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충청도 노론 학자들은 호서(湖西)를 따서 호학(湖學), 호론(湖論), 호당(湖黨), 아니면 그냥 호(湖)로 부르고, 서울에 속했던 학자들은 낙학(洛學), 낙론(洛論), 낙당(洛黨), 아니면 낙(洛)으로 불렸다. ‘낙(洛)’은 낙양을 뜻하는 말로 낙양(洛陽)이 수도의 보통명사처럼 쓰였기 때문이었다.

호론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을 추구했고, 외래 문물과 다양한 이론을 접하기 쉬운 서울이 근거지였던 낙론은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논쟁의 주제는 ‘인성과 물성은 같은가(同)? 다른가(異)?’였다는데 호(湖)론은 다르다 했고, 낙(洛)론은 같다 한 데서 비롯된 논쟁이었다. 호론을 대표한 이들이 송시열의 문하였으며, 낙론을 대표한 인물들은 석실서원 사람들이었다 한다. 이렇듯 석실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서원의 숫자가 수백 곳에 이르고 이들의 패악이 극심해지면서 관민 모두에게 위협과 고통을 안기는 일도 자주 발행했다.

양반 아드님 이름이 왜 ‘말생’?

흥선대원군은 실권을 쥐자 서원의 혁파 작업에 들어갔다. 1865년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송시열이 창건한 만동묘와 화양서원에 철폐 명령이 내려졌다. 1868년에는 서원에 하사한 토지에도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고, 지방 수령이 서원의 장을 맡도록 했으며, 1870년에는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서원은 사액서원이라도 훼철하도록 하였다. 이 조처로 전국 650개 서원 중 소수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등 사표가 될 만한 47개의 서원만 남겨지게 되었다.

장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겪은 대원군 앞에 장동 김씨의 집합체인 석실서원이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석실서원은 잊혀져 갔는데 1900년 남양주에 홍릉이 조성되면서 그 능역(陵域)에 있던 묘들은 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 두 개의 묘만 되새겨 보자. 하나는 태종-세종 때의 문신 양주 조씨 조말생(趙末生) 묘이며, 또 하나는 세종의 막내아드님 영응대군의 묘다.

잠시 한눈을 좀 팔아 조말생이라는 분의 이름을 보자. 이 분 집안 족보를 보지 않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생(末生)이는 말숙(末淑)이, 끝순이 같은 이름과 궤를 같이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분 막내아들이었을 것 같다. 우리 시대 같으면 막내아들 이름을 지으면서 이렇게 짓겠는가? 그런데 우리 조상님들은 적어도 이름을 짓는데 자유로웠다. 요즈음 사람들처럼 수리작명법이라 하여 사무라이식 이름 짓는 법도 없었으며, 이름이 나빠서 운명이 망가졌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셨다. 이름은 부르기 좋고 그 뜻이 담기면 좋은 이름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석실서원 땅은 양주 조씨들에게 사패지로 내려졌다고 한다. 요즈음 개념으로 보면 대토(代土)해 준 셈이다. 석실서원 영역 작은 봉우리 위에 이장한 조말생 묘는 한없이 포근하고 아름답다. 묘역으로 오르는 층계 옆에 서 있는 ‘석실서원지’ 돌 비석은 참으로 을씨년스럽다.

 

겸재 작 ‘미호’(석실서원).

 

이제 겸재의 미호 2(석실서원)를 보자. 번호 1은 지금 조말생 묘역이다. 바로 아래 기와집은 석실서원, 번호 2는 지금 조말생 신도비가 있는 지역인데 카페와 개인 주택이 가득 차 있다. 번호 3은 미호박물관에서 이어지는 앞쪽 언덕이다. 겸재 시절에는 저렇게 멋진 정자가 있었구나. 4는 홍릉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홍릉천이다. 이제는 강과 닿는 면에는 모두 시멘트로 옹벽을 쌓고 자전거 길 및 산책 길을 조성해 놓았다. 그림에 보이는 지역 대부분은 음식점과 카페이며, 사이사이 전원주택이 들어서 공터는 거의 없는 지역으로 바뀌어 있다.

이 뛰어난 비석을 맹지에 쳐박아 두다니

이제 조말생 신도비를 찾아간다. 사전 정보 없이는 찾아가기 어려운 곳에 있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가는 도로가 없기 때문이다. 조말생 묘역 위 능선 길을 따라 동쪽(미호박물관 쪽) 100m 간 후 우향우 밭두렁을 통과하여 개인주택이 보이는 곳 쪽으로 가면 한 칸쯤 크기의 붉은 벽돌 양기와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석실마을 당집으로 석실도당(石室禱堂)이다. 여기에서 50m쯤 앞 길 막힌 산기슭에 신도비가 있다. 1938년 옮겼다는데 귀부(龜趺)의 규모도 듬직하고 고개를 비튼 거북의 자세도 일품이다. 이런 수작을 길도 없는 맹지(盲地)에 가두어 두다니….

 

옮겨진 석물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제 미호박물관 앞길을 따라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나선다. 장동 김씨 묘역을 찾아가는 길이다. 석실마을 입구 정류장에서 166-1, 1660, 1670, 1700 버스를 타고 덕소역으로 간다. 이어 61, 88-1, 99 버스로 환승해 석실입구에서 하차, 덕소5리 마을회관을 찾아가든지, 아니면 덕소리 산5 김상헌 묘역으로 찾아가자. 묘역은 이미 지난 호에 소개했으니 석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석실서원이 폐쇄되자 서원 마당에 있던 석물들을 이곳 묘역으로 옮겼다. 석실서원묘정지비(石室書院廟廷之碑), 취석(醉石), 도산석실려(陶山石室閭), 송백당유허비(松柏堂遺墟碑), 고태오류문(孤態五柳門)이다.

묘정비는 1672년(현종 13)에 건립되었으며 서원의 내력을 적은 석비이다.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수증(金壽增)이 글씨를 썼다. 참고로 내용을 소개한다.

성인(聖人 = 공자)이 춘추(春秋)를 지어 공문(空文)을 드리우자, 맹자(孟子)가 이를 일치(一治)의 수(數)에 해당시켰다. 대저 만물의 흩어지고 모임이 모두 춘추에 있으나, 만약 그 대경(大經)-대법(大法)을 논한다면 주(周) 나라를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천하는 언젠가는 어지러워지게 마련인데, 어지러움이 극도에 이르면 하늘이 다시 그 어지러움을 종식시킬 사람을 낸다. 그러나 그 사람이 토지의 기본과 인민의 세력을 소유한 것이 없으면, 역시 성인의 공문(空文)으로 인하여 대경과 대법을 밝힘으로써 이에 인류는 금수와 다르게 되고, 중국은 이적(夷狄)이 되는 것을 면하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일치(一治)일 뿐이다.

대체로 숭정황제(崇禎皇帝: 명 의종/明毅宗)의 병자-정축 연간에 천하의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했다고 할 만하였다. 이때 우리 석실 선생(石室先生: 청음)이 몸소 예의의 대종(大宗)을 책임으로 삼아 이미 무너진 강상(綱常)을 세웠고, 중인들이 서슴없이 창귀(倀鬼)가 되는 의논을 함에 이르러서도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명언(明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말은 더욱 막히게 되었으나 그의 기개는 더욱 펴졌고, 그 몸은 더욱 곤경에 빠졌으나 그 도는 더욱 형통(亨通)하여졌다. 그러한 까닭에 그 어지러움은 더욱 심하였으나 그 다스림은 더욱 안정되었으니, 퇴지(退之: 당나라 한유/韓愈)의 “이전에 맹자가 없었더라면 천하는 다 오랑캐 옷을 입고 오랑캐 말을 하였을 것이다”고 한 그 말이 진실이다. 선생이 이미 세상을 떠나자, 중외(中外)의 장보(章甫)들이 선생의 옛집 옆 대강(大江) 가에 사당을 세우고는, 선생의 백씨(伯氏) 선원 선생(仙源先生: 김상용)도 난리에 임하여 정성껏 세교(世敎)를 부호(扶護)했다 하여, 여기에 아울러 신패(神牌)를 받들어 오른쪽에 배향하였는데, 대체로 갑오년(1654, 효종 5년) 5월에 사당을 짓기 시작하여 병신년 12월 14일에 배향을 마쳤다. 아, 석실 선생 같은 분은 이른바 천백 년 만에나 한 사람씩 나는 인물인데 또 선원 선생까지 있었으니 한 가문의 천륜이 성대하기도 하다. 아, 치(治)와 난(亂)은 음(陰)과 양(陽)의 이치이다. 그래서 성인이 이미 대역(大易: 주역)을 찬(贊)하여, 양은 끝내 없어서는 안 되며 난은 다시 다스릴 수 있음을 보였고, 또 춘추(春秋)를 지어 치란의 도구로 전해 주었으니, 이 도가 진실로 밝아지면 이것을 치(治)라고 할 수 있는데, 어찌 적음(積陰)이 구야(九野)에 덮여 있다 하여 양덕(陽德)이 아래에서 밝아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춘추가 비록 난을 인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나, 천하의 치(治)가 그 속에 없지 않다. 그러나 춘추를 가리켜 “문구(文句)가 수만(數萬)이요, 그 지적한 것이 수천이다” 하였으니, 성인의 은미한 말씀과 오묘한 뜻은 비록 알 수 없으나, 오직 주(周) 나라를 높이 숭상한 의(義)는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서 비록 소경이라도 볼 수 있다. 지금이나 후세 사람으로 무릇 이 서원에 들어가 당에 올라서 생도(生徒)를 가르치는 자가 선생의 도를 알고자 한다면, 성인의 필삭(筆削)한 뜻만을 가지고 억지로 그 통하기 어려운 것을 통하려 하지 말고, 다만 천고에 바꿀 수 없는 천리(天理)-왕법(王法)과 민이(民彝)-물칙(物則)만을 강론해 밝힌다면 비록 성인의 가노(家奴)가 다시 땅속에서 살아난다 할지라도 가하다. 그런 다음에 선생의 공(功)이 큰 것과 하늘이 선생을 내신 것이 참으로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아, 이 어찌 쉽게 속인과 더불어 말하겠는가.(기존 번역 전재)

서원이 세워진 뒤 17년(1672, 현종 13년) 3월 일에 후학 은진 송시열이 쓰다.

石室書院廟庭碑
聖人作春秋垂空文. 而孟子當之於一治之數. 夫萬物之散聚. 皆在春秋. 而若論其大經大法. 則莫過於尊周而攘夷矣. 天下未嘗不亂. 而亂之旣極. 則天必生已亂之人. 而其人也無有土地之基本. 人民之勢力. 則亦只因聖人之空文. 以明夫大經大法. 而於是乎人類異於禽獸. 中國免於夷狄. 則是亦一治而已矣. 蓋當我崇禎皇帝丙丁之間. 天下之亂. 可謂極矣. 我石室先生身任禮義之大宗. 以樹綱常於旣壞. 至於衆人不憚爲倀鬼之議. 則又有以明言其不然. 於是其言愈屈而其氣愈伸. 其身愈困而其道愈亨. 以故其亂愈甚而其治愈定. 退之曰. 向無孟氏. 則皆服左衽而言侏離. 其信然矣夫. 蓋先生旣沒. 而中外章甫建祠於先生舊居之傍大江之濱. 而以先生伯氏仙源先生臨亂立慬. 用扶世敎. 並奉神牌而右享之. 蓋經始於甲午五月. 妥侑於丙申十二月十四日. 噫. 若石室先生.所謂千百年乃一人者. 而又得仙源先生於一家之天倫. 噫其盛矣. 嗚呼. 治亂者陰陽之理也. 聖人旣贊大易. 以見陽不可終無. 亂可以復治. 而又作春秋. 以垂治亂之具. 是道苟明. 則斯可謂治矣. 豈可以積陰蔽於九野. 而不謂陽德之昭明於下也. 故春秋雖曰因亂而作. 而天下之治. 未嘗無也. 雖然. 春秋旣曰文成數萬. 其指數千. 則聖人之微辭奧義. 雖不可得以知. 而惟尊尙京師之義. 則炳如日星. 雖瞽者亦見之矣. 今與後之人. 凡入斯院. 升堂而鼓篋者. 欲知先生之道. 則只將聖人筆削之義. 毋強通其所難通. 而只於天理王法民彝物則之不可易者. 講而明之. 則雖使聖人家奴復出於地中. 亦可也. 然後乃知先生之功之大. 而天之所以生先生者. 眞不偶然矣. 嗚呼. 是豈易與俗人言哉. 後十七年橫艾困敦三月日. 後學恩津宋時烈記.

 

‘취석’이라 글씨를 새긴 비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취석(醉石) 글씨가 새겨진 비석도 있는데, 취석은 도연명이 세속을 떠나 취하면 잠자던 바위였다고 한다. 석실서원에서 세상과 떨어져 지내려는 마음을 담은 비석이다. 취석을 테마로 쓴 시들도 많고 정조는 선비들에서 취석(醉石)과 성석(醒石)으로 시를 짓도록 하기도 했다(以醉石爲五言律詩題. 醒石爲七言律詩題). <다음 호에 계속>

 

이한성 교수

 

제681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8.13 13:53:04

 

[겸재 그림 길 (60) 미호 ②] ‘왕이 자고 간 하천(왕숙천)’이 된 사연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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