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59) 미호 ①] 미사리 건너 ‘미호’를 두 번 그린 뜻은?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그림을 따라 한강을 거슬러 오르기를 행호(幸湖, 杏湖: 행주산성)에서 시작하여 어느새 광나루 지나 남양주 미호(渼湖)까지 올랐다. 미호라는 강 이름은 이제 잊혀진 이름이 되었지만 미호나루 건너편 강 마을이 아직도 미사리(渼沙里)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한강의 어디쯤인지는 짐작이 되리라. 남양주 구리시 왕숙천에서부터 대략 덕소에 이르는 한강 구간을 미호(渼湖)라 불렀다. 강 건너 하남 쪽은 미사리 모래벌판이었다.
분원(分院) 앞을 지난 한강 물이 예봉산과 검단산 사이 협곡을 빠르게 내려오다가 팔당대교(옛 도미나루)를 지나면 강폭이 넓어지면서 유속은 느려지고 퇴적물이 쌓인다. 이렇게 쌓여 만들어진 섬이 당정섬(堂亭섬)이었다. 이 한강 물이 흘러 왕숙천 물길과 만나면 더욱 유속이 느려져 강은 강이되 호수처럼 보인다. 해서 미강(渼江)이 아니라 미호(渼湖)라 불렀다. 압구정 앞을 동호(東湖)라 부르고 서강을 서호(西湖), 행주산성 앞 강을 행호(幸湖)라 부르듯 말이다.
지금도 미호 변(邊) 언덕에 올라 강을 바라보면 더없이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예나 지금이나 경치를 즐기는 이들을 불러 모은다. 겸재도 66세 되던 해인 1741년(영조 17년) 이곳에 와서 미호(渼湖)라는 제목으로 두 점의 그림을 그렸다. 경교명승첩에는 이 두 그림이 남아 있다.
같은 제목이지만 그린 대상은 다르다. 한 그림은 농암(農巖) 김창협이 은거해서 산 집인데 삼주삼산각(三洲三山閣)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집과 주변 배경을 그린 것이다, 또 하나는 삼주삼산각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있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을 그린 것이다. 도대체 이 집과 서원이 겸재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길래 1741년이라면 양천현령 시절인데 이곳까지 와서 그림을 그린 것일까?
겸재 일으켜 세운 장동김씨 인물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겸재는 이른바 장동 김씨(壯洞金氏: 新안동 김씨)의 도움에 힘입어 입신(立身)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 보니 겸재는 장동 김씨와 관련된 건물이나 활동 장소, 여행지 등 이들과 관련된 화제(畵題)의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이곳을 그린 두 점의 미호(渼湖)도 장동 김씨와 관련된 그림들이다.
이 지역은 장동 김씨와 어떤 관련이 있는 지역일까? 장동 김씨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의 활동 무대는 청와대 서쪽 장동과 인왕산 기슭이었다. 이 생거지지(生居之地)를 그린 겸재의 그림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을 비롯하여 여러 그림이 남아 있다. 이들 장동김문(壯洞金門)이 어려움을 겪거나 퇴임 후에 은거한 퇴후지지(退後之地)는 바로 겸재의 두 그림 미호에 그려진 삼주삼산각과 석실서원(石室書院: 남양주 수석동 석실마을)이었다.
그러면 이들이 세상을 떠난 후 영면한 사후지지(死後之地)는 어디였을까? 미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와부읍 덕소 석실(石室)마을이었다. 가까운 지역에 두 개의 석실마을이라니 혼동도 오고, 안동도 아닌 이곳이 장동 김씨와 무슨 연고가 있길래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부득이 장동 김씨네 집안 내력을 조금 살펴야겠다.
안동에는 두 개의 안동 김씨가 있는데 김씨 중 소산을 세거지로 해서 소산김씨(素山金氏)라고도 했던 신안동김씨는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의 증조부 김번 때 형님 김영과 같이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고향인 소산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김영은 청풍계(淸風溪)[靑楓溪]에, 김번은 장의동(壯義洞)[壯洞]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이 지역은 백부 되는 학조대사와 연관된 땅이었다 한다. 그렇게 서울살이 하던 김영은 자신의 당대에는 서울에 살았으나 손자 김기보(金箕報, 원주목사) 때 풍산으로, 일부 후손들은 예안·교하 등지로 이주하였다. 이에 김영의 집은 종증손 선원 김상용에게 인도되고 장의동 쪽 무속헌은 아우 김상헌의 소유로 굳어지니 청풍계·장의동 일대는 김번 후손들 즉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터전이 되었고 소산 김씨 대신 장동김씨(壯洞金氏)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新안동김씨의 ‘복스러운 땅’ 된 덕소
필자의 친구들 중에는 안동 김씨들이 있는데 그들은 구안동과 신안동이라고 자신들을 구분하고 있다. 본래 안동을 세거지로 하는 안동 김씨를 스스로 ‘구안동(본안동)’이라 부르고 장동에 자리 잡은 안동 김씨를 ‘신안동’이라 불러 구분한다. 이들 장동 김씨가 덕소와 인연을 맺은 것은 감상용, 김상헌 형제의 증조부 되는 서윤공 김번(金璠) 때부터였다. 지금 장동김씨 선산(안내판에는 안동김씨 선산)이 있는 지역은 원래 김번의 부인 남양홍씨 문중 땅이었다 한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어느 날 우연히 이곳에 왔던 김번의 백부 학조대사가 보니 이 땅이 명당 중에 명당이었다 한다. 넌지시 조카며느리를 불러 남편(김번)이 죽거든 반드시 이 땅에 장사지내라고 일렀다 한다. 남편이 죽자 부인 남양 홍씨는 친정을 졸라 남편을 이 땅에 장사지냈다 한다. 남양 홍씨 문중에서도 이 땅이 명당임을 알아보고 광중(壙中)에 물이 나오는 흉지라고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묘역 좌측 위 끝에 서윤공 김번의 묘가 있으니 김씨 집안으로 시집온 며느리 남양 홍씨는 친정보다 시집을 택해 남편을 비롯하여 후손들이 명당에 잠들게 한 셈이다. 묘역에는 청음의 할아버지 신천공 김생해, 아버지 도정공 김극효, 큰아버지 김대효가 잠들어 있다. 물론 청음 본인과 아들 광찬도 이곳에 잠들어 있으며, 조금 떨어진 마을 입구에는 강화에서 순절한 형님 선원 김상용 묘역도 있다. 묘역에는 연못도 있고 석실서원에서 옮겨다 놓은 석물들도 있는데 후(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겸재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들만 우선 살펴보고자 한다.
항복하더라도 살고자 했던 인조의 마음
치욕의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 조정은 조금씩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서 삶과 죽음을 오갔던 인조에게 어느 세력이 더 받아들일 만한 세력이었을까? 만약에 청음을 정점으로 하는 척화파(斥和派)들의 주창처럼 끝까지 항전하였다면 그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인조는 살아남았을까? 살았다 해도 온전히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척화파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대의명분 앞에 무대책으로 모두 죽자는 것 아니겠는가? 오랑캐에게 항복은 ‘아니 되옵니다’가 그들의 주장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알 수는 없지만 행간(行間)에 읽히는 인조의 마음은 수모를 감수하고라도 살아남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항복의 예를 올리면서도 인조는 자신의 수모보다 청태종이 어찌 하는지에 더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살고자 한 임금 앞에 죽으라 하는 척화파는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라도 대의명분 앞에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자신들의 죽음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런 인조의 분위기에 청음은 벼슬길을 단념하고 낙향 길에 오른다. 항복이 있은 다음 달 1637년 2월 27일 조상의 묘가 있는 덕소를 거쳐 안동에 도착했는데, 머무는 거처의 당호를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의 청원루(淸遠樓)라 달았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1640년 11월 안동 서미리에서 심양으로 압송됐다. 그렇게 심양의 구금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2년 뒤 최명길도 명나라와 비밀 외교를 벌이다가 압송되어 구금되니 척화파와 주화파의 거두 둘이 이렇게 심양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형조판서 이경여도 청나라 연호 쓰기를 거부했다가 심양으로 끌려갔으니 세 대신이 고초의 나날을 보낸 시기였다. 이렇게 심양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청음은 장동 무속헌(無俗軒)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영이 있는 덕소로 돌아왔다. 몇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그곳에 은거했다. 본래 이곳 지명이 적실(賊室: 도적골) 마을이었다는데 이름도 석실(石室)로 바꾸었다 한다. 고창 선비 황윤석의 이재유고(頤齋遺藁)에도 이 동네에서 춘천으로 가는 고개를 적실현(賊室峴)이라 했으니 도둑이 많았던 때가 있었나 보다.
청음은 호(號)도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 했다. 돌집이나 돌로 된 굴도 없는데 왜 석실(石室)이라 한 것일까? 미루어 짐작할 만한 사실들이 있다. 석실은 은거(隱居)나 우뚝함 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소동파는 환산석실(桓山石室)에 은거하였고, 어떤 은자(隱者)는 공동산 석실에 은거하여 1200살을 살았다는 전설도 있다.
넓고 넓은 마음을 표현한 호호가(浩浩歌)에선 설산석실고차아(雪山石室高嵯峨)라고 노래해 높고 높은 뜻을 빗대었다. 청음은 그렇게 살고자 한 자신의 마음을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 자호(自號)한 것 같다. 청음은 석실마을에서 그렇게 살다가 1652(효종 3년) 졸(卒)하여 이곳 선산에 묻혔다.
이렇게 지조를 세우고 산 청음의 모습이, 그 시대 성리학의 논리에 천착되어 있던 선비들에게는 기려야 할 표상으로 여겨졌는가 보다. 청음이 세상 떠난 뒤 4년 뒤 양주 유생들과 안동 김씨, 연안 이씨, 여흥 민씨 등이 출연하여 미호변 언덕에 청음과 형 선원을 추모하는 사당을 세웠다.
몇 년이 지난 1663년(현종 4년) 조정에서는 석실사(石室祠)라는 편액을 내려 주었다. 나라의 편액을 받은 석실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을 대표하는 사액서원(賜額書院) 중 하나인 석실서원(石室書院)이 되었다. 자연히 장동김씨 가문은 조선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고.
겸재 붓으로 전해진 삼주삼산각과 석실서원
청음의 아들 광찬을 거쳐 손주 김수항, 김수흥, 김수증은 영의정이 되었고 김수항(金壽恒)의 여섯 아들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 창립은 육창(六昌)이라 하여 영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되었다. 겸재가 인연을 맺은 이들이 이들 육창이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농암 김창협으로 초점을 맞추면 청풍(淸風) 부사로 있을 때인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金壽恒)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세상을 등지고 영평(永平: 포천 북방 백운산 지역)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노론이 재집권하자 신원이 복관되고 농암도 대제학, 판서 등에 중용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김창협은 본디 농암(農岩: 포천 백운산)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호도 농암으로 자호하였고 칩거했으나 모친(母親)이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문안드리고 찾아뵙기에 편리하도록 47세 되던 1697년 8월 미음(渼陰) 석실서원(石室書院)에 거처를 정하여 나왔다. 그러나 서원에서 계속 거처할 수 없기에 고개 넘어 미음나루 산 밑에 몇 칸짜리 사랑채를 지어 ‘삼산각(三山閣)’이라 편액하였다. 앞 강 모래톱이 세 개라 삼주(三洲)라 이름했다고 그 내력이 농암집 주(註)에 기록되어 있다.
삼주(三洲)에 거처를 정하였다.
선생은 본디 농암에서 여생을 마치려 하였으나, 모친이 이때에 서울 집에 있었기 때문에 문안하고 모시기에 편리하도록 근교에 머문 것이다. 그리고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주변 산수가 깨끗하게 탁 트여 한가로이 거처하며 늘 학문에 힘쓰는 즐거움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곳에 거처를 정한 것이다. 몇 칸짜리 사랑채를 지어 거처하면서 삼산각(三山閣)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앞에 모래톱 세 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또 삼주(三洲)라고 명명하였다.
八月. 定居于三洲.
先生本擬畢命農巖. 而大夫人時在京第. 故爲便省侍. 棲息近郊. 且以石室書院. 江山淸曠. 頗有齋居藏修之樂. 遂定居焉. 作外軒數楹以處焉. 扁曰三山閣. 前有沙渚三. 故又命其地曰三洲.“
이런 연유로 장동 김씨의 퇴후지지(退後之地), 사후지지(死後之地)가 된 이 지역을 겸재는 미호란 제명으로 삼주삼산각과 석실서원을 그렸다. 겸재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글로만 전해질 그 모습들을 실물에 가깝게 접할 수 있어 다행이다. 이제 삼주삼산각 터부터 시작하여 석실서원 터, 청음이 잠들어 있는 덕소 석실로 떠나 보자. 지도 1에서 번호 1은 수석마을인데 옛 미음나루가 있던 곳이다. 삼주삼산각도 이곳에 자리했을 것 같다. 번호 2는 석실서원 자리, 번호 3은 장동김씨 선영이다. 청음은 여기에 잠들어 있다. 4는 왕숙천, 5는 또 다른 하천 홍릉천이다.
제680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7.31 11:43:19
[겸재 그림 길 (59) 미호 ①] 미사리 건너 ‘미호’를 두 번 그린 뜻은?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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