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52) 압구정(狎鷗亭) ①] 자연과 ‘압구’하랴던 한명회, 피비린내 정치만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코로나로 마음은 얼어붙어도 봄 길은 화사하다. 오늘은 겸재의 압구정도(狎鷗亭圖)를 찾아 길을 걷는다. 언제부터인가 압구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집값이 서울에서 가장 비싼 동네라는 점이 되었으나 오늘은 그런 마음 내려놓고 겸재의 그림 따라 길을 나서 보련다.
겸재의 압구정도는 두 점이 있다. 한 점은 간송미술관 소장본으로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그림인데,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 언저리에서 지금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방향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그러니까 동북 방향에서 비스듬히 서남을 바라보며 그린 것이다. 압구정(狎鷗亭)은 바로 지금의 현대아파트 구역 내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 한 점의 압구정도는 필자의 졸고 동소문도를 소개할 때 이미 언급했던 독일 성베네딕토 선교회의 총 수도원장 노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신부가 수집해 갔던 겸재화첩에 들어 있었다. 이 화첩은 감사하게도 2008년 10월 영구임대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 화첩 속 압구정은 간송본과는 앵글이 반대로 동호대교 남단쯤 되는 위치에서 압구정을 바라본 그림으로 지금의 서울숲(옛 뚝섬경마장), 응봉, 중랑천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다행히 이 지역 동호(東湖)의 옛 모습을 알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두 점의 그림이 있다. 겸재보다 200년 가량 앞선 1500년대에 그린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가 그것이다.
현대아파트 지으면서 흔적도 사라진 압구정
오늘은 이런 그림들을 눈에 담고서 봄 길을 나선다. 참고가 되는 지도는 요즈음 지도(사진 1)와 또 하나 170년쯤 전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이다(사진 2). 이제 압구정을 찾아가자. 아쉽게도 압구정은 갑신정변 이후에 없어졌다 한다. 그 무렵 압구정의 소유주는 철종의 부마 금릉위(錦陵尉) 박영효(1861~1939)였다 하는데 갑신정변(1884)의 주모자로 정변이 실패하자 역적으로 몰리니 압구정은 몰수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의 동호대교 남단에 해당하는 지역은 본래 광주군 언주면(彦州面)으로부터 서울로 편입된 지역인데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사용했던 장비들을 보관하던 한강변 모래펄과 구릉지 과수원, 채마밭이었다 한다. 이 구릉지 언덕에 압구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 모래펄을, 앞강(동호)에 있던 저자도(楮子島)를 파내어 그 흙과 자갈로 메우고 구릉지를 깎아 정지 작업을 한 후 현대아파트를 지었으니 압구정의 흔적이 남아 있기나 한 것일까?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에서 내려 압구정 현대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74동 앞, 이곳에 압구정이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석과 압구정지(狎鷗亭址) 표석이 서 있다. 74동이 있는 곳의 높은 둔덕 위에 압구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둔덕을 깎아내려 아파트를 지었을 것이다. 74동 앞 동이 72동인데 그곳은 지대가 74동에 비해 낮다. 모르긴 몰라도 이 주변 지형은 강 쪽이 낮고 차츰 구릉의 형태로 지대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72동부터 앞쪽 강 방향은 지대가 낮아진다. 금강아케이드 그 앞쪽 논현로190길, 그 앞쪽 100단위 동들은 겸재의 압구정도를 보면 예전 백사장이었거나 우기에는 물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이 현대아파트 앞으로 강둑을 쌓고 그 위로 팔팔도로가 개설되었다. 어느 자료는 이 팔팔도로 뒷동쯤을 압구정 터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안쪽에 압구정은 있었던 것이다. 수십 미터 물길을 메우고 아파트 부지를 조성한 결과다.
그런데 이 지역 땅이름을 대표하는 압구정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압구정은 세조의 오른팔과 같은 권신(權臣)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별서였다. 아는 바와 같이 한명회는 세조를 도와 단종을 밀어낸 계유정란의 일등공신이며 대를 이어 예종, 성종의 비(妃) 장순왕후(章順王后: 睿宗妃), 공혜왕후(恭惠王后: 成宗妃)의 아버지였으니 그 권세는 임금 아래 제일이었다. 그가 광주 언주면 강가에 별서를 지었던 것이다.
뛰어난 명나라 학자에게 압구정 작명받아
그는 이 별서의 이름을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에게 부탁하여 이름을 얻었다. 예겸은 조선에 사신으로 와 많은 신료들과 우의를 돈독히 했던, 몇 안 되는 갑(甲)질 안 하는 명나라 사신이었다. 이런 예겸으로부터 이름을 받았으니 가히 국제적이었으며 한명회에게는 자랑거리였다. 그 이야기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사신으로 명(明) 나라에 들어가 정자의 이름을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에게 청하였더니, 예겸이 이름 짓기를 ‘압구’라 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에 또 사신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조정 선비들에게 시를 청하였더니,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 등이 말하기를, ‘이 분이 압구정 주인이다’ 하고, 한 가지로 시를 지어 보여 정자 이름이 마침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예겸의 기문(記文)에,
조선 왕성의 남쪽 십수 리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그 근원은 금강-오대 두 산으로부터 나와서, 모여서 긴 강이 되고 서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내 옛날에 조서(詔書)를 받들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 강 위에 이르러 정자에 올라 잔치하며 시를 읊었었고, 또 배를 강 가운데 띄우고 오르내리며 즐겼었다. 그 강은 넓고 파도가 아득하여 바람 돛이 오가고, 갈매기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시원하고 경치가 다함이 없어, 황홀히 몸을 창해와 한수(漢水)-면수(沔水: 중국의 강 이름)의 사이에 둠과 같아서, 몸이 동방 조선에 머물러 있음을 잊어버렸다. 이별한 지 10년에 매양 강 언덕의 풍치를 멀리 그리며, 정신이 달려가지 아니한 적이 없었었다. 천순(天順) 원년 겨울에 조선의 이조 판서 한명회 공이, 그 국왕의 명을 받들고 들어와 봉사(封事)를 천자에게 바치었다. 공은 전에 별장을 한강 가에 두고 정자를 그 가운데 지었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한다. 내 전날 사신 가서 한 차례 놀았으므로, 그 좋은 경치를 안다 하여 사람을 시켜 나에게 이름을 청하고 인하여 기문 쓰기를 부탁하였다. 내 이름 짓기를 압구(狎鷗)라 하고 다음과 같이 쓴다.
갈매기는 물새의 한가한 자이다. 강이나 바다 가운데 빠졌다 떴다 하고, 물가나 섬 위에 날아다니는 것으로,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어찌 친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위태로운 기미를 보면 바로 날아 떠오르고, 공중을 휘 날은 뒤에라야 내려앉는 것이니, 새이면서 기미를 보는 것이 이 같은 까닭으로, 옛적에 해옹(海翁)이 아침에 해상으로 나갈 적에, 갈매기가 이르러 오는 수를 백으로 헤아린 것은 기심(機心)이 없는 까닭이요, 붙들어 구경하고자 하기에 미쳐서는 공중에서 춤추며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것은 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오직 기심이 없으면 갈매기도 자연히 서로 친하고 가까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큰 키가 옥처럼 섰고 거동과 풍도가 빼어났으며, 위대하여 번국(藩國)에서 벼슬할 때, 인재를 뽑아 쓰는 데 공명(公明)한 재주를 나타내었고, 천조(天朝: 중국)에 사신 오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예절로 삼갔으니, 나라에 돌아가면 등용됨이 융숭할 것이어서, 어찌 갈매기와 친압할 수 있겠는가. 만물의 정은 반드시 기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느끼고, 만사의 이치는 반드시 기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사심이 붙어 있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기심이 진실로 없게 되면 조정에서는 사람들이 더불어 친하기를 즐기지 아니할 자 없고, 이 정자에 오를 적에는 갈매기도 더불어 한가히 친압하지 아니함이 없으리라.(이하 줄임, 원문은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압구정기는 예겸뿐 아니었다. 당대의 명문장가 김수온(金守溫)도 한명회의 청에 따라 압구정기(鴨鷗亭記)를 지었다. 식우집(拭疣集)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긴 문장이니 핵심부 일부만 소개한다. (원문은 자료를 요하는 독자를 위해 전문 소개함)
압구정기(押鷗亭記) - 김수온(金守溫)
(앞 생략)
왕도(王都)에서 남으로 5리쯤 가면 양화진(楊花津)의 북쪽과 마포(麻浦)의 서쪽에 언덕 하나가 우뚝 솟아 환히 트이고 강물로 빙 둘러 있어 세상에서 화도(火島)라 일컫는다. 이전에는 우양(牛羊)의 놀이터로 되어 위는 민둥민둥하고 아래는 황폐하여 어느 누구도 거기를 사랑하는 자가 없었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공(韓公)이 그 위에다 정자를 짓고 노니는 땅으로 삼았다. 공이 이 정자에 오를 적에 흰 갈매기가 날아서 울고 지나가니 공은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갈매기라는 새는 대개 천지와 강해(江海)로 집을 삼고 예나 지금이나 풍월로 생애를 삼아서 뜰 듯 잠길 듯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친근하여, 올 적에는 조수를 따라오고, 갈 적에는 조수를 따라가니 아무튼 천지간에 하나의 한가한 물건이다. 사람치고 기심(機心)을 잊어버린 것이 저 갈매기와 같은 자가 어디 있으랴” 하였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한림(翰林) 예공(倪公)에게 정자 이름을 청하니 애공이 압구(狎鷗)로 하기를 청하자 공은 더욱 흔연히 허락하며 “내 정자의 이름으로는 가장 적당하다” 하고, 드디어 압구로 편액함과 동시에 나를 불러서 기를 짓게 할 작정이었다.
나는 보니 이 정자의 승경(勝景)이 한강 하나에 있다. 정자를 경유하여 내려갈수록 물이 더욱 크고 넓어서 넘실넘실 굽이치며, 바다로 연하고 해상에 널려 있는 모든 도서(島嶼)가 멀고, 아득한 사이에서 숨었다 나타났다 나왔다 사라졌다 하여 간혹 상선(商船)들이 꼬리를 물고 노를 저으며 오락가락하는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고, 북으로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중중첩첩으로 솟아나서 새파란 빛을 더위잡을 만큼 울울창창하여 궁궐을 옹위하고 있으며, 무르익은 빛이 뚝뚝 떨어지려는 듯하고 푸른 빛깔이 젖을 듯하며 말이 뛰어 내닫는 듯한 것은 남쪽을 끼고 있는 관악산(冠岳山)이요, 놀랜 파도는 우레를 울리고 솟는 물결은 해를 적실 듯하여 콸콸 쏟아져 바다로 닫는 것은 동에서 오는 한강이요, 무릇 산빛과 물빛이 가까이는 구경할 만하고 멀리는 더위잡을 듯하며, 이의(二儀: 천지)의 높고 깊음과 삼광(三光: 일/日, 월/月, 성/星)의 서로 가름하여 밝은 것과 귀신의 으슥한 것과 음양(陰陽)-풍우(風雨)의 어둡고 밝음의 변화하는 것이 모두 궤석(几席) 아래 노출되지 않은 것이 없다. 공은 휴가를 얻으면 구경을 나와서 종자[騶從]들을 물리치고 이 정자에 올라 머뭇거리고 서성대며 내리보고 쳐다보며 바야흐로 강산을 의복으로 하고 천지를 문호(門戶)로 삼아 정신을 발양하며 물상(物象)에 흥취를 부칠 적에는 시원한 맛이 마치 바람을 타고 공중에 노니는 것 같으며, 활발한 생각이 날개가 돋혀서 봉래(蓬萊)-방장(方丈)을 오르는 듯하니, 그 고상한 정회는 바로 세상을 벗어나 홀로 서서 홍몽세계 밖에 뛰어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후략, 기존 번역에 따름)
拭疣集卷之二
狎鷗亭記
凌嵩華以求登臨之曠者。必歷參井之高。蹈江河以親魚鳥之觀者。必躡舟楫之危。若夫不高之凌。不危之躡。咫尺闤闠。毋遠城邑。有地可以兼湖山之勝者。殆蓋天作而地藏之。以遺其人者也。夫豈易得哉。王都南去五里。楊花之北。麻浦之西。有一丘穹㝫爽塏。環以漣漪俗號火島。先是。爲牛羊所牧。上禿而下葑。未有卽而愛者也。上黨府院君韓公。作亭其上。以爲遊衍之地。公之登斯亭也。有白鷗飛鳴而過者。公曰。異哉。鷗之爲鳥也。是蓋[乾坤江海以爲家。風月古今以爲生。載沈載浮。相親相近。]其來也隨潮之至。其去也隨潮之退。蓋天地間一閑物也。人孰有忘機如鷗者乎。及其入朝。問名於翰林倪公。倪以狎鷗爲請。公尤欣然諾曰。名吾亭固當。遂以狎鷗扁之。間欲余招。俾之作記。余觀斯亭勝狀。在漢水一江。由亭而下。水益弘闊。汪洋盪潏。連于大洋。其島嶼之列于海上者。隱現出沒於蒼茫杳靄之間。其或商帆貨舸。舳艫相御。鼓櫂往來。不知其幾。北望三峯。層巒疊嶂。巑岏崷崪攢靑蹙翠。如可承攬。蔥蔥鬱鬱以拱衛乎宮闕。至若濃光欲滴。翠色如潤。如馬奔突以馳者。冠嶽之拱于南也。[驚濤吼雷。駭浪沃日。滔滔汨汨。以赴于海]者。漢源之注于東也。凡山光水色。近可玩。遠可挹。以至二儀之高深。三光之代明。鬼神之幽顯。陰陽風雨。晦明變化者。莫不呈露顯現於几舃之下。公於休暇之隙。駕言出遊。却騶從上斯亭。逍遙徜徉。俯仰周旋。方其襟袍江山。戶牖天地。發舒精神。涵泳物象。[翛然如馭風而遊汗漫。浩乎若揷翼而登蓬壺。其高情雅懷。直欲遺世獨立。超鴻濛混希夷。]有不可以言語形容者矣。蓋公存志於經綸。而其所以瞻眺江山者。適足以資於野謀。故雖數出遊。而人不以爲傲。蓋公潛心於道體。而其所以察乎鳶魚者。適足以資於默契。故雖簡其車徒。而人不以爲嗇。昔謝公之登東山也。必以妓女。則是流連光景而已矣。賀監之賜鏡湖。以漫日遇。則是淸狂形骸之外而已矣。是皆尙一吷於千載之上矣。豈可與公同年而語哉。自古國家之興。必有雄才碩德之人出於其間。始則佐帷幄。決勝負。終則坐廟堂。贊化育。成大功而享榮名。爲邦家之柱石。係社稷之安危。若漢之蕭酇候,宋之趙韓王。其人也。唯公爲國冢宰。再爲國舅。重扶日轂。勳名德業之盛。罕有儷於古今。蓋將以伊傅周召爲期。而漢宋之臣。有所不屑也。位極人臣而節愈下。功振人主而德愈謙。不惟忘其勢。又有以忘其富貴。不惟忘其當貴。而其志恒存於江湖丘壑之僻。余故曰。泰山巖巖。峻極于天者。乃公勳名德業之盛也。蒼波萬頃。白鷗遊泳者。乃公相忘於江湖之外者也。惟能不以勳庸祿位累其心。此豈非所以能光輔國家。而永奠斯民於無窮者也耶。
그는 이어 중국과 조선의 이름 있는 많은 이들에게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지어 받아 정자에 걸었다. 심지어는 임금 성종도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내려 주었다.
그런데 압구(狎鷗)란 무슨 뜻일까? 압(狎)은 ‘친압하다’라는 뜻인데 서로 허물없이 친할 때 쓰는 말이다. 갈매기와 아무 허물없이 지내다니…. 이는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리라. 일찍이 중국 송나라 명재상 한기(韓琦)는 압구정이란 정자를 지은 일이 있었다. 한명회도 그 반열에 들어가고 싶었나 보다. 중국 고전 열자(列子) 황제편(黃帝篇)에는 바닷가에 마음을 비우고 사는 이 이야기가 나온다. 압구(狎鷗)란 말의 출처가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기심’을 알아채는 갈매기
바닷가에 사는 사람 중에 갈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매일 아침 바닷가에 나가 갈매기들과 더불어 놀았는데, 놀러오는 갈매기들이 몇 백 마리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들으니 갈매기들이 모두 너와 더불어 논다고 하던데, 네가 잡아 오면 내가 그 갈매기와 놀아보겠다.”
다음 날 바닷가로 나가보니 갈매기들은 맴돌면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극한 말은 말을 초월하고 지극한 행위는 행위를 초월한다. 지혜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고 한다면 천박한 행위가 되는 거지’
(海上之人有好漚鳥者,每旦之海上,從漚鳥游,漚鳥之至者百住而不止。其父曰:「吾聞漚鳥皆從汝游,汝取來,吾玩之。」明日之海上,漚鳥舞而不下也。故曰:至言去言,至為無為;齊智之所知,則淺矣).
이 글대로라면 마음은 지(知: 지혜, 지식) 너머에 있는 것이다. 위 바닷가 사람처럼 한 순간이라도 이렇게 갖는 딴 마음을 기심(機心)이라 한다. 과연 한명회는 기심(機心)이 없었을까? 그는 압구라는 정자 이름처럼 자연에 일부가 되려는 마음이었을까? 동국여지승람에만 기록되어 있는 시(詩)를 지어 받은 명나라 사람, 조선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태복시 승(大僕寺丞) 김식(金湜), 급사중(給事中) 진가유(陳嘉猷), 급사중 장녕(張寧),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 정서후(定西侯) 장완(蔣琬), 병부 상서(兵部尙書) 항충(項忠), 병부 좌시랑(兵部左侍郞) 등소(滕昭), 이부 좌랑(吏部左郞) 유비(劉斐),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형연(李炯然), 병부 낭중(兵部郞中) 우면(于冕),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장여필(張汝弼), 한림 수찬(翰林修撰) 나경(羅璟), 교유(敎諭) 오가립(鄔可立), 진사(進士) 진승(秦昇), 회계(會稽) 진지(陳贄),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祁順), 신숙주(申叔舟), 안지(安止), 성임(成任), 이승소(李承召) 등등등.
그의 정자 압구정에는 임금의 어제시(御製詩)에서부터 당대에 한 가닥 하는 명나라 사람, 조선 사람의 시들을 새긴 편액이 줄줄이 걸렸다. 성종도 장인 한명회를 위해 자신의 어제시에 화답하는 시(詩)들을 지어 올리게 했다. 그 중 사가집에 실려 있는 서거정의 시(詩) 한 수를 소개한다.
임금의 어제시에 답하여 지음(御製狎鷗亭詩應製)
(긴 시 6편 중 일부만 소개합니다)
만년에 강호 풍류 누릴 만하지 江湖晩節可風流
곱고 높은 명성 그 몇 해를 우뚝했나 雅尙高名聳幾秋
화동 주렴은 등왕각에 내리는 비 같고 畫棟珠簾滕閣雨
맑은 개울 방초는 한강의 모래섬에 晴川芳草漢陽洲
청산은 음전한 모습으로 늘 문과 마주하고 靑山窈窕長當戶
백구는 한가로이 배도 피하지를 않는다네 白鷗安閑不避舟
행여 시비의 소리 귀에 이를 리 없으니 莫遣是非聲到耳
자연천지 취하니 아무런 시름 없지 醉鄕天地百無愁“
서거정이 시에서 일렀듯이 한명회도 강호풍류(江湖風流) 속에서 압구의 낙(樂)을 즐기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온갖 난리법석을 떠는 한명회를 세상 눈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았던 모양이다. 매월당집 부록에 실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명회 비판한 김시습의 촌철살인
한명회는 본인이 지은 시를 편액해서 압구정에 걸었던 모양이다.
靑春扶社稷 젊어서는 사직을 돕고
白首臥江湖 머리 희끗해서는 강호에 묻히련다.
이를 본 매월당 김시습은 한 필(筆)에 그 가식을 고쳐버렸단다.
靑春亡社稷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白首汚江湖 머리 희끗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
(다음 호에 계속)
제673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4.14 10:02:19
[겸재 그림 길 (52) 압구정(狎鷗亭) ①] 자연과 ‘압구’하랴던 한명회, 피비린내 정치만 (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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