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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 과정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예타는 앞서 과학계 일각에서 신속한 기술 개발 착수의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일각에선 예타 완화 방침에 대해 조심스러운 시각도 제기된다. 대규모 국고 투입이 필요한 사업이 대상인 예타의 적용 범위를 줄이는 것은 자칫 과도한 예산낭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형 사업 예산 심사에 대한 세부지침을 섬세하게 마련하지 않으면 이같은 반대 목소리에 부딪쳐 실제 입법까지는 난항을 겪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9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정부는 국가 R&D 사업 예타를 폐지하거나 완화하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예타를 포함한 R&D 투자강화 관련 제도개편을 검토 중이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과기계에선 정부가 이전부터 언급해오던 '예타 제도 대규모 손질'이 임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권석민 과기정통부 과학기술정책국장은 이달 초 열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산하 위원회 간담회'에서 R&D 사업 예타를 원칙적으로 폐지하고 시설·장비 사업 등에만 예외적으로 예타를 실시하고 관리를 체계화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정부가 공언한 내년 R&D 투자·지원 확대의 일환으로 언급했다.
예타가 국가 R&D의 걸림돌로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는 긴 심사 기간이다. 통상 1년이 소요되는 심사 기간을 거치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발전 현황을 기획안이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타 기준금액은 기존 총사업비 500억에서 1000억으로 완화하는 방안이 시도됐다. 과학선도국들이 과감한 투자에 나서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준금액에 발목을 잡히는 첨단 기술 개발 사업이 산적하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예타가 폐지되면 촌각을 다투는 사업들이 지체없이 착수되면서 기술 경쟁에 보다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부 연구자와 산업계 관계자들은 권 국장이 소개한 예타 제도 개편 방안에 대해 조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설과 장비에만 예타를 실시하는 방안을 예외로 둘 경우 여전히 중요 R&D가 예타에 가로막히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당초 6000억원 규모로 기획됐던 한국형 달 착륙선 사업은 2022년 11월 예타 대상에 선정됐지만 2023년 4월 국가 전략기술 프로젝트 선정을 거쳐 지난해 11월 통과됐다. 우주항공업계 한 관계자는 "우주사업에선 한 달이 다르게 기술과 장비가 발전한다"며 "'속도 경쟁'인 우주산업에서 1년의 심사 기간은 굉장히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예타 폐지 자체에 대해서도 이견이 일 수 있는 가운데 개편안에 대해 과학계 의견을 촘촘하게 수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서울 소재 한 대학 교수는 "예타 제도는 나랏돈 누수를 막는 장치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며 "폐지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위해선 세부 규정이나 대책안을 섬세하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예타 폐지 방안이 실제 법제화로 이뤄질지도 지켜봐야 한다. 올해 정부의 R&D 예산 삭감 이후 지원 확대에 대한 여야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재정건전성을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반론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동아사이언스(dongascience.com)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2024.04.29 1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