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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코펜하겐대 연구팀은 이달 5일 백신 개발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화학'에 공개했다.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 크기에 불과한 초미세 실험실 수만개를 만들어 각각에 백신 후보 물질을 넣고 대량 분석하는 원리다. 연구를 이끈 니코스 하차키스 화학과 교수는 “백신 개발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미래 전염병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혁신 기술”이라고 소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다음 팬데믹(대유행)에 대응할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코펜하겐대 연구팀은 머리카락 굵기 10만분의 1에 불과한 나노미터(nm, 10억 분의 1m) 크기의 공간을 4만개 만들었다. 이 공간에 백신 후보물질들을 각각 넣고 동시에 효능을 분석했다. ‘DNA 나노기술’로 불리는 이 기술은 초미세 공간에서 나노입자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기술이다. 전기적으로 양(+)전하를 띤 나노입자를 이용해 음(-)의 성질(음전하)를 띠는 DNA를 끌어당겼다놨다 하는 원리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나노미터 크기의 아주 작은 실험실에서 백신 후보물질의 DNA 분자를 조작할 수 있어 다양한 분자를 합성하고 분석할 수 있다. 약 7분이면 4만개에 대한 분석이 끝난다. 나노 크기의 실험실에서 분석이 이뤄지기 때문에 필요한 재료나 에너지 사용도 크게 줄어 개발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연구팀은 인공지능(AI)을 적용해 후보물질 발굴 속도도 더욱 높였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보듯 백신 개발 속도는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와 모더나는 새로운 메신저리보핵산(mRNA) 방식을 빠르게 채택해 전세계 코로나19 백신 시장의 60%을 장악했다. 백신 개발 전체에서 후보물질 발굴은 여전히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백신 개발은 크게 후보물질 발굴과 동물시험, 임상시험, 허가와 시판 네가지 과정을 거친다. 우선 치료 가능성이 있는 질병원인과 타겟을 규명해야 한다. 그런 다음 기존에 만들거나 수집된 분자들을 분석해 후보물질을 선정하게 된다. 분자 구조변경 등 최적화를 거쳐도 기존 분자들에서 기대하는 치료 효과를 얻지 못한다면 아예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야 한다. 통상 후보물질 발굴에만 1~2년씩 걸리는 이유다. 후보물질 발굴 과정은 모래알 속 바늘을 찾는 것에 비유된다.
전문가들도 다음 감염병에 대응할 핵심을 여전히 백신 개발 속도로 보고 있다. 실제 미국은 지난해 9월 미래 감염병 대응을 위해 653억달러(약75조원)를 투입하기로 했는데 이 중 약 40%를 백신 기술 개발에 쏟아붓고 있다. 과학자들은 후보물질 발굴 시간만 줄여도 백신 개발과정의 속도를 크게 끌어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연구결과는 코로나19 사태 때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던 백신 개발 속도를 더 끌어올릴 것으로 보인다. 사태 이전에는 백신 개발까지 보통 4년이 필요했지만 코로나 첫 백신 개발까지 326일이 걸렸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로 개발 속도를 100만배로 끌어올리고 인력, 재료 등을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며 “향후 백신 산업에서 혁신을 주도할 기술로 발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러 과학자과 기업들은 미지의 감염병인 ‘질병X’의 발생을 조기에 파악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과학자들은 코로나19를 뛰어넘는 다음 질병이 또 다시 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기생충 등 인간이 감염될 수 있는 병원체 약 1400종 중 하나가 언제든 더 심각한 팬데믹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전망이다. 열대 지방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바이러스가 약 160만개나 있을 것이란 연구 결과도 있다. 산림 개간과 같은 인간 개발 활동으로 야생동물과 인간과의 접점이 늘어나면서 실제 감염병의 발생 주기도 짧아지고 있다. 미국립보건원(NIH)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 지난 반세기 동안 매년 평균 1~2개씩 새로운 전염성 바이러스가 발견돼 확산됐고, 최근엔 연 평균 3건으로 늘었다. 애런 번스테인 미국 보스턴어린이병원 연구원팀은 지난 2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팬데믹의 경제적 피해가 과소평가되고 있다”며 “예방이 치료법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캐나다 스타트업 블루닷은 뉴스보도와 세계 여행기 비행 패턴, 정부 보고서 등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AI 알고리즘이 감염병 발발 신호를 포착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회사는 지난 2019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세계보건기구(WHO)보다 앞서 코로나19 발병을 감지했다. 블루닷은 최근에는 비식별화된 개인 의료정보와 같은 데이터를 결합해 더 강력한 감시 체계를 구축했다. 미국 헬스케어기업 애보트 역시 이런 기술이 결합된 국제공동 조기경보시스템을 지난해 3월 구축했다. 조기경보는 물론 유전자 분석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변이 발생도 파악할 수 있다. 미 CDC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질병예측센터’ 설립을 지난해 8월 발표하기도 했다.
진단 기술의 진보도 일어나고 있다. 기존보다 더 적은 시료로도 더 빠르게 검출결과를 도출하는 기술이나 유전자 편집 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를 이용한 진단 기술 등이 개발돼 의료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인식해 절단할 경우 신호를 주고, 이 신호를 통해 바이러스 유전자가 존재한 것을 알게 되는 방식이다.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com)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2022.04.08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