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혈의 가장 기본은 환자의 혈액형과 수혈하는 혈액형이 동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만 O형의 경우 A형, B형, AB형 모두에게 수혈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른 혈액형의 피를 O형으로 바꿀 수 있다면 특정 혈액형을 구해야하는 불편이 없어 수술 등의 치료가 훨씬 원활해지지 않을까.
이 같은 상상을 현실화시켜줄 수 있는 기기가 파퓰러사이언스 2007년 7월호에 소개됐다. 미국 매사추세츠 소재 생명공학기업 자임퀘스트가 개발한 ‘혈액전환장치’다. 식기세척기 크기의 이 장치는 A형과 B형 혈액을 O형으로 변환해준다.
사용자는 그저 시작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러면 90분 만에 약 8팩 분량의 혈액이 O형으로 전환된다. 이 장치의 비밀은 두 개의 효소에 있다. 박테리아의 일종인 ‘엘리자베트킹기아 메닝고셉티쿰’과 ‘박테로이데스 프라길리스’에서 추출된 효소로서 이들은 각각 A형과 B형 혈액에서 항원을 제거해 O형을 만들어준다.
혈액형 전환 장치
당시 자임퀘스트는 두 효소가 혈구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며 혈액 내의 모든 세포를 O형으로 전환시킨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극소량의 혈액세포라도 원래의 혈액형으로 남아 있다면 치명적 면역반응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환된 O형 혈액의 인체 안전성 역시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이후 자임퀘스트는 지난 2009년 B형 혈액을 O형으로 완벽히 전환, 인체에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임상 1, 2 단계를 거쳐 증명했다. 현재는 A형 혈액에서 전환된 O형 혈액의 안전성을 검토하는 과정에 있다.
임상시험을 마치고 기기의 상용화가 이뤄진다면 병원측 실수로 다른 혈액형을 수혈받는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확률은 약 1만2천분의 1로 매우 드물지만 분명 존재한다. 또한 이는 혈액이 부족해 수혈을 받지 못할 확률보다 높은 수치다.
자폐증 치료제
우리 주변에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만 자폐증에 효과적인 치료제 개발은 너무도 더딘 실정이다. 하지만 지난 2008년 8월호에 실린 미국 시나몬의과대 제니퍼 바츠 교수팀의 말을 빌리면 걱정을 잠시 접어도 좋을 듯하다.
기사에서 바츠 교수는 “사랑의 호르몬으로 알려진 옥시토신을 흡입하면 자폐증 증상이 완화된다”고 설명했다. 옥시토신은 모유 수유를 하는 여성들에게 풍부하게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타인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고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차단하며 반복적이고 편집증적인 행동을 취하는 자폐증 환자들의 혈액 내 옥시토신 수치는 극히 낮다. 바츠 교수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그는 “자폐증 환자에게 옥시토신을 투여할 경우 기존의 정신요법이나 행동교정 등의 치료법보다 효과가 뛰어나며 어떤 부작용이나 중독성이 없는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 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장기간의 임상시험을 거쳐 그 결과를 2년 내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작년 9월 바츠 교수는 이 약속을 지켰다. 27명의 성인 남성을 모집해 실험군에는 옥시토신, 대조군에는 가짜 약을 주고 타인의 생각을 읽는 공감능력 테스트를 실시한 결과를 공개한 것.
그 결과 원래부터 적극적이고 사회성이 좋은 사람들은 옥시토신 투여여부와 관계없이 항상 과제를 잘 수행했던 반면 사회성이 부족한 피실험자들은 옥시토신 투여 시 공감능력이 향상됐다.
연구팀은 이를 놓고 옥시토신은 평범한 사람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자폐증 환자 등에게는 사회적 인지능력 향상 효과를 발현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현재 바츠 교수팀은 옥시토신의 새로운 기능에 대한 추가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마비 환자 재활 돕는 전극
머지않아 신체 마비 환자들도 자유자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른다. 지난 2009년 11월호에는 이런 미래를 구현하기 위한 미국 유타대 브레들리 그레거 박사 연구팀의 활동이 게재됐다. 연구팀은 이를 위해 16개의 마이크로 전극을 내장, 뇌의 정밀한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
이 장치를 뇌의 피질 표면에 부착하면 뉴런들 사이를 흐르는 미세한 전류를 감지해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레거 박사는 이러한 뉴런 간의 전기신호를 해석할 경우 뇌졸중 등으로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전신 마비 환자와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레거 박사는 또한 전기신호를 지령으로 삼아 로봇의 수 등을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사지 마비 환자들의 삶의 질을 대폭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불과 1년여가 지난 탓에 이 연구는 아직 기대만큼의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구팀은 이 장치를 활용, 간질 환자가 생각하는 몇몇 단어를 알아내는 실험을 실시했고 그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언어능력과 밀접한 뇌 부위에 전기신호 감지장치를 부착하고 환자로 하여금 ‘네’, ‘아니오’ ‘배고파요’, ‘목말라요’와 같은 기본적 단어 10개를 소리 내어 읽게 한 뒤 각 단어를 말할 때의 뇌 신호를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실험을 실시한 결과, 컴퓨터는 환자가 말을 하지 않고 오직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한 단어를 28~48%의 정확도로 맞췄다.
‘네’와 ‘아니오’에 대한 정확도는 무려 90%에 달했다. 현재 연구팀은 더욱 많은 단어에서 더욱 높은 정확도를 이끌어내는 데 매진하고 있다. 이 장치가 상용화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언젠가 실생활에 도입된다면 마비 환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을 희망적인 뉴스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휴대용 의료영상기기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후진국의 의료 환경 개선을 위한 의료기기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지난 2008년 12월호에 실린 ‘셀 스코프’도 그중 하나다. 미국 버클리대의 댄 플레처 교수팀이 개발한 셀 스코프는 휴대폰에 현미경을 장착한 형태의 극히 단순한 설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현미경은 최고 50배율까지 사물의 확대가 가능하다.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환자의 혈액샘플은 물론 피부 속의 말라리아 기생충까지 손쉽게 관찰할 수 있다. 셀 스코프로 촬영한 사진은 정밀진단을 위해 멀리 떨어진 의료연구소에 보낼 수도 있다. 촬영과 진단에 걸리는 시간은 채 10분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질병진단의 신속성이 배가될수록 치료시기를 놓칠 확률도 줄어들어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음은 당연하다. 당시 연구팀은 콩고에서의 필드테스트를 실시한 뒤 이 기기가 의료시설 접근성이 낮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특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특수 렌즈로 보다 더 작은 셀 스코프의 개발에 나서는 한편 상용화에 대한 의지도 피력했다. 지금쯤 셀 스코프는 출시됐을까. 연구팀은 콩고에 더해 케냐, 우간다, 인도 등지에서 추가 필드테스트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안타깝게도 아직은 연구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셀 스코프에 적용된 기술은 미래가 아닌 현재의 기술인만큼 상용화에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