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연구자의 생존기, 해외 연구실에서 살아남기] 즐거움, 사소한 것으로부터 느끼는 행복
미국의 내 자취방은 로프트 구조의 특이한 공간이다. 천장이 매우 높고,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계단이 있을 뿐 따로 문으로 분리가 되어 있지 않다.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벽 한 면을 가득 차지하는 큰 창문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큰 창으로 계속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반투명한 얇은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빛이 일렁이는 게 좋아서 한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처음 이사 왔을 때 나의 소소한 낙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공기와 햇볕을 즐기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미국 생활은 대체로 크고 작은 즐거움의 연속이다. 처음에는 살고 있는 도시를 탐방하는 것이 좋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꽤나 규모가 큰 도시이기에 볼거리가 많다. 큰 도시의 또 다른 장점은 한국 문화를 (비교적) 부족하지 않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인 마트가 가까운 곳에 있고 한국 음식점도 여러 군데 있다. 동네 예술영화관에서는 20세기 초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좋은 한국영화를 종종 상영해 주며, 최근에는 화요일마다 상영하는 모든 영화에 (미국 상업영화 포함) 자막을 달아 주기 시작해서 나와 같이 영어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최신 한국 상업영화도 멀지 않은 교외의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 주기적으로 영화관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며 어떤 한국영화가 들어왔는지 확인하다가 지난봄에는 <파묘>와 <범죄도시4>를 재밌게 보고 왔다. 미국 극장에서 한국어로 된 영화를 보면 자막 없는 미국 영화를 보면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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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주변 탐방이 끝나면 야금야금 다른 지역을 방문해 보기 시작한다. 북동부 대도시권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였다. DC를 방문하기 전까지 나는 미국의 모든 도시가 내가 사는 곳처럼 다소 더럽고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DC는 너무나도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조용하기까지 했고, 거의 모든 박물관의 입장료가 무료인 것은 덤이었다. 특히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DC 근교에 있는데, 학회로 그 지역을 방문했을 때 동네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또한 DC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벚꽃 명소이기에 나는 거의 매년 벚꽃 시즌에 그곳을 방문한다. 비록 그때마다 날이 흐려서 슬펐지만 내년에는 분명 맑은 날에 벚꽃이 만개한 타이들 베이슨을 걸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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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에 있는 플로리다는 휴양지 분위기가 가득해서 즐거웠지만 날씨가 너무 무덥고 습해서 오래 바깥에 있는 것은 다소 견디기 힘들었다. 다음으로는 큰 마음을 먹고 서부에 한 번 다녀오기도 했는데, 적어도 남부 캘리포니아(SoCal)는 내가 살던 북동부와는 마치 다른 나라처럼 느낌이 달랐다. 사람들이 더 많이 웃어 주고 더 많이 말을 거는 문화는 매우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멋진 자연환경과 좋은 날씨에 더해 한인 마트를 비롯한 한국적인 인프라가 훨씬 잘 갖춰져 있고 한국과의 비행시간도 짧다는 큰 장점들로 인해 서부에 한 번쯤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서부라도 오리건과 워싱턴 주와 같은 조금 더 북쪽 지역(Pacific Northwest)은 또 남부 캘리포니아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들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미국 체류 기간 동안 미국에 있는 모든 주를 방문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밖에서 외식을 하는 날에는 어떤 음식을 먹어볼까 매번 행복한 고민을 한다. 동남아시아 음식이라고 한데 묶일 때도 있지만 사실은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캄보디아와 같이 서로 조금씩 다른 음식 종류가 있다는 것, 같은 인도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인도의 어떤 지역인지에 따라 식문화가 차이가 있다는 것, 남미와 중미/카리브해 음식도 서로 다르다는 것은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또한 미국 음식에는 절대 버거와 감자튀김만 있지 않으며, 이곳에서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퓨전 음식을 먹는 것도 아주 즐거운 경험이다. 미국 남부의 케이준 음식은 다소 나의 입맛과는 맞지 않지만 이스라엘과 중동 음식은 내 취향과 잘 맞다는 사실도 미국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더불어 미국 식당의 메뉴판에는 항상 어떤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에 대한 긴 설명이 있기에,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영어사전과 구글 이미지를 이용해 새로운 식재료에 대해 공부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나들이를 가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은 소소한 일상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참 별것 아닌 일로 즐거울 일을 만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미국에는 항상 어떤 지역이든 크고 작은 축제와 행사가 열린다. 처음에 나는 별 시답잖은 행사를 엄청 많이도 한다고 생각했다. 버섯 축제, 스트릿 푸드 축제, 골동품 축제, 정원용품 축제 등과 같이, 나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과연 축제의 주제가 될 수 있는지 의아했다. 하다못해 시내 조그만 구역의 길을 막아두고 블록 파티를 자주 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축제일지언정 거리는 항상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그것이 값이 나가는 상품이든 아니면 다소 하찮아서 과연 누가 저런 것을 살까 싶은 상품이든 사람들이 기꺼이 지갑을 여는 모습을 매번 발견했다. 예전에는 옆 연구실 동료가 주말 동안 르네상스 페스티벌이라고 해서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르네상스 혹은 중세 시대 옷을 입고 마치 그 시대를 살아가는 것처럼 꾸며진 축제를 다녀왔다는 것을 들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이 멋진 일이 되고 특이한 것이 특별한 일이 되는 분위기가 나는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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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나의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고, 내 마음의 크기도 따라서 넓어진다. 연구실에서 나는 여전히 실험이 하나 실패하면 세상이 무너질 듯 슬퍼하고, 작은 실수를 하면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실패한 실험을 바로 다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빠른 시간 안에 끝내버려야겠다는 조급함에 밥을 거르거나 퇴근을 무한정 미루지는 않는다. 어차피 오늘 하루 해가 떠 있는 동안 최선을 다 해서 일을 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분명히 배웠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집에서의 쉼과 소소한 즐거움이 있어야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전에 어떤 교수님께서 내게, 실험과학자는 다섯 시간 실험을 했다면 다섯 시간은 실험대에서 벗어나 생각을 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해 주신 적이 있다. 무작정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일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하여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님을 나는 점차 깨닫고 있다.
즐거움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풍경이 있었고, 그것으로 이 글의 도입부를 쓸 수밖에 없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그것은 창문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산들바람에 커튼이 부드럽게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작디작은 내 조그만 자취방 하나의 크기만큼이었다. 그렇게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도 가만히 바라볼 수 있으니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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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미윤) 등록 2024.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