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연구자의 생존기, 해외 연구실에서 살아남기] 그리움,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생각하는 마음
지도교수님이 한국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오라고 권유했을 때,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박사 1년 차가 막 끝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연구실에 합류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즐겁게 실험을 하고 있었다. 미국인 학생은 고향집에 다녀오는 게 단 며칠이면 되지만 나는 그렇지 않고, 한국이 딱히 그립지도 않은 데다 미국 생활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힘든 것도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가며 한국에 다녀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고학년 때는 보내주기 쉽지 않을 수 있으니 지금 마음 편히 가라는 교수님의 설득에 못 이겨 3주간 한국에 다녀왔고, 돌아오는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졸업하기 전에는 한국에 다시 들어올 것 같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도교수님은 나와 마찬가지로 박사과정부터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며칠 출근을 안 하면서 쉬다 올 수는 있지만 굳이 한국에는 다녀오지 않겠다는 내게 교수님은 자신도 박사학생 때 그렇게 생각했었고 실제로도 딱 한 번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다녀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내게 한국에 다녀올 것을 권하는 이유는 미국에서 경력을 쌓느라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점점 고국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진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자신도 미국 생활이 이렇게 길어지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자의 반 타의 반 타국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다가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게 되어 이젠 이곳이 내 가족이 있는 내 집이라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고국을 방문해야 하는 필요성이 덜 느껴진다고 말했다.
자신도 원래는 이렇게 긴 타향살이를 할 생각은 없었다며 웃던 교수님의 말은 그때보다는 지금,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떠오르곤 한다. 지난 4년 동안 미국 생활을 해오면서 한국이 그리운 마음이 든 적은 거의 없었지만 늘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고 느낀다. 나는 미국에서 항상 어딘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존재다. 아무리 영어가 조금씩이나마 늘고 있다 한들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내 나이 또래 미국인이라면 다 아는 추억의 노래를 나 혼자 따라 부를 수 없었을 때, 가벼운 잡담을 하다 유명한 옛날 만화영화나 TV 시리즈의 비유가 나올 때마다 그게 뭐냐고 물어보며 대화의 흐름을 끊어야 했을 때. 그리고 다른 많은 순간에 나는 설명 없이도 나 역시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면, 하고 바란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떠나온 한국 역시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새로운 건물이 이것저것 들어선 내 고향 동네는 집이 아닌 것 마냥 다소 낯설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간 카페에서는 한참 전에 유행했던 디저트를 몰라서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디저트를 먹게 되는 줄 알고 신이 났던 적도 있었다. 이러다가는 한국에서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존재가 될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들 때는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 떠올린다. 카프카는 체코에서 나고 자란 체코 사람이었지만 유대인이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체코는 오랫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 결과 카프카는 고압적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출세를 위해 독일어를 주로 쓰고 독일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법학을 공부하고 보험 공단에 다녔다. 그러나 그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모두가 잠든 밤에 숨죽여 글을 쓰며 어떻게 전업 작가로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러나 그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어 가족들에게 버림받는다는 내용의 그의 소설을 떠올려 본다. 어떤 존재도 아닌 자신이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그는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일평생 프라하 토박이로 살았지만 그에게 고향은 늘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아닌지, 그랬기에 일평생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었던 것은 아닌지.
물론 나와 같이 언젠가는 꼭 한국에 돌아가리라 생각하는 유학생에게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야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소수 집단의 그것에 비할 바는 못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많은 수의 유학생이 적어도 한 번은 한국에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조차 없던 인종과 언어, 문화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문득 그런 고민과 맞닥뜨리면, 나는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내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한국이 많이 생각난다. 미국에서 살면서 나는 한국에서는 거의 쓸 일이 없던 단어와 개념을 영어로 많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중의 하나가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이고,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길거리를 걸으며 나의 생김새가 매우 이질적임을 의식하고, 내가 미국에 사는 내내 이 불편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해서 이 불편한 마음이 단숨에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내 머리는 새로운 생각들로 항상 복잡했다. 생김새와 언어는 비슷할지 몰라도, 생각은 서로 달랐다. 한국을 너무 그리워하고 한국에 돌아갈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며 어떻게든 미국에 남고자 하는 사람들, 아예 한국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며 미국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고자 하는 사람들, 이미 아주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자랐기에 생김새만 비슷할 뿐 사고방식은 미국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모든 사람들은 얼마간 소수자로서 느끼는 상처와 두려움,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도 저도 아닌 나는 그 혼란 속에 있는 것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마냥 행복할까? 반대로 미국에 남아 있게 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딱히 어느 한쪽이 답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대체 어디일까?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리고 지금도 생각하면 매번 설레는 것들에 대해 떠올려 본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게 처음에는 낯설고 신기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 딱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내 옆에 있는 동료로서 일을 할 때 손발이 잘 맞고 날씨 이야기를 가볍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다 마음까지 맞아 조금씩 친해지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멋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아무리 하찮고 쓸모없는 일이라고 해도. 그래서 나도 친구들의 하찮고 쓸모없는 일을 진심으로 재밌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미국은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그들을 하나하나 진심으로 존중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상관하지 않는 거라고 하는 의견이 있음을 안다. 나도 얼마간 동의한다. 그러나 너무 다양해서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기 쉬울 수 있지만, 나는 거리낌 없이 나의 개성을 드러내고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싶어서 여기에 왔고, 부족하지만 대체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 즐겁다.
카프카는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해서는 타향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잃어버린 고향을 찾았을까? 앞으로도 몇 년이 될지 모를 미국 생활을 아득히 그려보며, 삶은 놓고 온 고향을 찾다 끝내 포기하고 스스로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 나가는 긴 여정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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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미윤) 등록 2024.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