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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연구실 실전편] 02. 연구비 지급 연한이 끝났을 때 - 칼부림의 서막

산포로 2024. 4. 26. 15:04

[해외 연구실 실전편] 02. 연구비 지급 연한이 끝났을 때 - 칼부림의 서막

 

벨기에에서는 연구원 인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 중앙 정부에서는 과학자들에게 연구비를 지급할 때 정말 다양한 규제를 둔다. 특히나 인건비와 관련된 부분에선 정말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조건들을 들이민다. 예를 들어 박사생에 대한 인건비 계약은 최대 5년이고, 그 뒤로는 박사생이 일을 구하거나 연구실에 연구원 내지는 교직원으로 재취업을 해야 한다. 또 박사후 연구원의 경우에는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제한을 두기도 하는데, 지금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주니어 포닥을 최대 5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뒤로는 당연히 교수님이나 연구원의 재량에 따라 자유롭게 계약을 할 수는 있으나, 현 학교에서 1저자 논문 출판 없이 8년을 초과하여 근무하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가 어떠한 사유로 문제가 있는지 등을 소명해야 하는 등의 제약을 둔다.

 

연구비 지급 연한이 끝나간다는 건, 프로젝트가 끝나 곧 논문이 나올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도 있고, 어필을 잘해서 학교에 교직원으로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나와 같은 경우로 박사 학위 청구를 하기 전에 먼저 연구실에 자리를 잡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어디든 그렇듯, 연구실 일상에는 희극만 있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누군가는 어쨌든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는 게 가장 슬픈 사실이 아닐까. 그리고 원하지 않게 잘 돌아가지 않은 연구 때문에 연구비 지급이 어렵다는 통보와 함께 짐을 싸서 나가야 할 날이 정해졌다는 사실이 들리면, 속된 말로 팀 분위기와 연구실 분위기 모두 지옥으로 가는 특급 열차를 타게 된다.

 

지난 화에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나의 경우에는 교수님께서 먼저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를 외친 케이스다. 2022년 여름이 갓 지난 시점, 나는 계약서와 채용 확정 서류가 나왔으니 인사팀 오피스에서 해당 서류를 수령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2023년 3월에 박사생으로서 받고 있는 인건비의 연한이 딱 5년이 될 참이었던 터라, 어떻게 체류 자격을 찾아야 하나에 대해 걱정이 없다면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굳이 다른 기관이나 회사에서 체류 자격을 찾아야 할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인 게 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른 동료들과 이런 일을 같이 겪었다면 모두가 행복하게 2022년을 마무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해 겨울은 서유럽의 보통 날씨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싶을 만큼 추웠고, 뉴스에서 한파 경보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2022년의 겨울, 연구실에서는 그때 불었던 바람보다 더 춥고 잔인한 칼바람이 불어 들기 시작했다. 그다음 해, 혹은 2024년에 마주할 동료 여러 명의 운명이 결정 났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한 날, 얄밉게도 그날은 눈이 정말 벨기에 답지 않다 싶을 정도로 예쁘게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잔인한 칼날을 맞이한 사람은, 연구실에서 근면함으로 따지자면 제일 먼저 이름이 나오는 우리 연구실 공식 최고참인 이탈리아 박사후 연구원 형님이었다.

 

2022년 12월 중순쯤, 교수님께서는 팀 미팅을 끝내시면서 이탈리아 형님에게 잠깐 사적으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기 오피스에 남아달라고 했다. 형님은 연구실에서 8년 넘게 일한 사람이지만, 캠퍼스 내에서는 정말 그 누구보다 일과 관련된 운 하나는 끝내주게 없던 분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작게라면 시퀀싱 결과물에서 나온 후보 유전자들 다섯 개 중 다섯 번째로 고른 유전자가 제일 중요한 유전자였던 터라 실험으로만 1년 반을 날렸다는 것. 크게 보자면 어렵게 중국에까지 수소문을 해서 구한 쥐 모델을 수입하려고 하니 코로나로 모든 게 막혀서 그동안 했던 프로젝트를 포기해야 했던 일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 형님과는 2022년 초반부터 같이 하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실험도 잘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연구실에서 낸 논문의 내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물론, 우리가 해당 프로젝트에서 설정한 가설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당연히 시퀀싱 데이터 분석을 진행했고, 그 분석 결과에서 가장 유의하다고 나온 것 마저도 교수님께서 우리가 생각한 가설대로 가고 있으니 실험으로 어서 증명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혹시 몰라 이 실험이 안 될 때를 가정해 몇 개의 pathway 후보군을 더 골라 두었고, 그 형님은 다시 벤치로 돌아갔다. 이때만 해도 교수님께서는 6개월 내로 실험을 마치면 논문을 투고할 수도 있겠다는 계산을 두드렸지만, 그 어떠한 후보군도 실험으로 증명이 되지 않았다.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연합 내 연구 재단의 경우, 연구비를 수주하는 동안은 2년에 한 번씩 중간 보고서를 내야 한다. 이탈리아 형님은 그동안 여러 차례 실패한 실험에 대해 소명을 잘해왔고, 실패해도 이유만 있다면 괜찮다는 게 적어도 그동안 연구비를 주던 주체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연구 재단도 학교도 이 형님의 실패를 용인해 줄 수 없고, 포닥 8년 차를 이렇게 보내면 더 이상 시니어로서 연구비도 계약도 연장이 불가능하다는 메일이 한 통 날아오게 됐다. 더 이상 실패에 대해서 구제를 해 줄 수 없으니, 억울하면 신생 자매지든 어디든 일단 투고를 해서 1저자 논문을 만들고 소명을 하라는 내용의 메일. 그리고 교수님도 마찬가지로 자신은 더 이상 이에 대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논문을 내고 나가지 못하면 아예 프로젝트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제받기가 어렵다는 거다. 

 

결국 형님은 2023년 여름, 교수님과 함께 재단 담당자와 만나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다. 다행히 재단에서는 지금 진행 중인 실험을 고려하여 2024년 말까지 연구비를 줄 수 있다고 했단다. 교수님께서는 따로 인사팀과 이야기를 하셨고, 만일 2024년 내로 논문을 투고해서 리비전을 받으면 해당 논문이 나올 때까지는 학교에서 교직원으로 자체 계약을 해 줄 수 있다는 대답을 받았다고 했다. 이 모든 대답을 듣는 데 반 년이 넘게 걸렸고, 형님이 아무리 어려워도 항상 하던 말인 la vita è bella(인생은 아름답다)는 말은 그 사이에 어디론가 사그라져 가고 있었다.

 

생각 외로 잔인한 겨울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동료들 중 일부는 4월의 벨기에 날씨처럼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을 통지받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벨기에의 봄처럼, 동료들이 맞아야 할 칼바람이 사그라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떠날 날이 정해진 동료들이 떠날 날이 다가오는 걸 보고 있으면, 착잡한 마음은 덤으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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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송유라) 등록일2024.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