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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20년의 독일경제 : 변화와 시사점

산포로 2010. 12. 10. 14:30

통일 20년의 독일경제 : 변화와 시사점


김영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Ⅰ. 독일 통일은 성공적인가?

 

통일 20년의 독일경제. 관심의 초점은 통일된 독일이 지금 성공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독일은 경제적인 면에서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 주범은 화폐단일화에 있었다고 했다. 1:1의 화폐교환이 동독의 경제를 엄청나게 평가절상시킴으로써 경제를 파탄 낸 주범으로 여겨졌다. 서독에 의한 일방적 흡수방식에 의한 통합도 잘못된 독일 통일로 강한 비판을 받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그런 평가가 아직도 유효한가.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아직도 할 일은 남았지만, 독일 통일은 그래도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어떻기에 그런 평가가 가능한가? 독일 통일에서 우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몇 가지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2. 통일과 함께 배태된 갈등

 

독일 통일은 기본적으로 동독주민이 요구한 것이다. 그 요구는 「고르바초프」의 동유럽 국가에 대한 개혁과 개방(「페레스토로이카」, 「글라스노스트」)과 연결된 시민혁명을 통해 분출되었다. 동독주민 모두는 통일을 하면 자유롭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믿음은 어디서 생겨났던 것일까? 그것은 분단 하에서도 부단히 이루어졌던 양독간의 길고 긴밀한 교류·협력을 통해, 특히 동독주민들이 서독의 방송을 보면서 생겨났던 것이다. 교류협력을 통해 얻었던 서독에 대한 경험이 통일을 하면 서독과 같이 자유롭고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으로 차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사코 통일하려고 했다. 그것도 동독이 서독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그야말로 ‘흡수되는’ 형태의 통일을 택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의 평화통일, 동독주민의 시민혁명으로 쟁취한 통일이 독일 통일의 실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동독의 붕괴라고 한다면 그 붕괴를 동독주민 스스로가 원했기에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시민혁명을 통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변화를 얻은 동독주민은 즉각적인 통일을 요구했지만, 통합의 과정은 모두 서독사람들에게 맡겼다. 통일조약을 체결했지만, 통합의 과정은 철저한 동독의 서독화였다. 통일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동반한다.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더 중요하다. 통일을 먼저 돈으로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통일은 사람이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많은 것이 이미 어긋나 있었다.

 

베를린 장벽 이후 동독인들은 “또 다른 사회적 실험”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즉각적인 통일을 원했고 가능한 한 빨리 서독인들처럼 풍요롭게 살기를 원했다. 서독의 사회체제가 이를 가능케 해줄 것으로 믿었다. 서독사람들도 동독 사람들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함께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동독 사회주의와 서독 자본주의의 좋은 면만 어우러지게 하는 통합은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웠다. 그런 생각은 통일의 대세에 밀려나 있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배태되었다. 통합이 전적으로 서독사람들의 우월적 자세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추진되지는 않았어야 했는데 실제 진행된 것은 정반대였다. 동독주민들은 서독 주도의 통합이 가져다 줄 정신적 폐해를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중요한 자리를 서독인들이 싹쓸이 하듯 차지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통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아직도 68%의 구 서독지역 사람들은 통일 뒤 구 동독지역을 한 번도 여행하지 않았거나 여행할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 반대로 구 동독인으로서 구서독을 여행해보지 않은 사람도 29%에 달한다. 여전히 많은 동독주민들이 그들은 “2등 시민으로 취급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2008년 구동독 지역에 거주하는 18세 이상의 2,892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베를린-브란덴부르크 사회과학연구센터)에 따르면 구동독 지역 주민들 가운데 자신을 실질적인 독일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은 22%에 불과했다. 동독이 불법국가가 아니었다고 답한 주민들은 41%였고, 62%는 독일국민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심지어 16%는 동독시절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고 대답했다.

 

통일 초기 모든 것은 ‘청산(Sanierung)’의 대상이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토지와 기업의 사유화는 「신탁관리청(Treuhandanstalt)」에 의해 동독의 기업과 공장을 파산시키는 것이 대세였다. 그래서 수만 개의 동독 기업이 파산·청산됐다. 기업은 사라졌고 실업자는 늘어났다. 붕괴된 동독지역은 경제적으로 진공상태가 되었고, 그 공백을 서독의 기업들이 자연스럽게 장악할 수 있었다. 동독지역은 서독기업의 이윤 극대화의 시험장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작동방식을 모르는 동독주민들은 서독의 기업에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3. 돈으로 산 동독지역 경제

 

통일에 따라 구동독지역에 대규모 지원이 이루어졌다. 통일과 함께 동독 사람들은 모두 서독의 사회보장체제에 편입되어,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의 비용조달을 위해 1991년부터 독일 정부는 소득세나 법인세에 추가로 붙는 「통일연대세」를 도입, 폐지와 재도입을 반복하며, 2019년까지 연장했다.

 

통일 이후 2009년까지 총 1조 3천억 유로(약 2,011조 원)의 연방예산이 동독지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 중 12.5%가 인프라 재건(도로․철도․수로 개선 및 기초단체교통개선, 주택 및 도시건설)으로, 구동독지역 경제활성화(지역경제활성화, 농업구조 및 해안 보존, 투자 보조, 이자 보조, 전철 등 근거리 교통보조 등)를 위해서는 7.0%가 사용됐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사회보장성 분야(연금·노동시장 보조, 육아 보조 및 고등교육 보조 등)였다. 전체의 49.2%를 차지했다. 그 외 임의기부금(독일 통일기금, 판매세 보조, 주 정부 간 재정균형조정, 연방보조지급금 등) 및 국방비가 31.3%에 달했다. 전체적으로는 62.8%가 소비성 지출로, 나머지 37.2%는 투자성 지출에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정부는 통일비용으로 매년 독일 국민소득(GDP)의 1.5% 수준이 지출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4%나 되었다.

 

돈으로 산 구 동독지역의 발전은 눈부실 정도다. 1990년 통일 당시 양독간의 격차는 소득수준면에서 동독이 서독의 절반, 생산성은 1/5에 불과했다. 1991년 구동독에서 1천 유로의 재화를 생산하는 데 77.2시간이 소요됐으나, 현재는 29시간이면 충분하다(Ifo 경제연구소 분석). 서독의 79%까지 향상되었다. 2009년 말 현재 구동독 지역의 국내총생산(GDP)은 서독 지역의 65.8%, 동독 지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서독의 71%까지 회복되었다. 1991년 9,751유로였던 동독 1인당 국민소득은 2009년 19,500유로로 2배가 되었다. 서독지역은 같은 기간 동안 12%의 증가에 그쳤다. 동독 지역의 임금이 빠르게 상승한 것은 노동시장의 통합에 따른 노조, 최저임금, 노동보호 등 노사관계 관련 제도의 통합, 특히 노조의 단체교섭권이 동독에까지 적용된 데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서독 노조들은 동독 노동자들의 서독 이주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동독의 임금을 크게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동독 지역 주민의 자동차 소유비율은 현재 57% 정도다. 2명 중 1명 이상이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구서독 지역의 51%를 넘어섰다. 실업률도 1997년에는 17.9%까지 상승했으나 2010년에는 통일 이후 최저인 11.5%로 낮아졌다. 그렇지만 구서독의 6.6%보다는 훨씬 높은 편이다. 구동독 지역으로부터의 대규모 두뇌 유출은 서독지역의 발전에 한 몫을 했다.

 

통일 당시 동독지역으로부터 서독지역으로의 대규모 인구이동도 크게 감소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많은 동독주민들이 임금이 높은 서독으로 왔다. 1990년 10월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40만 명의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이주 규모는 크게 감소해 그 후부터는 연간 20만 명 이하로 감소했다. 이주 규모가 감소한 것은 동서독간의 생활수준 격차가 빠르게 좁혀졌기 때문이었다.

 

4. 독일 통일 20년과 ‘창조적 파괴’

 

현재 독일은 국내총생산 기준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다. 세계 3위의 상품 수출국이자, 수입국으로서 세계경제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독일의 실질경제성장률은 2004년 1.1%의 플러스 성장 이후 2010년에는 1.6%를 예상하고 있다. 안정적인 성장세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독일 30대 기업들 가운데 구동독 지역에 본사를 가진 기업은 단 하나도 없다. 경제적으로 독일 하위권 7개주 가운데 구동독 지역이 6개주나 된다. 게다가 통일 이후 동독 지역 주민 300만 명이 일자리를 찾아 서독지역으로 이동한 탓에 동독지역은 노동력 공동화 현상마저 보이고 있기도 하다. 또한 동독 지역 재건을 위한 막대한 비용조달로 세금 인상·재정적자 확대 등의 후유증이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독일 통일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 시작이 잘못된 통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서독의 막강한 경제력에 따라 동독인들을 부양하고 동독지역의 부흥을 위해 엄청난 재원을 투입할 수 있었던 저력에도 기인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동서독주민사이에 기본적으로 존재했던 상호 이해와 수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동서독인들 사이에는 기본조약 체결 이후 수많은 인적 교류와 협력을 통해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과 연대의식, 기본적으로 서로의 사회체제와 문화에 대한 상호 이해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서독의 사회보장체제는 동서독의 통일을 받쳐준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통일 후 동독지역에 대량실업이 발생했고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독지역의 실업률이 서독 지역의 두 배에 이르고 있지만 사회적 항의를 넘어, 심각한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지 않은 것은 서독의 사회보장체제가 굳건히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을 현재의 위치에서 볼 때 독일 통일은 어쩌면 ‘창조적 파괴’였다. 동독지역은 이제 서독지역에 비해 훨씬 앞선 기술과 설비로 무장되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이 구동독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통일비용을 산출할 때 흔히들 삼는 지표는 통일 10년 북한 주민 1인당 소득 수준이 남한 1인당 소득수준의 60%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독 경제는 신기할만큼 빠르게 서독의 수준을 따라잡은 것으로 평가된다. 통일 이후 불과 5년 만인 1995년에 동독의 1인당 국민소득이 서독의 60%, 노동생산성(취업자 1인당 국민소득)은 66%, 1인당 소비지출은 74%에 도달했다. 체제통합적 측면에서 볼 때 독일 통일이 서독체제로 탈바꿈한 것은 빠른 시간 내 동독지역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오히려 유리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것이 가져오는 주민간의 이질감을 배제하면 그렇다.

 

통일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합쳐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독일 통일은 심리적 정체성과 정신적인 화합을 하는 데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그러나 급진적 체제통합이 오히려 동독 내 개혁의 주요 걸림돌을 일시에 무너뜨린 최대의 효율성을 가졌던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5. 독일 통일 20년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

 

동서독 통일이 비록 많은 부작용과 문제를 가져왔지만, 결코 잘못된 통일 또는 실패한 통일이 아니다. 적어도 동독주민의 마음을 샀던 상태에서 이룩한 통일, 동독주민이 스스로 원해서 이룬 통일, 그리고 주변국들이 동의한 통일이라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평화적으로, 동서독 정부가 조약체결을 통해 서독체제로 합의한 통일, 이 보다 더 좋은 형태의 통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통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독일은 주민간의 이질성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그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남북한은 어떤 통일을 해야 할 것인가? 동서독과 같은 서로 적응하는 과정 없이, 상대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을 했을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남북한이 통일하기 위해서는 먼저 통일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 주민이 원하고, 남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통일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다음 통합의 방법이다. 동서독 통일은 수준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두 경제를 급속도로 통합시키고 비적정 환율을 선택함으로써 통일 정부에 큰 경제적 부담을 지운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점에서 남북한 경제통합은 먼저 북한의 경제체제를 전환시키기 위한 제도적 조치를 취하고 일정기간이 경과해 북한 지역이 시장경제체제로서의 역량을 확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경제지역을 단일화하는 것이 경제적 부담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이 되었을 경우라도 급진적인 사회·경제·정치 통합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남북한의 통일 시 동서독의 경우처럼 사회보장제도를 완전 통합하는 것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조치다. 북한이 남한식 사회보장제도로 통합되면 북한 주민의 대다수는 기초생활보장 및 의료보호 대상자 내지 공공부조 대상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필요한 지출은 거의 전적으로 통일한국이 부담해야 한다. 여기에 의무교육을 비롯한 공공 서비스까지도 부담해야 한다면 대규모 재정지출이 생길 것이 명확하다. 이런 대규모 재정지출이 북한 주민의 소득으로 이전·시현될 경우, 북한 지역의 임금은 생산성 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는 북한 지역의 산업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남북한 경제 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될 시점까지 남북한을 분리하여 관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분리 관리 기간 동안에는 독일처럼 주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다. 노동력의 자유이동은 그로 인한 사회적 파급효과와 함께 노동시장의 왜곡을 남한 지역에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홍콩과 같은 일국양제의 남북한 적용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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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이후 독일 문화의 변화

 

김누리 중앙대학교 교수

  

1. ‘동독 문화계’의 도태

 

독일통일은 동독과 서독이라는 두 독일사회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동독은 흡수통일의 과정에서 밖으로는 서독에 무리 없이 편입되는 듯이 보였으나, 안으로는 심각한 갈등을 내연시켰다. 정치ㆍ경제적 시스템 통합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사회ㆍ문화적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서독 또한 변화의 무풍지대에 머물 수 없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지난 40년간 안정적으로 작동해온 사회복지체제가 급격히 동요하면서, 예전과는 판이한 사회로 변모했다. 통일 20년의 독일은 “변화된 공화국”이 되었다. 1)

 

통일 이후 가장 큰 변화를 겪은 분야는 아마도 문화영역일 것이다. 동독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단호한 청산의지가 지난 20년간 일관되게 견지되었기 때문이다. 통일 직후부터 동독문화는 가혹한 청산의 대상이 되었고, 동독 고유의 문화 인프라는 제도적, 인적인 측면에서 철저히 해체되었다. 청산의 범위는 전면적이었다. 동독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생활세계의 영역에서 담론을 생산하는 학문과 지식인 영역, 담론을 소통시키는 언론 영역, 그리고 일상의 체험을 심미적 방식으로 재현하는 예술 영역에 이르기까지 동독의 문화 인프라 전체가 일거에 와해된 것이다.

 

생활세계의 변화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은 통일 이후 동독여성들이 겪은 문화충격이다. 그들은 통일독일이 요구하는 새로운 여성상을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어머니’이자 사회주의 ‘노동자’,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양육자’로서 자긍심을 가졌던 동독여성은 통일 이후 ‘섹시’와 다이어트의 미학 속에서 ‘성적 주체’이자 ‘독신 커리어 우먼’이라는 새로운 여성의 이미지에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있다.” 2)

 
문화담론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언론의 경우에도 동독 인프라의 해체는 전면적이었다. 구동독의 신문사들은 구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기관지였던 <노이에스 도이칠란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독의 신문자본에 매각되었고, 구동독의 방송 또한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 채 서독방송에 편입되거나, 새로운 방송체제로 재편되었다.

 

문학, 연극, 영화 등 예술영역에서도 동독 문화인프라의 해체와 동독 예술인들의 ‘전락’은 뚜렷하다. 문학의 경우 작가단체, 문학비평, 문학잡지 등 동독의 문학제도들이 해체되거나 서독의 제도에 편입되었고, “동독작가들은 동독이라는 ‘문학사회’가 완전히 해체됨으로써 하루아침에 ‘천직’을 박탈당한 실업자로 전락” 3)했다.

 

영화의 경우에도 제도적 인적 와해는 괴멸의 수준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본집약적인 영화생산의 특성과 대중추수적인 영화수용의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특히 자본의 힘과 대중의 취향이 여느 예술장르보다 강하게 생산과 수용을 결정하는 영화장의 경우, 동독 영화의 청산은 급격히 빠른 속도로 일어났으며 그 파장도 컸다.” 4)


연극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별다른 변화를 경험하지 않은 서독 연극계와는 달리 동독연극계는 완전히 변화된 연극 생산과 소비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을 위해 고투했으나, 서독극단과의 성급한 해체 통합의 결과 급격한 몰락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동독의 학문영역도 통일 이후 과거청산의 표적이 되어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서독의 대학이나 연구소 체제가 고스란히 동독으로 이식되는 방식으로 학문영역의 통합이 이루어진 결과 동독대학의 학생 수는 급격히 감소했고, 수많은 학자와 연구자들이 직장을 잃었으며, 동독의 학문 패러다임은 와해되었다. 지식인 세계의 지각변동 또한 극심해서, 동서독을 막론하고 지식인의 전통적인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고, 사회적 발언권도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이와 같이 문화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벌어진 과도한 청산의 결과 동독의 문화엘리트는 공론장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통일독일 사회에서 문화 분야의 동독 엘리트 점유 비율은 턱없이 낮아졌는데, 언론계의 11%, 문화계의 12%, 학계의 7%에 해당하는 엘리트만이 동독 출신이었다. 5)

 
이처럼 언론계, 학계, 문화계 등 공론 영역에서 문화인프라가 해체되고 문화엘리트가 과소대표됨으로써 동독인들은 개인적 체험영역과 공적 담론영역 사이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따라 동독은 점차 “정체성의 휴경지”, “담론의 부재지대”로 전락했다. 여기서 생겨난 빈자리를 상업적으로 파고든 것이 다름 아닌 ‘오스탤지아 쇼’(구 동독 시절의 문화를 소개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TV 프로그램)이다.6)


2. ‘동독 문화’의 부상

 

통일 초기에 행해진 동독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청산은 이처럼 주로 제도적, 인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동독이 자랑하던 문화인프라는 전면적으로 해체되었고, 동독의 문화엘리트들은 통일독일의 문화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통일 초기의 이러한 ‘청산’ 분위기는 대략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동독인들이 새로운 자의식에 눈을 뜨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동독 고유의 것’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확산되면서 동독 고유의 ‘부분문화 Teilkultur’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동독문화는 서독문화의 변화를 견인하면서 통일독일의 문화장 전체를 변화시켰다. 동독문화가 통일독일 문화장의 ‘아방가르드’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동독문화는 인프라 청산-부분문화 형성-아방가르드로의 부상이라는 세 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통일독일의 문화변동을 촉발하고, 또 주도하게 되었다.

 

볼프강 엥글러는 2005년에 출판되어 동서독 학계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저서 『아방가르드로서의 동독인』에서 동독인들이 통일독일 사회를 이끌어갈 아방가르드의 구실을 하리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동독인들은 미래의 변화에 보다 잘 대처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경쟁을 미덕으로 삼는 서방의 체제에 연대의 이름으로 저항할 것이며, 바로 이러한 동독인 고유의 속성이 그들을 미래사회의 선구자로 만든다는 것이다.7)

 

 엥글러는 또한 동독인들의 사회적 판단력과 문화적 기억이 통일독일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리라고 본다. 동독인들은 지난 40년간 사회주의 사회에서 내면화된 평등주의적 아비투스와 문화적 기억 때문에 사회적 위계와 권위를 중시하는 서독인과는 다른 사회적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동독인들이 통일독일 사회의 아방가르드로서 미래지향적 대안을 제시하고, 현실의 구체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과 마찬가지로, 동독문화도 서독문화에 영향을 주고, 때로는 서독문화를 변화시키면서 통일독일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확장해가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다양한 영역에서 발견된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동독의 여성문화가 통일독일 사회에 미친 독특한 영향력이다. 동독의 여성문화는 전통적인 서독의 여성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여성문화 형성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통일의 최대 희생자로 규정되었던 동독여성이 자신들 특유의 문화를 창출하고 정치적 파워를 형성”8)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동독여성들이 통일독일의 미래를 열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성주류화 gender mainstreaming’(여성들이 사회의 주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결정에 참여하도록 사회시스템 운영을 변화시킴)정책이다.

 

문학의 영역에서도 동독문학의 부활은 인상적이다. 동독문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통일독일의 문학장에서 당당히 살아남은 것이다. 특히 동독 출신 제3세대 작가들의 부상은 눈부시다. 토마스 브루시히, 우베 콜베, 잉고 슐체, 케르스틴 헨젤, 카타 량 뮐러, 브리기테 브루마이스터 등 동독 출신 신예작가들은 “정체의 늪에 빠져있던 독일문단에 새바람을 불어넣으며 어느새 통일독일 문단을 떠받치는 든든한 ‘허리세대’로 성장해가고 있다.” 9)

 

데파(DEFA 국영독점제작배급사) 매각 이후 몰락의 길을 걷던 동독영화 또한 “화려한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눈에 쉽게 띄는 것은 동독영화가 동독의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레안더 하우스만의 영화 <존넨알레> 속에서 동독은 서독인이 마땅히 부러워해야할 재미있는 나라로 이미지를 고쳤고, <굿바이 레닌>에서는 잃어버렸던 품위를 비록 거짓말이지만 되찾았다.” 10)

 

통일 직후 심각한 위상 추락을 겪으며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했던 지식인들도 통일 이후 재편된 문화지형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모색의 구체적인 성과는 1997년 1월 9일 귄터 그라스, 다니엘라 단, 발터 옌스, 프리드리히 쇼를렘머, 기스베르트 슐렘머 등 동서독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통일 이후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폐해를 강력하게 경고한 에어프르트 선언이다.


3. ‘동독 정서’의 서독 확산

 

독일통일 이후 문화변동의 진원지는 동독이었고, 그곳에서 퍼져나간 진동이 독일의 문화지형 전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동독발 변동의 해일이 전독일을 덮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문화영역에서 서독이 동독화되는 경향이다. 페터 슈나이더의 말처럼 “생활환경은 서독화되지만, 생활감정은 동독화” 11)되는 현상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동독여성들이다. “동독여성은 통일현실의 경쟁과 갈등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독의 다원화된 가치관에 적응하는 한편, 자신들의 내면에 각인된 동독 고유의 여성적 정체성을 포기하지도 않고 있다. 서독적 사회 환경을 수용하면서도 ‘동독인’의 의식은 버리지 않고 적응과 저항 사이에서 야누스의 얼굴로 현실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12)

 

또한 서독인의 가치관이 동독인의 가치관에 수렴되는 경향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 서독식 민주주의, 사회주의 이념, 국가의 역할, 자유와 평등의 선호도 등과 관련된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가치관의 변화 추이를 보면 서독이 동독을 따라가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자유보다는 평등을 중시하는 동독인의 성향은 현재 전독일적인 현상으로 보편화되어 가는 추세이다. 게다가 서독인이 느끼는 불안 심리마저도 동독인의 그것에 접근하고 있으며, 구동독 사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동독인들에게 동조하는 서독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서독의 가치관은 통일 이후 분명하게 동독의 가치관과 같은 방향으로 선회”13) 하고 있다.
서독인의 생활정서와 가치관이 점차 동독화되어가는 현실을 상기할 때 “동독인이 서독을 문화적으로 정복하고 있다” 14)는 베를린 자유대학 클라우스 슈뢰더 교수의 진단은 단순한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진실의 핵을 품고 있다. 사실상 문화의 다양한 영역에서 동독의 정서가 곧 전독일의 정서가 되어가는 현상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정서가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세계화의 영향 아래 이제 독일의 전반적인 정서로 확산된 것처럼 보인다.” 15)

 

이러한 현상은 동서독의 문화이전이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고 정치적 패자의 문화가 승자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4.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 : 상호 변화와 관용의 정신

 

통일독일 20년은 분단의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특히 통일 이후 문화변동 및 가치관 변화와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사항은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동서독이 여전히 존재하는 가치관의 차이를 넘어 진정한 문화통합을 이루려면 쌍방의 동시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독일통일이 동서독 사회를 동시에 변혁시키는 방식으로 추진되지 않고, 동독이 서독 모델에 일방적으로 동화되는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통일독일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통일 이전보다 오히려 약화되었다. 오늘날 독일이 안고 있는 제반 갈등과 모순은 일차적으로 여기서 잉태된 것이다. 또한 동시변혁은 ‘동서독의 문화적 융합’으로 이어져야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서독인이 중시하는 자유, 개인적 능력, 대의민주주의의 가치가 동독인이 강조하는 평등, 사회적 정의, 직접민주주의의 가치와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야말로 통일독일이 추구해야할 미래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한반도의 경우도 통일을 북의 변화와 남의 변혁을 동시에 실현할 기회로 인식하는 탄력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둘째, 통일과정은 다양한 사회적 실험의 장이 되어야 한다. 독일의 경우 동독이 서독의 체제와 가치에 일방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으로 통일과정이 진행됨으로써 동과 서 어디에서도 새로운 사회적 실험은 부재했다. 그 결과 통일이 쌍방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하고 새로운 국가적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 사회적 실험과 모색의 과정이 되지 못했다. 흡수통일로 인해 동독과 서독의 상황을 실질적으로 지양하고, 두 사회의 진보적인 요소들을 계속 발전시키며, 사회적 변혁과 해방의 새로운 질을 창출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남은 정상사회요, 북은 비정상사회라는 식의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는 한, 그리고 이러한 편협한 이분법에 기초하여 통일을 일방적 흡수과정으로만 인식하는 한, 통일과정을 새로운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창조적 실험의 장으로 활용하지 못한 독일의 실패를 우리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독일통일은 두 개의 이질적인 사회가 통합될 때 차이에 대한 관용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동독 정체성이 강화되고, 동서독 가치관의 차이가 엄존하며, 동독인과 서독인 간에 틀에 박힌 타자상이 고착되는 현상은 상대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충분히 못했음을 반증한다. 사실 장기간 대립해온 두 이질적인 사회가 결합될 때 가치관, 정체성, 자아상, 타자상 등에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독일의 경우 이러한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오용함으로써 동서독 간에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독일통일 20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보다도 양 체제의 동시변혁이 필요하다는 것, 통일공간이 사회적 실험의 장으로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 통일 이후 사회문화적 통합을 위해서는 관용의 정신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방송이 통일과정과 통합과정에서 수행해야할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게 된다. 방송은 양 체제의 강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체제간 소통의 교량이 되어야 하고, 통일 과정에서 양쪽 주민들의 사회적, 문화적 상상력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고무하는 통로가 되어야 하며, 통일 이후 예상되는 사회문화적 갈등과 대립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상호이해와 관용의 정신을 제고하는 확성기가 되어야할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논문 "통일독일의 문화변동"(독일문학, 2008/108)과 "동독의 귀환. 통일 이후 독일의 가치관 변화"(한국괴테학회, 2008/21)을 축약하여 부분적으로 손질한 것이다.

1) 클라우스 슈뢰더는 2006년 출판된, 통일독일 16년을 결산하는 책의 제목을 "변화된 공화국"이라고 명명하였다. (Klaus Schröder: Die veränderte Republik. Deutschland nach der Wiedervereinigung, München 2006.)

2) 도기숙: 독일통일 이후 여성상의 변화. 동독여성을 중심으로, 『독일문학』 제101집, 2007년, 256쪽.

3) 류신: 통일 이후 독일문학계의 지형변화,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27집, 2006년, 165쪽.

4) 박희경: 일상의 발견. 안드레아스 드레젠의 영화 <그릴 포인트>에서 찾는 동서독의 스밈, 『카프카 연구』 제18집, 2007년, 76-77쪽.

5) Vgl. Rolf Reißig: Die gespaltene Vereinigungsgesellschaft. Bilanz und Perspektiven der Transformation Ostdeutschlands und der deutschen Vereinigung, Berlin 2000, S. 32.

6) Ebd., S. 94.

7) Vgl. Wolfgang Engler: a.a.O., S. 114.

8) 도기숙: 통일 이후 동독지역 여성문화의 변화. 동독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독일어문학』 제38집, 2007년, 447쪽.

9) 류신: 통일 이후 독일문학계의 지형변화, 같은 곳, 171쪽.

10) 박희경: 통일 이후 동독 영화계의 변화 양상,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27집, 2006년, 236-237쪽.

11) Peter Schneider: Wie der Osten gewann, in: Der Spiegel, 48/2005, S. 176.

12) 도기숙: 독일통일 이후 여성상의 변화. 동독여성을 중심으로,  같은 곳, 2007년, 269쪽.

13) Klaus Schröder: a.a.O., S. 602

14) Ebd., S. 483.

15) 박희경: 일상의 발견. 안드레아스 드레젠의 영화 <그릴 포인트>에서 찾는 동서독의 스밈, 같은 곳,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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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독일 20년의 정치적 변화와 방송의 역할

 

 

정병기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 급격한 통일과 정서적 분단

 

‘콜민화(Kohlonisierung, Kohlonization)’와 ‘오스텔지어(Ostalgie, Ostalgia)’. 독일 통일의 결과를 빗댄 신조어로서 통일 독일에서 가장 많이 회자돼온 말이다. 전자는 독일 통일을 이끌어낸 콜(Helmut Kohl) 전 총리의 이름을 식민지화(colonization)라는 단어와 결합해 흡수통일을 꼬집은 것이며, 후자는 동독(Ost-Deutschland)과 향수(Nostalgie)를 결합해 동독에 대한 구 동독 사람들의 향수를 상징한 것이다. 급격한 통일만큼 통일 후 통합의 과제가 더욱 막중하다는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들이다.

 

독일 정치교육센터와 슈피겔 지(Das Spiegel) 등의 자료에 따르면, 통일 전 서독인들은 통일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부정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독인들의 경우도 통일을 통한 개혁이나 자본주의화보다는 사회주의 내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1986년에 “통일은 생전에 체험할 수 없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서독인들이 무려 93%에 이르렀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1989년 11월 당시 통일을 반대한 서독 청소년들이 52%에 달했다. 또한 장벽 붕괴가 시작된 직후인 1989년 12월 초 동독 시위 대중들의 68%가 통일이 아니라 동독 사회주의 내의 개혁을 주장하는 노이에스 포럼(Neues Forum) 등의 시민단체나 정치단체를 지지했다.

 

통일을 향한 정치과정은 이와 같이 서독에서는 잠잠한 분위기였다면 동독에서는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개혁 움직임에서 출발했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바 있는, 라이프치히(Leipzig)와 베를린(Ost-Berlin) 등지에서 월요일마다 일어난 이른바 월요시위(Montagsdemonstration)의 초성은 통일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혹은 인민이 진정한 주권자로 인정되는 ‘개혁사회주의’의 주장이었다. 그 상징적 표현이 바로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 We are the people!)”라는 구호였다. 그러나 점차 정치 권력의 공백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이 구호는 서서히 힘을 잃어가면서 급기야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 We are a people!)”라는 통일 주장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개혁사회주의 단체들과 통일사회당(동독 공산당)이 경제적 대안과 개혁사회주의의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지 못한 채 분열해 간 것과 달리, 콜 총리가 이끄는 서독 정부는 동서화폐의 1:1 교환(당시 실제 환율은 약 10:1) 가능성을 구체화했다. 결국 통일 총리가 된 당시 콜 총리의 저돌적 통일정책과 함께 서독 마르크의 장밋빛 전망을 담은 서독 자본주의의 약속이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라는 구호로 정교화된 것이다. 이러한 구호는 얼마 후 통일사회당 정권이 물러난 상태에서 소득 발전과 사회안정망을 유지하고자 하는 대중정서에 효과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일 과정은 통일 이후의 사회적ㆍ심리적 통합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했으며 통일 후 적어도 15년 동안은 이러한 예상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동서독 지역을 비교한 최근 자료는 없지만 통일 후 15년을 평가한 자료들을 통해 유추해볼 때 2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러한 동서독주민들간의 사회적ㆍ심리적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고 추단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독일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태도를 통해 통일 독일의 연방제와 경제제도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2005년도에 구 서독주민들의 71%가 긍정적인 태도를 나타낸 반면 구 동독주민들의 경우는 38%만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 통일 독일의 새로운 지역주의

 

 

통일 독일의 정서적 분단은 특히 선거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지역 정서가 더욱 강하게 표출되는 주의회 선거에서 통일사회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의 지지율이 더 높지만, 연방의회 선거만을 보더라도 이러한 경향은 분명하게 나타난다(표 참조). 투표참여율도 전반적으로 구 서독 지역에서 높은 반면 구 동독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낮다. 연방 정치에서 자신들의 이해가 제대로 대변되지 못하고 있다는 구 동독주민들의 실망감과 민사당에게 거는 이들의 기대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 후 구동서독 지역별 연방의회 선거결과: 정당명부 제2기표(%)

정당

연도

사민당

기민연/기사연1)

동맹90/녹색당2)

자민당

민사당/좌파당3)

극우

정당4)

기타

투표

참여율

구 서독 지역과 서베를린

1990

35.7

44.3

4.8

0.6

0.3

2.6

1.7

78.6

1994

37.5

42.1

7.9

7.7

1.0

2.0

1.9

80.5

1998

42.3

37.1

7.3

7.0

1.2

2.8

2.4

82.8

2002

38.3

40.8

9.4

7.6

1.1

0.9

1.9

80.6

2005

35.1

37.5

8.8

10.2

4.9

1.7

1.8

78.5

2009

24.1

34.6

11.5

15.4

8.3

1.6

4.5

72.2

구 동독 지역과 동베를린

1990

24.3

41.8

6.2

12.9

11.1

1.6

2.1

74.5

1994

31.5

38.5

4.3

3.5

19.8

1.3

1.1

72.6

1998

35.1

27.3

4.1

3.3

21.6

5.0

3.6

80.0

2002

39.7

28.3

4.7

6.4

16.9

1.7

2.3

72.8

2005

30.4

25.3

5.2

8.0

25.3

4.0

1.8

74.3

2009

17.9

29.8

6.8

10.6

28.5

3.3

3.1

64.7

1) 구 서독 지역에서 기민/기사연(바이에른 주에서 기사연, 바이에른 이외 구 서독 지역에서 기민연), 구 동독지역에서 기민연.

2) 1990~94년 구 서독 녹색당과 구 동독 동맹90(Bündnis 90)의 선거연립, 1998년 이후 합당

3) 1990~2005 민사당, 2009년 좌파당

4) 연방 차원에서 활동하는 3개 정당만 계산: 독일민족민주당(NPD) + 공화당(REP) + 독일국민연합(DVU: Deutsche Volksunion)

 

자료: 독일연방선관위(http://www.bundeswahlleiter.de) 자료 종합

 

 

우선 통일을 추동한 기민/기사연(CDU/CSU)의 지지율은 통일 초기에 구동서독 지역에서 모두 압도적으로 높아 여러 정당들 중에서 유일하게 40%를 넘었다. 그러나 구 서독 지역에서 부침을 거듭한 것과 달리 구 동독 지역에서는 최근 선거를 제외하면 매우 급격하게 하락해 왔다. 반면 완만한 통일을 주장했던 사민당(SPD)의 경우는 구 동독 지역에서 통일 초기에 기민연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지만 분당 논란이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양대 정당의 이러한 구동서독 지역간 차이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민사당의 성장이었다.

 

민사당은 구 서독 지역에서도 대단히 미미한 지지율이지만 꾸준한 증가를 보여 왔고, 사민당에서 분당한 선거대안당(WASG)과 연립체를 구성했던 2005년에는 4.9%에 이르렀다. 게다가 선거대안당과 합당(2007년)해 좌파당(Die Linke)으로 참가한 2009년 선거에서는 8.3%까지 획득했다. 특히 구 동독 지역에서의 성장세는 더욱 놀라운 수준을 보여주었다. 1990년 11.1%에 머물렀던 지지율이 이후부터 거의 두 배로 증가해 1994년 19.8%에 이르고 1998년에는 21.6%에 달한 것이다. 물론 2002년에는 적녹연정의 개혁정책에 대한 기대로 인해 사민당에게 많은 표를 빼앗겨 다시 하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에는 다시 역대 최고인 25.3%를 얻어 적어도 구 동독 지역에서는 사민당 및 기민/기사연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으며 2009년에도 다시 역대 최고 기록을 갱신해 28.5%를 얻었다.

 

한편, 극우정당의 성장세도 구 동독 지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독일의 3대 극우정당인 민족당(NPD), 공화당(REP), 국민연(DVU)을 합산해 볼 때, 통일 후 1990년대 중반까지는 구 서독 지역에서 지지율이 높았으나, 1998년부터는 구 동독 지역에서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지지율 변화도 구 서독 지역에서는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일정한 범위를 유지하면서 낮아지는 반면, 구 동독 지역에서는 역시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큰 폭의 성장세를 보여 왔다. 그러나 구 동독 지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보인 2009년 선거에서도 그 수치는 3.3%에 불과해 독일 정당정치의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통일 전 서독은 양대 정당인 기민/기사연과 사민당을 중심으로 자민당과 녹색당이 연정파트너로 고려되는 양당중심체제 혹은 온건다당제였다. 반면, 동독은 통일사회당이 국가정당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다른 블록정당들이 대중동원 기제로 작동하는 비경쟁적 정당체제였다. 통일 과정에서 서독의 정당들이 구 동독 지역으로 확장함으로써 통일 후 구 서독 지역에서는 기존의 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구 동독 지역에서는 구 서독 정당들과 통일사회당 후신인 민사당이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구 서독 지역과 구 동독 지역이 서로 다른 정당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특히 구 동독 지역에서는 사민당과 기민연 및 민사당이 대등한 세력을 갖는 3당 구도 혹은 다당제 구도를 띠게 되었다. 정당일체감도 구 동독 지역에서는 크게 낮아 정당일체감 없는 부동층 유권자가 서독이 1/3인데 비해 구 동독 지역에서는 1/2 수준으로 나타난다.

 

통일 독일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동서 지역 간 차이는 정치적 통일 과정이 장벽 붕괴 시점에서부터 제시된 급격한 사회경제적 발전과 생활수준 동일화라는 장밋빛 전망을 통해 이념적ㆍ문화적 차이를 간과한 채 진행되었다는 데에서 그 씨앗이 배태되었다. 물론 통일 이후 사회경제적 발전이 약속대로 이루어졌다면 새로운 지역적 균열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과 약속은 통일 후 20년 가까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통일 독일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동서독 지역 간의 소득 격차와 실업이다. 통일 후 5년 내에 동서독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을 동일화하겠다는 약속이 아직도 지켜지지 않았고 지역간 실업률 격차도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곧, 통일 직후 구 서독 노동자 임금 수준의 50%였던 구 동독 노동자 임금 수준은 2008년도에도 70% 수준으로 상승되었을 뿐 여전히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있다. 또한 1991년에 각각 6.2%와 10.2%였던 구 서독지역과 구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2009년에 각각 7.8%와 14.5%로 그 차이 비중이 1.65배에서 1.86배로 커졌다.

 

3. 타임 랙(time lag)의 부메랑 효과와 통일 후 통합의 과제

 

20여년 전 동서를 가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만 그로부터 20년 동안 구 동독 지역과 구 서독 지역을 가르는 새로운 이념적ㆍ물질적 장벽은 여전히 남아 있거나 오히려 더 강화된 면을 보이고 있다. 이 현상은 구 동독 지역에서 민사당/좌파당이 갈수록 성장하여 제1당을 두고 각축하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이미 제1당으로 등장함으로써 가시화되었다. 통일 독일을 동서로 가르는 이 정당정치적 균열은 무엇보다 급격한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 사회경제적 통합의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서독 정당들에 의한 효과적 선거전과 콜 정부의 경제적 전망 제시를 통해 통일 전야의 개혁사회주의적 전망은 급격한 통일 구호 속에 묻히고 통일이 급격하게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은 당시 동독주민들의 이념적 경향을 경시한 채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통일 이후 20년 가까이 진행된 사회경제적 통합의 실패와도 맞물려 새로운 균열을 부추겼다. 그에 따라 구 동독 지역 주민들은 일부 극우 정당들에게 지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괄목할 만한 증가 추세로 민사당을 선택해 가고 있다. 급격한 정치 통합으로 시작된 독일의 통일이 사회통합의 타임 랙(time lag)을 초래함으로써 다시금 정치 통합의 균열이 야기되는 부메랑 효과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통일 이후 동서독 간의 격차는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긍정적 태도에서 1991년에 구 서독주민들에 비해 구 동독주민들이 36%p가 높았던 반면, 2004년에 이르러 그 격차 수치는 23%p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곧, 독일 통일은 절반쯤 비워진 물병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통일 독일의 평등과 부흥을 기대하는 구 동독주민들에게 독일 통일은 그 기대를 절반이나 비워버린 병이지만, 여전히 분단의 고통을 안고 통일에 목마른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독일 통일은 평화로운 통일의 꿀물을 적어도 절반이나 채우고 있는 물병이다.

 

사회통합과 문화교류의 핵심 기제인 방송의 역할도 독일 통일과 통일 독일에서 모두 중요하게 작용했다. 구 동독 지역에 매우 빠른 속도로 보급된 구 서독 방송이 통일 과정을 평화롭게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음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통일 독일에서 수행한 방송의 기능에는 절반 채워진 물병 혹은 절반 비워진 물병이라는 논리가 정치사회 통합에서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신속하게 보급된 구 동독 지역 방송은 구 동독주민들에게 유용한 시사 정보와 생활 정보를 효과적으로 보도하여 사회통합에 기여하였지만, 오스텔지어를 상품화하여 새로운 지역주의 형성을 부채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급격한 정치통일에 대한 대비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과 공공성보다 이윤 논리에 얽매인 사설 방송에 대한 적절한 통제가 미비했다는 것이다.

 

특히 통일 후 통합은 방송이 떠맡아야 할 매우 중대한 과제 중의 하나다. 사회통합을 정치가 제대로 추동해내지 못한다면 그 과제는 공론의 장을 주도하는 방송에게 맡겨진다. 방송 고유의 순환 기능을 살려 급속한 통일과 지연된 사회통합의 타임 랙을 메우고 공공성의 논리를 살리는 방송정책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균열이라는 부메랑 효과를 차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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