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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된 바이러스...치명적인 항생제 내성균에 폭탄 넣어 죽인다

산포로 2022. 5. 16. 09:31

천사가 된 바이러스...치명적인 항생제 내성균에 폭탄 넣어 죽인다

[사이언스샷]
파지 바이러스로 내성균 치료
미국서 성과 잇따라 발표

 

대장균에 결합한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파란색)의 전자현미경 사진. 파지는 대장균 안에서 증식한 다음 밖으로 나오면서 대장균을 죽인다/Eye of Science

 

코로나 같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악마로만 알고 있던 바이러스가 사람 목숨을 구하는 천사로 변신했다. 항생제가 듣지 않는 병원균에 감염된 환자들이 잇따라 바이러스 치료를 받고 목숨을 구했다. 과학계는 연구가 발전하면 매년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항생제 내성균 문제를 바이러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미국 국립유대의료원의 제리 닉 박사 연구진은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된 환자가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 치료를 받고 무사히 폐 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지난 13일 국제 학술지 ‘셀’에 발표했다.

 

달착륙선처럼 생긴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는 세균에 침입해 자신을 복제한 다음 밖으로 나오면서 세균을 터뜨려 죽인다. 이번에 환자의 몸에 있는 항생제 내성균을 이 바이러스로 감염시켜 없앤 것이다.

 

◇바이러스 덕분에 폐 이식 수술 가능

 

기존 항생제가 듣지 않는 내성균은 매년 에이즈나 말라리아 사망자보다도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2019년 전 세계에서 120만명이 직접 항생제 내성균에 목숨을 잃었으며, 간접 원인까지 합치면 항생제 내성균 희생자는 500만 명까지 이른다고 알려졌다.

 

미국에 사는 올해 26세 남성인 제롯 존슨은 과거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폐 기능을 대부분 상실했다. 폐 이식만이 살 길이었지만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된 상태여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존슨의 주치의인 닉 박사는 피츠버그대의 그레이엄 햇펄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햇펄 교수는 지난 2019년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17세 영국 여성이 폐 이식을 받고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되자 박테리오파지로 치료해 목숨을 구했다.

 

다발성 경화증 환자는 4년 넘게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됐다(왼쪽). 이 내성균에 맞는 파지 바이러스 두 종을 골라 1년간 주입했다(가운데). 그 결과 환자 몸에서 내성균이 사라져 무사히 폐 이식 수술을 받았다(오른쪽)./Cell

 

햇펄 교수는 지난 40년 동안 파지 바이러스 2만여 종을 수집해 연구했다. 피츠버그대 연구진은 그 중 두 가지 파지 바이러스가 존슨의 몸에 있는 내성균을 죽이는 것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변형시켜 치료효율을 더 높였다.

 

존슨은 4년 넘게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됐지만, 2020년 9월부터 파지 치료와 항생제를 1년 반 가까이 병용한 끝에 감염을 완전히 치료했다. 덕분에 무사히 폐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존슨은 파지 치료와 수술 후 고등학교를 마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파지에 대해 일부 항체가 생겼지만 항체가 파지를 죽이는 것보다 파지 바이러스가 내성균을 죽이는 속도가 더 빨라 문제가 없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관절염 환자의 피부 감염도 치료

 

하버드 의대 산하 브리검여성병원의 제시카 리틀 박사와 피츠버그대의 햇펄 교수 연구진은 지난 3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56세 남성 관절염 환자의 피부에 감염된 치명적인 내성균을 파지 바이러스로 치료했다”고 밝혔다.

 

관절염은 면역세포가 정상세포까지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다. 이런 환자에게는 과도한 면역반응을 막기 위해 면역억제제를 쓰지만 이로 인해 병원균에 쉽게 감염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항생제 내성균이 침입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피츠버그대의 햇펄 교수는 썩은 가지에서 이 환자의 내성균을 죽이는 파지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수주간 파지 치료 끝에 피부의 상처가 사라졌으며 2개월 후 조직 검사에서 내성균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이전 파지 치료에는 여러 가지 바이러스가 동시에 쓰였지만, 이번에는 단 한종의 파지 바이러스로 치료효과를 냈다는 점에서 더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국 피츠버그대의 그레이엄 햇펄 교수가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에 감염된 병원균을 살펴보고 있다./미 피츠버그대

 

파지 치료의 성과가 잇따라 나오자 내성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하지만 피츠버그대의 햇펄 교수는 “많은 환자들이 파지 치료에 실패했다”며 “앞으로 연구해야 할 게 많다”고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했다.

 

또 파지 바이러스가 내성균 치료에 효과가 있어도 모든 병원균 감염을 치료하거나 항생제를 완전히 대체할 수도 없다. 이점에서 내성균을 치료할 새로운 항생제 개발도 계속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과학자들은 수익성이 없다고 제약사들이 항생제 신약 개발을 등한시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선일보 (chosun.com)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입력 2022.05.16 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