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은행, 산수유, 뱀, 쇠똥구리, 바다달팽이, 무당거미. 이들은 의학적으로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신약의 원료가 된다는 점이다. 최근 이 같은 천연 생물을 활용한 ‘천연물 신약’ 개발이 의약계의 핫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천연물에서 추출한 약리 활성 물질을 이용하면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식에 비해 개발기간과 개발비를 줄일 수 있는데다 약효는 뛰어나고 부작용은 적은 고부가가치 신약 개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세계 각국은 제약 분야의 패권 장악을 위해 다양한 동식물을 연구, 천연물 신약 후보물질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신종 인플루엔자 A(H1N1)가 세계인을 공포로 몰아넣었을 때 일약 스타덤에 오른 약이 있다. 바로 항바이러스제 타미 플루다.
타미 플루는 당시 H1N1 치료의 유일한 대안으로 집중적 조명을 받으며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품귀 현상이 나타났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덕분에 타미 플루를 개발한 스위스의 제약사로서도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았다. 작년 한 해 동안의 타미플루 매출이 무려 30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현재 타미 플루가 어떤 약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사람 역시 그리 많지 않다.
약효, 경제성, 안전성 3박자 겸비
타미 플루는 일반적인 화학 합성 신약이 아니다. 목련과 상록수에 속하는 팔각 나무의 열매인 팔각회향(八角茴香)에 함유된 시킴산(shikimic acid)이라는 성분으로 합성한 천연물 신약이다.
팔각회향은 중국과 베트남의 토착식물로서 이뇨 작용, 식욕 증진 등의 효과가 있어 이전에도 약재로 쓰여 왔으며 중국식 돼지고기 요리나 베트남 쌀국수에 쓰이는 식재료이기도 하다.
이러한 팔각회향이 어떻게 항바이러스 제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제약사들은 3월에서 5월 사이에 수확한 팔각회향을 정제한 뒤 그 종자를 특정 대장균을 이용해 발효시킨다. 그리고 여기서 시킴산을 추출한다. 대략 30㎏의 팔각회향에서 1㎏의 시킴산이 생산된다. 이후 약 6~8개월간 10여 단계의 공정을 거쳐야만 바이러스 증식 효소의 작용을 막는 신약으로 거듭난다.
사실시킴산은 팔각회향뿐만 아니라 소나무, 전나무, 가문비나무 등 여타 고등식물에도 다량 들어있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타미 플루가 아닌 시킴산을 함유한 여타 약초나 식품으로는 타미 플루와 같은 항바이러스 효과를 볼 수 없다.
오히려 경련, 구토 등 부작용의 우려만 있을 뿐이다. 시킴산을 추출한 후 거치는 10 여 단계의 공정에 비밀이 숨어 있는 셈이다. 타미 플루와 같은 천연물 신약은 한 가지 성분으로만 구성돼 있기도 하고 여러 성분을 혼합한 진액형태도 있다. 그 성분은 크게 과학적으로 효능을 입증 받은 생약제제와 동의보감 등 전통요법에 의존한 한방제제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그 비율이 4대 1정도다.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천연물 신약이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2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대체보완의학연구부가 설립되면서부터다.
이후 합성 신약보다 개발기간이 짧고 개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이점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관련연구가 확산되고 있다. 조용백 환인제약 중앙연구소장은 “합성 신약은 신약 개발까지 적어도 2,300억 원 이상의 연구개발비와 11년 이상의 개발기간이 소요되는 반면 천연물 신약은 7년간 최대 100억 원으로 개발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천연물 신약은 또 유효성과 안전성에서도 우위를 점한다. 조소장은 “천연물 신약의 원료는 이미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생약으로부터 주로 얻는다”며 “임상적으로 충분히 검증이 된 만큼 예측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거나 효과가 기대를 밑돌 개연성이 합성신약에 비해 월등히 낮다”고 밝혔다.
생활 속에 파고 든 천연물신약
이 같은 메리트에 주목한 선진국들은 미래 성장동력의 일환으로 천연물 신약 연구에 속속 뛰어들었다. 미국의 경우 지난 2000년 식품의약국(FDA)을 통해 천연물신약 개발 규정을 별도로 제정, 과학적 방법에 의해 효능을 증명하기만 해도 천연물 신약으로의 등록을 허용하고 3~5년간 독점권을 부여하는 등 정부차원에서 전폭적 지원을 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미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생활 깊숙이 파고 든 천연물신약이 꽤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제품이 다국적 제약사 BMS의 주 사용 항암제 ‘탁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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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국들은 미래 성장동력의 일환으로 천연물 신약 연구에 속속 뛰어들었다. | 유방암, 난소암, 위암, 식도암, 폐암 등에 탁월한 치료효과를 인정받아 최초의 블록버스 터급 항암제로 명성이 자자한 탁솔의 원료는 미국 태평양 연안에서 자생하는 주목나무의 껍질이다.
여기서 얻은 추출물이 암세포 증식과 성장을 억제하는 약리 작용을 한다. 신통방통한 이 성분은 지난 1958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 국립암센터(NCI)가 3만 5,000여 종에 이르는 식물의 항암성분을 조사하면서 발견된 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탁솔은 지난 1992년 출시된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매년 15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국내에 첫 출시돼 거둬들인 수익도 100억 원을 넘었다. 차세대 항암제로 손꼽히는 악타비스의 ‘도세탁셀’ 역시 유럽산 주목나무 잎의 추출물을 주성분으로 삼고 있다.
지난 2000년 미국임상종양학회 학술 회의에서 밝혀진 바로는 도세탁셀은 폐암 환자의 생존율을 10년 이상 연장 시켜준다. 이는 기존 치료제와 비교해 5배 가량 향상된 효과다.
또한 아일랜드 제약사 엘란의 진통제 ‘프리알트’는 바다달팽이의 일종인 청자고둥의 독을 원료로 만들어졌다. 고통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을 선택적으로 차단하는 새로운 유형의 치료제로 진통효과가 모르핀의 1,000배 이상이다.
물론 중독성은 없으면서 말이다. 때문에 프리알트는 첫 시판 후 6개월 만에 자그마치 6,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일본 제약회사 산쿄의과 콜레스테롤 혈증 치료제 ‘메바스타틴’은 페니실리움 시트리눔이라는 다소 난해한 이름의 곰팡이가 원료다.
이 곰팡이가 지닌 ML-236B라는 물질이 콜레스테롤의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를 억제, 지방 단백질의 농도를 낮춰준다. 이외에 미국 일라이 릴리의 당뇨병 치료제 ‘바이에타’도 최근 떠오르고 있는 천연물 신약이다.
이 약의 약리물질 제공자는 힐러 몬스터라는 미국 도마뱀으로 이 도마뱀의 타액 성분인 엑센 딘-4를 합성해 개발됐다. 힐러 몬스터의 타액에는 췌장 기능을 되살리는 단백질이 들어있는데 혈당이 높아졌을 때만 인슐린 분비를 촉진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