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합DNA기술 개발 40주년을 맞아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52
1973년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11월호에는(지금은 매주 나오지만 당시는 월간이었다.) 생명공학의 이정표가 될 역사적인 논문이 한 편 실렸다. 미국 스탠퍼드대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 교수팀과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허버트 보이어(Herbert Boyer) 교수팀이 함께 연구한 결과로 논문의 제목은 ‘생물학적으로 기능하는 박테리아 플라스미드 제조’다.
생명과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낯선 용어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 감을 잡기 어려울 텐데, 대중매체에서 흔히 쓰는 말을 빌면 재조합DNA기술을 처음 구현한 실험이다. ‘PNAS’ 9월 24일자에는 재조합DNA기술 논문 출간 40주년을 맞아 코언 교수(여전히 스탠퍼드대에 적을 두고 있다)의 회고글이 실렸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재현해본다.
▲ 1973년 11월 학술지 ‘PNAS’에 실린 DNA클로닝 실험을 도식화했다. 1. 제한효소 EcoRI에 잘리는 자리가 있는 플라스미드에 제한효소를 처리하면 선형이 된다. 2. 여기에 양끝이 EcoRI 제한효소 서열인 항생제(카나마이신)저항유전자를 넣고 DNA연결효소를 처리해 이어붙인다. 3. 항생제저항유전자가 들어간 플라스미드를 대장균에 넣는다. 4. 클로닝이 성공해 도입된 유전자가 발현하면 대장균은 항생제 배지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스탠리 코언 교수와 캘리포니아대 허버트 보이어 교수는 DNA클로닝을 발명하고도 여전히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강석기
두 과학자의 우연한 만남
20세기 전반 동안 사실 생명과학은 큰 진전이 없었다. 당시 주류 생물학은 린네의 분류법에 따라 동물학, 식물학, 미생물학 이런 식의 패러다임에 따라 각자 연구를 진행했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의 DNA이중나선발견은 생명체에 공통으로 작용하는 원리, 즉 분자 차원에서의 연구로의 패러다임 전환의 상징이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러나 여기저기에서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다.
1968년 스탠퍼드대에 자리를 잡은 코언 교수는 병원균이 항생제 저항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규명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1940년대 페니실린을 필두로 항생제가 개발돼 의료혁명을 불러일으켰지만, 불과 십 수 년이 지난 뒤 항생제 저항균이 발견되기 시작하자 의학자와 생물학자는 당황했다. 수년에 걸친 연구 결과 이들 병원균들은 플라스미드(plasmid)라는, 박테리아 게놈과 별도로 존재하는 작은 원형의 DNA에 항생제 저항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박테리아들은 서로 빨대 같은 대롱으로 연결한 뒤 플라스미드를 주고받아 항생제 저항성을 획득한다. 1972년 코언 교수팀은 인위적으로 항생제 저항 유전자가 있는 플라스미드를 박테리아에 집어넣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보이어 교수는 1966년 캘리포니아대에 부임하기 전 예일대에서 박사후 과정을 할 때 제한효소를 연구했다. 제한효소(restriction endonuclease)란 박테리아가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를 파괴해 확산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효소다. 제한효소는 바이러스 DNA의 특정 염기서열을 인식해 자르는 걸로 추정됐다. 1970년 미국 존스홉킨스대의 해밀턴 스미스는 최초로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지라는 박테리아에서 HindII(‘힌디투’라고 읽음)라고 명명한 제한효소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보이어 교수팀은 대장균에서 제한효소를 찾는 연구를 진행해 1972년 마침내 EcoRI(‘이코알원’이라고 읽음)으로 이름지은, 유명한 제한효소를 발견한다. EcoRI은 DNA이중나선에서 ‘GAATTC’ 서열을 인식해 자르는데, 흥미롭게도 G와 A 사이를 자르기 때문에 두 가닥에서 잘리는 위치가 서로 다르게 된다. 그 결과 잘린 말단에 염기 4개 길이의 단일 가닥(3′-TTAA-5′)이 달려있다. 이렇게 잘린 부분은 상보적인 서열의 단일 가닥을 만나면 수소결합으로 다시 달라붙기 쉽다.
보이어 교수는 하와이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이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객석에서 듣던 코언 교수는 자신의 연구와 보이어 교수의 연구를 엮으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하와이 해변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식당에 들어가 냅킨에 구체적인 실험방법을 디자인했다. 즉 제한효소 EcoRI으로 플라스미드를 자른 뒤 여기에 항생제 저항 유전자를 넣어 다시 이어붙여(당시 이런 작용를 하는 DNA연결효소가 막 발견된 상태였다.) 대장균에 넣어줘 항생제 내성을 갖게 한다는 구상이었다.
1973년 초에 시작된 실험은 생각대로 술술 진행됐고 이해 오월 재현실험까지 마쳤다. 이들은 유월 논문을 투고했고 지적된 몇몇 추가실험을 한 뒤 논문이 받아들여져 11월 실린 것이다. 이처럼 특정 DNA 조각을 플라스미드에 실어 원하는 생명체에서 발현시키는 방법을 ‘DNA클로닝(cloning)’이라고 하는데, 포괄적으로는 ‘재조합DNA기술(recombinant DNA technology)’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유전공학 의약품, 인슐린
한편 논문이 통과되는 과정 중에 코언 교수팀은 포도상구균 플라스미드의 유전자를 포함한 대장균 플라스미드를 만들어 대장균에 집어넣었고, 그 유전자가 발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 종의 유전자가 다른 종에서도 문제없이 작동함을 보여주는 첫 사례였다. 이어서 코언 교수팀과 보이어 교수팀은 아프리카개구리의 리보솜RNA 유전자 조각을 플라스미드에 실어 대장균에서 발현시키는데도 성공했다. 양서류의 유전자가 박테리아에서도 작동한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는 곧 사람의 유전자도 박테리아에서 작동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재조합DNA기술이 산업적으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 1982년 제품화된 인간 인슐린 휴물린은 유전공학기술로 만든 최초의 의약품이다. ⓒ일라이릴리
당뇨병이 인슐린이라는 호르몬의 분비 또는 인식의 장애가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 1920년대부터 인슐린은 당뇨병 치료제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살한 소와 돼지에서 수거한 췌장에서 추출해야했기 때문에 수급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제약회사들은 인슐린을 합성하려고 시도했지만, 인슐린은 아미노산 51개로 이뤄진 복잡한 생체분자였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5년 보이어 교수는 밥 스완슨이라는 젊은 벤처 투자자와 손을 잡고 ‘제넨텍(Genentech)’이라는 생명공학벤처를 만들었다. 그리고 DNA 조각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연구를 하고 있던 시티오브호프병원의 아서 리그스 박사를 끌어들였다. 리그스 박사팀은 엄청난 노동으로 인슐린 유전자를 합성했고, 보이어 교수팀은 이를 클로닝해 대장균에서 발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때가 1978년 8월 21일이었는데, 불과 4일 뒤인 8월 25일 미국의 제약회사 일라이릴리(Eli Lilly)의 코르넬리우스 페팅어 부회장이 제넨텍을 전격 방문해 라이선스를 체결했다. 제품화에 성공할 경우 제넨텍이 6%, 시티오브호프병원이 2%의 로열티를 받는 조건이었다.
일라이릴리는 재조합DNA기술로 만든 인간 인슐린(제품명은 ‘휴물린(Humulin)’으로 인간(human)과 인슐린을 합친 조어다)에 대한 임상시험에 들어갔고, 1982년 10월 마침내 미국식품의약품안전처(FDA)의 승인을 얻었다. 오늘날 전 세계 당뇨병 환자 수억 명의 구원이 되고 있는 인슐린은 최초의 유전공학 약물이다. 유전공학이나 DNA조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생명과학을 혁신시켰지만 노벨상은 못 받아
1980년 제넨텍은 나스닥에 상장됐고 보이어 교수와 스완슨은 각각 6600만 달러(환산하면 약 700억 원이나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훨씬 큰 돈이다)의 갑부가 됐다. 유전공학의 선구자로 1981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던 보이어 교수는 1991년 55세의 나이에 일찌감치 은퇴해 전 세계 낚시 명소를 돌아다니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반면 DNA클로닝의 상업화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코언 교수는 아직까지도 대학에 남아있고 이번에 40주년 회고 논문을 쓴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생명공학뿐 아니라 생명과학 전반에 엄청난 기여를 한 DNA클로닝을 개발한 두 사람이 아직까지 노벨상을 타지 못했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보이어의 상업화 행보와 함께 이들이 재조합DNA기술을 특허로 등록한 게 한 원인으로 보인다.
즉 1974년 어느 날 스탠퍼드대의 기술라이선싱 책임자인 닐스 레이머가 코언에게 전화를 해 기술을 특허로 등록하자는 제안을 한다. 코언은 공공 연구비를 받아 진행한 기초연구의 결과를 특허로 내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레이머의 설득에 넘어가, 상업적인 이용에 한해 스탠퍼드대와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가 특허료를 받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1997년 특허가 만료될 때까지 461건의 특허사용 계약이 있었다.
코언이 논문 말미에 이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은 걸 보면, 생명과학의 양자도약을 가능케 한 엄청난 발명을 해놓고도 노벨상을 타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 무척 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 kangsukki@gmail.com 2013.11.08 ⓒ ScienceTimes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72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