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살고 싶으면 흙을 보호하라
흙이 줄면 식량이 줄고 문명 쇠퇴
남태평양 이스터 섬의 거대한 석상은 흔히 미스터리로 불린다. 이런 유적을 만들 만큼 번성했던 문명의 흔적을 지금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대 지구우주과학부 교수인 저자는 미스터리를 풀 실마리를 흙에서 찾는다.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은 토양이 비옥하고 산림이 우거진 이스터 섬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 비탈에도 경작을 하면서 토양이 침식됐다. 퇴적물의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200∼1650년에 원시 겉흙의 대부분이 깎여나갔다. 경작지가 줄고 식량 생산이 감소하면서 문명은 급속히 쇠퇴했다. 흙의 소멸은 문명의 붕괴로 이어졌다.
한 줌 속에 미생물 수십억 마리가 사는 흙은 생명의 터전이다. 하지만 흙은 재생시간이 더딘 한정된 자원이다. 농사에 중요한 흙의 두께는 1m도 안된다. 이는 지구 반지름(6380km)의 1000만분의 1을 조금 넘을 뿐이다. 기반암이 풍화되고 유기물이 활발하게 움직여 겉흙 10cm가 만들어지려면 수백 년, 수천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반면 오늘날 농지에서 흙 2.5cm가 사라지는 데는 평균 40년이 걸리지 않는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흙의 역사였다. 성경의 ‘아담’은 히브리어로 땅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온 말이다. ‘이브’는 생활을 뜻하는 ‘하바’에서 왔다. 흙과 삶의 결합이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의 뼈대다. 수메르, 이집트, 황허 등 고대 문명은 비옥한 토양에서 꽃폈다.
하지만 관개, 화학비료, 그리고 노동의 집중 투입에 기댄 현대 농법은 흙을 착취했다. 토착 언어로 ‘초록 섬’을 뜻하는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는 토질 저하로 한 나라가 어떻게 쇠락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프랑스 식민지시대 아이티 고원에서는 커피와 인디고(천연염색 원료) 플랜테이션으로 대규모 침식이 일어났다. 1804년 세계 최초로 노예에서 해방된 시민들이 공화국을 세운 뒤에도 토양침식은 계속됐다. 인구가 늘고 토지를 잘게 쪼개서 배분하면서 묵히는 땅이 거의 없었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더 가파른 산허리까지 경작을 했고 1986년엔 전 국토의 3분의 1이나 되는 흙이 사라진 불모의 땅이 됐다. 궁지에 몰린 소작농들은 도시의 빈민촌을 이뤘고, 이는 2004년 정부를 무너뜨린 폭동의 원인이 됐다.
반면 아이티에서 80km 떨어진 쿠바는 흙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 성공한 사례다. 농기계와 비료, 살충제에 의존하던 쿠바 농업은 1980년대 말 옛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수입하던 식량이 끊기면서 중대한 변화를 맞는다. 당시까지 쓰이던 투입물의 반입이 봉쇄되자 쿠바의 농업은 지식집약적 농업으로 바뀌었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버리고 응용생물학과 농업생태학을 토대로 무경운농법(땅을 갈지 않고 작물 잔재를 표면에 남기는 방법)과 생물학적 해충 방지법을 널리 보급했다. 새로운 농법을 도입한 지 10년도 안돼 쿠바의 식량 생산량은 이전으로 돌아갔다.
저자는 “오늘날 문명의 영속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농업 수확량을 유지해야 한다”며 새로운 농업의 철학적 기초를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흙을 산업적 체계가 아닌 생물학적, 생태학적 체계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흙, 물, 식물, 그리고 미생물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뿌리를 두고 지역의 토지 조건과 환경을 고려하는 농업생태학을 저자는 대안으로 제시한다.
[동아일보] ◇ 흙/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이수영 옮김/384쪽·1만9000원·삼천리
민병선 동아일보 기자 bluedot@donga.com 2010년 11월 27일
http://news.dongascience.com/PHP/NewsView.php?kisaid=20101127100000000021&classcode=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