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miR) 이야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터넷에서 유명한 한 익명 서평꾼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자체가 그 답이라는 모호함으로 우리를 조롱하며 그 모호함을 거창하게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가리려 한다. 그리고 그에게 '인간다움'의 대답은 윤리학과 미학의 차원에서 구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 중인 학자들의 답을 들어볼 수도 있다. 최근 출간된 책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1에서 15인의 석학들은 제 각각의 대답들을 내어 놓는다. 저자들이 내 놓은 답은 아래와 같다.
△ 제1장. 모방 - 수전 블랙모어 △ 제2장. 기억, 시간, 언어 - 마이클 코벌리스, 토머스 서든도프 △ 제3장.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 - 로빈 던바 △ 제4장. 원시인류와 언어 - 마우리치오 젠틸루치, 마이클 코벌리스 △ 제5장. 반(半)은 유인원 반은 천사 - 리처드 해리스 △ 제6장. 비유물론자의 관점에서 본 물질적 사실들 - 데이비드 흄 △ 제7장. 우리의 조상과 기후 - 스티븐 오펜하이머 △ 제8장. 호기심과 탐구 - 찰스 파스테르나크 △ 제9장. 인간의 진화와 인간의 조건 - 이언 태터솔 △ 제10장. 인간 본성의 진화와 심층적 사회성 - 앤드루 휘튼 △ 제11장. 인과적 믿음 - 루이스 월퍼트 △ 제12장. 요리의 수수께끼 - 리처드 랭엄
어쩌면 다 맞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또한 인간만이 가진 특징을 찾으려는 시도는 진화라는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신이 만든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상상하던 중세 서양에서는 '존재의 대사슬'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인간의 지위가 자연 속에 자리매김했었다. 그 곳에서 인간은 침팬지보다는 조금 높은 곳에, 천사보다는 조금 낮은 곳에 앉아 있는 어정쩡한 존재다.
다윈의 등장 이후 고정된 '존재의 대사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도, 선형적 진화에 대한 환상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허버트 스펜서는 적자생존을 사회에 적용시켜 사회진화론을 탄생시켰고, 결국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했던 '서열화'라는 서구 사상의 전형적인 패턴 속에 함몰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분류하고 그 분류를 서열화하는 능력도 어쩌면 인간 고유의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서열화의 능력은 인간다움인 것이고, 스펜서는 가장 인간적인 사상을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창안한 셈이 될지도 모르겠다. 본성과 양육의 해묵은 논쟁은 '인간다움'의 기준을 두고도 또다시 반복될지 모르겠다.
인간다움은 본성 속에 모두 각인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모든 능력은 빈서판일 뿐인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해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문화를 사이에 둔 지난 세기의 지긋지긋한 반목은 대한민국에서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화해쯤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분법', 다시 한번 굴드가 지적한 서구의 오래된 지적 전통의 악습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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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유전학적 대답을 찾는 작업이, 본성과 양육 혹은 두 문화 사이의 해묵은 갈등을 반복할 정도로 낡지 않았다는 것이다. RNA는 이 지긋한 갈등의 싸움판에서도 조율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 본성과 양육, 그리고 두 문화
데이터가 제한하지 않는 이론과 가설의 영역에선 언제나 소설과 같은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나래가 펼쳐지게 마련이다. 물론 이런 무한한 상상력이 반드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소설이라는 명칭에 부정적 의미가 따라붙게 된 것은 필자의 잘못이 아니다.
프란시스 제이콥이 잘 지적했듯이 과학자들에게도 '밤의 과학'을 즐기는 시간이 있다. 물론 밤의 향락에 중독되는 것이 건강에 해롭듯이 '밤'에만 과학을 하겠다고 우기는 건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닌 듯 싶다. 치열하고 어쩌면 보수적으로 데이터의 제한을 받아야 하는 '낮의 과학'과 자유로운 '밤의 과학' 사이에서 과학자들은 과학을 진화시켜 나간다. 밤에만 하는 과학이 과학이 아니듯, 낮에만 하는 과학도 좋은 과학은 아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과학계에는 연구와 논문에만 몰두하는 '낮의 과학자들'보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통학과 통섭과 융합을 향해 나아가는 '밤의 과학자들'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일률적인 기준으로 개인을 판단하는 이 땅에서 진짜 과학이 꽃피기 위해서는 '괴짜'들이 당당하게 한 켠에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충분한 양의 데이터가 확보되어 있지 않을 때, 정상적인 과학자들은 파격적인 이론을 내놓지 않는다. 기존의 이론이라는 권위에 도전하는 꿈이야 모든 과학자가 꾸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권위에의 도전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장의 과학자들이 그다지 많은 대답을 내어 놓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과학자들의 학문적 보수성은 어쩌면 과학의 미덕이다. 물론 모든 과학자들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과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시스템은 보수적이지만, 과학자들 사이엔 언제나 변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시 한번 질문을 되짚어보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쉽게 풀면 '인간과 다른 종의 차이는 무엇인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은 '차이'의 정도, 즉 인간은 다른 종과 얼마나 다른지가 되겠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다른 종'을 무엇으로 규정짓느냐는 것인데, 오랫동안 연구되어 온 진화학의 경험을 되살려 비인간 호미니드(non-human hominid), 즉 인간과 가장 가까운 과거에 진화의 가지에서 갈라져 나온 근연종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합당한 자세일 것으로 보인다.
인간과 근연종의 차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잘 알려져 있는 이족 보행 능력, 털이 없는 피부, 상대적으로 큰 두뇌, 언어 습득 능력, 의식의 존재, 상대적으로 늦은 발생 속도, 모방 능력, 수명의 연장, 복잡한 문화를 만드는 능력 외에도 수영을 배울 수 있는 능력, 마라톤을 할 수 있는 지구력 등도 거론되곤 한다. 이 외에도 더 많은 리스트들이 있다2.
하지만 이러한 차이들은 대부분 상대적인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속속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근연종에 대한 표현형 연구가 진행될 수록 그 차이는 점점 더 좁혀질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한 세기 전만해도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 믿었던 언어 습득 능력의 잔재가 유인원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과, 심지어 조류에게도 방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연과학만이 아니 인문사회과학에서도(실은 인문사회과학은 철저히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한다) 상대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구가 풍부한 까닭에, 우리에겐 유인원들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따라서 인간과의 차이를 말할만한 데이터가 부족한 셈이다.
RNA는 '인간다움'이라는 주제를 조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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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재 UCSF 박사후연구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몸, 그리고 몸을 둘러싼 환경 모두에 존재할 것이다. 특히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완성 이후 사라져 버린 유전체적 우월성은 인간과 침팬지를 다르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해도 미묘한 차이일 것이라고 예측하게 만든다.
따라서 인간다움을 논하는 데 있어 생물학자의 시선으로 유전체를 파고 든다 해서 '유전자 환원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조금 보류해주었으면 한다. 염색체의 숫자도, 유전체의 양도, 단백질을 근거로 한 유전자의 숫자도 결국 인간을 침팬지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만한 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유전자의 숫자나 유전체의 크기와 같은 단순한 비교로는 드러나지 않는 이 작은 차이가 생물학자들로 하여금 창발성이나 네트워크와 같은 이론 혹은 유전자 네트워크의 조절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던 것처럼, 어쩌면 작은 차이에서 비롯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유성(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문화와 사회의 역할에 숨쉴 틈을 마련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인간과 침팬지보다 더욱 유전적으로 먼 근연종들 사이에서도 잘 발견되지 않는 인간의 독특함을 유전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로 인문사회과학의 과업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RNA라는 물질의 재발견은 생명과학자들의 사고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환원주의에 목을 매는 생물학자도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방법론적 환원주의를 경시하는 생물학자도 없다. 적어도 생물학이라는 학문적 영역에서 본성과 양육의 이분법은 해결되었다.
남은 것은 여전히 생물학자들을 유전자 환원주의의 화신이라고 여기는 인문사회과학자들의 태도일 뿐이다. RNA라는 물질이 중심도그마를 부수며 유전자 발현 네크워크의 조절만으로도 엄청난 후성유전학적 차이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듯이, 다시 RNA는 그 방식 그대로 본성 대 양육의 구도 속에 오래도록 침잠되어 있었던 '인간다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줄지 모르겠다.
어쩌면 RNA라는 초라한 물질은 서열화와 이분법의 벽을 깨고 본성과 양육의 틀을 부수며,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깊은 골을 메우는 역할에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데이비드 흄 | 로빈 던바 | 루이스 월퍼트 | 리처드 랭엄 | 리처드 해리스 | 마우리치오 젠틸루치 | 마이클 코벌리스 | 수잔 블랙모어 | 스티븐 오펜하이머 | 앤드루 화이튼 | 월터 보드머 | 이언 태터솔 | 토머스 서든도프 (지은이) | 찰스 파스테르나크 (엮은이) | 채은진 (옮긴이) | 말글빛냄 | 2008-06-25
2. Varki, A. & Altheide, T. K. Comparing the human and chimpanzee genomes: searching for needles in a haystack. Genome Res. 15, 1746–1758 (20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