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와 연구행정가의 효과적인 소통 방법] <7회> 프레젠테이션

늦은 가을, 어김없이 찬바람이 위세를 부린다, 구름은 물러나 하늘은 높아지고, 나뭇잎은 울긋불긋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우수수 떨어져 앙상한 나목이 드러난다. 갑작스러운 차가운 기운은 사람 몸에도 생채기를 낸다. 여기저기서 감기에 걸려 고생한 사람들 이야기가 들려온다. 절로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시기다. 대입 수능시험, 졸업시험, 졸업작품.... 무언가 준비한 것이 있다면 드러내 보이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연구자는 연구 성과에 대한 압박을 느끼는 시즌이다. 다음 해 신규 연구 과제의 선정 및 기존 연구 과제의 연간 실적과 향후 계획을 점검하기 위해(요즘에는 계속과제의 연차 발표평가는 거의 없어졌다),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일백여 개가 넘는 연구 과제에 대한 발표 평가가 이루어진다. 연구행정가는 일찌감치 세부 연구 분야별로 일고여덟 명씩, 수십 명의 평가위원을 섭외한다. 일 년에 한 번 성과를 보여주고, 계획을 평가받는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연구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평가 결과에 따라 향후 연구과제 선정 여부가, 또는 연구비 규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인 만큼, 연구행정가도 실수가 없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업무에 임한다. 하루 종일 연구자들의 발표를 듣고 있다 보면, 그리고 그 일을 여러 해 반복하다 보면, 연구행정가에게도 난해한 과학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쌓여간다. 지식이 쌓인 만큼, 연구행정가는 연구자와의 간극을 좁히고 그들에게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
연구자들의 다양하고 개성 있는 발표 모습을 엿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발표하는 중에 연구자 A는 목이 메고 호흡이 불규칙해져, 자꾸 말이 중간에 끊긴다. 순간 정적이 흐르길 반복한다. 어떤 공포가 그를 휩싸고 있는 걸까. 무엇이 그의 생각을, 그의 말을 방해하는 걸까. 보다 못한 평가 위원장이 그에게 물을 좀 마셔보라고 권한다. 물을 마신 그는 조금 진정이 되고, 발표는 곧 마무리된다. 연구자 B는 시종일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발표한다. 자신감 있는 모습은 좋지만, 자칫 현학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겸손의 양념이 들어가면 더 맛있는 발표가 되지 않을까 나 혼자 아쉬워한다. 연구자 C는 발표 자료의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발표를 듣는 연구행정가가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나중에 질의응답 시간에 들어보니, 역시나 본인의 박사과정 연구원이 모든 실험을 하고 발표 자료를 준비했음을 실토한다. 그는 그러고도 무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자신은 누구이며, 자신이 내린 판단은 무엇이며, 자신이 스스로 한 것은 정녕 하나도 없단 말인가.
오직 지금 알고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이지, 옛날 한때 알았던 것, 혹은 미래에 알게 될 것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1)
‘Life is presentation.’ 무슨 문제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나름의 확고한 인생철학을 설파하며 사는, 어느 미드(미국 드라마) 주인공의 명대사 중 하나다. 인생 자체가 발표의 연속이다. 사람은 골방에 들어가 혼자 숨어 살 순 없고, 매일 어느 곳에 있든지, 누군가 앞에서 자신을, 또는 자기 노력의 산물을 드러내며 살기 마련이다. 소설가는 글로, 성악가는 노래로, 미술가는 그림으로, 요리사는 요리로, 패션모델은 자신의 몸에 걸친 옷으로, 연구자는 연구 성과로, 연구행정가는 그 성과에 나름의 기여를 함으로써. 그러니 저마다의 인생 프레젠테이션을 위해서는 항상 끊임없이 계획하고 노력함이 필요하다. 마치 자신이 현재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노라,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일의 가치는 그 일의 계획에서도 느껴진다. 2)
발표(Presentation)는 현재(Present)화하기(-ation)에 다름 아니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에 녹여내야 한다. 과거 한때 잘 나갔으나 현재 그렇지 못한 것은 위험하다. 과거 지식을 업데이트하지 못하고, 자꾸 옛이야기를 끄집어내, 그 시절에나 통용되던 경구를 반복 인용하는 사람이 있다. 옛 시절의 영광에 도취한 채 안주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들이 뽐내는 지식은 자칫 오늘날의 실정에는 맞지 않아, 적절치 못한 경우가 많다. 현재를 충실히 사는 사람의 지식은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업그레이드된다. 현재와 단절된, 언뜻 보기에 화려하기만 한 미래의 계획도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어찌 현재가 신뢰할 만한 모습이 아닌데, 그 미래를 믿어주겠는가. 과거에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를 이루었고, 이를 토대로 현재 탁월한 성과 창출을 이어가고 있으며, 향후 미래에는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전도유망한 계획을 보여줄 때, 감동이 있고, 발표자는 선물(Present)을 받을 수도 있다.
연구행정을 위한 신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도입하기 위해 마련한 공청회. 이번엔 많은 연구자들 앞에서, 연구행정가인 내가 발표할 차례다. 발표 자료를, 나름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으나, 발표 시간이 임박하자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예전 책에서 읽은 조언에 따라,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떨면서 발표해 보자’라고 되뇐다. 피식 웃음이 나와 긴장이 조금 누그러진다.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구자 D가 웃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건다. “발표 잘하시네요. 그동안 연구자들 발표 들으면서 많이 웃었겠어요. 좀 부끄럽네요.” 소박한 발표를 한 연구행정가에게 기꺼이 칭찬을 건넨 연구자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발표장에서는 단연 평가위원이 ‘갑’이다. 예전 같으면, 평가위원은 발표를 들으면서, 저마다 가진 평가지에, 볼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였을 텐데, 이제는 각자의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며, 평가점수와 평가의견을 타이핑한다. 발표 후 이어지는 질의응답 시간. 본인 말고도 예닐곱 명의 평가위원이 더 있다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표가 끝나자마자 독점적으로 장황한 질문을 쏟아내는 평가위원이 있다. 말이 장황하면 핵심을 놓치기 일쑤다. 핵심을 놓치면 맥락이 흐려지고 자잘한 오해를 낳는다. 기분이 상한 발표자는 자제심을 잃는다. 동료 연구자들끼리의 감정싸움으로 번져, 발표장이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재판정으로 변하기도 한다. 평가위원 섭외를 담당한 연구행정가도 좌불안석이 된다. 말은 제때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말의 힘을 알아보는 제일 좋은 방법은 얼마나 정확하고 분명하게 멈출 줄 아는 지를 보는 것이다. 3)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고 명료한 발표를 하는 연구자, 차가운 지적이나 비난보다는,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따듯한 격려와 촌철살인의 코멘트를 하는, 평가위원을 안다. 찬바람이 불면, 그들이 그립다.
※ 참고
1) <에세>1권,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심민화 외 1인 옮김, 2022, ㈜민음사, p257
2) ibid. p163
3) ibid.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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