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원숭이가 읽어주는 오늘의 과학기술] 바나나의 미래를 지키는 형질전환
오늘날 가장 많이 생산되고 거래되는 과일은 바나나입니다. 2022년에만 1억 8천만 톤에 달하는 바나나가 생산되었다고 하는데요, 바나나 한 개의 무게가 200그램 정도이니 거의 10억 개의 바나나가 소비된 셈입니다. 우리가 흔히 먹는 바나나는 씨앗을 맺지 못하는 3배체 돌연변이라 새끼싹(흡아)을 분지 하여 심는 방식으로 재배합니다. 야생종 바나나의 과육에는 단단한 씨앗이 빽빽하게 박혀 있어서 먹기 불편하기 때문이에요. 파푸아뉴기니에서는 10,000년 전에 이미 바나나를 식용했던 흔적이 보이는데, 씨앗이 없는 3배체 돌연변이를 야생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재배한 것이 기원이라고 합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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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천 종류에 이르는 바나나 품종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에서는 플랜테인(plantain)이라는 종류를 즐겨 먹는데, 단맛이 거의 없고 녹말 위주로 구성되어 고구마나 감자 먹듯 요리해 먹는다고 해요. 하지만 오늘날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바나나는 대부분 캐번디시(Cavendish) 품종입니다. 19세기 초 영국에 모리셔스산 바나나를 도입했던 데본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를 기념하여 붙은 이름이지요. 캐번디시 가문의 저택인 채스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의 온실에서 재배되던 캐번디시 바나나는 여러 경로로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고, 20세기 초반에는 상업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합니다.
캐번디시가 처음부터 주력 바나나 품종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20세기 초반에는 그로 미셸(Gros Michel) 바나나가 훨씬 거래가 많이 되었는데요, 생장이 느리지만 껍질이 두껍고 다발이 빽빽해서 운송이 편한 품종이라 국제 무역에 최적화된 품종입니다. 바나나 향의 주성분인 아이소아밀 아세테이트(isoamyl acetate)의 함량도 높은 편이라 캐번디시에 비해 맛과 향이 풍부했다고도 해요. 중남미의 광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그로 미셸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경로가 활발하게 가동되었는데, 온두라스를 비롯하여 국가경제가 바나나 플랜테이션에 많이 의존하던 국가들은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남미를 강타한 파나마병(Panama disease) 탓에 그로 미셸이 절멸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파나마병은 푸사리움 마름병(Fusarium wilt)이라고도 불리는데, 푸사리움 속의 곰팡이에 의해 발병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식용 바나나는 3배체라 유성생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농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로 미셸 바나나들이 모두 유전적으로는 쌍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문에 이들이 저항력을 갖추지 못한 질병이 등장하자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것이지요. 푸사리움 곰팡이는 흙에 묻어 전파될 수 있기 때문에 신발이나 옷, 장비에 묻어서 인근 농장으로 손쉽게 옮겨 다녔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마름병은 파나마 TR1 (Tropical Race 1)이라고 불리고, 현대에 발생한 식물 전염병 중 가장 큰 규모였다고 평가받습니다. 바나나 산업계는 푸사리움 곰팡이가 존재하는 한 그로 미셸 재배로는 큰 이익을 남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TR1에 면역을 갖는 다른 품종을 찾아내는데, 바로 캐번디시였습니다. 1960년대를 거치는 동안 그로 미셸 플랜테이션은 거의 완전하게 캐번디시로 대체되어 오늘날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바나나의 대부분은 캐번디시입니다. 그로 미셸은 지금도 동남아의 소규모 농장에서 재배되어 국내에서도 가끔 유통되곤 하지만 국제 무역에서 중요하게 취급할 만큼 대량 생산되지는 않지요.
하지만 캐번디시 역시 파나마병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TR1에는 면역이지만, 이후에 발견된 TR4가 캐번디시마저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게 밝혀졌거든요. 중남미 플랜테이션을 완전히 절멸시켰던 TR1에 비하면 전파 속도가 느리지만 TR4 역시 전 세계의 바나나 농장을 천천히 감염시키는 중입니다. 과거에 비해 식물 전염병에 대한 이해가 많이 발전하고 방역 기술도 개선되어서 전면적인 바나나 시장 붕괴로는 이어지지 않겠지만, TR4에 내성을 가지면서도 상업성이 확보된 품종에 대한 수요는 높습니다.
푸사리움 곰팡이에 감염된 캐번디시를 치료하는 방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유전적으로 TR4에 내성을 갖는 품종을 육종 하거나 개발하는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 공과대학교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TR4 내성 캐번디시 품종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2024년 2월경 호주 연방정부에서 상업적 재배의 승인을 드디어 받아냈다고 해요. [2] 퀸즐랜드 주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바나나 생산량 중 95%를 담당하는데 재배량의 97%가 캐번디시 품종입니다. 학계와 연방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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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4 내성에 대한 유전학적 연구는 이전에도 꾸준히 진행 중이었습니다. 예쁜꼬마선충(C. elegans)의 세포자살 조절 유전자 중 하나인 Ced9이 TR1 저항성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 [3]가 있었고, 이외에도 바나나의 이배체(diploid) 야생종에서 발견되는 RGA2 (resistance gene analog 2) 유전자가 TR4 저항성과 관련 있다는 보고 [4]가 있었습니다. 퀸즐랜드 공과대학교의 연구진들은 형질전환(transgene)을 통하여 Ced9과 RGA2 유전자를 도입한 캐번디시 바나나인 QCAV-4 품종이 TR4에 높은 저항성을 갖는다는 결과를 2017년에 발표한 바가 있지요. [5]
이번 결정은 2017년에 발표된 형질전환 캐번디시의 상업적 재배 허가입니다. QCAV-4는 세계 최초의 유전자 조작 바나나이면서, 동시에 호주에서 재배가 허가된 최초의 GM 작물이라고 해요. 다만 QCAV-4가 지금 바로 캐번디시를 전면적으로 대체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호주는 현재 TR4 유행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어서 근시일 내에 캐번디시 품종이 절멸할 확률은 낮기 때문이에요. QCAV-4는 상황이 급변할 경우에 대비해 캐번디시 대신 투입하도록 준비한 예비 수단에 가깝습니다.
퀸즐랜드 공과대학교의 연구진들은 QCAV-4의 관리 작업을 이어가는 한편, 바나나의 안정적인 생산을 위협하는 다른 전염병에도 대응할 수 있는 연구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파나마병 다음 가는 위협으로는 블랙 시가토카(Black Sigatoka)라는 또 다른 진균 감염이 있는데요, 파나마병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바나나 생산량을 최대 50%까지 감소시키는 질병입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재배지의 기온이 상승하며 곰팡이가 더 쉽게 번식하여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고도 해요.
근본적으로 바나나가 질병에 취약한 것은 유전적 다양성 부족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상업용 작물이 으레 그렇기는 하지만 바나나의 재배나 유통 구조는 유독 캐번디시에 집중되어 있거든요. 형질전환을 통해 특정 질병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재배 품종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점점 힘을 얻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1] S. C. Nelson et al., Species profiles for Pacific island agroforestry (2006).
[2] QLD Country Hour/Lydia Burton, Genetically modified banana resistant to Panama disease given approval for Australian consumption (2024).
[3] J. Y. Paul et al., Plant Biotechnol. J. 9, 1141 (2011).
[4] S. Peraza-Echeverria et al., Mol. Breed. 23, 431 (2009).
[5] J. Dale et al., Nat. Commun. 8, 149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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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여원 (필명)) 등록일2024.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