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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

산포로 2011. 3. 8. 11:03

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

[강기자의 과학카페]<25>

 

에콰도르 내분비·대사·생식연구소 하이메 쿠에바라-아귀레 박사는 유전성 왜소증( 라론 증후군)인 사람들을 오랫동안 연구해 암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위는 연구를 시작할 무렵인 1988년 모습이고 아래는 2009년 모습이다. 하이메 쿠에바라-아귀레 제공

 

최근 TV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가수 김태원 씨가 위암수술을 받는 장면이 방송되면서 화제가 됐다. 다행히 위내시경 검사에서 초기암이 발견돼 두 차례 간단한 수술로 완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나이가 들면서 몸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느끼게 되면 건강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특히 ‘나도 암에 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을까. 실제로 열 명 가운데 두세 명은 암으로 죽으니까.

그동안 “획기적인 항암제로 이어질 발견”이라는 뉴스가 수도 없이 나왔지만 여전히 암의 위세는 꺾일 줄을 모른다. 물론 요즘은 의술이 발달해 암도 일종의 ‘만성병’이 되고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아무튼 기발한 건강검진법이 있어 “당신은 죽을 때까지 확실히 암에는 안 걸리다”는 진단이 내려진다면 당사자는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 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잃는 것과 얻는 것

과학저널 ‘사이언스’ 2월 18일자는 자매지인 온라인저널 ‘사이언스 병진의학’ 2월 16일자에 실린 논문을 소개했다. 남미 에콰도르의 하이메 쿠에바라-아귀레라는 의사의 20년에 걸친 연구 스토리다.

당뇨병 전문의인 쿠에바라-아귀레 박사는 1988년 에콰도르의 희귀한 유전성 왜소증 집단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라론 증후군(Laron syndrome)’이라는 불리는 이들의 증상은 성장호르몬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용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결과다. 라론 증후군인 남자 가운데 가장 키가 큰 기록은 140cm이고 여자는 124cm라고 한다.

그런데 1994년 어느 날 그는 이들에게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6년 동안 관찰한 100여명 가운데 암과 당뇨병에 걸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그 뒤 그는 최근까지 라론 증후군인 152명과 키가 정상인 이들의 친척 1600여명을 조사했다.

그 결과 라론 증후군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이 암에 걸렸고(난소암으로 화학치료 뒤 완치됐다) 당뇨병은 아무도 걸리지 않았다. 반면 친척 가운데 사망한 사람의 17%는 암이, 5%는 당뇨병이 원인이었다. 한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키는 잃었지만 암과 당뇨병에 대한 ‘기적의 백신’을 얻은 셈이다. 그런데 성장호르몬 수용체가 고장난 것과 암이 걸리지 않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암이란 세포분열이 제멋대로 일어난 결과다. 세포분열에 밀접하게 관련된 생체물질이 바로 성장호르몬이다. 성장호르몬의 신호가 완벽한 통제 아래에서 전달되면 세포가 정상적으로 분열해 성장을 하거나 현 상태를 유지하지만 통제가 안 될 경우 암조직으로 자란다. 그런데 라론 증후군인 사람의 세포는 신호 자체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암에 걸릴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

당뇨병 역시 성장호르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라몬 증후군인 사람들은 혈중 인슐린 농도가 매우 낮고 인슐린 민감도는 높아 설사 비만이더라도 당뇨병에는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래 살지는 못한다고 한다.

작은 키 때문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고 간질 같은 신경질환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연구결과는 암치료제를 개발하는데 영감을 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람처럼 돌연변이의 결과가 아닌, 그 종 자체가 암에 안 걸리는 동물은 없을까.

●못생겨도 주목받는 벌거숭이두더지쥐

굴속에서 사는 설치류인 벌거숭이두더지쥐는 p16이라는 유전자가 세포의 무분별한 증식을 막아 암에 걸리지 않는다. 로체스터대 제공

 

동아프리카에 사는 설치류인 벌거숭이두더지쥐(naked mole rat)는 정말 이상한 동물이다. 땅속에 미로같이 굴을 파서 백여 마리가 모여 사는(개미처럼 여왕이 있다!) 이 동물은 이름 그대로 몸에 털이 없어 마치 꼬물거리는 쥐새끼가 그대로 커진 것 같아(눈이 퇴화돼 더 그렇다) 무척 징그럽게 보인다.

이 동물이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는 건 이런 외모보다도 더 기괴한 특징 때문이다. 먼저 이 녀석들은 수명이 최대 30년이나 된다. 비슷한 크기인 생쥐의 수명이 3년 남짓인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오래 사는 셈이다. 게다가 이들은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암에 걸리지 않는다.

암 얘기를 하기에 앞서 다른 특징에 대한 설명을 잠깐 하면 장수는 이들의 대사율이 굉장히 낮은 것(그 결과 활성산소로 인한 세포노화가 느리게 일어난다)과 관련이 있고 통증을 못 느끼는 건 통증신호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P물질(substance P)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지금까지 암에 걸린 벌거숭이두더지쥐가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이 오래 사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이 암에 걸리지 않는 비밀이 2009년 밝혀졌는데 바로 p16이라는 유전자 때문이다. 이 유전자는 세포가 서로 접촉하게 될 경우 더 이상 자라거나 분열하지 않게 명령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이런 메커니즘(이를 ‘접촉저지(contact inhibition)’라고 부른다)은 사람을 포함해 다세포 동물에서 나타나는데(그래야 세포가 제대로 배열돼 조직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일에는 p27이라는 유전자가 관여한다. 그런데 벌거숭이두더지쥐는 p27에 더불어 p16까지 이런 역할을 해 세포가 접촉저지에 훨씬 민감하다는 것. 따라서 접촉저지에 둔감한 세포덩어리인 암이 생기지 않는다.

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나 동물에 대한 이런 연구결과들은 암 치료에 희망을 갖게 한다. 다만 전문가들은 여기에 관여하는 메커니즘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현상들의 발견이 뒷받침 돼 뛰어난 항암제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