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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5화. 연구참여

산포로 2024. 4. 9. 14:26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5화. 연구참여

 

비록 강제적이었지만, 최전방 소총수가 아니었다면 결코 맛보지 못했을 다층적인 인생의 다채로움을 경험한 나는 예정대로 3학년 2학기로 복학했다. 때는 2001년. 새로운 밀레니엄은 미신적인 우려와는 달리 세상의 종말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은 본격적으로 세상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숙사 방마다 랜선이 깔려 있었고, 아이피 주소가 할당되어 있었다. 전화선을 뽑고 끼익 소리 내며 연결되는 인터넷 연결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군대를 다녀온 것뿐인데, 나는 그저 3년을 휴학했을 뿐인데, P 공대에는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격동의 세월을 겪으면서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나만 빼고 모든 게 앞서간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불안했다.

 

친구들은 스타 크래프트라는 온라인 게임을 한답시고 밤낮 가리지 않고 소란을 피웠고, 또 다른 친구들은 당시 유행하던 여러 웹에디터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글과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드디어 온라인 세상이 오프라인으로 침투하여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컴퓨터가 필요해진 나는 제대 후 복학 전 과외와 학원 강사를 하면서 벌어들였던 돈으로 컴퓨터 부품을 사들였고, 그것들을 직접 조립해서 나만의 PC를 구축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할당해 주었던 온라인 공간에 내 아이디 (내 아이디는 신입생 때부터 줄곧 mulder였는데, 유치하게 들릴지 몰라도 X-file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다. 그때 내 눈엔 왜 그리도 멀더가 멋져 보였는지 모른다)로 나만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글쓰기가 지금처럼 내 일상으로 잦아들기 시작했던 건.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나에게도 혁명과도 같은 변화가 찾아왔다. 일명 ‘복학생의 신화’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에게도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다. 학사 경고를 겨우겨우 면하던 나는 역사상 처음으로 학점 3.4를 넘기면서 우수상 명단에 들게 되었다. 휴학 전 최대 학점이 복학 후 최저 학점으로 자리매김하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그래봤자 B+) 나는 혼자 감동에 겨워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이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3년 동안 학업과 동떨어진 삶을, 어쩌면 정반대의 삶을 살다가 3년 간 학업을 성실하게 지속해 온 친구들을 상대하며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나 자신을 향한 의심이 컸기 때문이다. 우수상은 단지 하나의 상이 아니라 나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로 작용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한 과목을 수강하면서 4년 전 세포생물학을 들을 때 느꼈던 생명을 향한 경이를 다시 느낄 수 있었고, 연구라는 것을 조금 더 깊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 과목은 면역학이었다.

 

인생은 만남으로 좌우되지 않던가. 누군가와의 만남은 원한다고 해서 항상 이루어지지도 않고, 뜻하지 않은 시공간에서, 게다가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조차도 운명 같은 만남이 주어지기도 하며, 그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같은 논리로 복학 직후 내가 면역학을 수강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 삶은 없었을 거라고 나는 강하게 믿고 있다. 나에게 자신감만이 아닌 경이감까지 선사해 주었던 면역학은 결국 나를 연구자 아니 과학자라는 직업을 갖게 만드는 초석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민수와의 뜻밖의 재회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미 교주 형은 물론 절반 이상의 동기들이 포항을 떠난 상태였다. 96학번이었던 우리들 중 절반 이상은 2000년 2월에 졸업을 한 뒤 (물론 당시 나는 군대에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거나 다른 대학원으로 진학을 했기 때문이었다. 교주 형도 그 가운데 속했다. 사실 교주 형이 과학자의 길을 걷는다는 건 그 당시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미래의 향방을 섣불리 결정짓기 전에 군대를 선택했지만, 교주 형은 그러지 않았다. 졸업을 하자마자 병역특례 제도를 활용해 생물학과 거리가 먼 컴퓨터공학 쪽의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나중에 교주 형의 평생 직업이 된다.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출세한 경우로 마이크로소프트 코리아에 당당하게 입사하여 나중엔 간부 자리까지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교주 형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그러니까 내가 미국으로 박사후연구원을 떠나기 전 밥을 사준다며 끌고 나왔던 차가 BMW 700 시리즈였다. 그러나 생물학이 아닌 컴퓨터 공학 관련 직업이 자신의 평생 직업이 될 줄은 교주 형도 몰랐을 것이다. 인생 참 모를 일이다.

 

면역학을 재미있게 듣던 어느 날, 교수님이 출장 때문에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셨다. 대신 조교가 들어왔는데, 그 조교가 바로 민수였다. 순간 19동 205호에서 같이 먹고 놀던 기억이 스쳤고, 시험 당일 새벽에 초집중 모드로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던 민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랬던 녀석이 조교가 되어 교수님을 대신하여 당당하게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교단에 서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마침 그날은 진도를 나가지 않고 지난 시간 퀴즈 본 결과를 알려주고 질의응답을 받는 시간이었는데, 민수는 교수님보다 더 설명을 잘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거침이 없었고 원리와 개념을 다 알고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마저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 보여주고자 애쓰는 형태가 아니었다. 감추려야 도저히 감출 수 없어, 마치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어쩔 수 없이 안에서 삐져나오는 그 무엇이었다. 마치 조교가 아니라 이미 교수가 된 자의 이미지와 같았다. 20여 년이 지난 후 민수의 모습을 나는 그날 미리 앞당겨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다음 시간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표면적으로는 퀴즈 채점 결과 때문이었다. 나는 그 퀴즈에서 10점 만점에 12점을 받았는데, 교수님이 의도한 교과서 수준의 답을 넘어 그 답을 반영하고 있는 연구 논문을 참조하여 답을 작성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복학생답게 면역학을 배우면서 신기하고 재미있어 퀴즈 전 날 논문을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운 좋게 그게 퀴즈의 문제로 나왔던 것이다. 나를 칭찬해 주시면서 교수님은 본론을 꺼내셨다. 자기 랩에서 연구참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 학업과 관련해서 처음 들어보는 칭찬에 이은 제안이었고, 어차피 4학년 동안은 1년 내내 전공필수인 연구참여를 어디서든 해야만 했기에 나 역시 어느 랩에서 연구참여를 할까 망설이던 중이었다. 교수님의 제안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주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을 따라 랩으로 첫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 랩에서 나를 또 반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민수였다. 민수가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랩이 바로 그 랩이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또 있냐면서 나는 무언가 운명 같은 이끌림을 느꼈고, 그날 즉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앞으로 연구참여 1년, 석/박사 통합과정 6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장소가 정해지는 사건이었다.

 

4학년이 되고 본격적으로 나는 연구참여생이 되어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대학원생들과 함께 랩에서 시간을 보냈다. 예비 대학원생이 된 것이었다.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민수가 석사 과정 동안 수차례 시도했으나 실패로 마감했던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치밀한 민수는 스스로의 실패를 발판 삼아 문제해결을 위한 작전을 다 짜놓고 있었다. 다시 말해, 실행만 하면 성공할 수밖에 없는 계획. 즉, 필요한 건 좋은 머리가 아닌 좋은 손이었고 때마침 내가 그 순간 연구참여생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나는 결국 학부생 주제에 그 프로젝트를 일 년에 걸쳐 성공시키게 되고, 랩이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넉아웃 마우스를 만든 사람이 된다. 덕분에 나는 학부 졸업할 때 최우수 논문상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데, 솔직히 내가 한 건 그저 민수가 짜놓은 계획을 실행한 것밖엔 없었기 때문에 학과장으로부터 최우수상을 수여받을 때에도 속으로는 떳떳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상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그 자리엔 민수 이름이 적혀야 한다고 은연중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대학원을 진학하고 박사학위를 받기까지의 6년이란 세월은 어쩌면 그 상장에 적힌 내 이름 석 자에 대해 나 스스로 떳떳함을 구현하기 위한 기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은 지금도 나는 종종 다음과 같이 나에게 묻는다. 나는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에 떳떳한가. 스스로를 과학자라고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다.

 

본격적인 대학원생 시절로 들어가기에 앞서 연구참여 때 일어났던, 빼놓을 수 없고 또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할까 한다.

 

연구참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2002년 1월 즈음이었다. 월드컵을 5개월 앞둔 어느 날, 한 남자가 랩 테크니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왕경태였다. 맞다. 당신이 상상하는 그 왕경태. 영심이 친구. ㅋㅋ 물론 생긴 건 전혀 달랐다. 안경도 안 썼을뿐더러 고지식하거나 답답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아주 먼 이미지의 사람이었다. 오히려 부랑자 같은 이미지도 있었고, 노가다 현장에서 바로 튀어나온 사람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인생을 초탈한 사람 같기도 했다. 인사 겸 통집에 가서 술 한 잔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그의 나이는 민수와 나와 동갑이었다. 어인 일로 이 랩에 왔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씩 웃어 보일뿐 명료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수줍어했던 것일까, 혹시 어떤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는 건 아니었을까, 하며 몇 초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 나와 함께 연구참여를 시작했던 후배가 눈치 없이 대뜸 되묻는 것이었다. “아니, 그냥 웃지만 말고 말을 하셔야죠. 경태 형!” 지욱이는 까칠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녀석이었고, 이미 조금 취한 것 같았기에 지욱이가 어떤 인간인지 이미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왕경태에게는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나는 내심 궁금했다. 그런데 왕경태는 지욱이를 한 번씩 보더니 맘에 들었는지 입을 여는 것이었다. “음, 도망 나왔어.”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우리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괜스레 오징어 피데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지욱이가 자기 앞에 놓여 있던 닭다리를 하나 물어뜯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와, 형은 정말 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런데 왜 도망 나오셨어요? 교수님이 갈구셨나요?“ 머릿속에 떠 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말을 하나도 남김없이 대신 다 말해주는 지욱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곤 대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지욱이는 갑자기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웠다. 질문한 사람이 사라진 공간, 그 자리를 관망하던 우리들은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괜히 안주에 더 집착을 보이고 있었는데, 왕경태는 멀리 사라져 가는 지욱이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두지 뭐.“ 그 순간 나는 입에 오징어 다리 하나를 물고 안경 너머로 살짝 엿보았다. 왕경태의 눈을 말이다. 왕경태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그날 이후였던 것 같다. 왕경태와 지욱이는 둘도 없는 친구라도 된 듯 늘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조합이라는 평이 난무했다. 도저히 만날 수 없고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캐릭터가 저렇게 단짝이 되어 다니는 것을 보고 우린 모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걸 보고 운명 같은 만남이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당시 왕경태가 맡은 실험은 랩의 유일한 박사후연구원이었던 김진주 박사님의 실험을 도와 웨스턴블랏을 공장처럼 돌리는 일이었는데, 그 웨스턴블랏은 김진주 박사님이 만들고 계신 여러 라인의 세포에서 시간 별로, 그리고 약물의 양에 따라 보이는 반응을 어떤 단백질의 양으로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다. 세포 라인이 세 개만 되어도, 다섯 개의 다른 시간과 두 가지 약물의 세 개의 다른 양에 따른 샘플 수는 수십 개가 훌쩍 넘어서고, 그에 따라 웨스턴블랏에 사용될 아크릴아마이드/에스디에스 젤 수는 적어도 아홉 장이 넘어가게 된다. 보통 손이 좋고 빠르다고 하는 사람도 한 번에 네 장 정도를 다루는데, 왕경태는 한 번에 6장씩 두 번, 총 12장을 하루에 달렸다. 지나가던 교수님도, 그 실험을 부탁했던 김진주 박사님도 모두 왕경태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왕경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요. 늘 하던 것인데요 뭘.“하며 실실 웃어넘기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기숙사에도 잘 들어가지 않고 랩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라꾸라꾸를 이용해 쪽잠을 잤고, 보란 듯이 하루 만에 열두 장의 웨스턴블랏 젤에 대한 현상된 필름을 선보여 모두의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그때 보았던 그 가지런하고 깔끔했던 밴드들의 향연은 그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움이었다. 실험에 일가견이 있던 나조차 감히 넘보지 못할 수준이었기에 사람들은 왕경태를 평할 때 외계인이라는 둥 철인이라는 둥, 특별한 사람으로 대했다. 그리고 왕경태의 옆에는 늘 지욱이가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항상 지각에 지각을 일삼던 지욱이를 어떻게 저렇게 단박에 바꿔놓을 수 있는지 우린 왕경태의 손의 정확함과 빠름에 한 번 놀라고, 그의 사람 다루는 기술에 대해 두 번 놀랐다.

묘한 우려를 손에서 놓지 않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지만, 왕경태는 어쨌거나 표면적으로는 랩에 아주 필요한 인재로 단기간에 자리 잡게 되었다. 교수님도, 김진주 박사님도 모두 말 별로 없는 왕경태를 아꼈고, 우리들에게는 늘 모범답안처럼 제시하곤 하셨다. 그런데 이런 게 다 몇 달 후 있을 비극으로 끝맺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2002년 6월이었다. 월드컵이 한창이던 시절, 우리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지랄발광을 했고, 그에 따른 결과인진 몰라도 한국은 결국 4강까지 오르게 된다. 원하는 게 이루어진다는 말이 그 짧았던 초여름날 가시적으로 성취되는 걸 보면서 우린 얼마나 매일 신기해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랩에서는 토요일 오전에 랩미팅을 지속했는데, 그날은 포르투갈에 1 대 0으로 이긴 다음날이었다. 포르투갈 경기를 보고 신이 난 우리들은 통집을 향했고, ‘손에 손 잡고’를 들으며 (통집은 그 당시 자정이 조금 지나면 문을 닫았는데, 항상 ‘손에 손 잡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통집을 나와서 효자시장으로 2차를 갔고, 노래방까지 갔던 것 같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을 때가 아마 새벽 4시 반 정도였을 것이다. 내가 시간을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는 까닭은 정확히 4시 44분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적 있지 않은가. 연달아 같은 숫자가 디지털시계에 표시되는 순간, 인상에 강하게 남는 순간의 기억. 미신적인 생각으로 (하필 숫자가 4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4는 ‘죽을 사’자를 떠올리게 한다고 사람들은 싫어했다) 나는 꺼림칙하다는 생각을 하며 씻지도 않고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랩 미팅 시간은 아침 9시 반이었는데, 모두들 부스스한 모습으로 미팅 시간에 맞춰 자리에 앉았지만, 왕경태와 지욱이는 보이지 않았다. 자주 랩에서 잠까지 자던 왕경태였기에, 그의 근면성실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부분이었기에, 우린 어디가 아픈가 싶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5분 정도 더 기다려보자며 우린 다른 이야기를 했고, 나는 잠시 랩을 나가 왕경태와 지욱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통 세 번 정도 전화를 걸고 받지 않으면 나는 관두는 편인데, 그날따라 한 번 더 하고 싶어 각자에게 네 번씩 전화를 걸었다. 둘 다 받지 않았다. 불길했다. 새벽에 보았던 4:44가 뇌리를 스쳤고, 나는 얼른 다시 랩미팅에 들어가 왕경태와 지욱이가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 방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교수님께 말씀드렸다. 의외로 교수님은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고 나는 기숙사를 향해 뛰었다. 뛰기 전부터 이미 내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기숙사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고 대답이 없자 방문을 밀어젖혔는데 쉽게 열리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어젯밤 들어온 흔적도 없었다. 나는 다시 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왕경태의 휴대폰이 방 안에서 울리는 것이었다. 지욱이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랩으로 돌아와 미팅에 참석했다.

 

 

미팅이 끝나갈 무렵,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지욱이 번호였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받았는데, 지욱이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무적인 목소리로 경찰이라고 자신을 밝히면서 최신 번호로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한 것이라며, 혹시 직장 동료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경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욱이가 포항 앞바다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으니 가족에게 알려야 하는데, 신분 조사를 해야 하는데 지갑도 없고 백사장에 벗어놓은 옷가지와 휴대폰이 있길래, 이게 가장 빠른 길인 것 같아 전화했다고 했다. 순간 나는 4:44가 다시 떠올랐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말을 잠시 잇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스피커폰으로 바꾼 뒤 잘 못 들었으니 다시 한번 말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우린 모두 경찰의 사무적인 사망 선고 목소리를 함께 들었다.

 

 

모두 정신이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경찰은 한 마디를 덧붙였는데, 혹시,라고 하며 운을 떼었다. 이야기인즉슨 익사체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이었다. 휴대폰이 하나밖에 없어서 혹시 친구가 아닐까 해서 묻는 거라고 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 사체는 왕경태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왕경태의 휴대폰은 기숙사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말문을 잃고 경찰서를 향했다.

 

그날의 끔찍한 비극을 떠올리는 건 지금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금지된 영역 안으로, 그 어두운 기억의 방으로 다시 스스로 들어간다는 건 내 살을 갉아먹는 행위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억을 이 자리를 빌려 기록해두지 않고 영원히 망각의 바다에 빠뜨려놓는 것은 한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함께 했던 동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다. 왕경태와 지욱이의 그 운명과도 같았던 만남. 비록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이 그립다. 통집에서 지욱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씩 웃던 왕경태의 얼굴엔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인가가 감춰져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무엇인가를 놓쳤던 건 아닐까, 하고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기억되고 있는 우리의 월드컵 4강 신화를 뒤로하고 우린 한동안 먹먹한 기분으로 실험도 공부도 모두 손에 잘 잡히지 않은 상태로 그해 여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중 그 누구도 바닷가를 찾지 않았다. 나는 왕경태가 남기고 간 모든 실험을 긴급 투입된 민수와 함께 하나둘 처리해 나갔다. 나에게는 DNA 클로닝에 이은 웨스턴블랏을 손에 익힐 수 있는 의외의 기회로 작용했다. 비록 젤을 한 번에 네 장씩 사용하는 한계를 끝내 넘어서지 못했지만 말이다.

 

학부 동기로서의 첫 만남에 이어 3년 차이가 나는 랩 선후배 관계로서의 두 번째 만남을 시작한 민수와 나는 그 이후 각자 박사후연구원을 떠나기 이전까지 줄곧 함께 하게 된다. 다음 장부터는 예비 대학원생이 아닌 대학원생 시절을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민수뿐 아니라 시철이도 함께 하는 돼지 삼형제의 슬기로운 대학원 생활을 차차 소개해볼까 한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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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일2024.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