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3화. 통나무집

산포로 2024. 3. 27. 11:00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3화. 통나무집

 

 

P 대학을 얘기하면서, 그리고 P 대학 출신으로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장소 중 단연 일위를 차지하는 곳은 아마도 ‘통나무집’, 일명 ‘통집’일 것이다. 누군가는 78계단이나 지곡연못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도 통집에 1위를 매기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통집은 P 대학의 상징이자 자랑 혹은 명소 혹은 핫플 (핫플레이스의 줄임말)이었다.

 

이름으로 쉽게 알 수 있듯 통집은 통나무로 지어진 집이다. 물론 평범한 집이 아니라 집 앞에 ‘술’이라는 단어를 붙여야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처음 들으면 놀랄 수도 있고, 거짓말이라고 믿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엄연히 통집은 교내에 위치한, 학교가 운영하는 공식적인 술집이었다. 학교가 개교한 이후 몇 년 뒤에 세워진 이 통집은 1989년 당시 대학 주위에 논과 밭과 주거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혈기 왕성한 대학생, 대학원생들에게는 사막과도 같았던 환경과 학생들의 편의와 복지를 고려하여 만든 곳이라 한다. 처음엔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들었다. 그랬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숭고한 상아탑이라고만 여겼던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 세속적인 이미지의 끝판왕인 술을 파는 장소를 허락한다는 게 한국인의 고정관념에는 충분히 반하고도 남은 결정이었으리라.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그 위험하게만 보였던 결정은 신의 한 수가 되었고, 세워진 지 30년이 지났건만 큰 사고 하나 발생하지 않고 학업과 연구에 지장도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학생들과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은 물론 편한 마음과 값싼 가격으로 저녁식사를 포함하여 출출한 배를 채울 수 있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통집은 단순한 술을 마시는 곳을 넘어서 만남의 장이자 위로와 쉼의 자리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1996년에 입학한 나 역시 선배들이 자랑스러워하며 데려간 통집을 처음 영접하고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먹는 데에 진심이었던 민수와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길 좋아했는데, 학생식당 저녁 메뉴가 형편없을 때마다 당시 차가 없던 우리에겐 통집은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우리뿐 아니라 P 대학생들도 여느 사람처럼 세끼를 먹었는데, 차이라면 아침/점심/저녁이 아니라 점심/저녁/야식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통집에서의 식사는 우리에겐 세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식사였다. 우리가 자주 먹었던 메뉴는 훈제치킨과 소시지야채볶음, 반건조오징어, 감자튀김 등이었는데, 우린 술보다는 안주를 먹으러 통집을 찾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안주만 먹자니 목도 마르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맥주 500cc를 한 잔씩 들이켜기도 했다. 술만 마시면 속이 쓰려 안주를 곁들이는 부류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반복된 습관은 또 다른 자아를 형성한다고 했던가. 민수와 나는 점점 둥글둥글해졌고 기어이 돼지 형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덩치도 동기 중 가장 컸는데… 아니, 아니다. 덩치 얘기하니까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불현듯 떠오른다. 진우, 최진우였다. 진우는 대학원으로 진학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진학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거대 서사의 본론에 다다르기 전, 그러니까 학부 때의 추억을 씹는 지금, 진우가 남겼던, 27년이 지나도 나뿐 아니라 그 자리를 함께 했던 동기들 뇌리에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각인된, 명언을 소개하는 게 최적의 기회 같아 보인다.

 

 

너무 강렬한 순간이라 그날 무슨 일로 그 자리에 모였는지, 왜 그 멤버들이 옹기종기 한 테이블에 앉아 야식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진우의 명언만이 그 시간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민수와 나는 당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중에 돼지 삼 형제가 될 시철이도 있었고, 당연히 교주 형도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린 각자 교내 야식장에서 형편없게 끓인 라면 하나씩을 앞에 두고 있었고, 한 점씩 곁들여 먹으려고 역시나 형편없게 구워진 군만두도 테이블 중앙에 놓아두고 있었다.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이나 짬뽕 하나씩 시키고 가운데 탕수육을 놓고 나눠 먹는 상황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그날 그 장소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벌어졌는데, 이건 너무나 당연하고, 굳이 지침이나 규칙이 없어도 암묵적으로 우리 모두가 수긍하고 있는 상식을 깨트리는 일이었다.

 

진우를 뺀 우리들은 모두 라면을 국물과 함께 한두 젓가락 먹고 만두를 하나 먹는 정도의 우아하고 교양 있는 패턴으로 야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우는 달랐다. 첫 젓가락부터 군만두를 짚더니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계속 만두만 공략하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교주 형이 입을 열었다. 속으로 나는 역시 요럴 땐 삼수생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야지, 역시 교주 형이야, 하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교주 형 왈, “진우야, 배 고팠니?” 진우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네, 교주 형. 배가 많이 고팠어요.“ 교주 형이 응답했다. ”응, 그랬구나.“ 그랬구나? 아니, 그랬구나라니! 교주 형은 그 이후 아무 말 없이 라면 국물에 담긴 계란을 숟가락으로 건져 먹으려 하고 있었다. 실망한 나는 내가 나서서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그때 곧 돼지 삼 형제가 될 시철이가 먼저 나서는 것이었다. 참고로 시철이는 재수생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불리할 땐 시철이 형이 되곤 하는 녀석이었다. ”진우야, 너 만두만 먹으면 어떡해?“ 군더더기 없이 뼈가 충분히 담긴 말이었다. 나는 만족했고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진우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런데 진우는 시답잖은 질문을 한다는 듯 살짝 아래로 쳐진 안경을 손으로 추켜올리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응, 라면은 내 거잖아.“

 

 

허걱. 라면은 내 거잖아, 라니! 그렇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팩트를 너무나도 조리 있고 간결하게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진우는 그래도 나름대로 눈치를 봤는지 만두를 달랑 2개만 남겨놓고 라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먹기 시작했다. 진우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을 테다. 라면은 각자 하나씩 있었기 때문에 같은 돈을 내고 가장 많이 먹기 위해서는 공동으로 먹는 군만두를 먼저 공략해야 한다는 것. 만두는 공동의 것이지만 라면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 것이라는 것. 이 엄연한 진리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졌고, 우린 그 라면 사건 이후 야식장은 물론 중국집에 한 번씩 갈 때에도 진우는 데리고 가지 않았다. 미안하다 진우야.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참 덩치 얘기하다가 또 곁길로 샜다. 그런데 어떤가. 곁길이 의외로 즐겁지 않았는가. 다시 덩치 얘기로 돌아가자면, 민수와 나는 진우 다음으로 덩치가 컸고, 한 박자 느린 삼시세끼 때문에 점점 덩치가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과대를 통해 미팅 의뢰가 들어왔다. 맞다. 그 미팅. 젊은 남녀들이 끼리끼리 모여 처음 만나 서로 소개하고 먹고 마시고 놀다가 간혹 진지한 관계까지 성장하곤 하던 그 시절의 단체 데이트. 저번엔 경북대 약대였는데, 이번엔 부산대 약대였다. 민수와 나는 말없이 서로의 배를 훔쳐봤다. 그리고 다짐하게 되었다. 살을 빼보자.

 

 

다이어트를 해야 했다. 두 주 뒤에 부산대 앞에서 있을 미팅을 위해 우린 그날 즉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한 끼를 과감하게 먹지 않는 것. 그런데 이미 한 박자가 늦춰진 세끼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우린 무슨 끼를 거를까 고민에 빠졌다. 점심을 굶자니 아침을 이미 먹지 않아 일과시간에 힘이 안 날 것 같았고, 저녁을 굶자니 일과시간 이후에 처리해야 할 산더미 같은 숙제들을 할 에너지가 부족할 것 같았으며, 야식을 굶자니 배고파서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린 이 사상 최대의 난제 앞에서 열띤 토론을 이어갔는데, 그때 그림자처럼 19도 205호 1층 내 침대에 자리를 잡고 있던 교주 형이 묘안을 내놓았다. “얘들아, 한 끼를 굶는 건 미련한 방법 아니겠니? 차라리 아침을 먹고 야식을 먹지 말자. 나도 조인할게.“

 

점심/저녁/야식이 아닌 아침/점심/저녁의 체제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정상인으로의 회귀를 뜻했다. 그제야 우린 우리가 얼마나 정상인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는지 깨닫게 되었고,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그날따라 교주 형의 말은 정말 교주의 말처럼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첫날은 교주 형이 아침 8시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우리 방에 말끔히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상태로 민수와 나를 깨우러 와서 아침식사를 먹으러 갔지만, 둘째 날부터는 내가 일어나 민수를 깨우고 교주 형을 깨우러 가야 했다. ”아까 일어났는데 다시 잠들었어. 미안해 영웅아.“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한 교주 형은 그다음 날에도 내가 깨우러 갔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너네끼리 먹으러 가지 않겠니?“ 결국 그 계획은 무산되었고, 우리는 정상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며,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은 미팅 때문이었기에 미팅을 나가지 않으면 되지 않냐는 의견에 우리 모두를 동조했고, 우리는 매일밤 멕시칸 아저씨를 맞이했다. 삼 일간 멕시칸 아저씨를 못 만났더니 사일만에 보는 아저씨의 얼굴이 어찌나 반갑던지!

 

그리고 그날 이후로 우리는 다이어트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멕시칸 피자’ 때문이었다. 매일 치킨을 먹는 것이 지겨워 어느 날 교주 형이 자기가 살 테니 새로 생긴 피자 집에서 피자를 시켜 먹자고 했다. 이름이 멕시칸 피자였다. 우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먹어볼까, 하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주문 전화는 언제나 그랬듯 내 몫이었다. ”네, 멕시칸 피자입니더.“ 이럴 수가! 나는 전광석화처럼 빠른 속도로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멕시칸 치킨 아주머니였던 것이다! 민수와 나와 교주 형은 쾌재를 불렀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사를 읊었다. ”안녕하세요. 여긴 P 공대 기숙사 19동 205호인데요. 치킨, 아니 피, 피자, 음… 슈퍼슈프림 피자 라지 한 판이요.“ 그리고 바로 들려오는, 우리 모두가 매일 듣던 노랫소리와도 같은 그 대답. ”네, 알겠심니더.“ 우린 전화를 끊고 함께 껑충 뛰며 금메달이라도 딴 듯 즐거워했다. 아마 모두 머릿속으로는 같은 걸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피자 한 판 반의 기적을 말이다.

 

 

삼심 분 정도가 지나고 부웅 하는 스쿠터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재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멕시칸입니더.” 아, 그날 그 방문을 열 때 나는 얼마나 긴장하고 긴장했는지 잊히지가 않는다. 과연 정말 피자 한 판이 한 판 반으로 불려져 있을 것인가!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쿵쿵 대던 그 순간, 멕시칸 아저씨는 여느 때처럼 수줍어하는 얼굴로 씩 웃고 있었고, 손에는 그냥 피자 한 마리, 아니 한 판이 들려 있었다. 급실망을 하려는 찰나, 치킨 반 마리가 조그만 박스에 담겨 다른 비닐봉지로 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아, 그러면 그렇지! 아저씨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길게 말씀하시는 건 처음 듣는 일이었다. ”피자는 반 개만 더 구울 수가 없어서예.“ 그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 우리는 무릎을 치며 아, 그렇구나 했다. 엄연히 서로 다른 피자를 치킨의 논리로 이해하려고 했던 우리의 무지몽매함을 반성했다. 그리고 우린 그날 이후로 피자와 치킨을 번갈아가며 시켜 먹기 시작했다. 우리의 덩치는 점점 비대해져 갔다. 참, 교주 형은 여전히 가끔 아침식사를 실천하는 기행을 보였는데, 밤에는 여전히 19동 205호 내 침대를 차지하고 야식을 함께 했다. 세끼가 아닌 네 끼나 먹는 기행을 보여줬던 교주 형. 형, 형도 역시 정상인은 아닌 것 같아요!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오류 신고하기]

 

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일2024.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