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21화. 에필로그
지금도 눈을 감고 대학원생 시절을 떠올리면, 그 고유한 풋풋함과 천진난만함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면서도 곧 입가엔 미소가 지어진다. 대학원 생활은 그런 것 같다. 좌충우돌, 우왕좌왕하며 과학 하는 법을 처음으로 배우고, 그러면서 가끔 실험에 성공을 하거나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훌륭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기쁠 때도 있지만, 많은 시간은 잦은 실수와 빈번한 실패와 늪 같은 좌절의 순간들로 가득 채워지는 시간들. 단순하게 열정이나 노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6년이란 기간은 분명 대학원생들에게는 인고의 시간이자,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연속이며, 일등을 위해 앞서 달리려는 노력보다는 어떻게든 견디고 버텨서 살아남는 나날들이지 않을까.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 출간되는 자신의 첫 저자 논문을 쓸 때면 알게 된다. 이게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던 것인가, 하는 한숨과 함께 지난날들을 톺아보게 된다. 그리고 조용히 깨닫게 된다. 6년이란 시간이 쓰여 얻어낸 열매는 논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렇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의 대학원 생활의 진짜 열매는 박사 졸업 논문이나 임팩트 높은 저널에 게재되는 논문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다. 박사 학위 소유자, 소위 챔피언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학원생일 때는 박사 학위 취득이 결승선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박사 학위를 받고 나면 금방 깨닫게 된다.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게 될 때 몸으로 알게 된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말했다시피 대학원생 시절은 과학자의 삶이라는 전체 인생 여정에서 도입부에 해당될 뿐이다. 화려한 출발, 강력한 추진력이 나쁠 건 없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 과학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는 없다. 그 길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 길은 비포장 도로다. 그 길은 마른땅이 아닌 진창에 가깝다. 그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과학자의 길을 가려거든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과연 이 길을 걸어낼 용기가 있는가?”

여기서 능력이 아니라 용기라고 한 까닭은 이미 과학자의 길을 고려할 정도라면 능력은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학부 때나 대학원생 때 최고 학점을 받은 사람이 가장 훌륭한 과학자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능력은 도움이 될 뿐 그 길을 걸어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용기라고 표현한 그 마음, 그 자세가 필요하다. 중간 정도의 능력만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그릿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그 외로운 길을 충분히 걸어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길이 외롭고 고달픈 것만은 아니다. 고행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과장된 느낌이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한 많은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면 그 어떤 독자도 고행이라는 단어에 동의하진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 길이 고행 길이 아닌 이유는 그 길 위엔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에는 랩 가족들이 있고, 과학자의 선배님이신 교수님과 같은 리더나 보스가 있으며, 멀게는 날 응원하는 가족과 세계 각지에 흩어져 비슷한 연구를 진행하는 동료 과학자들이 있다. 즉,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넘어질 때면 옆에서 위로해 주고 응원해 주는 동지들, 때론 다정한 말들로, 때론 따끔한 충고로 우린 점점 더 강해져 갈 수 있다. 다시 털어내고 일어서서 뚜벅뚜벅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이런 다양하고 다채로운 과정을 모두 소화해 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이 바로 대학원 생활인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박사 과정 중에 있는 대학원생들을 나는 응원하고 그들에게 힘내라고 말하고 싶다. 더 좋은 아이디어, 더 좋은 손, 더 훌륭한 결과를 내라고 말하진 않겠다. 다만, 좀 더 견뎌보라고, 그게 끝이 아니라고, 비록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성과 논리보다는 가슴에 호소하고 싶다.

‘나는 누구? 지금 어디에?’라는 목소리가 자주 들릴지도 모른다. 나의 정체성에 의문이 들고 나의 좌표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질문이 든다는 것 자체가 그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오히려 그런 질문이 들 때마다 ‘나는 지금 과학을 즐기면서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길 원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때,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 길을 걷을 때 필요한 건 ‘내가 현재 이 길 위에서 즐기고 있는가?’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넘어져도 괜찮다. 깨어져도 괜찮다. 그게 대학원생의 특권 중 하나라는 점을 잊지 말길 기원한다.

화려해 보이는 의사들의 생활과는 달리 과학자들, 그중에서도 대학원생들의 생활은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통해 그들이 빛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은 챔피언, 곧 빛과 같은 존재로 훈련받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열심히 해줬으면 하지만 나는 하기 싫은 대학원 생활, 그들이 결국 되어가는 모습은 훈련된 과학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존재들이 꺼져가는 기초과학의 빛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박사 학위를 어렵사리 취득했다고 해서 대우해주지도 않는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훈련되고 있는 그들의 존재에 빛을 비춰주고 싶었다. 부디 이 소설이 현재 대학원생들에게 가 닿아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면 좋겠다. 또한, 주위에 대학원생들이 있는 분들에게 가 닿게 되면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격려해 주면 좋겠다.
이 책에 소개된 등장인물 중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들이 절반 정도 된다. 물론 허구를 가미하여 각색한 캐릭터들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모두 유럽과 미국에서 박사후연구원을 마치고 지금은 모두 중견급 과학자가 되어 여전히 과학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다. 부디 이 소설이 널리 읽혀서 나중에는 그들의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팩션(팩트 40 + 픽션 60)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민수다. 민수는 2024년 현재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구본경 단장이다. 이 팩션이 책으로 출간되면 민수의 유럽에서의 본격적인 과학자의 여정이 쓰일 예정이다. 부디 출간으로 연결되길 기원하고 매주 수요일 21주에 걸쳐 이 연재를 즐겨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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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2024.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