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20화. 챔피언
민수와 한스 클레버스의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던 2008년은 우리 랩 가족들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해였다. 직접 만들었던 넉아웃 마우스가 뱃속에서 죽어버려 고배의 쓴잔을 마시고 자주 통집에서 영웅아, 나 그냥 관두고 약사나 할까, 하면서 푸념을 늘어놓던 시철이는 꿋꿋하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배아를 가지고 여러 실험을 진행하여 EMBO라는 저널에 논문을 실으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수준이는 민수가 만든 조건부 넉아웃 마우스를 이용한 뇌 연구에서 줄기세포와 연관된 중요한 신호전달체계를 밝혀냈고 Neuron이라는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며 박사학위를 받아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논문들은 단순한 논문 한 편이 아니었다. 5-6년 동안 20대 중후반의 인생을 올인하여 얻어낸 값진 가시적 열매였다.
한편, 캐나다 학회에서 충격과 깨달음을 동시에 받았던 나는 2008년 3월에 논문을 마무리하여 Blood 저널에 투고했고 9월에 게재 승인을 받아낸다. Nature나 Cell 지가 아니었지만, 나에겐 소중한 결과였다. 연구를 잘해서 얻어냈다는 의미보다, 포기하지 않고 어려운 순간들을 견뎌내며 마치 마라톤을 완주하듯 끝까지 연구 프로젝트라는 한 편의 드라마를 주도했다는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를 마무리하며 내는 논문은 저마다의 고유한 스토리가 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에서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했다. 연구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박사학위를 받아낸 자들은 서로 닮았지만, 받아내지 못한 자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받아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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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파릇파릇할 이십 대 청춘의 시간 중 6년 정도를 바쳐 박사학위를 받아낸 모든 자들에게 나는 박수를 보낸다.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사라는 타이틀 말고 다른 타이틀을 선물해주고 싶다.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박사 졸업할 때의 논문이 비록 화려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안다. 그들의 6년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천 번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을 것이고, 수만 번 다른 길을 알아보며 갈등했을 것이다. 스스로의 역량을 탓하고 노력이 가져오는 그 허무한 열매에, 넘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벽 앞에서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때론 무식하다는 말을 듣고, 때론 무모하다는 말을 들으며, 마지막 결승선까지 달려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챔피언이다.
넘어져 보기 전에는 몰랐을 것이다. 실패해 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승선이 아닌 결승선 너머로 계속 이어지는 인생이라는 트랙을. 그렇다. 과학자의 길은 100 미터 달리기보다는 마라톤 경주와 비슷한 면이 많다. 아니, 마라톤은 끝이라도 있지, 과학자의 길은 인생 자체이며, 그래서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원생은 이러한 인생이라는 끝없는 트랙 위 시작점에서 출발한 선수들이고, 박사 졸업생은 그 트랙 위의 첫 번째 반환점에서 이제 겨우 다시 출발하는 선수들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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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거리 경주가 아니기 때문에 순발력이나 폭발적인 초반 스피드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100 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전체 거리를 숨을 참고 뛸 수도 없다. 적절한 호흡을 하면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뛰어야 한다. 즉, 끈질긴 지속력과 포기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넘어지되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뛸 수 있는 자가 되면 된다. 그게 대학원생이다. 그게 챔피언인 이유다.
이때 가장 중요한 마음은 치열하고 열심히 하는 마음보다는 즐길 줄 아는 마음이다. 즐기지 못한다면 그 트랙 위에 서 있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는 효율과 성과만 따질 때에도 마찬가지다. 같은 시간 같은 노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결과의 양을 따진다면 과학자(혹은 예술가)만큼 비효율적인 직업도 없을 것이다. 특히 기초과학 분야는 보이지 않는 열매를 위하여 정성스레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농부의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기초과학을 하는 이유는 성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씀의 퍼즐이 마침내 맞춰질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비록 현재 어느 퍼즐 조각을 만지작거리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기초과학자들의 지속적인 헌신은 지금까지 역사가 증명해 주듯 그 큰 그림을 궁극적으로는 찾아 완성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과학은 투명하고 가치중립적이며 이성과 논리에 의한 자정 작용이 여전히 작동하는 유일한 영역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박사학위라는 단어에 대한 기존의 정의(즉 독립적으로 연구 주제와 가설을 설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관찰/관측을 시행하거나 재현 가능한 실험을 설계 및 계획하여 실행에 옮긴 뒤, 도출된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가설을 검증하거나 관찰/관측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꼬리표)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로 Grit(그릿)이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능력 말이다. 뛰어난 역량을 대학원생도 박사학위를 끝내 받지 못하고 중도 포기할 수 있지만, 그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그릿을 가지고 있다면 그 대학원생은 마침내 박사학위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챔피언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과학자라는 인생길 위에 두 발로 당당하게 홀로 서게 될 것이다. 모든 대학원생들에게 응원과 격려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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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일2024.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