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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2화. 숙제 그리고 시험

산포로 2024. 3. 20. 10:58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2화. 숙제 그리고 시험

 

 

P 공대의 숙제는 악명이 높았다. 졸업생 중 누군가는 이런 말을 남길 정도였다. “입학식과 졸업식 사이에는 숙제밖에 없었어요.” 물론 과장된 표현이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닌 이유는 한 학기에 평균 18학점, 그러니까 약 6과목의 수업을 들으면서 매 과목마다 쏟아져 나오는 숙제의 양이 가히 엄청났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 특성상 1학년 때는 전공과 상관없이 모든 학생이 기초필수라고 명명된 과목을 수강해야만 했다. 누가 공과대학 아니랄까 봐, 그 과목들은 일반수학, 미적분학, 일반물리, 일반화학, 일반물리실험, 일반화학실험 등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동시에 졸업했다고 여겼던 그 지긋지긋한 수학, 물리, 화학의 삼단 콤보를 대학에 와서도 또 공부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는 급실망과 급좌절 모드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든 교과서가 영어로 된 원서였기 때문에 수학을 해도 물리를 해도 화학을 해도 모두 영어의 연장선이었다. 이럴 수가. 그래도 여기까진 참을 만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나의 가벼움을 느꼈던 순간은 숙제로 나온 문제들을 제대로 풀어낼 수 없었던 나의 무능력함 탓이었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뭐랄까. 상대적 박탈감이랄까. 사실 일반고등학교를 나온 나 역시 그 마의 삼단 콤보에서 꽤 높은 점수를 받던 놈이었고, P 공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이유도 수학과 화학 본고사를 잘 치렀기 때문이었다. 당시 본고사 문제의 난이도는 P 대학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았다. 그 철의 장벽을 뚫고 당당히 전국에서 25명의 정원에 들었던 나였기에 나름대로의 자신감이 내 안에서는 충만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디 가서도 수학과 화학에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좁디좁은 우물 안의 한 마리 개구리에 불과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던가. 그렇게나 자신 있던 수학과 화학에서도 나는 평균 점수밖에 받지 못했다. 좌절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입생 중 절반 정도가 과학고등학교 출신이었다. 그들은 고 3 때 대학 1학년 때 배우는 수학, 물리, 화학을 선수학습한다고 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었던 벽과 같았다). 이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좌절을 내게 안겨주었던 과목은 일반물리였다. 학기 말 학점이 C- 였기 때문이다 (이 과목은 1년 뒤 기어이 재수강해서 나는 겨우 B-를 받아낸다). 그러나 나는 이것조차도 괜찮았다. 나의 좌절감에 치명타를 주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좋게 말하자면 민수의 탁월함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내가 민수에게서 느낀 열등감 혹은 배신감이었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중간고사 하루 전이었다. 19동 205호는 학기 중 무휴였기 때문에 그날도 어김없이 자정이 넘어서 영업이 시작되었다. 멕시칸 아저씨는 그날도 순진무구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우리 기숙사 방 문을 두드렸고, 우리는 또다시 터질 것 같은 치킨 박스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끊어질 듯 말 듯한 노란색 고무줄의 우아한 탄성력에 감탄했다. 그 아름다운 자태는 매일 봐도 지겹지 않았다. 우리는 비닐봉지에 담긴 그 치킨을 받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멕시칸 아저씨의 성실함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표했다. 우린 정말, 진심으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고마웠다. 무한 감사합니다! 멕시칸 아저씨! 흑, 또 보고 싶어요!

 

 

아뿔싸, 한 명을 빼먹었다. 19동 205호는 민수와 내가 사용하는 2인 1실의 기숙사 방이었지만, 그 방에는 거의 매일 밤 상주하던, 내가 사용했던 2층 침대의 1층에 터를 잡고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하던, 실질적인 야식교의 교주이자 물주가 있었다. 기가 막힌 건 그 형의 이름이 진짜 교주였다는 것이다. 한교주. 허걱. 어찌 이름을 이 따위로 지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어느 날 민수에게 험담을 했는데, 민수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냐?”, “왜?”, “넌 영웅이잖아. 김영웅!” 젠장.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그 후로 교주 형을 부를 때마다 이름은 빼고 형이라고만 불렀다. 아차, 교주 형이 형인 이유는 삼수생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근거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관행으로 재수까지는 말을 놓았고, 삼수부터는 존대를 해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쨌거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이었던 것 같다. 교주 형이 동갑이었더라면, 아니 재수생이었더라도 나는 그를 교주야,라고 불렀을 테니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곁길로 좀 더 새어야겠다.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분명 들어볼 가치가 있으니 믿어주길 바란다. 때는 입학식 당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입학식을 마치고 우린 선배들에 이끌려 어떤 빈 강의실로 불려 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지도 않지만, 대학교 2-3학년생들이 갓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얼마나 어른인 척 굴던지 기도 막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봤자 19세, 20세, 21세 정도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엔 눈과 입이 가려진 상태라 우리 96 동기들은 재수생이든 삼수생이든 상관없이 반은 긴장한 얼굴로 반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선배들의 지시를 따랐다.

 

95 과대 (과대표의 줄임말)가 나와 우리 귀여운 신입생들 이름 한 번 불러볼까요?,라고 말하며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들 25명에게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이름이 불리는 순으로 추론해 보니 가나다 순인 것 같았다. 1번 구민수, 하자 몇 시간 뒤 19동 205호로 들어와 나와 방돌이가 될 민수가 긴장한 나머지 넷, 하며 벌떡 일어났다. 네, 도 아니고 넷, 이라니. 그런데 민수가 일어날 때 뒤로 의자가 벌렁 넘어져서 그렇잖아도 암묵적인 침묵이 흐르는 상태에 조금 더 긴장이 가해졌다. 속으로 으이구, 저런 멍충이 같은 놈 하고는, 하며 혀를 차던 나는 정작 5번 김영웅, 이라고 불릴 때 의자와 함께 뒤로 자빠지고야 말았다. 아, 그때 느꼈던 쪽팔림이라니! 그런데 선배들은 물론 동기들 모두가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른 채 겨우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고 혹시나 바지 밑이 찢어지진 않았나 만져보고 아니구나 하고는 안심하며 눈만 꿈뻑이고 있었는데, 과대 선배가 니가 영웅이냐?, 하고 묻는 것이었다. 당연히 내 이름이 영웅이니까 네, 하고 대답했는데, 사람들은 더 깔깔 웃어댔다. 그제야 나는 상황 파악이 되었고, 사람들이 내 이름 가지고 놀려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어날 때 뒤로 자빠지는 바람에 어릴 적부터 늘 이름 때문에 놀림받던 그 익숙한 상황이 똑같이 재연되고 있음에도 나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멍충이라니. 진짜 멍충이는 민수가 아니라 나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본론은 23번에 다다라서야 나왔다. 내 이름 때문에 한바탕 웃으면서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진 강의실은 22번에 이르면서 다소 굳어지기 시작했었다. 23번을 불러야 할 순간, 과대 선배가 먼저 터졌다. 혼자서 배꼽을 잡고 웃어젔혔던 것이다. 우리는 뭐지? 하는 눈으로 말없이 서로를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칠판을 부여잡고 간신히 웃음이 멈춘 과대 선배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출석 체크를 이어갔다. 우리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23번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럴까 하며 집중하고 기다렸다. 무슨 연예 대상 발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에서 그렇게 궁금한 상태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적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기억이다.

 

드디어 목을 가다듬고 과대 선배가 입을 열었다. 23번 최고…라고 말하며 선배는 또 웃음보가 터졌는데, 보다 못한 부과대 누나가 옆에서 출석부를 낚아채더니 짜증 난 목소리로 출석을 부르려고 했다. 과연 이번에는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우린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고 있었다. 23번 최고봉? 평서문 혹은 명령문 조의 마침표가 아닌 의문문의 물음표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름이 최고봉일리가 없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그때 최고봉이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일어나서 예, 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그 강의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어떤 이는 책상을 두드리며 웃어댔고, 어떤 이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르게 안경을 벗어든 채 연신 눈물을 훔치며 웃어댔으며, 또 어떤 이는 바닥에 뒹굴면서 각자 자기만의 웃음보를 터트렸다.

 

 

이름이 김영웅인 나조차 경악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이럴 수가, 최고봉이라니! 나는 아무것도 아닌 놈이었다. 감히 이 김영웅을 평범한 인물로 전락시키고 이름 계를 평정해 버린 최고봉은 이후 나의 든든한 바람막이 혹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누군가가 또 내 이름으로 장난을 걸어오면 나는 전혀 굴하지 않고 대뜸 우리 과엔 최고봉도 있어요,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으로 놀리는 사람들은 두 눈이 동그레 지면서 정말이야?,라고 말하며 더 이상 내 이름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역시 최고봉은 최고였다. 고봉아,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다시 중간고사 하루 전으로 돌아가자. 그날도 교주 형은 마치 자기 자리인 듯 1층 내 침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멕시칸 치킨 한 마리 반과 코카콜라 1.5리터를 다 해치우고 나서도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그날은 교주 형이 치킨을 샀는데, 밤을 새우기 위해서는 든든히 먹어둬야 한다면서 이미 대학 경험이 있는 삼수생의 노련함을 과시하려는 듯했다. 어차피 밤을 새야 한다는 사실에는 교주 형뿐만이 아니라 민수도 나도 모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교주 형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도, 그리고 나는 적어도 공부는 책상에서 하는 편을 선호했기 때문에, 괜찮았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교주 형은 교과서를 품에 안고 코까지 곯며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당 떨어지지 않고 밤새서 잘 공부하기 위해 먹었던 치킨과 콜라가 교주 형에게는 잠을 가져다준 꼴이었다. 형, 일어나, 내일 아니 오늘 아침에 시험 있어요. 공부해야죠, 하면서 나는 교주 형이 딱해 보여 흔들어 깨웠는데, 언제나 친절했던 교주 형 왈, “응. 영웅아, 나 안 자.” 기가 막힌 나는 형, 코까지 곯았는데 무슨 말이에요?,라고 하자, 교주 형은 여전히 친절한 말투로 타이르듯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응, 그랬니? 알았어.“ 그리고는 계속 잠을 이어갔다. 알았다니, 도대체 뭘 알았다는 건지, 참 대책 없는 사람이네, 하며 민수와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며 단념을 했고 우리는 서로 등을 마주 보고 각자 책상에 앉아 공부에 매진했다.

 

한 시간 즈음 지났을까? 아니, 삼십 분밖에 지나지 않았던 건 아닐까? 탱크가 지나가는 것처럼 거대한 포효 소리를 내며 민수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거 큰일인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매일밤 민수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던 나로서는 진퇴양난에 봉착한 기분이었다. 교주 형이 자는 건 조용해서 괜찮았지만, 민수가 자는 건 굉음 때문에 도저히 아무 공부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민수를 흔들어 깨웠고, 민수는 영웅아, 딱 한 시간만 잘게, 깨워줘, 하면서 엉금엉금 기어서 2층 침대로 올라가서 본격적으로 자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에휴, 한심한 것들, 하면서 나는 알람을 한 시간 뒤로 맞췄고, 공부를 하려는 찰나 다시 민수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귀를 막고 교과서에 머리를 파묻고 집중을 하려고 했지만,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침까지 그 상태로 잠들어버렸던 것이다.

 

 

시험은 9시 30분에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불편한 몸으로 잠에서 깬 건 8시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놀라운 건 눈을 뜨자마자 민수가 반짝이는 눈, 초집중 모드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민수 눈이 그렇게 초롱초롱하던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라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이놈, 정말 대단한 놈이군, 하고 나는 민수를 속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교주 형은 계속 자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냐, 하고 묻자 민수는 응, 두 시간 전 즈음에 일어났어,라고 응답했다. 간밤에 알람을 맞추고도 잠들어버려 민수를 깨워주지 못했던 죄책감과 함께 나는 왠지 모르게 민수로부터 살짝 배신감을 느꼈고, 여전히 나와 함께 한 배를 탄 것처럼 보이는 교주 형을 세게 흔들어 깨웠다. 역시 친절한 교주 형은 응, 영웅아, 고마워, 하면서 일어났고, 에이, 한 시간밖에 안 남았군, 하면서 있다 시험장에서 보자, 하고 자기 방으로 휑하니 가버렸다. 침대에서 자지도 못하고 책상에서 공부하지도 못했던 나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 듯한 심정으로 그날 중간고사를 치렀는데, 혹시나 하고 바랐던 기적은 역시나 일어나지 않았다. 민수는 A-를 받았고, 교주 형은 C+, 그리고 나는 C-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과목이 바로 일반물리였다. 내가 2학년 때 재수강을 하게 될 바로 그 과목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일반물리는 정말 좋지 않은 느낌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침 8시에 보았던 민수의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내가 입학식 당일 방에서 악수하면서 보았던 그 눈빛을 재확인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 실험실을 책임지고 바닥부터 일으켜 세웠고, 나중엔 나 같은 놈까지 인내를 가지고 가르쳐 박사 학위를 받도록 도왔고, 더 나중엔 동기들 중 가장 성공한 과학자가 되어 내 인생의 마지막 보스가 되어있을 인물의 시작은 이미 그때부터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최고봉은 박사 학위를 받고 대기업 연구소로 넘어가 나중에 부장 자리를 꿰차게 되고, 교주 형은 학부만 마치고 마이크로소프트 코리아에 들어가 나중에 간부 자리까지 역임하게 된다.

 

내 기억의 파편 하나하나를 충만하게 채우고 있는, 실로 대단한 그들의 존재가 오늘따라 그립다. 언제 다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을까?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이 글이 종이옷을 입고 세상에 나오게 되면 혹시 가능해지지 않을까? 친구들아 보고 싶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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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일202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