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19화. 싱가포르
해외 국제 학회 참석은 대학원생들의 눈을 열어주고 지경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것으로 인해 대학원생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익 중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피부에 와닿는 건 아무래도 박사후연구원으로 갈 랩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고 직접 그 랩의 보스를 만나 짧게라도 대화를 해보는 것일 테다. 자기 자신을 어필할 수 있고 기억에 남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박사후연구원 지원서를 이메일로 제출할 때에도 스팸함이나 휴지통으로 직행하는 꼴을 면할 수 있게 된다. 유명한 랩 보스 (Big guy라고 부른다)들은 하루에도 수십 통씩 그런 이메일을 받는다고 한다. 일일이 확인하기에는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서가 있는 경우에는 비서가 대신 그 이메일을 관리하며 답장을 써주기도 한다. 지원하는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답장이라도 받으면 다행인 셈이다. 보통은 답장도 받지 못한 채 소리 소문 없이 지원 이메일은 사라지고 만다. 이메일만 한 장 툭 보낸다고 해서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선 이메일이 아니라 지원하고자 하는 랩 보스를 알고 동시에 나를 아는 사람을 통해서 지원하는 경우가 훨씬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다. 특히 한국에서 대학부터 박사학위까지 다 취득한 사람일 경우에는 말이다.
극히 희박한 확률로 학회 장소에서의 짧은 만남을 통해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바로 구할 수 있는 경우가 현실에서 아주 가끔 기적처럼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런 일이 바로 민수에게 일어났다. 때는 2008년,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 싱가포르에서 열린 줄기세포 관련 학회에서였다. 마침 일이 많아 몇 달 전 캐나다 밴쿠버 학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민수와 더불어 두 번째 해외 학회 참석이 될 시철이, 형우,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참석한 학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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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다녀오고 우린 실험실에 복귀하자마자 함께 하지 못했던 민수와 린, 주혜, 윤지에게 얼마나 자랑을 해댔는지 모른다. 저마다 자기가 느꼈던 점들을 토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돼지 삼 형제였던 시철이와 나는 민수에게 꼭 다음엔 같이 가자면서 민수를 약 올렸다. 그리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이용해 어느 학회가 어디서 열리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괜찮아 보이는 학회가 9개월 뒤에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민수는 물론이고 시철이와 나도 발표할 수 있는 줄기세포 관련 학회였다. 역시 대규모가 아닌 소규모 학회였고, 캐나다 학회와 비슷한 일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그 학회에는 민수가 몸담고 있는 분야인 장(Intestine) 연구의 세계적인 리더, 한스 클레버스 (Hans Clevers)가 연사로 초청되어 있었다. 한스 클레버스 교수님은 얼마 전 장 줄기세포(Intestianl stem cell)의 존재를 마우스에서 찾아내셨고, 민수가 넉아웃 한 유전자가 관여된 신호 전달 체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다른 신호 전달 체계의 중요성을 마우스 유전학으로 명료하게 증명해 내신 스타셨다. 민수는 작년인 2006년에 졸업하여 1년이 넘도록 하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서 논문을 곧 투고할 상황이었고, 박사후연구원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나는 민수와 시철이에게 곧장 그 사실을 알렸다. 민수가 만약 장 연구를 계속해서 하게 된다면 한스 클레버스 랩이 세계 최고/최적의 장소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내 제안을 듣고 민수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졌고 좀 더 알아보고 말해주겠다고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형우도 만약 우리 돼지 삼 형제가 모두 참석한다면 자기도 동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민수는 시철이, 형우, 나를 부르더니 잠깐 나가서 커피나 마시자고 제안했다. 어제 내가 알려준 학회 정보를 진지하게 살펴본 모양이었다.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빼서 손에 들고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는데 민수는 말이 없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민수가 말했다. “가자. 싱가포르.” 우리는 기대했던 답을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수가 말을 이었다. “내가 교수님께 어젯밤 말씀드렸더니, 나 빼고 셋은 9개월 전에 캐나다 다녀왔기 때문에 학회비를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하셨어. 그래도 셋이 가기 원하면 갈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실 수는 있대. 참, 우린 학생이라 학회비는 저렴하니까 그건 교수님께 잘 말해 보면 지원해 주실 것 같아. 그리고 잠자는 건 내가 지원받을 호텔 숙박비를 저렴한 호스텔로 옮기면 해결될 것 같아. 하지만 비행기값은 어떻게 너네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거야.” 우린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네 명이서 같이 해외 학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는 데에 공감을 했고 어떻게든 비행기값을 마련해 보겠다고 합의를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9개월 뒤 우린 바라던 대로 다 함께 싱가포르에서 잊지 못할 3박 4일을 보내게 된다. 이 학회가 민수에게는 인생에서 손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우리들은 숙소를 찾기 전 학회 등록을 마치고자 학회가 열릴 호텔을 향했다. 근사한 호텔이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가 적도 상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시원하고 쾌적했다.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할 때 이용했던 택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나 에어컨이 잘 작동되어 실내에서는 추울 지경이었다. 적도 위에서 느끼는 추위라니! 아이러니를 느끼며 우린 학회 등록을 마치고 숙소로 이동했다. 너무 춥기도 했고 택시비도 아낄 겸, 그리고 걸어서 갈 만한 거리라서 우린 걷기로 했다. 도중에 맛집이라고 소문난 길거리 음식점에도 들를 참이었다. 길을 걷는데 의외로 덥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싱가포르는 적도 지방이라 사계절이 없고 그래서 여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사계절이 여름일 테니까. 정말 신기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를 떠나 우리가 적도 지방에 와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길거리 식당에서 우린 볶음밥을 시켜 먹었는데,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그 강한 불맛에 우린 넋을 잃고 말았다. 쌀도 우리나라에서 먹던 쌀과 달리 길쭉했고, 물기가 없어 밥알끼리 뭉쳐 있는 곳이 없었다. 낱알낱알이 다 기름과 계란으로 코팅되어 있는 듯했고 불향을 머금고 있었다. 형우를 포함한 우리 돼지 사형제는 볶음밥을 두 번 더 시켜서 배를 불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인간의 의지로는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 다시 싱가포르에 갈 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 볶음밥을 먹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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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숙소는 ‘리틀 인디아 (Little India)’라는 구획 안에 위치해 있었다. 진입로부터 학회가 열릴 호텔 부근과 온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적도 위에서도 확연히 차이 나는 온도는 빈부의 격차가 빚어내는 표현형인 것 같았다. 근처의 아파트 같은 구조물 앞에는 시골 동네 골목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허름한 반팔 반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힘없이 의자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고, 빨래들이 빨랫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기도 했으며, 벽에는 도마뱀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있다가 읍, 면 단위의 장소로 이동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삼십 분 정도의 거리 안에 이렇게 큰 온도 차를 낼 수 있다니, 하며 우리는 신기해했다.
우리가 머문 곳은 호스텔이었다. 여러 사람이 한 방 안에 배치되고 각기 다른 침대 위에서 자는 시스템이었다. 당연히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이었다. 여행객이 많고 적음에 따라 3박 4일 동안 우리가 머문 방은 매일 사람들이 바뀌었다. 하루는 덩치가 산 만한 외국인이 들어왔는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낯선 체취 때문에 우린 모두 고생하기도 했다. 우리에겐 마늘 냄새가 난다던데, 과연 그들에겐 우리도 ‘냄새나는 외국인’일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한국에만 있을 땐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한국인들로만 둘러싸인 곳에서 살다가 다른 나라 다른 혈통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지낸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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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순간은 학회 이튿날 점심때 일어났다. 민수는 학회 참석하기 두 달 전 즈음에 마무리한 논문을 투고한 상태였다. 그리고 한 달 뒤에 받은 심사 평가를 들고 논문의 수정을 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는 와중에 한스 클레버스와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잠시 말을 걸고 자신을 소개하고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물어볼 생각으로 파워포인트 자료를 준비했었다. 오전 세션이 끝나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가려는 찰나, 우리 앞에 한스가 지나가는 것이었다. 민수는 “간다 영웅” 하고 내 어깨를 툭 치더니 한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한스 앞으로 걸어가는 그 몇 초간 과연 민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과연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마침 한스는 민수의 인사에 반응을 했고, 민수가 자기 이름을 말하고 소개를 하면서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냐는 요청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몇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리들은 상황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바라던 대로 흘러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놀라움에 빠져 있었다. 민수와 한스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그들은 점심을 같은 테이블에서 먹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우린 괜스레 무슨 말을 주고받나 엿들으려고도 해 보고, 음식을 더 가지러 굳이 그 테이블 옆으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면서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지켜보았다. 흥미진진한 영화 한 편을 관람하는 것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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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훔쳐본 바에 따르면 민수는 준비한 자료를 랩탑으로 한스에게 보여주면서 자기가 무슨 연구를 하는지 소개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중에 민수가 얘기해 준 바에 따르면, 민수는 최근에 논문을 투고했고 심사 평가를 받은 뒤 수정을 하는 중이라고 한스에게 밝혔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민수의 논문을 심사한 심사위원 셋 중 하나가 한스였던 것이다. 민수는 한스와의 대화 중 그 사실을 추론하여 알아냈다고 말했다. 심사 평가에 적힌 내용과 똑같은 지적을 했고 거기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여서 한스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스가 낯선 아시아인이 다가와서 자기 이름을 밝힌 뒤 시간 좀 내달라고 부탁했을 때 흔쾌히 들어주기가 쉬웠던 것이다. 아,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쩜 민수는 이러한 타이밍에 맞춰 거기에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걸까!
더 놀라운 것은 약 20분 정도의 대화 끝에 민수는 한스 랩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민수의 말에 따르면, 민수가 짧고 간결하게 자기 연구와 논문에 대한 소개를 하고 난 뒤 서로 질문과 답을 주고받다가 한스가 그 자리에서 구두로 민수를 채용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학회를 마치고 돌아오고 며칠 뒤 민수는 실제로 한스로부터 박사후연구원으로 채용되었으니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라는 통보가 담긴 서류를 이메일로 받게 된다. 기적 중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가 낯선 땅 싱가포르에서 직접 목격한 장면은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민수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민수의 미래를 축복해 주었다. 민수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우리 모두는 믿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민수는 2009년 네덜란드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우리의 싱가포르 학회는 민수가 거둬들인 완벽한 기회로 인해 지금도 강렬하게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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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일2024.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