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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17화. 캐나다

산포로 2024. 7. 3. 09:50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17화. 캐나다

 

배낭여행이니 젊은이의 객기니 패기니 하며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비행기 타고 해외로 나가보는 경험은 대학원생들에겐 좀처럼 허락되지 않은 사치와도 같다. 일단 물리적인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나라 대학원생에게는 기껏해야 일 년에 일주일 정도의 휴가가 주어진다. 둘째, 금전적인 문제다. 대학원생이 받는 월급으로는 등록금 내고 기숙사나 대학원 아파트 사용료를 내고 한 달 식사비와 휴대전화 사용비 등을 제외하면 거의 남지 않는다. 저축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다. 설사 스크루지처럼 남는 돈을 일 년 내내 모아도 비행기 편도 티켓 하나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모두 극복하며 해외를, 그것도 경치 좋고 유명하다고 보장된 곳을 가볼 수 있는 공식적인 기회가 대학원생들에게 주어진다. 바로 해외 학회 참석이다. 연구비에서 모든 비용이 지출되고, 대학원생들은 자신의 휴가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일석이조, 금상첨화인 것이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은 해외 학회 참석을 갈망한다. 특히 나처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대학원생은 더 그렇다. 현실적인 이유로 해외를 경험할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2007년은 랩이 생긴 지 7년이 되던 해였다. 연구의 박차를 가하던 시기인 것을 감안하여 교수님은 친히 안식년을 미루셨다. 암묵적인 책임감을 느낀 우리들은 각자 맡은 프로젝트를 논문으로 열심히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민수가 만든 조건부 넉아웃 마우스들이 모두 근사한 표현형을 나타내면서 충분히 좋은 논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시기이기도 했다. 나 또한 국내 학회에서 2년 연속 면역학 분야 포스터 발표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던 터라 자신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정말 Nature에 첫 저자로 내 이름을 싣는 건 따놓은 당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다. 교수님의 두 번째 점프는 그 당시 나에겐 곧 실현될 예언과도 같았다. 포스터 발표라도 하지 못할 거라면 해외 학회 참석은 지원해주시지 않겠다는 교수님의 방침에 따라 우리들은 국내 학회만 다니던 차, 2007년 우리에게 처음으로 해외 학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장소는 캐나다 밴쿠버였다. 최고참이었던 민수와 막내였던 린, 주혜, 윤지를 제외하고 모두 참석했었다.

 

 

촌놈이었던 나는 신혼여행차 제주도 갈 때 비행기를 타본 적은 있지만, 우리나라를 벗어나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학회 참석을 위해 세 달 전에 여권을 처음으로 만들기도 했다. 여권 사진을 찍느라 사진관에 들러 찰칵 터지는 조명 앞에 어색해했던 내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캐나다라니! 그것도 밴쿠버라니! 내 생각은 온통 핑크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같은 촌놈이라 여겼던 형우는 베트남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수준이와 남순이는 신혼여행도 외국으로 다녀오고 여러 번 해외로 가족 여행을 다녀와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효영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어떤 배드민턴 결승전을 보기 위해 싱가포르를 다녀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경이는 비행기 자체를 처음 타보는 것이라 했다.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선경이는 언제나 뜻밖의 위로가 되어주는구나 싶었다.

 

시철이의 친척이 마침 밴쿠버에 있어서 그분의 추천을 받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안전하고 경치도 좋은 곳에 숙소를 미리 예약하기도 했기에 모든 여행이 순조로울 것이었다. 우린 다들 저마다의 기대로 벅차 있었다. 비행기 경험이나 해외 경험을 차치하고 해외 학회 참석은 모두에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쭙잖은 영어 실력으로 포스터 발표를 준비했었다.

 

포스터 발표는 구두 발표와 달리 발표자나 청자나 집중력이 떨어진다. 한 세션에 수십 장의 포스터가 즐비하고, 그에 따른 수십 명의 발표자와 그보다 두세 배 이상 많은 청자들이 마음껏 오가면서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가벼운 맥주 한 병씩 든 청자들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맥주는 학회 측에서 제공하는 것이며, 이는 포스터 발표라는 시스템이 얼마나 편하고 자유로운지 알려준다. 그러므로 발표자는 청자 앞에서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즉각 대답할 준비가 되어야 하며, 전체 내용을 약 5분 안에 요약해서 간결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모국어가 아니라면 요약문은 미리 써보고 외우거나 숙지해 두는 편이 좋다. 나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스토리를 풀어줄지 핵심 메시지의 임팩트가 경감되지 않는 수준에서 5분 버전과 3분 버전을 준비했었다.

 

비행기 안에서 10시간이 넘도록 불편하게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좋았다. 영화도 세 편이나 보고, 두 번이나 기내식을 제공받고, 음료수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면서 즐겁게 밴쿠버에 도착했다. 그리고 버스를 이용하여 우린 3박 4일 동안 머물 숙소로 이동했다. 모든 게 낯설고 신기했다. 하늘의 색부터 달라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사람이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살짝 두렵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정말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학회 일정을 보니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중간중간 15분이나 30분의 커피 브레이크, 1시간 점심식사에 이은 2시간 오후 휴식 시간을 제외하면 구두 발표가 빼곡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첫째 날 저녁부터 학회 일정이 시작되었다. 줄기세포 분야에서 저명한 과학자들이 대거 초청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린 논문에서 이름으로만 보던 과학자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신기했다. 영어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파워포인트 자료를 함께 보며 집중하니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첫 학회라 그랬는지 우린 모두 몰입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쉽게 말하자면, 소규모와 대규모인데, 소규모라 함은 참석 인원이 300명 이내로써 어떤 연사가 구두 발표를 진행하면 모든 참석자가 함께 경청하는 시스템을 일컫고, 대규모라 함은 참석 인원이 많게는 수천 명이 넘으며 여러 세션이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참석자는 미리 계획을 짜서 그 시간에 어느 발표를 들을지 정해야 하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우리가 참석한 학회는 소규모 학회였다. 그 이후로 박사후연구원 과정에서 나는 여러 차례 학회를 참석했지만, 소규모 학회가 대규모 학회보다 개인적으로는 더 알차고 배울 게 많았다. 무엇보다 긴밀하게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름으로만 알던 유명인을 앞에 두고 포스터 발표를 하며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아무래도 소규모 학회에서 훨씬 높다. 대학원생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주어지면 영광스러운 기억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그 랩으로 박사후연구원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는 1년 뒤 민수에게 벌어질 일이기도 했다.

 

이튿날 저녁, 하루 종일 영어 발표를 몰입해서 듣느라 지친 우리들은 다 같이 맥주 한 잔씩 곁들이며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저마다 학회가 주는 인상이 남달랐던 모양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린 어느새 해외 학회 예찬론자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매년 한 번씩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해외로 나오자는, 결코 장담할 수 없는 희망을 서로 나누면서 말이다. 마침 그날 오후엔 포스터 발표자의 절반이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시차 적응 실패와 더불어 배탈이 나는 바람에 오후 2시간 휴식시간에 숙소로 들어와 잠을 청했고 그 후에 연이어 있었던 2시간 포스터 발표에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뒤늦게 식사 자리로 온 효영이가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형,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말이 별로 없던 효영이가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건 드물었기 때문에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효영이는 형이 직접 보세요, 라고 말하며 나를 학회장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나는 잠시 다녀오겠다면서 효영이와 길을 나섰다.

 

 

효영이가 흥분했던 이유는 어떤 한 포스터에 있었다. 그 포스터는 발표 시간이 거의 끝날 때 즈음에서야 부쳐졌다는 말을 덧붙이며 효영이가 말을 계속 이어갔다. “형, 이거 보세요. 형 스토리랑 완전 똑같아요. 유전자만 다를 뿐 스토리 진행이 완전 판박이예요.”

 

효영이에게 고맙다는 한 마디 못한 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재빠르게 포스터 내용을 확인한 결과, 넉아웃 한 유전자만 다를 뿐 스토리 전개가 내가 준비하고 있는 논문 및 포스터 발표의 스토리 전개와 거의 똑같았다. 혈구 세포의 문제가 비혈구 세포의 유전자 결함 때문이라는 핵심 메시지가 동일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골수이식을 여러 가지로 진행한 방법도 동일했다. 게다가 더 충격적이었던 건 그 포스터 발표자가 하버드와 MIT가 함께 설립한 기관에서 그 분야의 대가라고 알려진 J 교수님의 실험실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 실험실은 인원이 스무 명이 넘으며 그 분야만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전 세계적으로도 선두 그룹에 속하는 곳이었다. 나도 그 실험실에서 출판한 논문들을 여러 편 읽었고, 덕분에 많은 지식과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나 존경하고 만나길 고대하던 실험실에서 나온 연구결과가 나의 환하기만 할 것 같은 미래의 불을 꺼 버렸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나는 효영이를 저녁 식사 자리로 들여보내고 혼자서 길을 걸었다. 밴쿠버의 밤, 아름다웠어야 할 그 야경도 모두 부질없어 보였고 너무 인공적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영어로 지껄이는 주위 사람들에 짜증이 났고, 나는 왜 이 따위인가 싶기도 하고, 앞으로 과학을 하지 말라는 계시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터벅터벅 걷던 밴쿠버의 밤거리, 그 거리에 덩그러니 혼자가 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던 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음 날 아침 함께 간 랩 사람들은 효영이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었는지 나에게 말을 아꼈고 나는 그들의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이며 입을 온종일 다물고 있었다. 그날은 나도 포스터를 발표해야 하는 날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그 포스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명 인사들의 구두 발표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커피 브레이크마다 사람들 가슴에 달린 명찰을 힐끗힐끗 엿보며 그 포스터의 발표자를 찾았다. 그리고 점심 식사 직전, 마침내 나는 그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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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일2024.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