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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16화. 라면을 끓이며

산포로 2024. 6. 26. 11:43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16화. 라면을 끓이며

 

랩이라고도 부르는 실험실은 대학원생들의 삶의 터전이다. 이 말이 과장이 아닌 이유는 먹고 자고 씻는 기본적인 생활 이외의 시간엔 대학원생들은 보통 랩에 상주하기 때문이다. 수업이 없는 방학 때면 특히 더 그렇다. 방학이란 단어는 수업을 하는 교수님들의 언어에 속한다. 대학원생들에게 방학은 본격적인 연구의 시간이다.

 

그러나 랩에서 연구만 한다면 삶의 터전이라는 말이 무색해지지 않는가. 기계가 아닌 이상 대학원생들도 일만 할 수 없다. 그들도 웃고 떠들며 논다. 서로 주고받는 농담은 삶의 활력소가 되고, 랩이라는 또 하나의 배가 순항할 수 있는 동력이 되며, 지치고 힘들 땐 위로도 된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랩이라는 공간에서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사라지면 중요한 유전자가 넉아웃 된 마우스가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는 것처럼 랩은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다. 

 

줄기세포 분야뿐 아니라 랩에서도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던 2006년, 형우와 선경이가 신입생으로 들어왔다. 톰과 제리 같은(누가 톰이고 누가 제리인지는 모호하지만) 이 둘의 기묘한 공생은 다음에 소개할 에피소드에서 그 빛을 발한다.

 

당시 랩 옆에는 전자레인지, 냉장고, 정수기 및 약간의 식기류와 컵들, 그리고 테이블 하나와 낡은 소파가 배치된 조그만 휴식 공간이 있었다. 연구에 지칠 때면 우리들은 그곳에서 커피나 차 같은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고, 허기질 때면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거나 편의점에서 사 온 냉동식품을 데워 먹기도 했다. 

 

 

형우와 선경이가 어느 정도 랩에 적응했던 시기, 그리고 그들의 후배인 린과 주혜와 윤지도 막 입학한 시기였으니 2007년 초봄이었던 것 같다. 그날 저녁 우리들의 휴식터에선 민수가 어디선가 배워 왔다면서 봉지 라면 (진라면이었던 것 같다)을 큰 사발에 담아 물을 넣고 전자레인지에 끓여 먹는 시범을 선보이고 있었다. 사발면에 지겨워진 우리들은 봉지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고 민수가 끓인 라면을 맛보려고 너도나도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한다면 개혁이었다. 사실 군대에 다녀온 나는 뽀글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전자레인지를 이용해 물을 끓인다는 건 뭔가 좀 더 과학적이었고 멋져 보였던 것 같다. 뽀글이는 뜨거운 물, 아니 식어가는 물에 라면을 퉁퉁 불려 먹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시철이와 나도 나무젓가락을 하나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남순이가 오빠, 언제 먹을 수 있어요?,라는 가사가 하나밖에 없는 노래를 무한반복해서 부르고 있었고, 수준이는 언제나처럼 다 되면 불러, 하면서 친절하게 한 마디 남기고는 다시 실험실로 들어갔다. 배드민턴을 치다 온 효영이도 배가 고픈지 한쪽 구석에서 라켓을 들고 헤어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민수는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마치 자기가 뭐라고 되는 것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전자레인지를 째려보고 있었다. 말을 걸면 큰일 날 것 같은 포스였다.

 

그때였다. 아까부터 소파 구석에 앉아 티격태격 대던 형우와 선경이는 어릴 때 즐겨하던 놀이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니, 다방구 아나?”, 하고 선경이가 물었고 (참고로 선경이는 경상도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형우 (형우도 경상도 남자다)는 당연히 안다며, 그럼 너는 얼음 물이 뭔지 아냐고 되물었다. “얼음 무~울?“, 이라고 바로 되받아치며 선경이가 말했다. “얼음 물이 뭐꼬, 얼음 불이지.” 처음 들어보는 말에 입이 벌어진 형우는 얼음과 물의 상태 변화를 굳이 언급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어는점을 설명하며 얼음 불이 아니라 얼음 물이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이에 질세라 선경이는 “듣다 듣다 고런 궤변 첨 들어보네“, 라고 말하면서, 얼음은 멈추는 거고 불은 불처럼 재빨리 뛰라는 말이라며 얼음 물이 아니라 얼음 불이어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나로선 듣다 듣다 그런 궤변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던 나를 포함한 랩 사람들은 모두 뜨악한 표정으로 선경이를 보고 있었는데, 겸연쩍어진 선경이는 대뜸 ”니는 그러면 시마 맞추기 아나?“라고 물으며 전세를 역전시키려 했다. ”당연히 알지, 깽깽이로 뛰다가 돌 맞춰서 넘어 뜨리는 거 아이가?“, 라면서 형우는 선경이를 확인사살했고, 선경이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상황이 종료된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다. 선경이는 다음 수를 짚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선경이는 자기는 철봉을 했다면서 뚱딴지 같은 말을 꺼냈다.

 

 

사람들은 순간 당황했지만, 눈치 빠른 형우가 태연한 척 느긋한 어투로 바로 받아쳤다. “철봉에서 하는 놀이들도 많지요~ 허수아비 같은 거.”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반면, 선경이는 마치 한심한 인간들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발언을 이어갔다. “아, 그런 거 말고! 난 하루 종일 철봉만 해서 엄마가 이제부터 철봉 하지 마!라고 혼내기도 했단 말이야!” 사람들은 이게 무슨 대화인가 하면서 말문이 막혔고, 참다못한 남순이가 어이없다는 듯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선경이 너, 그럼 철봉 잘해?”, “네, 잘해요“, “선수들처럼 해?”, “네!”, “선수들은 철봉에서 막 돌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그러는데?”, “네! 선수들만큼 해요!” 

 

우리들은 또 한 번 경악했고, 계속해서 전자레인지를 째려보고 있던 민수도 잠시 집중력을 잃은 듯해 보였다. 비장한 기운마저 감도는 싸늘한 분위기. 남순이가 다그치며 말했다. “그럼 해봐! 해봐!” 그런데 기죽은 듯 선경이가 대답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살쪄서 못해요.”

 

뭔가 대화 같은 대화를 기대했던 게 무리수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남순이가 한 마디를 더했다. “너 그럼 철봉 많이 해서 목도 짧은 거야?” 어이없는 대화를 인신공격적 발언으로 역전시키려는 의도 같았다. 지긋지긋한 사발면에서 해방되어 처음으로 전자레인지에 라면 끓여 먹는 날인데, 선경이 때문에 기분을 망쳐서 언짢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선경이는 끝까지 지지 않았다. “저 목 안 짧아요!” 우린 다 같이 남순이 편을 들었다. “너 목 짧잖아~” 그리고 선경이가 대답했다. 잊지 못할 명언이었다. “……어깨가 높은 거예요.”

 

 

순간 띵! 하면서 전자레인지 라면이 완성되었다. 이 띵 소리는 선경이가 명언을 던진 후 싸해진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해 주었다. 민수는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사발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라면의 면발이 갈색 빛을 입고서 표면에 드러난 채 말라 있었다. 국물이라 할 것은 가장자리에 말라비틀어진 갈색 띠를 띤 모습으로 그 존재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우린 고고학 전공자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민수가 말했다. ”이런, 또 실패네.“ 효영이는 배드민턴 라켓을 가방에 집어넣었고, 시철이와 나는 괜찮아, 다음엔 물을 좀 더 넣어 보자, 라며 민수를 위로했으며, 형우와 선경이와 남순이는 테이블 밑에 쌓여 있는 사발면을 하나씩 꺼냈다. 그날 우린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지만, 선경이의 명언은 영원성을 가진 채 15년이 넘도록 이렇게 살아 있다. 목이 짧은 게 아니라 어깨가 높은 것이라는 말. 그것은 인신공격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었고, 소신 있는 발언이었으며, 인식의 전환이었다. 

 

한 가지만 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할까 한다. 어느 날 오후였다. 남순이 주변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남순이 가족들 사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남순이는 요즘 세대에 보기 드문 7 남매로, 막내만이 Y 성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니까 딸, 딸, 딸, 딸, 딸, 딸, 그리고 아들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남순이의 큰 언니 (아니, 큰 언니가 아니었나? 몇 번째 누나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사진을 보며,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바로 그때, 선경이가 묻지도 않은 답을 하는 것이었다. “원래 큰 딸은 아빠를 닮는 거예요.”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거래요’가 아니라 ‘거에요’였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전하는 게 아니라 무식하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오… 그래?”, 하면서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이내 남순이가 반론을 제기했다. “나 아는 사람은 큰 딸인데 엄마 닮았던데?”

 

사람들은 일제히 선경이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도대체 어떤 제기 발랄한 말을 쏟아낼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우리들을 가르치려는 뉘앙스의 선경이가 남순이에게 당하는 꼴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드디어 선경이가 입을 열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해야 하는 자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역력하게 지으면서 말이다. “원래 아빠를 안 닮으면 엄마를 닮는 거예요!” 옆에서 96개 중 83번째 샘플을 집어넣던 나는 그 순간 순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으이구, 그럼 옆집 아저씨 닮겠냐?’ 우린 이제는 익숙해질 법한 싸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다시 PCR을 준비했다. 선경이는 형우 따라 실험실 밖으로 나가면서 자기 말이 맞지 않냐고 강력하게 항의했고, 형우는 니 말이 맞다면서 어린아이 타이르듯 말해주었다. 그날 우린 자식이 아빠를 닮지 않으면 엄마를 닮게 된다는 유전학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선경이는 우리에게 자명한 진리에 새로운 옷을 입혀 낯설게 보게 하여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를 지닌 사람이었다. 

 

아, 선경이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으려나? 결혼은 했을까? 아, 참고로, 민수는 그 후로 한 번 더 실패의 쓴 잔을 마신 뒤 전자레인지로 라면 끓여 먹기에 성공을 해낸다. 4전 3패 1승의 기록을 남기고서 말이다. 덕분에 테이블 아래에서 사발면이 점차 사라지고 진라면, 신라면, 너구리, 짜파게티 등이 자리를 메웠다. 그런 사소한 것들 하나에 웃고 즐거워하던 시절이 그때에 비해 모든 게 너무나도 풍족해진 지금 무척이나 그립다. 전자레인지 라면 하나로 행복해하던 그때로 잠시라도 돌아가고 싶다. 웃기지도 않은 대화를 들으며 전혀 뜻하지 않은 시공간,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부터 진리를 확인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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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일2024.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