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13화. 운명

그날 밤 그렇게 싸한 분위기로 그 랩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주연이도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방에 도착해서 숨 좀 돌리려는 차에 그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당연히 주연이는 사과 전화인 줄 알았는데, 경고와 협박 전화였다고 했다. “야... 너 나한테 정식으로 사과 안 하면 죽을 줄 알아... 어디서 후배 따위가… XX, XX.” 하면서 난리를 쳤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대쪽 같은 주연이는 다음과 같은 워딩으로 받아쳤다고 했다. “전 이런 선배 필요 없어요!” 어젯밤 자기가 겪었던 일을 직접 전해주는 주연이는 마치 제삼자의 얘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의외로 태연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그 선배라는 작자에게 분노가 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단 주연이가 더 걱정이 되었다. 진지해진 내 표정을 보더니 주연이가 한 마디 더 했다. “그게 끝이 아닌데 벌써 그런 표정은 뭐니? 내가 그렇게 말한 뒤 2-3초 정도 아무 말도 없다가 전화 끊기 전 그 선배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어! 그래! 잘됐다. XX!! 너 앞으로 내 후배 아냐!!, 라고 말이야.” 나는 주연이에게 무슨 일 생기면 꼭 알려 달라고 말하며(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면서) 파이팅을 빌었고, 점심식사 시간에 민수와 시철이에게 들은 대로 전해주었다. 그랬더니 민수가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 싸이코 같은 놈, 내 대학원 동기인데 우리보다 세 살 많아. 동기들도 그 자식과 거리를 둬. 그런데 손 하나는 끝내준다 하더라. 그나저나 주연이라는 애 나도 걱정되네. 왜 하필 그 녀석과 연결된 거냐. 느낌이 좋지 않아.” 그랬다. 민수의 촉은 정확했다. 주연이는 그 후 약 두 달간 지옥 같은 실험실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In situ hybridization으로 실험의 쓴맛 아니 본래의 맛을 본 나는 몇 주 후 교수님을 또 한 번 껑충 뛰게 만드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민수가 만든 조건부 넉아웃 마우스를 이용해 Mind 유전자가 마우스 유방 발달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체 내에서 확인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이미 나는 유방 상피세포 특이적으로 Mind 유전자가 넉아웃 된 마우스가 태어나도록 교배를 시킨 상태였고, 매일 같이 혹시나 그 마우스가 죽거나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동물실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보통 마우스를 교배하면 새끼가 평균 8마리 정도 태어나는데, 나는 이미 그것들의 꼬리를 조금씩 이용해서 어떤 녀석이 넉아웃 마우스이고 어떤 녀석이 정상 마우스인지 알고 있는 상태였다. 3 케이지에서 각각 8 마리 정도씩 태어났으니 한 케이지에 약 사 분의 일인 2 마리 정도가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라 존재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PCR 결과 거의 사 분의 일 정도의 비율로 넉아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두 달이 넘도록 매일 관찰을 해오고 있던 차였다. 총 24 마리 중 넉아웃은 5 마리였는데, 그중 3 마리가 암컷이었고, 2 마리가 수컷이었다. 유방의 발달과 혹시라도 생길지도 모르는 유방암을 염두에 두고 있던 나는 수컷 2 마리 보다는 암컷 3 마리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당연한 논리였다. 수컷에겐 유방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컷 한 마리가 태어난 지 두 달이 넘어가자 시름시름 앓는 것이었다. 곧 죽을 것처럼 보여 나는 얼른 뛰어가 교수님께 알렸다. “교수님, 엠엠티브이 마인드 마우스가 태어난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죽어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에요.” 교수님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시더니, 혹시 모르니까, 라고 하시면서 마우스를 검사해 보자고 하셨다. 돌아가는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나는 그저 교수님의 지시를 따랐다. 같은 케이지 안에 있던 정상 마우스 한 마리와 죽어가는 넉아웃 마우스 한 마리를 가지고 실험실로 내려왔더니, 민수도 옆에 있었다.
교수님은 수술용 장갑을 끼시고 마우스를 잡고 배를 보시더니, 뭐야? 왜 이렇게 배가 빵빵하지?, 하셨고, 아무래도 splenomegaly나 hepatomegaly 같아 보인다고 하셨다. Splenomegaly는 spleen (비장)이 비대해진 현상, Hepatomegaly는 liver (간)이 비대해진 현상을 일컫는 용어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면역학을 전공하셔서 우리가 모르는 지식들을 많이 알고 계셨던 교수님은 굉장히 진지해지셨고 예리한 수술용 메스와 가위를 들고 숙련된 손으로 직접 조심스럽게 배를 가르셨다.

20년 실험 생물학자로 살면서 그날만큼 내 가슴이 벅차오른 순간은 없었다. 민수와 나는 입이 쩍 벌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교수님도 마찬가지셨다. 그 마우스의 빵빵했던 배는 비대해진 비장과 비대해진 간으로 꽉 차 있었다. 교수님의 예측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교수님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정확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그 비대해진 비장과 간을 도려내셨다. 그랬더니 그 마우스의 배 안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나는 곧장 비장과 간의 무게와 길이를 쟀다. 정상 마우스의 비장은 1 센티미터 남짓이었는데 반하여 넉아웃 마우스의 비장은 3 센티미터를 넘기고 있었다. 무게는 정상 마우스의 경우 70 밀리그램 정도였고 넉아웃 마우스의 경우는 그것의 13배가 넘는 940 밀리그램이었다. 거의 1 그램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리고 정상 마우스의 간은 1 그램 정도였고, 넉아웃 마우스의 간은 3 그램을 넘기고 있었다. 비장과 간을 합치면 약 4 그램이었다. 전체 몸무게가 25 그램 정도인 것을 감안할 때 체중의 약 육 분의 일이 비장과 간 무게였던 것이다. 충격이었다. 아직도 그 장면은 생생한 그림처럼 내 머릿속에 박혀 있다.
교수님은 이어서 면역학 전공자다운 모습으로 각 조혈 기관을 차례대로 분리해 내셨다. 조혈 과정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시하신 듯했다. 두 다리에서 뼈를 발려내시고 주사기를 이용해서 그 안에 들어있는 골수를 뽑아내셨다. 그리고 곳곳마다 위치해 있는 림프절들을 분리해 내셨는데, 림프절들도 정상 마우스의 그것에 비해 대여섯 배 이상 비대해져 있었기 때문에 몸 안 어느 곳에 림프절이 위치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정상 마우스에서 여러 군데 림프절을 찾아내는 일은 웬만한 생물학자들도 어려워하는 일에 속한다. 해부학적인 지식이 없는 데다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고 인접한 조직과 구별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초보인 나와 민수에게 림프절의 위치를 하나씩 가르쳐주시면서 직접 다 떼어 내셨다. 림프절에 이어 흉선도 떼어 내셨는데, 이번엔 정상 마우스의 그것에 비해 서너 배 작아져 있었다. 교수님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마우스가 나이가 들거나 조혈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흉선이 작아진다고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리고 민수와 나에게 떼어낸 기관에서 혈구세포를 분리해 낸 뒤 유세포분석기로 분석을 하라면서 항체 리스트를 알려주셨다. 이미 죽은 마우스에서는 혈액을 추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쉽다면서 다음에는 마우스를 안락사시키기 전에 혈액 채취를 먼저 하라고 말씀하셨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재빠른 손으로 마우스를 해부하고 일차적인 진단과 해야 할 실험들을 조목조목 알려주시는 데까지 불과 한 시간 채 걸리지 않았다. 교수님의 그 모습은 나에게 각인이 되었고 나는 지금도 마우스로 실험을 진행할 때면 언제나 그때 가졌던 그 마음을 떠올리고 숨을 가다듬곤 한다.

나는 교수님의 지시대로 실험을 진행했다. 점심 먹고 마우스를 해부했기 때문에 아마 그날은 저녁도 거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실험을 마쳤던 것 같다. 다행히 조혈 기관에서 혈구세포를 분리하고 여러 항체들로 염색을 한 뒤 유세포분석기를 이용해 혈구세포 표면에 위치한 여러 단백질들의 발현 패턴을 분석하여 어떤 세포들이 각 기관을 이루고 있는지 테스트하는 건 나의 대학원 첫 프로젝트였던 ‘너무나도 정상적인’ 넉아웃 마우스 분석 경험 덕에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노력은 많이 했으나 가시적인 열매를 얻지 못한 채 접었던 그 프로젝트도 궁극적으로는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던 것이다.

그다음 날 유세포분석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 민수에게 먼저 보여주고 교수님께 보여드렸다. 교수님에겐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1분 정도 말없이 집중해서 결과를 보시더니 또다시 껑충 점프를 하시는 것이었다. 2년 전 보았던 그날의 데자뷰였다. 그리고 곧장 말씀하셨다. “이건 Nature야. Nature!” 내 가슴은 쿵쾅대고 있었다.
며칠 뒤부터 나는 지속적으로 관찰해오고 있던 넉아웃 마우스들의 꼬리에서 소량의 혈액을 채취하여 그 혈액을 이루고 있는 혈구세포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케이지를 계속 늘렸으며, 늘리는 대로 태어난 모든 마우스들이 4-5달 나이가 될 때까지 두 주에 한 번씩 혈액 검사를 실시했다. 모두 합치면 아마도 백 마리 정도가 넘는 수가 될 것이다. 나는 당시 실험실에서 조직학 분야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던 이지나 선생님의 도움으로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려 혈구 세포의 종류와 모양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말 검사를 실시했고, 유세포분석기로 혈구 세포의 분포도를 조사했다. 비교적 간단하고 반복적인 단순 노동 같아 보였던 그 실험들은 이후 엄청난 데이터가 되어 논문에 소중하게 쓰이게 된다.

지속 관찰을 하던 중 곧 죽을 것 같아 보이는 마우스가 발생할 때마다 나는 그 마우스를 첫날 교수님이 보여주신 대로 해부하고 분석을 실시했다. 비장, 간, 림프절이 비대해지는 현상은 동일하게 관측되었고, 흉선이 작아지는 현상도 그랬다. 혈액 검사에서도 늘 과립백혈구(Granulocyte)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정상 마우스의 말초 혈액에서 과립백혈구는 보통 10% 이내로 관찰된다. 그러나 넉아웃 마우스의 혈액에서는 많으면 80% 이상도 관찰되곤 했다. 총 백혈구 수도 많게는 정상 마우스보다 열 배 정도 늘어나 있었고, 이에 반하여 적혈수 수는 터무니없이 적어 빈혈 증상을 보였다. 조직학적인 측면에서도 눈에 띄는 차이를 나타냈다. 비대해진 비장과 간과 림프절의 단면을 관찰한 결과 과립구와 그들의 전구 세포들이 곳곳에 혈관 주위에 침투해 있었다. 이들의 침투는 다른 장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장과 폐 단면을 조사해도 그들의 존재가 확연하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교수님도 나도 새로운 관찰 결과를 토대로 심도 있는 공부를 시작했다. 여러 대학 병원 소속 혈액학 교수님께도 우리의 결과를 보여드리며 자문을 구했다. 무수한 논문을 읽어나갔고,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다. 나는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의사인 내 아내에게도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잠정적인 진단명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만성 골수성 백혈병(Chronic Myeloid Leukemia)이었다. 내 가슴은 쉬지 않고 뛰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들릴 정도였다. 만약 이 질병이 백혈병이라면 내가 연구하고 있는 조건부 넉아웃 마우스는 백혈병의 새로운 동물 모델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 달 정도가 지나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연이를 만났다. 일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주연이의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 순간 죄책감이 밀려왔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연이에게 인사하며 함께 길을 걸었다. 무슨 일 없었냐는 질문에 주연이는 또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랩을 갔는데, 내 실험 테이블에 있던 모든 버퍼와 시약들이 버려져 있었어. 그 모든 플라스크 및 에펜도르프 튜브가 설거지통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더라구. 그리고 그 선배는 내가 출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들어가지 못하게 실험실 문을 잠갔어. 그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실험실에 들어가지도 못했지. 가장 저질스러운 건 내가 그 선배 앞에 지나갈 때마다 그 선배는 쓰레기(사용한 파이펫 팁, 휴지 등)를 던져서 날 맞추는 거였어.” 단 몇 문장만 들었는데도 내 가슴은 분노로 휩싸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주연이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이미 어떤 선을 넘어선 것 사람 같았다.
나 같으면 도저히 참지 못했을 상황이었기에 나는 대뜸 주연이에게 물었다. 왜 교수님께 말하지 않냐고 말이다. 그런데 주연이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었어. 교수님은 그 선배를 굉장히 아끼셨거든. 그 선배 성격은 거지 같아도 연구는 끝내주게 잘해. 그런데 그 선배도 나와의 사건 이후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완전히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하더라구. 지난 추석 명절 휴가도 반납하고 매일 랩에서 잤대. 새벽에도 나와서 실험하는 모습을 보였고. 교수님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새벽 3-4시에 나오곤 하셨거든. 굉장히 지능적이었던 거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각설하고, 그래서 어떡할 거냐고 물었던 것 같다. 주연이는 잘 모르겠다고 하며 여자 기숙사로 향했고 나는 대학원 아파트로 향했다. 그 학기가 지난 후 결국 주연이는 나와 함께 시작했던 석박통합과정을 그만두고 석사 학위로 대학원 생활을 정리한다. 학교를 떠나기 며칠 전 동기들 모임에서 주연이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내가 왜 여길 그만두는지 알아? 난 그 선배도 참을 수 있고 교수님도 이해할 수 있었어. 그런데 랩 사람들의 반응은 도저히 못 참겠더라구. 다들 그 선배에게, 그 선배가 실세였잖아, 눈 밖에 나기 싫어서 벌벌 기면서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는 거 있지? 그때 마음에 확신이 들더라. 이 랩엔 미래가 없다고. 그러니까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나가자고.“

주연이의 용기 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현재 주연이는 내 아들과 동갑인 딸 하나를 낳고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에 돌아와 훌륭한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연이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는 것 같아 주저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그 선배란 작자는 모 대학교수가 되었다가 교수 이 년 차 때 성희롱과 대학원생 학대로 교수 타이틀을 반납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내 마음속에선 동정심이 전혀 일지 않았다. 오히려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현실에서 사필귀정이 어느 정도는 먹히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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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일2024.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