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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10화. 연애와 사랑, 그리고 결혼

산포로 2024. 5. 14. 09:39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10화. 연애와 사랑, 그리고 결혼

 

남순이와 수준이는 대학원 버전의 캠퍼스 커플이었지만, 캠퍼스 밖으로의 원정 연애와 사랑은 이미 실험실에 만연했다. 인간의 본능이었을까. 어느덧 이십 대 후반에 들어선 우리 돼지 삼형제도 연애에는 모두 일가견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민수는 포항으로, 시철이는 대구로, 그리고 나는 청주로 원정 연애를 했고, 모두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우리 랩에서 민수가 가장 먼저 결혼에 골인했다. 아내가 될 여인은 한소희를 닮은 동갑내기 요가 강사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첫날, 시철이와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민수의 결혼식에서 나는 민수가 던진 부케를 받는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랩에서 두 번째로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내 아내가 될 여인은 당시 의대생이었다. 민수와 시철이는 그 사실을 알고 다음과 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좋겠다. 영웅이 넌 돈 안 벌어도 되겠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지겹도록 듣고 있는 말이다. 아직 현실이 되지는 않았지만, 곧 현실이 될까 두렵기도 하다. 시철이는 내 결혼식에서 내가 던진 부케를 받는다. 그리고 보란 듯이 몇 개월 후 결혼식을 올린다. 시철이의 아내가 될 여인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그 사실을 알고 민수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철이는 우리 중 가장 옷을 잘 입었기 때문이다. 뭔가 좀 멋지긴 했다. 그래봤자 돼지 삼형제이었지만 말이다. 참고로, 그렇게 줄줄이 유부남이 된 돼지 삼형제는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 알콩달콩하면서 그때 그 여인들과 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결혼하고 머지않아 민수는 두 딸을, 시철이도 두 딸을, 그리고 나는 한 아들을 가지게 된다. 2023년 현재 자녀들은 모두 십 대 청소년이다.

 

 

아마 민수의 결혼과 내 결혼 사이였던 것 같다. 늘 저녁에 배드민턴을 치러 가던 효영이가 그날은 실험실 자기 책상에 앉아 텅 빈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당시 효영이에게 모두들 배드민턴을 조금씩 배우던 터라 그날은 우리가 먼저 효영이에게 배드민턴 치러 가자고 말을 건넸는데, 효영이는 고개를 돌려 그저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한 시철이가 “무슨 일 있어?”라고 묻자, 효영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민수가 먼저 말을 이었다. “답장이 왔구나?“ 효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늦게 온 답장이라 우린 그 당시 어느 정도 체념하고 있었다. 답장의 내용은 우리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Y 교수의 만행은 도가 지나친 것 같았다. 그 제보자 대학원생은 신문에 기사를 내고 한 달 후 자퇴를 했다고 했다. 답장이 늦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말이 자퇴였지, 실은 강요된 퇴학인 것 같았다. 교수가 교묘하게 자기를 따돌리는 일은 이미 각오했던 터라 참을 수 있었는데, 그가 자퇴를 결심했던 이유는 랩 사람들이 교수의 만행을 알면서도 모두 입을 다물고 교수와 한 배를 탔기 때문이랬다. 생각건대 그들도 나름대로 그 실험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힘과 권위를 가진 자가 협박을 해 오면 힘없는 대학원생들은 이미 수년간의 시간을 갖다 바친 랩 생활이 아까워서라도 다른 사람이 당하는 불의는 안타깝지만 작전상 눈을 감고 넘어가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이해야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다. 효영이가 창밖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던 것도 그제야 이해가 됐다.

 

시철이가 물었다. “그럼, 왕경태는? 왕경태에 대해선 별 말 없었어?” 효영이가 대답했다. “있었어요. 그 대학원생이 용기를 내어 자기 돈 내고 제보한 것도 왕경태가 죽은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래요. 왕경태랑 절친이었다나요.” 그랬구나, 하고 가만히 듣고 있는데, 효영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왕경태가 포르투갈전 하루 전에 그 대학원생한테 전화를 했다네요. 죽고 싶다고 말했대요. 자주 하던 얘기라 그 대학원생은 그러려니 했는데, 갑자기 왕경태가 해답을 얻은 것처럼 교수를 죽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교수 엿먹이는 방법은 자기가 죽는 거라고 말했다네요. 그리고 이어서 왕경태가 포르투갈전에 혹시라도 우리나라가 이기면 죽어버릴까, 하고 말해서 깜짝 놀랐대요.” 갑자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효영이가 계속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을 웃으면서 해서 그냥 실없는 녀석,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네요. 전화를 끊고서도 ‘혹시?’ 하고 생각했대요. 물론 포르투갈전에서 우리나라가 이길 리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걱정을 덜 수 있었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1:0으로 이겨버리고, 왕경태는 그다음 날 보란 듯이 죽어버린 거죠.” 안경을 닦던 민수는 안경을 떨어뜨렸다. 시철이는 얼굴 표정이 얼어버린 것처럼 정지 상태였고,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안경을 주우며 민수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더니 알겠다,라고 하며 침묵을 깼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왕경태는 그럼 자살을 이미 계획했던 거네. 포르투갈전에서 우리나라가 이기자마자 말이야. 그래서 일부러 휴대전화도 기숙사방에 놔두고 갔던 거지. 아, 좀 끔찍하긴 하지만, 우리와 통집에 가고 여우웃음에 가고 노래방에 함께 간 것도 왕경태에게는 모든 게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두고 있었다는 말이잖아. 그리고 지욱이. 지욱이는 아마 왕경태가 자살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 거야. 거기가 급류가 형성되는 곳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왕경태만 믿고 같이 바다로 들어갔던 거지. 지욱이에게는 아마도 그냥 객기였지 않았을까 싶다. 불쌍한 지욱이. 에이 XX, 그럼 왕경태는 지욱이가 자기를 따라 들어가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같이 들어갔던 게 되잖아!” 자기가 하던 말에 흥분한 민수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그렇게 민수가 흥분한 모습은 대학 1학년 때부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였다.

 

 

민수는 여러모로 리더 역할을 했었기에 민수가 그렇게 흥분하며 분노를 표하자 남은 돼지 삼형제인 시철이와 나, 그리고 효영이는 그 자리에서 어쩔 줄을 몰라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버렸다. 민수는 대뜸 미안하다며 자리에 앉아 안경을 다시 썼다. 민수의 추리는 너무 그럴듯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그리고 왕경태와 지욱이의 죽음이 사고사든 자살이든 그걸 밝혀봤자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우리는 민수의 추리가 사건의 전말 같아 보였다. 민수의 분노는 나의 분노였고 우리 모두의 분노였다.

 

그 이후로 우린 더 이상 왕경태와 지욱이의 죽음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Y 교수는 그로부터 며칠 후 국가에서 지정하는 과학자가 되어 5년간 1년에 8억씩 지원받는 사업에 선정이 되었다.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 그 교수는 티 없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옆에 열 명이 넘는 대학원생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실험실의 전형 같아 보였다. 부럽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 우리 돼지 삼형제는 그 기사를 보며 말을 아꼈다. 왕경태와 지욱이의 죽음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지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2005년 1월은 무척이나 추웠다. 나는 민수에 이어 랩에서 두 번째로 결혼식을 올렸고, 두 번째로 유부남이 되었다. 민수와 나는 더 이상 기숙사에 살지 않아도 되었다. 기혼 대학원생에게는 대학원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학교 측에서 제공해 주기 때문이었다. 시철이는 아내가 될 패션 디자이너와 매일 전화기를 붙들고 결혼식을 준비했다. 남순이는 대학원 입학을 위해 토플 시험에 올인을 했고, 수준이는 그런 남순이를 옆에서 도와주며 캠퍼스 커플을 지속해 나갔다. 누가 봐도 둘은 곧 결혼할 것 같았다. 효영이는 급기야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입을 했고 대회에 나가 우승 트로피를 가져왔다. 랩에서 제작했으나 아무런 표현형이 없어 정상 마우스와 다를 바가 없는 넉아웃 마우스는 모두 그들의 정자를 얼리는 방법을 통하여 정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순이가 만든 어떤 유전자에 대한 과발현 마우스와 민수가 만든 조건부 넉아웃 마우스의 수가 막대해져서 (민수는 장에서, 수준이는 뇌에서, 그리고 나는 유방과 피에서 민수가 표적한 유전자를 조건부로 넉아웃하는 마우스를 교배하고 있었다) 우리는 허구한 날 마우스 꼬리에서 DNA를 뽑고 PCR을 돌리고 전기영동을 실행했다. 랩에는 유기용매인 페놀 (Phenol)과 클로로포름 (Chloroform) 냄새가 진동했고, 세포 배양실 안에서는 ‘챠우챠우’가 울려 퍼졌으며, 자정이 지나도록 실험실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나의 대학원 3년 차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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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히어로(필명)) 등록일2024.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