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둥이 연구행정 도전기] 혁신 신약의 이름으로
복직하고 한 달 반 지난 시점인 22년 10월. 순환보직으로 직원들을 재비치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부서에서 내가 모르는 일을 가르쳐 주고 마음 상할 때마다 위로해 주던 선배 같던 후배의 전보가 결정 나자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허전한 마음 못지않게 그 후배의 업무 중 하나라도 내게 인계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마음도 컸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그중 몇 달만 맡으면 되는 일 하나가 주어졌다. 딱, 23년 6월까지만 담당하면 되는 정부 주관 과제 하나를 받게 되었는데 이름도 멋진 ‘혁신신약파이프라인발굴사업’이었다. ‘과제’라는 단어는 매력적이었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부담스럽기도 했다. 비용정산과 과제책임자의 최종 보고 과정만 서포트하면 된다기에 ‘어떻게든 되겠지’를 기도문처럼 읊었다. 후배가 말했듯, 처리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였다. 그녀는 또한 내가 필요할 때마다 열심히 가르쳐 주어 수월하게 6월까지 갈 듯 보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23년에 들어섰다. 팬더믹으로 금지되었던 많은 대면 행사들이 허용되고 사회적으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직장인의 한 사람으로서는 서류만 들여다보고 마무리할 줄 알았던 나의 과제가 성과보고회를 열 수 있게 되었다는 가슴 벅찬 반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기쁘다고 하긴 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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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흑심을 앗아간 ‘혁신신약파이프라인 발굴 사업’을 소개하자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관사업으로 글로벌 수준의 혁신신약 개발을 목표로 총 4년간(2019~2023) 진행된 산학관연계 사업이다. 국내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바이오 및 합성신약 파이프신약개발 초기단계 지원을 통해 IND 신청 및 기술이전이 가능한 유망 후보물질 발굴이라는 사업 목표로 한다. 총 24개 단위과제를 선정했고 단계 평가를 통해 최종 12개 과제를 지원했으니, 성과보고회가 필요함에 실무자로서 매우 동감하는 바였다.
내가 책임자의 위치도 아니고 기업에서처럼 성공에 대해 압박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복직한 지 얼마 안돼 감 잃고 일을 망쳤다 소리는 듣기 싫었다. 우선 회사에서 진행했던 각종 심포지엄들을 복기해 보았다. 성과보고회를 ‘혁신 신약 파이프라인 미니 쇼케이스’로 분위기로 만들기로 했다. 다행히 팀장님의 지지와 착한 후배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행사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막내 이모뻘 되는 선배가 안쓰러웠는지 팀원들은 내부 프로세스 처리에 더듬한 나를 위해 지도 편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제작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 나의 시대착오적일 뻔한 심미안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었다.
성과 보고회 이름을 작명하는데 함께 일하던 인턴의 공이 컸다. 국내 신약 사업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행사 이름이 짓자고 하니 ‘혁신신약파이프라인UP’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딱딱하게 굳은 내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신선한 작명 센스였다. 행사의 이름은 곧 키메시지로 연결돼 보도자료, 발표자료, 브로셔, 사전등록 홈페이지등에 잘 녹여냈다. 또한, 행사장 배너들은 희망과 치유를 상징하는 보랏빛에 가까운 남색(쪽빛)에 열정과 창의성을 상징하는 오렌지색을 포인트로 배치해 앞으로 우리 신약개발지원센터가 연구자들과 함께 혁신적인 신약개발에 활력을 불어넣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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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개발에 대한 업계의 뜨거운 관심이 느껴진 순간
장소가 서울이니 그래도 어느 정도 사전등록하신 분들이 오시겠지 하면서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다행히도 목표보다 더 많은 250여분 정도가 참가해 주셨고 기자분들도 현장취재를 와주셨다. 게다가 류마티스 관절염, 간암치료제, 패혈증치료제 등 다양한 치료영역에서 혁신적 신약 개발에 도전하시는 연구자분들의 깊이 있고 세련된 발표를 보면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힘들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치유되는 것 같았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과제에 선발되실 정도로 출중하신 분들을 모셔놓고 완벽한 무대를 꾸미고 나니, 내가 꼭 신약계의 아이돌들과 큰 무대를 치른 기획자가 된 느낌이랄까. 짧은 시간 동안 준비했지만, 여러 사람, 특히 젊은 동료들과 아이디어를 나누고 협동한 하면서 배운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약밥 먹은 지 20여 년… 여러 관계자들에게 국내 우수한 연구진들이 가까운 미래에 선사할 혁신신약개발에 대한 청사진의 시사회 한 편을 준비한 것은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혁신 신약’이라는 합성어는 나의 20~30대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2001년도에 아스트라제네카에 입사하면서 제약업계에 발을 들였으니, 국내 제약시장의 신약 탄생에 대한 염원을 꽤 오랜 기간 지켜봐 왔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의약품은 박카스였고, 전문의약품들 중 상위 매출 순위는 다국적 제약사 제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2003년경 LG 화학에서 개발한 국내 최초 퀴놀린계 항생제인 팩티브가 미 FDA진출에 최초로 성공하면서 국내 기술의 진일보를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이때, 신문기사 등에서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여 회사의 운명을 바꾼 약으로 아스트라(아스트라제네카의 전신)의 로섹(성분명:오메프라졸)이 많이 언급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약이 출연하길 바란다면서.
2004년, 운 좋게도 과학전문기자님과 함께 스웨덴 고텐버그에 위치한 아스트라제네카 본사 연구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특히, 그 연구소는 로섹(성분명: 오메프라졸, 이하: 로섹)의 탄생지로 아스트라제네카에 근무하는 직원으로서 한 번은 가보고 싶은 성지였다. 스웨덴 고텐버그 연구소의 규모는 생각이상으로 거대했다. 게다가 과학전문기자님과 함께 방문한 덕분에 본사에서 로섹 개발자인의 에나 칼손(Enar Carlsson) 박사님을 뵐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칼손 박사님께서 로섹 개발 때 쓰시던 연구 노트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낡은 노트의 질감과 약간 번진 잉크가 준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아스트라제네카에서는 산학 협력을 강조하며 연구원들의 겸임교수직을 독려한다며 칼손 박사님도 회사에 학생들을 가르치신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기업에서는 성행하는 일은 아니었던 지라 기자님도 나도 매우 인상 깊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은 대규모 다국가 임상시험 3상이 시행되는 국가로 각광받기 시작했는데 본사 임원진은 그 이유로 한국의 우수한 의료진과 훌륭한 병원 인프라를 꼽았다. 그러나 한국이 글로벌 신약의 초기임상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 BEST IN CLASS 나 FIRST IN CLASS를 개발해 낼 수 있을지 본사 연구소에 방문한 내내 너무 요원해 보여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래도 소화기 질환 환자들의 삶을 바꾼 에나 칼손 박사님의 실물 영접은 내 커리어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마 그 순간이 있었기에 문과생인 나는 이 업계에서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머물고 있는 게 아닐까?
2005년 아스트라라제네카는 미국 영업사원부터 시작해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룬 데이빗 브래넌 님이 CEO로 영전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더 놀라운 소식은 첫 해외 출장지로 한국을 선택하셨다는 통보였다. 한국이 그렇게 전도유망하다고? 본사의 그런 판단도 놀라웠지만 보건복지부와 한국에 3년간 260억 원의 투자하겠다는 MOU를 맺겠다는 결정이 더 신기했다. 이는 보건복지부가 최초로 외자유치에 성공한 사례이기도 했다.
MOU내용 중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는 보건산업진흥원과 함께 수행한 ‘가상신약개발연구소’였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한국의 역량 있는 연구자들의 약물개발 초기 연구를 돕는 데 있었다. 한국에 연구소를 직접 오픈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제안서를 스웨덴 아스트라제네카 본사에서 평가한 후, 자사 소속의 연구자와 선발된 한국 연구자들을 파트너로 맺어주었다. 서로 교류하며 연구를 진행한 후, 1년 후 한국 연구진들은 스웨덴 아스트라제네카 연구소를 방문해 파트너였던 연구원과의 워크숍을 진행하며 프로그램이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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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개발하는데 15년 정도의 시간이 투자된다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뭐 그리 효과가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도 했지만, 참여하신 연구진들의 만족도가 꽤 높았다. 그때만 해도 해외 본사랑 화상회의를 하려고 하면 꽤나 복잡하고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해외 연구진들과 교류를 활발하게 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기초과학을 하시는 분들이 학계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산업계에 있는 동료들과 인맥을 넓히는 기회가 드물었을 것이다.
한국이 임상 강국으로 발돋움했다고는 하나 신약 개발단계에 있어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기초과학 연구자분들에게는 더욱 아스트라제네카와 같은 세계적인 제약사의 연구자들과의 교류는 글로벌 트렌드를 이해하면서 시각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였을 것이다. 지붕은 없지만, 기둥도 없지만, 광케이블을 타고 세워진 연구소. 가상신약개발연구소. 홍보를 맡은 프로그램이나 제품을 꼭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는데, 나는 이 프로그램만큼은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랑했었고 열심히 했었다.
그 당시에도 물론 기초의학에 대한 다양한 정부의 지원이 있었겠지만, 다양한 관계자들의 교류로 생태계를 구성해 나간다는 컨셉이 확실히 보이는 사업들은 눈에 크게 띄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혁신신약파이프라인발굴사업’과 같이, 단계를 나눠 유효성 평가 과정을 한차례 지원하고 그다음단계로 사업화를 위해 BD, IND관련 컨설팅, 회계 관련 자문 등 연구자에서 사업가로 변모하려는 분들에게 다양한 지식을 접할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들의 출연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업계에 몸담을 때는, 왜 정부에서 생태계를 구성한다며 스타트업들을 지원하지? 불공정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로 우리나라에 없는 것은 전 세계 어디든 하루 이틀 만에 가서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세상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고 보건 안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히, 아직도 치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중질환의 경우 해외 공급망에만 치료제를 의존할 수는 없다. 국내 기술로 혁신적인 신약에 대한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될수록 ‘혁신신약파이프라인발굴사업’ 같은 신약개발 지원과 사업화를 연계하는 정부 과제들이 확대되길 바라며 우리 재단과 같이 노하우가 쌓인 기관들의 활약도 기대하게 된다.
‘혁신산업파이프라인업’ 행사 이후, 한 개의 교육프로그램을 더 진행하고 과제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사업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할 수도 없는 실무자면서 무슨 배짱인지, 발표 슬라이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내 의견을 강하게 표출해 연구책임자분과 팀장님 얼굴을 흙색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글에는 다 적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생방송 모노 시트콤 드라마를 방불케 했던 과제 실무자 업무는 다행히도 A등급을 받으며 해피앤딩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쇼가 끝나고 나면 아쉬움은 꼭 남는 법이다.
이 과제에 임함에 있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나의 좁은 관점이었다. 아무리 기간이 짧았고 내가 경험이 없는 분야이긴 하나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관점이 아닌 태스크 매니지먼트 관점에서 접근한 면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갑자기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는데 급급했고 전체 과제에 대한 조망은 부족했던 듯하다.
일을 마무리하고 생각해 보니, 과제 실무자는 연구자들이 편하게 과제를 진행하실 수 있도록 길을 내드리는 사람이었다. 길을 내려면 당연히 큰 지도를 펼쳐서 지형을 봐야 한다. 작은 행정적인 절차들을 깔끔하게 하는 것이 자갈을 걷어 내는 일이라면 과제의 큰 방향을 이해하고 과제의 이정표가 될 큰 행사들이 있을 때 그에 맞게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은 길을 잡는 일이다.
그 예로, 성과발표회의 경우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내가 좀 더 사업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면, 행사를 기획함에 있어서 앞으로 이 행사의 성과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까지 좀 더 내다보고 자료를 구성했을 것 같다. 연구책임자의 발표자료 준비를 도와드릴 때도 내 의견이 생경하게 들리지 않도록 더 잘 설명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서로 이견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상하 간에 건전하다는 뜻이라며 합리화시켜보지만, 그래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럽다.
만약 다시 과제 관리를 하게 된다면,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관점을 장착하고, ‘스토리가 있는 연구 지원 사업’을 해보고 싶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사업명 자체를 손댈 수 없더라도 프로그램들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목표를 드러내면서 특색 있게 브랜딩 할 방안을 생각해 볼 것 같다. 영화 007 시리즈 정도까지 벤치마킹 하기에는 너무 품위가 없어 보인다면 임상시험의 작명 방법 정도를 도입해 봄도 좋을 듯하다. 특색 있는 이름을 붙여 그 임상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잘 드러내곤 하는데 정부사업에도 활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업 하위적으로 이루어지는 마일스톤들에 대해서 유기적인 일임을 드러낼 수 있다면 참여하는 사람들도 내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더 확실히 알기에 더 즐겁게 연구에 임할 수 있지 않을까? 후속 사업을 추진하기도 더 설득력이 생기고 말이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위 과제 담당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연구기관 또는 연구지원기관에서 일하는 행정직들이 하는 역할은 단순히 서류를 처리하고 시스템에 전산자료를 입력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연구행정연구회가 출범한 이후 매달 전문성 있는 주제를 선보이며 세미나를 열어 주시는 데 큰 감사함을 느낀다. 연구행정가로서 내가 연구자들에게 제공하는 작은 서비스들이 우리나라에서 혁신적인 신약이 나오는 시간을 1초라도 절약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하는 일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혹시, 오늘 하루, 이런저런 일에 치이고 내가 뭘 하고 사는 건지 회의감이 드셨던 연구행정가가 계셨다면, 나의 작은 경험을 읽고 힘을 내셨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내가 하는 일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며 연구 현장에서 기여한 나 자신을 크게 칭찬하시길 바란다. 우리가 보인 무형의 전문성이 모여 연구자의 아이디어가 혁신 신약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분홍 안내선이 될 수 있다고 믿어보며, 오늘도 내일도 살아있는 노병은 성장할 것이다.
참고자료
1. ‘혁신신약파이프라인업’ 성과 보고회 보도자료: https://www.kbiohealth.kr/board.es?mid=a10402000000&bid=0006&act=view&list_no=10247&tag=&nPage=1
2. Dr. Enar Calsson 논문: https://pubmed.ncbi.nlm.nih.gov/1256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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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김하연) 등록일2024.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