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둥이 연구행정 도전기]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제약회사에 근무할 때 Business Development(이하 BD)라는 부서가 있었다. 2000년대 초 중반 다국적 제약사의 BD는 주로 영업력이 훌륭한 국내사와 협업 계약을 맺고 회사이익 극대화에 기여했다. BD업무를 하시는 분들의 특징을 보면, 희로애락이 드러나지 않는 항상 안정적인 표정, 탁월한 영어실력, 과묵함이었다. 업무에 대해서 동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시기보다는 C 레벨들과의 이야기가 잦으시니 그분들이 하시는 일에 대한 성과는 나중에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나 알 수 있었다. 길고 긴 기다림 속에서 BD 전문가는 항상 은밀하고도 위대한 작전을 수행했다. 국내사들과 영업 파트너링을 통해 주요 제품들의 국내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일도 중요했지만 국내 기업이 생산한 우수한 품목을 다국적 제약사가 파이프라인으로 유입시켜 해외 시장으로 나가는 판로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BD는 나날이 각광받는 기능으로 자리 잡아갔다.
산, 학, 연의 초기 연구를 돕고, 특히 후보 물질의 최적화 연구 지원에 특장점을 지닌 신약개발지원센터에 근무하면서 BD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 정말 몰랐다. 보통 PR팀이 BD에 관여되는 경우는 계약서가 작성되기 직전이었으니 분석이나 평가 중심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기관과 BD라는 용어의 거리는 멀게 느껴졌다. 이전에 참여했던 ‘혁신신약파이프라인발굴사업’에서도 초기 후보 물질 연구에 대한 BD 컨설팅 서비스를 과제 프로그램 중 하나로 두고 있는 것이 신기했었지만 과제를 수행하면서 약을 개발하기 전부터 BD활동에 자원을 투입해야 함을 이해했다.
2023년 연간 일정을 보다가, 한 여름에 제주도에서 열리는 ‘인터비즈 바이오 파트너링 & 투자포럼’(이하: 인터비즈) 행사에 참여한다는 계획이 눈에 띄었다. 당시 센터의 대외협력 업무를 맡고 있었으니, 내 업무였다. 7월에 제주도라니. 생각만 해도 등에 땀이 흘렀다. 제약회사에 근무하면서 라이센스 인-아웃 관련 협약식은 치러봤어도 여러 업체들이 모여 파트너링 기회를 모색하는 현장에는 처음 가는 것이니 궁금증을 가져보기로 했다.
행사 참여 전 사람들한테 그 행사의 모습에 대해 물어보았다. 한 회의실에서 몇 백 명이 삼삼오오 짝지어 떠들다가 종 치면 헤어져 다른 회의실에 다시 헤쳐 모여 새로운 사람들과 짝지어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머릿속에 그다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었다. 천고가 높은 회의장에서 얼마나 소음이 심할 것이며, 얼마나 산만할까 싶었다. 은밀하고 위대한 작전을 야단법석 속에서 수행한다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인기도 있고 역사도 긴 행사라고 했다. 여러 가지로 이해가 착착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4월 즈음되자 드디어 센터 차원에서 인터비즈라 참여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센터 내에서 어떤 기술을 중심으로 누가 소개하러 갈 것인지 치열하지만 지루한 논의에 들어갔다. 파트너링 행사에 대해 연구원들의 관심이 이렇게 높을 줄이야. 인터비즈에서 소개할 기술과 참가 인원 선정은 생각보다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던 모양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문의와 피드백이 많아 준비 과정에서부터 피로감이 있었다.
인터비즈를 준비하는 나는 흡사 여행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가이드 같았다. 숙소 잡고, 인터비즈 현장에서의 미팅 일정을 정리하고, 긴급 연락처를 작성하고, 기술 소개자료를 만들고 등등 기술을 소개할 연구원들이 제주도 행사장에서 어찌 시간을 보낼지 준비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다행인 것은 행사장 밖에서의 일정까지는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직원들과 함께 하는 행사를 준비해 본 분들은 알 것이다. 단체가 움직이는 행사에서 저녁 이후 스케줄까지 잡아야 하는 경우, 어떤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나마 행사장 안만 책임지면 되니 이런 경우를 두고 천만다행이라고 한다.
행사 준비의 첫 시작은 사이트가 열리자마자 숙소부터 잡는 것. 어디가 더 행사장과 가까운지 의견은 들었으나 대한민국 국민들의 광클릭 실력은 인터비즈 사이트에서도 드러났다. 직원들이 선호하는 곳보다는 약간은 거리가 있는 곳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최적화, 분석, 평가, 공정 4개 부서 10개 팀으로 이루어진 신약개발지원세터에서 각 팀의 대표 기반기술 1개 정도를 소개하는 게 초기 계획이었지만 실제 13개의 기반기술을 소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덕분에 책자에 소개될 기술의 개수도 늘어났으니 전년도에 사용했던 기술 소개 책자를 다시 손봐야 했다. ‘내 기술을 책자에 넣어 준다면 꼭 성과를 내겠다’는 장문의 연애편지 급 메신저 쪽지 로비를 몇 건 받기도 하며 과정은 고단해도 적어도 책자를 만드는 마음은 즐거웠다. 숙소도 잡았고, 여행지에서의 프로그램도 결정되었고, 소개책자도 그런대로 만들었다. 제주도로 갈 일만 남았건만, 16명의 인원이 움직이는 출장이다 보니 뒤통수가 찌릿, 마음이 묵직했다. 제발 아무 사고도 없이 다녀오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출발 당일, 지하철 첫차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복직한 지 1년 정도가 된 시점이었는데 휴직 5년간 쌓아 놓은 에너지는 순식간에 방전되었다. 하루에 200km를 고속열차를 이용하고 오랜만에 일을 하려니 힘들기도 했다. 눈을 떠도 감은 것 같은 상태에서 공항에서 졸다가 비행기 라스트 콜을 겨우 듣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제주도에 도착하니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느껴지면서 정신이 나기 시작했다. 공항으로 마중 나와준 행사를 같이 준비한 후배를 만나자 조금 안심이 됐다. 꼼꼼하기 그지없는 후배이니 큰 의지가 됐다. 동시에 직장생활 20여 년간 적용된 원리가 급 떠올랐다. 일이 시작되면 끝은 반드시 있다는 것.
불안한 마음을 달래 준 건 행사장으로 향하는 길에 본 성산일출봉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돋이 명소로 꼽히며 세계 자연유산으로 선정된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면서, 조직위원회가 장소 한번 전략적으로 섭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색적인 제주도에서, 그중에서도 용암이 만든 높은 봉우리, 일출이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모여 의기투합하며 미래를 모색하는 그림. 참으로 재미없는 주제 그 자체인 회의하는 모습들을 낭만의 한 장면으로 만들 수도 있는 조명, 배경을 갖춘 셈이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정말 사람이 많았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데도 더웠다. 행사장 입구에 있는 키오스크에는 등록을 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CD플레이어를 쓰다가 아이팟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이제 등록해 주는 사람은 찾을 길 없고 내 키만 한 상자 곽에 각종 정보를 콕콕 찍어야만 행사장 등록이 가능하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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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 가기 전에 사람들에게 들었던 설명이 눈으로 보니 확실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인터비즈 행사 진행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정말, 종이 땡 치면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자신이 가야 할 행사장으로 향했고 천장이 뚫어질 정도의 데시벨로 대화를 나눴다. 또 종이 땡 치면 다시 어딘가로 흩어졌다. 복도까지 가득 찬 탁자와 의자는 빌 시간이 없이 항상 사람과 그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4분의 3박자에 맞춰 왈츠를 추다가 곡이 끝나면 정중히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떠나는 사교 파티장 같은 생동감이 있었다. 길 가다 만나는 사람들은 인사와 명함을 끝도 없이 나눴고 간식과 아이스커피도 쉴 새 없이 제공됐다. 헬스케어 업계 관계자들을 고루 다 모아 놓은 느낌이고 행사의 백미가 맥주파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행사 주최에서 요청한 포스터들은 포스터 전용 키오스크를 통해서 방문객들에게 전시되고 있었는데, 주인도 없는 포스터를 덩그러니 본다는 게 행사장에 가기 전에는 그다지 공감가지 않았었다. 실제로 이용해 보니 생각보다 편리했다. 키오스크 하나에서 내가 원하는 키워드와 관련된 다양한 포스터를 열람할 수 있었다. 심지어 화질도 깨끗해 인쇄한 포스터보다 훨씬 가독성이 높았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발견했다! 가끔 아무도 없는 키오스크에 들려 신약개발지원센터 기술과 관련된 포스터를 몰래 띄어 놓는 것. 유치한 방법이지만, 행사 방문객들에게 광고 효과가 조금은 있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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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 다수가 움직이는 행사치고 변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현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항상 발생하곤 했다. 일정이 갑작스레 취소되기도 하고 잡히기도 했다. 게다가 참가한 직원분들이 무심코 던진 현장에서의 제안이 나에게는 재앙이 되기도 했다. 수용도 거절도 그 어떤 결정을 해도 함께 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을 때 지혜롭게 대처하기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참 어렵다.
여기서 행정직이 코디네이터로 분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연구원들께 드리는 꿀팁 방출! 현장에서 일정에 없던 이벤트를 제안할 수 있다. 다들 좋은 뜻으로 제안하지 코디네이터로 온 사람을 곤란하게 하려고 제안하는 경우는 없다. 모두가 알고 있다. 다만, 담당자에게 좋은 의도임을 태도로 보여주자. 본론을 꺼내기 전 ‘예정에 없었지만…. 혹시….’라며 군더더기 말로 친절을 더한다면 상황 흐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강렬한 눈빛과 ‘너는 내가 이런 것 물어볼 줄 몰랐니?’라는 뉘앙스의 말을 보탠다면 회사 복귀 후 한동안 서로 서먹해질 수 있다. 참가자 입장에서 전달하고 싶은 후기가 칭찬이 아닐 경우, 최대한 건조하게 전달하자. 예를 들어 다른 참여 기관의 좋은 사례를 발견해서 행사 현장에서 꼭 얘기해 주고 싶다면 팩트에 기반해 최대한 감정 빼고 가볍게 알려주는 것이 좋다. 행사 이후에 메일 등으로 환기시켜 준다면, 보고서 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 매우 고마운 일이 될 수 있다. 단, 현장에서나 행사 후 비교하는 말투의 코멘트 사절! 행정직의 서러움을 자극할 수 있다.
행정의 전문성은 평시에는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한다. 심지어 전공불문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개인적 경험이지만, 기업에 근무할 때 이러한 이유로 서러웠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자격증이나 학력 못지않게 한 개인이 경력에서 쌓은 전문성을 상당히 존중해 주고 심지어 행정분야는 철저하게 경력직만 채용하는 다국적 기업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PR전문가로서의 내 역량에 대한 평가를 주 업무인 기업홍보 분야의 성패가 아닌 살짝 엉뚱한 부분에서 들은 적이 있다. 어쩌다 하는 직원대상 행사에서 예산 절감을 위해 항상 주문하던 커피의 브랜드를 바꿨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빅마우스인 몇몇 분들이 공개적으로 불평을 드러내면서 발표 내용 준비로 밤을 지새운 나는 노고는 헛되어 보였다. 직원들 입맛에 맞는 커피 하나 제대로 주문한 센스 없는 PR 매니저. 그게 그날의 나에 대한 평가 중 2할은 차지한 듯하다. 가족행사 치르면서 칭찬받기 어렵듯 직원들을 인솔하는 행사도 그렇다. 이런 사정을 이해해 주고 어차피 크게 행사 영향을 주는 큰 문제가 아니라면 동료를 위해 말할 타이밍이나 방식을 조금 조정하는 것이 어떨는지. 몰라서 못했지 알면서 일부러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어봐 준다면 그 자체로 동료는 진한 동료애를 느낄 것이다.
인터비즈 행사가 끝나고 나니, 파트너링 행사들에 대한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각 학교, 기업들이 자신들이 보유한 유망기술들을 소개하는 파트너링 행사 광고를 적극적으로 집행하는 모습을 보니 오픈이노베이션에 대한 소구가 도처에 깔린 모양이다. 또한 로슈, BMS, 노보노디스크와 같은 세계 적인 제약사들도 우리나라 스타트업들을 대상으로 오픈이노베이션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기업이나 협회뿐만 아니라 보건산업진흥원, KOTRA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파트너링을 지원하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 의약품 연구 개발 수준이 이제 누군가와 협업할 정도로 크게 향상되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BD 논의의 장(場) 형태가 점점 다양해지고 오픈이노베이션이 활성화되는 것은 장기간의 협력이 요구되는 파괴적인 혁신을 좀 더 효율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업계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AI가 사람이 할 일의 상당 부분을 대신해 주고 비대면으로 시차를 극복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세상임에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겠다고 제주도까지 찾아오는 비효율성을 감수한다. PC가 보급되고 워드 프로세싱이 발달하면서 ‘종이 없는 사무실’이 실현될 줄 알았지만, 인쇄가 쉬워지면서 오히려 종이의 소비가 더 늘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비슷한 원리 아닐까? 예전에는 얼굴 보고 물어볼 정보를 이제는 구글링을 통해 사전에 충분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사람을 만나 핵심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게 되었다. 누군가 판을 깔아준다면 안 갈 이유가 없다.
인터비즈 홈페이지에 의하면, 2002년 1회 때 55개의 사업이 제안된대 반해 21회인 2023년 1255개 사업될 정도로 사업 규모로 발전했다고 하니 관계자들 간의 교류의 갈증을 해갈할 파트너링 행사는 앞으로도 더 활성화되리라 보인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면, 행정직의 업무를 모두 AI에게 내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기술의 도움으로 스케줄을 잡기 쉬워졌으니 더 효과적인 미팅을 위해 에너지를 쓸 여력이 생겼을 것이니 말이다. 앞으로 연구행정가들에게는 AI는 보유할 수 없는 센스로 오픈이노베이션의 소구가 있는 당사자들을 매끄럽게 이어줘야 하는 파티플래너나 커플매니저와 같은 역할까지 주어질 것이라 조심히 예상해 보며 그에 맡은 다양한 역량이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BRIC(ibric.org) Bio통신원(김하연) 등록일202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