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둥이 연구행정 도전기] 업무의 회전목마
올해 2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은 대전 민생토론회에 참여해 연구 행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통령은 정책, 회계, 노무, 홍보, 보안 등 행정의 세부적인 분야를 언급하면서 연구행정 전문성 강화를 위해 정부 출연 연구기관 관계자들의 교육, 교류등에 힘쓰겠다고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연구행정을 과제 관리로만 한정 져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좀 더 폭넓게 본다면 연구과제를 수행하는데 수반되는 연구를 제외한 모든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기업 등 조직을 운영할 때 성과를 발생시키기 위해 활용되는 전략적인 행정 활동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굉장히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지원하는 대상의 특징이다. 연구원들은 각자의 전문성이 매우 뚜렷하고, 꾸준한 학습을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에 적응해야 하는 직군이다. 개인의 역량을 위한 학습이 아니라 학습자체가 업무 중 하나인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바로 이들을 지원하는 업무가 연구행정이다.
연구행정의 전문성이 강조된 이유를 좀 삐딱한 시각으로 보자면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는 뜻도 될 수도 있겠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야기할 정도면, 중요한데 간과된 부분 아니었을까?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환영할 일이면서도 속상한 일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나 공공기관에 속한 연구지원 기관은 순환직무제도를 활용해 행정 인력들의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즉, 공공분야의 연구행정에 발을 들여놓으면 몇년에 한번씩 새로운 업무를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도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연구행정분야의 전문성 강화라는 측면을 볼 때, 이 제도는 스페셜리스트를 탄생시키는데 도움이 될까? 아니면 모두를 제너럴리스트로 만들어 비효율의 원인을 제공하는 제도일까?
공공기관에서는 보기 드물게 나는 한 가지 일을 20년 정도 한 경험이 있다. 그 이유는 일반 기업에서 몇 번의 이직을 거치면서 한 가지 업무를 지속했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근무했었던 다국적 제약사들은 개인의 경력경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역량개발을 독려하는 것을 경력개발의 핵심으로 봤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업무를 나선형으로 깊이와 폭을 확장시키면서 커리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정한 경력경로대로 경력이 개발된다고 회사가 보장해주진 않는다. 경력경로는 큰 밑그림으로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그래도 도착지를 어느 정도 생각하고 출발을 하니 경로를 변경하더라도 급작스러운 경우는 드물다.
나는 헬스케어 PR 전문가로 성장하겠다는 경력경로 정하고 언론 활동 중심으로 기업이나 브랜드 명성관리를 경험해 본 후, 헬스케어 환경을 이루는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관계자들, 예를 들면 환자단체, 다양한 협회등과의 일을 해보며 기업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었다. 약 20년간 일하면서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경력을 쌓을 수 있었지만, 그 깊이나 넓이가 내가 원하는 만큼 고루 달성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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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폐암, 유방암, 전립선암, 위식도역류질환, 조현병, 다발성경화증, 통증관리. 2001년부터 내가 관여했던 프로젝트들의 주제들이었다. 이 정도면 내가 제약업계 PR전문가였노라고 말해도 너무 과장한 것은 아니겠지?
PR일을 시작한 지 딱, 만 10년 즈음되었을 때로 기억하는데, 진지하게 이 업무가 내 적성에 맞나 고민하게 됐다. 주변 동료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적성에 안 맞으면 어떻게 10년씩이나 그 일을 하냐’며 내 고민을 슬럼프나 푸념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 고민을 잠시 접고 1~2년 지난 시점쯤, 내부에 관심 있던 업무가 잡포스팅(Job Posting: 어떤 자리가 비었을 때, 회사 내부적으로 관심 있을만한 직원이 지원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되었다. 그 업무에 지원해 볼 생각이 없냐는 선배의 질문을 받았을 때 선뜻 지원하게 되질 않았다.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겁이 났기 때문이다. 10년 넘는 기간의 경력은 도전하는 데 있어서는 큰 장애였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약 10년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나마 아는 일, 나에게 안전한 일을 택하며 '장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재단에 입사할 때 가장 마음에 드는 혜택은 순환직무제도였다. 신약개발지원센터 운영지원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안 해 본 일을 한다는 생각에 신이 났었다. 운영지원팀은 센터에 근무하는 연구원들과 경영지원본부의 가교역할을 하는 곳으로 각종 행정일이 모이는 곳이었다. 즉, 모든 일을 얕게 경험하기 좋은 곳이었다. 나처럼 한 가지 일만 오래 한 사람에게는 참 좋은 자리였다. 아무래도 PR 경력이 길다 보니 센터의 대외협력과 관계된 일을 많이 맡게 되었다. 그 이후, 주간업무보고, 주요 사업계획, 과제 운영 등을 맡으며 여러 가지 업무를 조금씩 맛볼 수 있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한다는 장점은 분명했지만 아무래도 깊이 있게 한 가지 업무를 파고드는 재미를 알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갈증도 컸다. 운영지원팀에 있으면서, 5년만 젊었어도 기획에 도전해 볼 텐데, 교육사업에 도전해 볼 텐데, 회계에 도전해 볼 텐데…'볼 텐데'가 입에 붙을 정도였다. 나의 ‘볼 텐데’ 타령을 누군가 들은 건지, 기대한 시점보다 일찍 부서를 옮기게 됐다. 발령받은 부서는 나의 ‘... 볼 텐데’ 중 한 팀이었던 구매물류팀이었다. 내 기존 경력을 봤을 때 굉장히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노바티스에 근무할 때, 프로페셔널하게 업체와 네고하던 구매팀 마르타 선배를 떠올려 보며 나도 잘해 보리라 굳게 결심했다.
새롭게 맡게 된 구매계약과 물품관리 두 업무 모두 절차와 법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시의성이 생명이었던 PR 업무와는 상당히 대척점에 있었다. 업무가 절차나 법이 중요하다는 특징 때문에 재단에서 꽤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어도 아직도 전산팀, 회계팀, 때로는 연구팀을 괴롭히는 실수를 하곤 한다. 이 와중에도 정말 신기하게도 구매 계약업무가 참 재밌다. 신약개발지원센터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일하면서 구매하는 품목들을 볼 때마다 그 다양함에 항상 놀란다. 우리 재단으로 인해서 많은 업체들과 새로운 거래가 생겼고 그 업체들이 납품한 물품과 서비스로 연구원들이 외부 기관들의 연구 활동을 돕고 있다. 거창하게만 느껴지던 산업 생태계의 조성이 엄청나게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거래’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산업의 생태계가 생성되는 시점이니 말이다. 처음으로 내 눈으로 세포들을 배양하는 칵테일 색깔 배지들을 보았고, 엄지손톱만 한 팁 속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엔자임들이 들어있다 하니 바이오의약품 개발 과정의 오묘함과 발전된 기술을 느끼며 순간순간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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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가장 집중적 직무 교육을 받아본 올해 2분기. 배움엔 끝이 없다.
구매물류팀으로 옮기고 또 한 번 크게 놀란 것은 우리 정부의 ‘ 전자정부 실현’에 진심이다. 나라장터라는 정부가 만든 구매 시스템을 사용할 때마다 편하네, 불편하네 툴툴거렸지만, 믿고 안심할 수 있는 국가가 만든 구매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 시스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또 얼마나 많은지. 순환근무제도가 없었다면 놓칠 뻔한 것들을 배우며 시각의 넓이와 생각의 깊이가 성장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기능적으로는 분명 구매업무를 오래 한 사람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나는 현재 ‘구매팀 친절한 김선임’으로 발전하고 있다. PR업무를 하면서 배운 내부 고객에 대한 개념, 조직의 명성을 우선시하는 자세를 바탕으로 한 외부 관계자들을 대하는 자세는 내가 민원을 처리할 때 큰 도움이 되곤 한다. 그렇다면, 현 상황을 두고 연구행정가로서 전문성이 희석되었다고 봐야 할 것인지 아님 강화되는 중이라고 봐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전문성에 대한 정의를 구글링해 보면, 전문성을 ‘일반적으로 특정 영역의 고도화된 지식과 기술로 일반인들이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의 높은 성과를 내는 능력’이라 정의한다. 일만 시간의 법칙을 적용했을 때 3년 8개월 정도를 한 업무에 쏟아야 전문성이 쌓인다고 한다. 이 기준을 놓고 봤을 때 순환근무제도가 연구행정가들의 전문성에 도움이 되는 제도인지를 결론내기는 참 애매하다.
이번 글을 쓰기로 결정하면서 순환근무에 자료를 살펴봤다. 주로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정부기관의 조사 결과와 신문기사들이었다. 공무원들의 경우, 2년마다 업무를 바꾸고 있었는데 순환근무에 대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났다. 그 이유로 전문성이 쌓이지 않는다는 답이 가장 많았다. 순환근무의 장점은 한 가지 업무를 지속할 경우 발생하는 업무에 대한 매너리즘 및 관계자들과의 유착으로 부정부패 발생의 가능성을 낮춘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리고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면서 직원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무를 찾을 수 있다는 점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업무가 익숙해질 때 즈음 다시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고, 인수인계등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업무 대응이 느려지고 조직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단점 또한 많이 지적했다.
점심식사를 하는 길에 10명 정도의 동료들에게 물으니, 순환근무제도에 대한 필요성에 매우 동의했다. 업무를 이동하는데 적정한 기간으로 3년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1년 차에 배우고, 2년 차에 익숙해지고 3년 차에 익숙함을 발휘한 후 약간 지루해지기 시작할 때 새로운 업무를 배우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동료들의 대답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문제점이 보이는 기간은 오히려 익숙해지기 전인 1~2년 차이고 3년 차 정도가 되면 익숙해져서 그다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매너리즘 빠지기 직전인 4년 차에 새로운 업무를 맡는 것이 조직이나 개인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었다. 3년에 한 번씩 업무를 순환하는 것은 좋으나 방향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내가 직접 경험을 해본 결과, 순환근무제도를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면, 오히려 깊이 있는 전문가를 키우는데 더없이 좋은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 경력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좀 더 연관성 있는 업무를 연결하고 어떤 분야의 ‘통(通)’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구매 업무, 회계업무, 예산업무, 감사업무 이런 방향으로 경력경로가 쌓이면 내규 및 각 부처에서 다루는 시행령등 절차에 강한 인재를 키울 수 있다. 이러한 방향성을 바탕으로 순환근무를 한다면, 직원 개인의 역량도 강화될 수 있고 이는 조직의 역량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예전에는 ‘전문성이 있다’는 의미에 있어 한 가지 업무에 대한 숙련도 자체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순환근무제도를 경험해 보니, 역지사지의 경험을 통해 생각의 넓이가 넓어지는 것이 숙련도 못지않게 중요해 보인다. 아직 연구행정가의 길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몇 가지 업무를 더 경험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문성이 높은 사람이라면 이것만은 마음속에 있을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이 조직의 목표에 부합하는지 수시로 생각해 보며 근무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그 시간에 주변 동료들이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효소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이 전문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직장의 신, 미스김’의 주인공인 미스김을 보면, 각종 자격증을 갖추고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도움을 제공한다. 그 정도의 자격증을 딸 능력도 없고 혼자서 서너 사람 몫을 해내가며 손대는 모든 일을 다 잘 해낼 자신은 없다. 백만 가지를 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순환근무제도를 잘 활용해 가며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약 순환근무제를 활용하는 조직에 근무한다면 내 경력경로를 그려보고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싶은지도 상상해 보자. 이 안에서 내가 무슨 통(通)이 되고 싶은지 결정했다면 순환업무제도가 뱅글뱅글 도는 지루한 회전목마로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놀이공원에서 타고 싶은 놀이기구를 탐색해 보는 좋은 도구로도 활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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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김하연) 등록 202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