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지 못한 과학자의 삶] 꿈에도 상상 못 한 일, 창업
나는 연구비를 타기 위한 연구 계획서를 주도적으로 써본 적이 없다. 난 이게 늘 수치스러웠다. 계획서의 일부를 맡아서 작성한 적은 있어도, 전체적인 내용을 다 아울러서 써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나는 더욱 스스로를 반쪽짜리 연구자라고 여겼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학위 과정을 하는 동안은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주변에 출신이 다른 박사들이 많아지면서 알게 되었다. 박사란 응당 제 연구비를 따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사실상 연구는 돈을 만들어 오는 일에서 시작한다. 돈이 없이 할 수 있는 연구는 없다. 그런데 연구비를 따기 위한 계획서도 쓰지 못한다면 박사라고 할 수 있을까.
하필이면 주변에 유능한 박사들이 많았다. 학위 과정 동안 연구실의 연구비를 죄다 따왔던 친구도 있었다. 다 같이 모여서 가진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속으로 몹시 수치스러웠다. 행여나 그들이 내게 그런 경험을 물어올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어떤 날부터는 내가 먼저 웃으며 선수를 치기도 했다. 너스레를 떨며 ‘나는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소. 나는 반쪽짜리 박사요. 자네는 정말 대단하오.’ 하는 거다. 속 편한 척 웃으면서도 속으로 얼마나 스스로가 한심했는지 모른다.
이것은 내 성격의 단점이기도 한데, 나는 경험해 본 적 없는 낯선 일을 하는 데에 과도한 두려움과 압박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막상 해보면 죄다 별 것 아닌 일인데도, 무언가 새로이 시작하는 일에 대해 좀처럼 도전하지 못한다. 그런 성격에 100쪽이 넘어가는 연구 계획서를 쓰는 건 내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일처럼 느껴졌고, 나는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가 정부지원사업에서 사업비를 따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심지어 그중 하나는 그 어렵다는 창업도약패키지였다.
가끔은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덤비는 것이 약이 될 때가 있다. 창업도약패키지의 지원을 위한 사업계획서를 쓸 때의 내가 그랬다. 당시 나는 정말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질적인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처음에 팀에 합류할 때에 대표가 구두로 약속했던 것들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역시나 이유는 자금 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는 업력 3년을 초과했으니, 창업도약패키지에 도전해 보자고 했다. 이 지원금을 받으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실험실을 세팅할 수 있다고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굉장히 나이브했다. 고생한 것에 비해 한참 철이 들지 않았었다. 나는 창업도약패키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대표로부터 사업계획서 양식을 전달받아서 그것을 쓰기 시작했다.
사업비 집행 계획 파트를 제외한 부분을 모두 작성하여 넘겼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후, 최종 발표에도 대표와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최종 합격했다. 모든 팀원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결국 그 지원금으로 인해 나는 팀에서 나왔다. 서울 한복판의 핫플레이스에 근사한 사무실이 생기는 동안, 실험실은커녕 연구 장비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직한 상태로 허송세월 하던 나는 원래 있던 우울증이 심하게 도졌다.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며 몇 달째 지내던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또 팀에 합류할 것을 제안받았다. 이번에는 예비창업패키지에 지원한다고 했다. 아이템을 대충 보고,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기본적인 수익 구조에 대한 이해조차 없었다. 제안을 거절하고, 심상하게 예비창업패키지를 검색했다. 접수 기한이 2주 정도 남아있었다. 딱히 하는 일도 없었고, 방에서 칩거하는 생활을 청산하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나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이 징그러운 우울증을 어떻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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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울증 환자를 위한 앱 사업의 기획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나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온갖 것들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앱이었다. 시중에 나와있는 우울증 관련 앱들이 제법 많았는데, 문제는 지금의 내 상태를 반영한 서비스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서비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명상 관련 서비스고, 다른 하나는 상담 관련 서비스였다. 한참 우울증이 심할 때 나는 일주일간 씻지도 않고, 밥도 거의 먹지 않으며 하루종일 누워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곤 했었다. 그런 상태에서 명상이나, 상담은 시도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우울증으로 인한 극도의 무기력을 경험한 다음에 나는 우울증 환자의 회복을 위해서는 그 무기력한 상태의 회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상태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시도한 것, 경험한 것, 느꼈던 것, 그리고 여러 문헌 자료들을 찾아보며 앱 서비스의 형태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중증 우울증 환자를 위한 앱 사업을 기획하고 사업 계획서를 썼다. 그리고 최종 합격하고, 예비 창업자가 되었다.
인생은 정말 예측할 수 없다. 내 지난 모든 인생을 통틀어서 내가 창업을 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마라톤 선수, 개그맨, 배우, 온갖 직업들을 가지는 상상은 다 해봤어도 창업은 거기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를 부르는 호칭이 ‘ㅇㅇ박사님’이 아니라 ‘ㅇㅇ대표님’ 되었다. 그 뒤로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지원 사업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해내느라 절로 창업자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깨닫고 배운 것들이야 참 많지만, 내게 있어서 가장 큰 소득은 내가 연구비를 따기 위한 연구계획서 하나 쓸 재주도 없는 반쪽짜리 박사가 아님을 스스로 확인했다는 사실이다. 완전히 똑같을 수야 없겠지만, 일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간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설득하고, 그 일이 지원금을 받을 가치가 있으며, 내가 그 일을 해낼 역량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전체적인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 큰돈을 받고 원하는 대로 앱을 개발해서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고작 연구 계획서를 쓸 수 있음을 증명해 낸 게 더 큰 소득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렇다. 어찌 보면, 이것은 간절함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내가 반쪽짜리 박사가 아님을 나는 그토록 절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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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ibric.org) Bio통신원(암바사맨(필명)) 등록일2024.05.08